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그날 밤, 김단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방 안의 난로가 뜨겁게 타올라서일 수도 있고, 3년 동안 추위에 떨며 비가 새는 음침한 오두막과는 달리 너무 포근한 잠자리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마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남은 생은 세답방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으나 다행히 그곳을 벗어났다.이튿날 아침,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임씨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옷은 그녀의 몸에 알맞지 않았지만 상처는 가려줄 순 있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안채로 향했다. 아침 기도를 하시는 조모님을 기다리기 위해 안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인기척을 느낀 큰 마님은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돌아왔느냐?”짧디짧은 말이었으나 무한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김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안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문안 인사를 올렸다.“조모님, 그간 기체일향하시나이까?”“어서 할미에게 오거라.”큰 마님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김단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큰 마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많이 여위었구나.”짤막한 한마디의 말에 묵혀뒀던 설움이 밀려 온 김단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몸종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3년 전 진산댁의 모두가 친딸에게 관심을 쏟던 순간에, 한켠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김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큰 마님이었다. 김단은 언제고 당신의 손녀이라며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을 때, 중전마마께 간청을 올리려한 것도 큰 마님뿐이었다. 하지만 중전을 뵙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가 그녀를 궐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세답방에서 바로 빼내지 못했다.진산군댁 큰 마님의 무모한 성정을 나무라 하는 나인에게 달려든 김단은 결국 그날
임학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김단을 쳐다보았다. 김단이 철없다고 여겼던 그는, 자기 모친께서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그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김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았다.어릴 적부터 하나뿐인 여식을 누구보다 아끼셨던 부친께서 그런 선택을 한 게 실로 믿기지 않았다.그는 뒤늦게 깨달은 진실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혼자 남은 소한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그는 어색하게 큰 마님에게 인사 올렸다.어린 나이에 늠름한 호국 장군이 된 사내를,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자를, 예의 바른 사내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소 장군, 어서 앉으시게! 어제 보내준 귀한 약재들은 잘 받았네. 내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해야 했거늘.”소한은 임원의 곁에 앉았다. “소인의 부모님들은 정년이라 귀한 약재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주상전하께서 하사하신 인삼과 녹용이니 좋은 품질일 것입니다. 큰 마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정말 효심이 깊구려. 마침 소 장군의 혼사에 대해 논의 중이었소. 소 장군이 직접 부모님께 여쭤보게. 적절한 날을 골라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소.”소한의 시선이 임원에게 향했다.임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임씨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변론했다.“아이고, 아직도 이런 것에 얼굴을 붉히면 어쩌자는 게냐?”임씨 부인은 얼른 소한에게 말을 돌렸다.“나이도 어느 정도 찼으니, 이젠 혼사를 진행할 때가 된 것 같네.”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소한의 시선이 김단에게 닿았다.“낭자 생각은 어떻소?”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단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그녀는 물론, 옆에 있던 임씨 부인과 임원도 상당히 놀란 눈치챘다.소한과 김단을 번갈아 쳐다보던 임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혹
