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제작된 의자에 성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양팔은 각기 의자에 묶여 있었다.게다가 다리를 따라 축 드리운 전깃줄까지 눈에 들어오자 권하윤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졌다.다행히 어두운 불빛 때문에 로건은 그녀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행객을 데리고 참관하는 가이드처럼 방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하윤 씨, 이게 바로 기계 스위치에요. 누르면 전류가 1분간 흐를 거예요. 하지만 연속 누르면 안 돼요. 바로 콱 죽어버릴 수 있거든요.”하윤 씨라는 세글자를 듣는 순간 수그리고 있던 성은우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사인과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로건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제가 한 번 보여줄게요.”그가 빨간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권하윤은 즉시 그를 막았다.“잠깐만요!”“네?”로건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며 약 2초간 멈칫하다가 뭔가 알아차린 듯 활짝 웃었다.“직접 해보시려고요? 이리 와 봐요.”“저…….”권하윤은 당연히 누를 리 없었다. 어떤 핑계를 댈까 생각하고 있던 그때 힘 있는 손 하나가 그녀의 앞을 쑥 지나 버튼을 눌러버렸다.잇따라 한껏 눌러 참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성은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까의 짤막한 신음을 끝으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순간 권하윤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의 등 뒤에서 민도준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권하윤은 성은우를 걱정하면서도 갑자기 나타난 민도준에 겁을 먹어 한참 동안 입을 뻐금거리다가 끝내 그를 불렀다.“도, 도준 씨, 저 점심을 배달하러 왔다가 도준 씨가 바쁘다고 해서…….”찔리는 게 있는 듯 부연 설명을 보태다가 머뭇거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 나갔다.“오, 그러다가 심심해서 구경하러 왔어?”자기가 말하려던 말이 상대의 입에서 먼저 나오자 권
뼈마디가 선명한 민도준의 손은 무감각할 정도로 차가운 권하윤의 손등위에 올려졌다.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차가운 손등으로 전해지는 순간 가식적인 그녀의 가면까지 타버렸다.“안 돼요!”결국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 권하윤은 손을 빼 민도준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뜨거운 눈물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타고 후둑후둑 떨어졌다.“제발요, 누르지 마요.”처절하게 우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거두지 않은 힘 때문에 여린 그녀의 피부가 쓸려 아프기까지 했다.하지만 그녀를 달래는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왜 울어? 마음 아프게.”민도준은 권하윤을 지나 그녀 등 뒤에 있는 성은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이런 점은 참 닮았단 말이지. 하나는 지금껏 실수 한 번 한 적 없던 킬러면서 힘없는 여자 하나 죽이지 못하고…….”이윽고 권하윤의 턱을 잡은 채 억지로 성은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며 말을 이어갔다.“하나는 분명 죽을뻔했으면서 눈물 흘리며 킬러 대신 사정하고. 하, 정말 재밌네.”“…….”권하윤은 눈물이 앞을 가려 흐릿해진 시선으로 성은우를 바라봤다.죄책감, 두려움, 걱정 등 많은 감정들이 점점 불어나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눈물이 유일한 배출구로 되었다.그녀는 민도준이 의심한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시간을 최대한 끄는 것 외에 다른 퇴로가 없었으니까.진작 함정에 빠졌기에 지금 도망치고 싶어도 늦었다.민도준의 속은 그녀가 헤아리기에는 너무 깊고 복잡했다.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는커녕 그의 모든 행동에 따른 의미가 뭔지도 알기 어려웠다.어떤 게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 행동이었는지 어떤게 진심이었는지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녀의 몸을 성은우쪽으로 돌렸다.억지로 성은우와 정면으로 서게 된 그때, 민도준의 위험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 시각, 권하윤은 마치 지배받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성은우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녀와 가족은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니 무슨 일을 당하든 그 결과는 본인이 감당하면 그만이지만 아무 관련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더욱이 성은우는 그녀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니까.궁지에 몰리자 권하윤은 오히려 태연해졌다.그녀는 땅을 짚고 일어서면서 눈물을 닦았다.“뭘 듣고 싶어요?”순간 지금껏 보여줬던 부드럽고 연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낯선 눈빛만 남았다.민도준은 막이 한 층 드리운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우선 두 사람의 관계부터 말하는 게 어때? 권씨 가문 아가씨인 하윤 씨가 어떻게 다른 성에 위치한 공씨 가문 킬러를 알게 되었는지.”‘올 게 왔구나.’권하윤은 눈을 질끈 감다가 다시 뜨더니 이미 절망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저…….”“우리 연인이에요.”권하윤은 멈칫하더니 성은우를 돌아봤다.드물게 얼굴을 훤히 드러낸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보다가 권하윤을 바라볼 때 다시 부드러워졌다.이윽고 그는 하던 말을 반복했다.“우리 연인이에요. 2년 전 제가 다쳤을 때 윤이가 저 구해준 뒤로 사귀게 됐어요.”그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그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민도준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놀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음?”그러고는 권하윤을 바라봤다.“제수씨, 사실이야?”지금 상황에서 권하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도와주려고 그런 말을 한 성은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2초간 망설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공기는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그러니까 연인이 있으면서 나랑 잤단 말이야? 아, 아니지, 연인이 있으면서 내 동생이랑 약혼하고 나랑 바람피웠다고 해
