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마디가 선명한 민도준의 손은 무감각할 정도로 차가운 권하윤의 손등위에 올려졌다.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차가운 손등으로 전해지는 순간 가식적인 그녀의 가면까지 타버렸다.“안 돼요!”결국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 권하윤은 손을 빼 민도준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뜨거운 눈물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타고 후둑후둑 떨어졌다.“제발요, 누르지 마요.”처절하게 우는 그녀의 모습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물을 닦아주었다.거두지 않은 힘 때문에 여린 그녀의 피부가 쓸려 아프기까지 했다.하지만 그녀를 달래는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묻어 있었다.“왜 울어? 마음 아프게.”민도준은 권하윤을 지나 그녀 등 뒤에 있는 성은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이런 점은 참 닮았단 말이지. 하나는 지금껏 실수 한 번 한 적 없던 킬러면서 힘없는 여자 하나 죽이지 못하고…….”이윽고 권하윤의 턱을 잡은 채 억지로 성은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며 말을 이어갔다.“하나는 분명 죽을뻔했으면서 눈물 흘리며 킬러 대신 사정하고. 하, 정말 재밌네.”“…….”권하윤은 눈물이 앞을 가려 흐릿해진 시선으로 성은우를 바라봤다.죄책감, 두려움, 걱정 등 많은 감정들이 점점 불어나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눈물이 유일한 배출구로 되었다.그녀는 민도준이 의심한다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시간을 최대한 끄는 것 외에 다른 퇴로가 없었으니까.진작 함정에 빠졌기에 지금 도망치고 싶어도 늦었다.민도준의 속은 그녀가 헤아리기에는 너무 깊고 복잡했다.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는커녕 그의 모든 행동에 따른 의미가 뭔지도 알기 어려웠다.어떤 게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 행동이었는지 어떤게 진심이었는지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녀의 몸을 성은우쪽으로 돌렸다.억지로 성은우와 정면으로 서게 된 그때, 민도준의 위험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그 시각, 권하윤은 마치 지배받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성은우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그녀와 가족은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니 무슨 일을 당하든 그 결과는 본인이 감당하면 그만이지만 아무 관련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더욱이 성은우는 그녀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니까.궁지에 몰리자 권하윤은 오히려 태연해졌다.그녀는 땅을 짚고 일어서면서 눈물을 닦았다.“뭘 듣고 싶어요?”순간 지금껏 보여줬던 부드럽고 연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낯선 눈빛만 남았다.민도준은 막이 한 층 드리운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우선 두 사람의 관계부터 말하는 게 어때? 권씨 가문 아가씨인 하윤 씨가 어떻게 다른 성에 위치한 공씨 가문 킬러를 알게 되었는지.”‘올 게 왔구나.’권하윤은 눈을 질끈 감다가 다시 뜨더니 이미 절망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저…….”“우리 연인이에요.”권하윤은 멈칫하더니 성은우를 돌아봤다.드물게 얼굴을 훤히 드러낸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민도준을 바라보다가 권하윤을 바라볼 때 다시 부드러워졌다.이윽고 그는 하던 말을 반복했다.“우리 연인이에요. 2년 전 제가 다쳤을 때 윤이가 저 구해준 뒤로 사귀게 됐어요.”그의 말이 끝나자 공기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그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민도준이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놀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음?”그러고는 권하윤을 바라봤다.“제수씨, 사실이야?”지금 상황에서 권하윤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도와주려고 그런 말을 한 성은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2초간 망설이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공기는 다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그러니까 연인이 있으면서 나랑 잤단 말이야? 아, 아니지, 연인이 있으면서 내 동생이랑 약혼하고 나랑 바람피웠다고 해
민도준은 품에 안긴 권하윤을 대충 주물럭거리더니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가주님, 바쁘세요?”“괜찮습니다.”“아-”민도준은 갈 곳을 잃은 듯 바삐 움직이는 권하윤의 얼굴을 꽉 잡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바쁘지 않다면 얘기 좀 합시다. 제 구역에 킬러를 보낸 건 대체 무슨 뜻이죠?”그의 말에 권하윤은 흠칫했다.성은우는 분명 그녀를 죽이러 왔는데 민도준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런데 곧바로 민도준을 죽이러 왔다는 게 자기를 죽이러 왔다는 것보다 죄가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보아하니 공태준이 직접 설명하게 하려고 하는 거구나. 설마 공태준이 성은우를 보낸 목적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공태준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민도준의 추궁에 전화 건너편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하지만 공태준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느릿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제가 은우를 경성에 보낸 건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였어요. 혹시 은우가 민 사장님 심기라도 거슬렀나요? 그랬다면 대신 사과드리죠. 하지만 민 사장님을 암살했다는 건 없는 일입니다.”“그래요?”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면서 성은우를 바라봤다.“가주님이 보낸 게 아니면 성은우의 단독 행동이라는 거네요? 부하 관리가 이렇게 소홀하다니 이 빚은 어떻게 갚을 예정이죠?”“…….”민도준의 말은 권하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오히려 모든 책임을 공태준에게 넘기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구역에서 사람이 잡혔고 이미 손에 목숨을 쥐고 있으니 그가 단언하면 반박할 사람이 없는 건 확실했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낮게 중얼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아름이 민 사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민 사장도 알고 있잖습니까. 민 사장님과 권하윤 씨의 사이가 너무 깊은 걸 그 애가 불안해해서 제가 걱정을 덜어주려고 은우를 보냈습니다. 아름이가 민 사장에 대한 마음을 봐서라도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분명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고 부탁하는 입장이었지만 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꺾지