한편, 김단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온 큰 마님의 병세가 악화하였다.임씨 부인의 말대로 큰 마님의 건강은 예전 같지 않았다.금일 무리를 해서인지 눕자마자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다행히 큰 마님을 모시고 있던 몸종이 미리 의원을 불러왔고 침소에 누운 그녀에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나서야 그녀는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단은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큰 마님은 당황한 김단에게 손짓을 했다.김단은 혹여 자신 때문에 그녀의 병세가 악화할까 봐 눈물을 참으며 곁으로 다가갔다.“많이 놀랐느냐?”부드러운 목소리에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무병장수하시겠다고 약조하셨잖아요.”하지만 큰 마님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보였다.“이 할미도 오래오래 네 곁에 남아 널 지켜주고 싶구나.”큰 마님은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 할미가 너에게 좋은 혼 자리를 알아봐도 되겠느냐?”건강이 그리 악화되지 않았을 때, 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손녀를 위한 좋은 혼사를 찾아주는 게 그녀가 김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그 뜻을 모를 리 없었던 김단이었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소녀는 조모님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3년간 그녀는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15년간 함께한 가족도 하루아침에 버리는 마당에 피도 섞이지 않은 부군에게 자신의 일생을 맡길 수 없었다.이번 생은 조모님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조모님이 세상을 뜨면 이 집을 나가 홀로 살기로 했다.절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게 이 집안 사람들과 얽히는 것보단 나았다.큰 마님도 그녀의 성정을 모를 리 없었다.한번 결심한 일은 누가 뭐라 해도 할 성정이기에 큰 마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아꼈다.김단은 큰 마님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별당으로 들어가자마자 숙희가 다가왔다.“아씨, 둘째 아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임원이?’미간을 살짝 찌푸린 김단에게
그녀의 질문에 임원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임원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아니오. 그런 적 없소. 그때 공주자가의 유리잔을 깨트린 게 나인 것은 맞지만, 낭자를 모함한 것은 내 몸종이오…”그녀는 억울한 듯 말했다.문에 비스듬히 기댄 임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데 3년 전에는 왜 진실을 고하지 않은 것이오?”말문이 막힌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단이 조롱어린 어투로 말했다.“낭자가 유리잔을 깨트렸다고 중전마마와 공주자가께 고하면 됐을 터인데, 왜 하지 않았소?”당황한 임원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무, 무서웠소. 처음 궐에 들어 중전마마와 공주자가를 뵙는 자리에서 내 죄를 고하는 것이 두려웠소. 하여…”“이제 와서 왜 이런 말을 하오?”김단은 임원의 말을 중도에서 가로챘다.어떤 말로든 3년 전의 일을 무마시킬 순 없었다.임원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낭자가 날 용서만 해준다면 원하는 건 전부 돌려줄 수 있소. 아버님과 오라버니에게도 말씀해 낭자의 오해를 풀겠소. 매화당도 돌려주겠소. 그리고, 그리고 장군님도 돌려주겠소.”김단은 그제야 임원이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눈치챌 수 있었다.김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 분명히 말했소. 낭자의 부모님이고 낭자의 오라버니요.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이오. 매화당은 내 비록 좋아하긴 하나, 대감의 심혈이 깃든 곳이니 낭자의 것이어야 하오. 만일 이곳이 탐난다면 알려주게. 낭자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소.”임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오. 낭자와 거처를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오.”“알고 있소.”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장군님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잘못을 빌러 왔다고는 했지만 결국은 남자 때문이었다.임원의 속내를 알아차린 김단의 말에, 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3년 전, 세답방에 가기 전부터 낭자의 혼처였네. 내 비록 지금 여기에 묶고 있긴 하나 그것 또한 조모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 때문이오. 하물며 난 더는