민도준은 품에 안긴 권하윤을 대충 주물럭거리더니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가주님, 바쁘세요?”“괜찮습니다.”“아-”민도준은 갈 곳을 잃은 듯 바삐 움직이는 권하윤의 얼굴을 꽉 잡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바쁘지 않다면 얘기 좀 합시다. 제 구역에 킬러를 보낸 건 대체 무슨 뜻이죠?”그의 말에 권하윤은 흠칫했다.성은우는 분명 그녀를 죽이러 왔는데 민도준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런데 곧바로 민도준을 죽이러 왔다는 게 자기를 죽이러 왔다는 것보다 죄가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보아하니 공태준이 직접 설명하게 하려고 하는 거구나. 설마 공태준이 성은우를 보낸 목적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공태준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민도준의 추궁에 전화 건너편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하지만 공태준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제가 은우를 경성에 보낸 건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였어요. 혹시 은우가 민 사장님 심기라도 거슬렀나요? 그랬다면 대신 사과드리죠. 하지만 민 사장님을 암살했다는 건 없는 일입니다.”“그래요?”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면서 성은우를 바라봤다.“가주님이 보낸 게 아니면 성은우의 단독 행동이라는 거네요? 부하 관리가 이렇게 소홀하다니 이 빚은 어떻게 갚을 예정이죠?”“…….”민도준의 말은 권하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오히려 모든 책임을 공태준에게 넘기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구역에서 사람이 잡혔고 이미 손에 목숨을 쥐고 있으니 그가 단언하면 반박할 사람이 없는 건 확실했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낮게 중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아름이 민 사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민 사장도 알고 있잖습니까. 민 사장님과 권하윤 씨의 사이가 너무 깊은 걸 그 애가 불안해해서 제가 걱정을 덜어주려고 은우를 보냈습니다. 아름이가 민 사장에 대한 마음을 봐서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분명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고 부탁하는 입장이었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꺾지
권하윤은 입을 벌린 채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말, 말하지 마요.’민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귓가에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계속할까?”권하윤은 그가 말이라도 할까 봐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양옆에 놓여 있던 긴 머리카락도 그녀의 동작을 따라 하늘거렸다.그제야 민도준은 그에게 상이라도 주듯 머리를 만지며 대충 대답했다.“성운우 킬러님이 말하길 예전에 다쳤을 때 여자 하나를 알게 됐는데 지금은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주님도 모른다면 됐어요. 제가 시간 날 때 대신 찾아주면 되죠.”말을 마친 민도준은 바로 전화를 끊고 막다를 골목에 몰린 이 새끼 여우를 제대로 혼쭐낼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때 공태준이 하필이면 다시 물어왔다.“혹시 2년 전 하모니카를 줬던 그 사람인가요?”하모니카라는 단어에 권하윤의 눈은 다시 당황함에 마구 흔들렸다.그리고 마침 그녀의 허리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호주머니 속에서 하모니카를 찾아낸 민도준은 눈을 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공태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사실 그때 그 일도 다 제 불찰이었어요. 2년 전 제가 운우를 경성에 보냈었는데 그때 사고가 있었거든요. 만약 은우가 실력이 없었더라면 중상을 입고 다시 돌아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만약 민 사장님이 은우 대신 그 여자분을 찾아준다면 기쁜 일이긴 하겠네요.”“…….”공태준의 말은 성은우가 다쳤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주었고 권하윤이 지니고 있던 하모니카는 그의 말에 결정적인 증거까지 제공해 주었다.하지만 이건 성은우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그는 2년 전 확실히 큰 부상을 당했었다. 하지만 그가 권하윤과 만난 건 경성이 아니라 공씨 저택이다.게다가 하모니카도 그때 준 것이다.어찌어찌해서 거짓말은 진실로 둔갑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권하윤은 이게 대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공씨 가문 때문에 언제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권하윤을 만나던 성은우는 처음으로 이렇게 똑바로 권하윤을 쳐다봤다.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고 찾아온 이 순간이 과분할 정도로 소중했다.웃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무표정으로 산 얼굴이라 굳었는지 아니면 웃는 방법을 잊었는지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다.“괜찮아, 안 그래도 원래 죽을 목숨이었어.”나지막한 위로가 잇따랐다.“…….”하지만 그 말에 권하윤의 눈물은 더 심하게 흘러내렸다.‘안 돼. 이러면 안 돼!’감정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권하윤은 끝내 민도준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생각을 간파한 성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무 늦었어. 윤아, 너무 늦었어.”그는 공태준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마당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때문에 권하윤이 모든 걸 고백한다 해도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외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더욱이 그는 처음부터 살 생각이 없었다.