윤이의 말에 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본궁도 같은 생각이다. 이전에는 큰 소리도 치더니, 어제 겸인의 시체를 보고는 조용하기 그지없다.”윤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뇌리에는 평양 원군 관저에 있을 때,김단이 그녀를 위해 해준 말이 맴돌았다.그 말 때문인 것일 까.공주 마마께서는 김단을 해하려고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를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마냥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하나 공주 마마께 신뢰를 얻었으니,살 길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마침 공주 마마의 곁에 일을 할 자가 필요하다.김단은 서원 공주의 침소에서 나간 뒤, 어의원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내내, 김단은 마음이 불안했다.방금 공주의 앞에서 한 말이, 소하 오라버니를 도울 수 있는 말이었을까.이번에는 넘어갔다 하여도, 다음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계속 ‘수’의 입장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하나 ‘수’ 에서 ‘공’으로 바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곧이어 어의원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김 낭자께서 도착하셨나이다,소 장군께서 낭자를 오래 기다리셨나이다!”김단이 걸음을 멈추었다.고개를 들어 방 안을 바라보았다.곧이어 소한이 교의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는 동시에,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다.“의녀 김단, 소 장군을 뵙습니다. 소 장군께서 어찌 어의원에 행차 하셨나이까?”“낭자를 찾아 왔소.”소한이 부드럽게 답했다.하나 그의 미간에는 강렬한 감정이 숨겨 있었다.“낭자가 의녀로 봉직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경축하는 마음에 가져왔소.”그리고는 보석함 하나를 건넸다.김단은 받지 않았다.계속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감사하옵니다. 하나 소인은 그저 마음만 받겠나이다. 오는 것이 있다면 주는 것이 응당한 터인데, 소인은..”“낭자와 그리 생소한 사이는 아니지 않소?”소한은 김단의 말을 끊었다.보석함을 쥐
김단은 서원 공주의 살기를 느꼈다.하나 당황하지 않았다.“소신은 소 장군을 감싸는 것이 아니옵니다. 소 장군께서 총령으로 봉직된 지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어떤 자가 금군을 이리 다스렸는지, 내막을 알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곧이어 서원 공주의 눈빛이 변했다.“이전에 금군을 맡은 자가 누군지 알고 있소?”옆에 있던 윤이가 서둘러 답했다.“공주 마마께 아룁니다. 덕빈의 친 아우인 손헌이라는 자 이옵니다.”“그래, 손헌 이구나!”서원 공주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그래. 자신의 누이가 덕빈 인 것을 핑계 삼아, 그 손헌 이라는 자가 본궁을 몇 번이나 무시했는지 모른다.”서원 공주는 무언가를 떠오른 것처럼,말투에 냉기가 돌았다.“어쩌면 그 일은 모두 그놈이 계획 한 일이지도 모른다!”김단은 공주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그녀는 그저 소하의 억울함을 풀고 싶었을 뿐이다.이때, 서원 공주가 물었다.“손헌은 지금 어디 있는가?”윤이가 대답했다.“노비가 듣기로는 손 대감께서 파직 되신 이후에, 덕빈과 주상 전하가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하옵니다. 하나, 전하께서는 좀처럼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다 합니다.”서원 공주가 코웃음을 쳤다.“본궁에게 그러한 수모를 겪게 하고도, 어찌 감히 위로 오를 생각을 하는 것이야?”그녀는 금방 어찌 손헌을 해칠지 생각을 끝냈다.김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된다.서원 공주의 방식은 흉악하기 그지없다.만일 소하 오라버니에 대한 살의를 품었다면, 아무리 무예가 좋은 그도 그녀에게 꼼짝 당하고 말 것이다.소하 오라버니와 손헌 중에 한 명만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 하는 자는 손헌이다!김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원 공주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자네의 뜻은 소하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오?”김단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번 바라보았다.떠보려는 서원 공주의 말에도, 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소한 총령께서 여러 도움을 받
김단은 말을 멈추고, 서있는 궁녀 몇 명을 바라보았다.소리를 낮추어 자신과 서원 공자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공주 마마께서 실혈이 과다하였나이다. 제대로 추스르지 않으시면, 단시일에 기력이 회복되지 않사옵니다.”김단의 말에 서원 공주는 그제야 눈을 떴다.그리고는 서 있는 궁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그들을 보며,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곧이어 김단에게 물었다.“본궁이 어찌하면 좋소?”서원 공주가 의술에 대해 까막눈이라고 해도, 낙태를 하고 먹어야 하는 약은, 한풍을 맞아 먹는 약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어선방의 사람들은 약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나, 궁녀의 여인들이 낙태를 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만일 다른 이가 눈치라도 채면, 귀찮아지기 마련이다.김단은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공주 마마의 보양을 핑계삼아, 소신이 친히 약을 끓어 드리겠나이다. 손수 다룬 약재이기에 다른 이가 발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서원 공주는 만족하지 않았다.“수 어의가 때를 맞추어 약재를 정리하니, 어떻게든 알게 될 것 이오.”김단이 미간을 찌푸렸다.“공주마마, 소신이 빈궁들의 보양을 핑계삼아, 처방을 몇 가지 더 내리면 되옵니다. 약재도 섞으면 수 어의 께서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옵니다.”서원 공주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좋은 생각이오.”김단이 답했다.“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빈궁들은 공주 마마께서 나서야 할 것 같사옵니다.”고작 칠품 의녀가 빈궁들의 보양을 도와준다 하여도,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을 것이다.서원 공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작은 일에 마음 둘 필요 없소, 술시에 사람을 보내겠소.”“예.”김단이 공손하게 대답했다.어쩌면 그녀의 공손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서원 공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김단을 향해 말했다.“또 한 가지 일. 자네와 상의할 게 있소.”그리고 옆에 있던 윤이를 한 번 바라보았다.윤이는 눈치를 채고 궁녀들과 함
늦은 밤.김단은 악몽을 꾸었다.꿈에서 그녀는 세답방 시절로 돌아갔다.다른 이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던 곳이었다.그녀는 개울가 근처로 끌려가 매질을 당하고 있었다.하나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매질이 아니었다,김단의 곁에 숙희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김단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익숙한 침장 너머로, 뛰어오는 숙희를 발견하고 나서야 꿈인 것을 알아챘다.생생한 꿈 탓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숙희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살펴도,자신의 눈앞에 있어도 가쁜 호흡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아씨, 노비를 놀라게 하지 마지 옵소서!”숙희는 김단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노비,노비가 의원을 데려오겠나이다!”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김단이 그녀를 저지했다.“나는 괜찮다.”혹여 숙희가 걱정을 할까하여,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금 시진이 어느 즈음이냐?”“묘시이옵니다.”숙희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더 누워 계시렵니까?”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어의원에 가야한다.”의녀이기에 어의원의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노비가 부축해드리겠나이다.”그리고 김단의 세수를 돕고, 뒤이어 옷을 갈아입혔다.반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김단은 어의원에 도착했다.수 어의는 김단이 의녀로 봉직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였다.하나 그녀를 축하하기는커녕, 김단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고는 충고를 건넸다.“서원 공주는 불손한 성격을 가지고 있소, 눈치도 보면서, 주의 있게 대답을 해야 할 것이오. 이전처럼 공주를 화나게 만들면 아니되오, 알겠소?”수 어의가 말한 이전은 임금이 평양 원군에게 열어준 연회때 일어난 일을 뜻한다.그 날도 김단은 곤란한 처치에 빠졌었다.다행히도 최지습과 구연평이 도와주었다.수 어의도 이전의 일을 전해 들은 듯했다.하나 오늘날에는 최지습이 외지로 출정을 나갔고, 구 낭자도 매번 김단을 대신하여 나설 수 없는 일.어쩔 수 없이
하나 김단은 멈추지 않고, 서둘러 궐 밖으로 향했다.이전에 의원이 목숨을 살리는 환약을 두 개 건네 주었었다.소한에게 주고 나서,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김단은 서둘러 평양 원군 관저로 돌아가야만 했다.겸인이 숨을 멎기 전에, 그 약을 겸인에게 먹여야 한다!김단은 다급한 마음에 관저로 뛰어갔다.사실 그녀는 겸인과 그저 몇 마디만 나눈 사이다.하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선한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최지습도 겸인을 칭찬한 적이 있었다.절대로 죽게 해서는 안되었다!드디어 김단이 궐 문에 도착했다.곧이어 관저의 마차에 올라타 다급하게 말했다.“어서! 관저로 돌아가시오!”마부는 영문을 모르고, 밧줄을 세게 흔들었다.그 덕에 처음 달리는 속도로 관저로 돌아갔다.하나, 김단이 한발 늦었다.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내시 하나가 호위병사 두 명과 함께 관저에서 나왔다.내시가 김단을 보고는 예의를 차렸다.김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호위병사들의 대곤에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순간, 심장이 세게 요동쳤다.그녀는 내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상관 없었다.서둘러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안에는 시체 하나가 놓여져 있다.그 위로 하얀 천이 덮여 있었다.천 위로는 붉은색으로 가득 물들었다.“아씨!”숙희는 김단을 보고, 서둘러 달려왔다.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궐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 겸인께서 공주 마마께 불경한 언행을 하셨다 하여 형벌을 집행하였나이다. 