민도준의 말처럼 연약한 여자 하나 죽이지 못한다는 건 실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실수했다고 해도 다시 기회를 찾으면 그만이니까.그게 아니라면 그가 죽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그가 죽으면 공태준도 권하윤이 민도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될 테고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을 테니 말이다.때문에 민도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물었을 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인이라고 말했다.민도준을 자극해 죽음을 자초하려는 것 외에도 한 번쯤은 마음이 품어오던 꿈을 이루게 하고 싶었으니까. 아무리 그게 가짜라도 말이다.이 시각, 성은우는 더 이상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고 권하윤을 탐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내비쳤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권하윤은 해원에 있을 때보다 많이 여위었고 명랑하고 맑기만 하던 얼굴에 고통이 맴돌고 있었다.사실 그는 말없이 도망친 그녀를 원망한 적 없다고, 그녀가 공씨 저택에서 도망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자기의 하모니카 실력이
민도준이 이런 걸 조건이랍시고 내걸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권하유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민도준은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여유로운 듯 되물었다.“왜? 싫어?”여전히 아무 대답 없는 권하윤을 빤히 보던 그는 성은우 쪽으로 턱을 들더니 명령했다.“1분 지났어. 한 번 더 눌러.”“할 게요!”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권하윤은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그러자 로건은 자각적으로 몸을 돌려 벽을 마주했다/이제 방금 전류 때문에 잃었던 감각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던 성은우는 민도준의 다리 위에 앉은 권하윤을 보자 두 눈에 핏발이 섰다.“민 사장님, 우리 얘기 좀 합시다.”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권하윤의 가는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얘기? 나 지금 바쁜데. 그냥 말해.”성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잖아요. 저처럼 어둠 속에서만 사는 개 때문에 윤이한테 상처를 입힐 가치가 없지 않나요?”자기를 비하하는 그의 발언에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권하윤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민도준이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권하윤을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그는 자기처럼 천박한 사람 때문에 언짢아할 필요 없다는 걸 애써 어필했다.하지만 잔인하고 대단하기로 유명한 성은우가 자기 품에 안긴 여자를 위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민도준은 혀로 볼을 꾹 밀며 화를 삭였다.“그러지 뭐. 성은우 킬러님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데 시간은 줘야지 않겠어?”그는 권하윤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다가 톡톡 두드렸다.“밖에서 기다려.”하지만 권하윤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나가면 다시는 성은우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로건, 끌어내.”“하윤 씨, 나가시죠.”민도준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로건이 권하윤의 시선을 막아섰다.그러다가 여전히 버티고 서있는 그녀를 보고는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조사를 끝낸 비서는 자료를 들고 공태준을 찾아온 순간까지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듯 쉴 새 없이 눈을 비벼댔다.그 표정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싶었다.“가…… 가주님.”그의 떨리는 부름 소리에 의자가 빙 돌더니 공태준의 시선이 비서가 쥐고 있는 자료에 멈췄다.“이리 가져 와.”“어, 네.”잠시 뒤.종이의 가장자리는 손끝에 눌려 구겨졌고 고개를 숙인 탓에 눈에 드러난 모든 감정이 모두 가려졌다.그렇게 약 30초간 흘렀을 때 공태준의 목소리가 끝내 들려왔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비서도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아마도 경성에 있는 권하윤 씨와 이시윤 씨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이건 많이 닮은 게 아니라 아예 똑같은 수준이었다.만약 옆에 권하윤이 어린 시절부터 겪은 기록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공태준은 아마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하지만 이시윤과 다른 건 권하윤은 어릴 적부터 가문의 영향으로 재벌가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거다.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권하윤과 민승현이 약혼했을 때 찍은 웨딩사진이 있었다. 외적으로 봤을 때 꽤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공태준은 믿기지 않는 듯 다시 한 장 한 장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이 자료들 모두 사실이야?”“저도 권씨 가문에서 이런 사람을 일부러 만들어 낸 건 아닌지 의심은 가지만 알아본 데 의하면 권하윤 씨는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경성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대외적인 활동도 끊긴 적 없다고 합니다.”한참을 설명하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아마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하지만 공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사진 한 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었다.“문태훈 불러 와.”“아, 그렇네요. 문태훈 씨가 아름 아가씨와 함께 경성에 갔었으니 분명 권하윤 씨를 만난 적 있을 겁니다. 바로 불러오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움직였다.얼마 전 문태훈은 의식을 잃은 채 해원에 실려 왔었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