허나 겸인께서 나이가 있으신 탓에 열세 대를 맞으시고, 그대로 숨을 거두셨나이다…”숙희는 울먹거리며 말했다.관저의 하인들이 시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모두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김단은 무엇이 크게 잘못되었다 생각했다.또 한편으로는 숙희가 아닌 것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마당에 누워있는 자가,열세 대도 넘기지 못하는 자가, 숙희 일 수도 있었다.김단의 안색에 이상을 느낀 숙희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소곤도 아니고 대곤 삼십 대였다.대곤은 비교적 넓은 모양을 갖춘다.또한 형벌을 집행하는 자들은 군부대의 사람이기에, 힘이 세서 뼈가 저릴 정도의 아픔을 느낄 것이다.삼십 대를 맞고 나면, 겸인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는가.김단이 서둘러 입을 열려고 하자, 손등에서 무언가에 쏘이는 통증이 느껴졌다.다름 아닌 서원 공주가 그녀의 손등을 꼬집고 있었다.김단이 고개를 들자, 서원 공주가 경고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김단은 그제야 서원 공주가 자신을 상대로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서원 공주를 성심성의껏 그녀를 도운 것은, 이후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한데 어찌 겸인을 처리하려 한 단 말인 가.서원 공주는 김단이 다른 이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다.동시에 임금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그녀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그녀의 한 마디, 작은 애교에도 사람의 생사가 왔다갔다 한다.그 자가 평양 원군의 겸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그 자는 외지로 나가 있는 평양원군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겸인이다!어떠한 증거도 없으면서, 김단의 말을 끊고, 백 세를 넘긴 관리에게 막대한 벌을 내렸다.삼십 대가 아닌 열 대라고 할지라도,겸인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김단은 서원 공주와 임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겸인을 위하여 다급하게 해석을 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임금은 보지 못한 것일까.평양 원군의 겸인이 어찌 감히 국가의 공주에게 불경스러운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임금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는가.혹여 그저 친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 탓에, 평양 원군 관저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인가.아니면 겸인의 일을 빌미로, 다른 것을 경고하는 것인가.김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나 겸인의 오해를 풀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아챘다.“그만하거라. 짐도 돌아가 문서를 읽어야 하느니라!”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바라보았다.“그저 작은 겸인에 불과하다, 짐이 다시 사
사실 임금은 이전부터 김단을 눈여겨보고 있었다.신의에게 의술을 배운 자가 아닌가.임 씨 부인이 궐 안에서 고열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김단이 침을 놓아 열이 내려갔다는 사실은 임금도 전해 들었다.당시에는 신의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또한 짧은 기간 동안 배운 의술로 김단은 어의원들을 제쳤다.그 덕에 서원 공주의 칭송에 임금도 동의했다.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김단에게 물었다.“짐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좋은 제안이네. 김 낭자는 어떠한 가.”임금과 공주가 좋다고 하는 데. 어찌 김단이 싫다고 할 수 있는가.하물며 의녀로 봉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곧이어 김단은 그들에게 절을 했다.“소인,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그녀의 모습에 임금이 웃음소리를 냈다.“소인이 아니라 소신이라 하거라.”“예. 소신,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김단은 한번 더 절을 했다.임금은 그제야 그녀에게 일어나라, 명했다.그리고는 공주를 보살핀 공으로, 귀한 약재를 적지 않게 하사했다.그 덕에 김단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조모가 남긴 많은 금은보화와 땅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약재가 부족했었다.오늘 궐에 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서원 공주가 입을 열었다.“아바마마, 사실 아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소녀가 평양 원군 관저에서 머무는 동안, 김 낭자의 보살핌을 보살핌을 입었사오나, 소녀에게 불경스러운 언행을 보인 자가 있었나이다.”그녀의 말에 김단이 깜짝 놀랐다.웃음을 짓고 있던 임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감히 공주에게 그러한 언행을 한 것이지?”“평양원군 관저의 겸인이옵니다!”서원 공주는 살을 덧붙여 말했다.“가장 낙후한 방을 소녀에게 내어 줄 뿐만 아니라, 윤이가 몇 마디 한 것을 빌미로 삼아 불경한 언행까지 일삼았사옵니다. 마치 관저가 제 거처인 것 마냥 행세하였사온데, 졸개가 호랑이 행세를 하는 격이옵니다. 아바마마, 부디 소녀를 위하여 나서 주셔야 하옵니다.”서원 공주의 말에 김단은 바닥 ㅣ
서원 공주는 나흘간 한풍을 맞았다는 이유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나흘 동안 윤이를 제외하고, 김단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나흘 이후.서원 공주의 안색이 돌아왔다.그녀는 그제야 평양 원군 관저를 떠나, 궐로 돌아갔다.때마침 숙희도 마당에서 돌아왔다.하나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김단을 보자, 눈가가 벌겋게 변했다.“아씨, 노비가 원림장를 찾아갔나이다. 적매 나무가 아주 잘 크고 있다 하였사옵니다. 이듬해 겨울에 나뭇가지에 가득 피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당에 정리해야 할 곳은 노비가 손을 써 두었나이다.”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숙희의 모습에 김단은 걱정이 되었다.“왜 그러느냐, 누가 괴롭히기라도 한 것이야?”숙희는 고개를 저었다.곧이어 눈물을 터트렸다.“노비도 압니다. 노비를 위하셨다는 것을요. 그래서 노비를 떠나셨지요. 하나, 노비도 아씨가 걱정이 됩니다.흑흑흑..아씨, 노비도 고된 일 정도는 할 줄 압니다. 이후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노비를 내보내시지 말아 주시 옵소서.”숙희는 이러한 기분이 싫었다.아씨가 장양강에 몸을 던지고, 한양에 홀로 남은 사실에 견디기 힘들었다.우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하나 이번에는 어떠한가.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저 아씨 홀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에 걱정이 되었다.적어도 자신이 곁에 있다면, 아씨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며칠 동안 김단이 홀로 관저에 남아,서원 공주의 수발을 들었을 생각에 숙희는 마음이 아팠다.김단은 서둘러 숙희를 품에 안았다.“알겠어, 알겠어. 다음에는 내보내지 않겠다고 약조하마.”숙희는 훌쩍거렸다.“흑흑..약조 지키셔야 합니다!”울면서도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것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마치 어린아이 같았다.김단은 숙희를 다독이고는,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숙희의 안색은 그제야 한결 밝아졌다.그 다음 날.김단은 호출을 받아 궐로 들어갔다.길을 안내하는 내시는 김단을 데리고 어화원으로 향했다.초가을의 날씨.쌀쌀한 바람이 불
서원 공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비웃음이 담겼다.“다른 이를 엮지 말라니, 그러하면 내 노여움은 자네가 감내하겠다는 뜻이오?”김단은 서원 공주의 눈을 직시했다.그녀는 조금이라도 물러 날 생각이 없었다.“만일 소인이 공주 마마를 이 고난에서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켜 드린다면, 소인 또한 마마께 요긴한 인재라 할 수 있지 않사옵니까.”무슨 재앙이 닥칠 지 모르는 것처럼,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김단의 말에 서원 공주도 머리를 굴렸다.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고 물었다.“본궁이 자네를 세답방에 보냈소. 자네를 괴롭히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보냈소. 어찌 본궁이 밉지도 않소?”“원한이란 본디 근원이 있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업보가 따르옵니다. 소인이 당한 수모는 모두 임원이 시작한 일이옵니다. 오늘날 임원은 죽었으니, 그 업보는 갚았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더 이상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다.서원 공주는 김단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서 작은 가식이라도 찾아내고 싶은 모습이다.하나, 김단의 눈빛에는 진심밖에 보이지 않았다.짧게 탄식을 내뱉고는 말했다.“잘만 한다면, 본궁도 자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공주 마마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곧이어 김단은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건넸다.윤이가 그릇을 건네받고, 공손하게 서원 공주에게 가져다주었다.곧이어 김단이 입을 열었다.“공주 마마,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옵니다. 이 약을 드시면 두 시진 동안 잠에 드시고, 두 시진이 지나면 제자리를 잡을 것이옵니다.”두 시진 동안 잠에 든다는 말에 서원 공주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하나 김단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는, 평양 원군의 관저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잠시 뒤, 그릇을 건네받고는 한번에 들이켰다.약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서원 공주는 약을 마시자마자 어지러운 증상을 보였다.윤이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하여, 침상으로 향했다.다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