권하윤은 입을 벌린 채로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말, 말하지 마요.’민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귓가에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계속할까?”권하윤은 그가 말이라도 할까 봐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양옆에 놓여 있던 긴 머리카락도 그녀의 동작을 따라 하늘거렸다.그제야 민도준은 그에게 상이라도 주듯 머리를 만지며 대충 대답했다.“성운우 킬러님이 말하길 예전에 다쳤을 때 여자 하나를 알게 됐는데 지금은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주님도 모른다면 됐어요. 제가 시간 날 때 대신 찾아주면 되죠.”말을 마친 민도준은 바로 전화를 끊고 막다를 골목에 몰린 이 새끼 여우를 제대로 혼쭐낼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때 공태준이 하필이면 다시 물어왔다.“혹시 2년 전 하모니카를 줬던 그 사람인가요?”하모니카라는 단어에 권하윤의 눈은 다시 당황함에 마구 흔들렸다.그리고 마침 그녀의 허리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호주머니 속에서 하모니카를 찾아낸 민도준은 눈을 접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공태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사실 그때 그 일도 다 제 불찰이었어요. 2년 전 제가 운우를 경성에 보냈었는데 그때 사고가 있었거든요. 만약 은우가 실력이 없었더라면 중상을 입고 다시 돌아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만약 민 사장님이 은우 대신 그 여자분을 찾아준다면 기쁜 일이긴 하겠네요.”“…….”공태준의 말은 성은우가 다쳤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주었고 권하윤이 지니고 있던 하모니카는 그의 말에 결정적인 증거까지 제공해 주었다.하지만 이건 성은우가 한 말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니기 때문이다.그는 2년 전 확실히 큰 부상을 당했었다. 하지만 그가 권하윤과 만난 건 경성이 아니라 공씨 저택이다.게다가 하모니카도 그때 준 것이다.어찌어찌해서 거짓말은 진실로 둔갑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권하윤은 이게 대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공씨 가문 때문에 언제나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권하윤을 만나던 성은우는 처음으로 이렇게 똑바로 권하윤을 쳐다봤다.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고 찾아온 이 순간이 과분할 정도로 소중했다.웃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무표정으로 산 얼굴이라 굳었는지 아니면 웃는 방법을 잊었는지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웠다.“괜찮아, 안 그래도 원래 죽을 목숨이었어.”나지막한 위로가 잇따랐다.“…….”하지만 그 말에 권하윤의 눈물은 더 심하게 흘러내렸다.‘안 돼. 이러면 안 돼!’감정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권하윤은 끝내 민도준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생각을 간파한 성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무 늦었어. 윤아, 너무 늦었어.”그는 공태준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한 마당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때문에 권하윤이 모든 걸 고백한다 해도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외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더욱이 그는 처음부터 살 생각이 없었다.민도준의 말처럼 연약한 여자 하나 죽이지 못한다는 건 실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실수했다고 해도 다시 기회를 찾으면 그만이니까.그게 아니라면 그가 죽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그가 죽으면 공태준도 권하윤이 민도준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될 테고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을 테니 말이다.때문에 민도준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물었을 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인이라고 말했다.민도준을 자극해 죽음을 자초하려는 것 외에도 한 번쯤은 마음이 품어오던 꿈을 이루게 하고 싶었으니까. 아무리 그게 가짜라도 말이다.이 시각, 성은우는 더 이상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고 권하윤을 탐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내비쳤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권하윤은 해원에 있을 때보다 많이 여위었고 명랑하고 맑기만 하던 얼굴에 고통이 맴돌고 있었다.사실 그는 말없이 도망친 그녀를 원망한 적 없다고, 그녀가 공씨 저택에서 도망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자기의 하모니카 실력이
민도준이 이런 걸 조건이랍시고 내걸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권하유은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민도준은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여유로운 듯 되물었다.“왜? 싫어?”여전히 아무 대답 없는 권하윤을 빤히 보던 그는 성은우 쪽으로 턱을 들더니 명령했다.“1분 지났어. 한 번 더 눌러.”“할 게요!”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권하윤은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그러자 로건은 자각적으로 몸을 돌려 벽을 마주했다/이제 방금 전류 때문에 잃었던 감각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던 성은우는 민도준의 다리 위에 앉은 권하윤을 보자 두 눈에 핏발이 섰다.“민 사장님, 우리 얘기 좀 합시다.”민도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그의 앞에서 보란 듯이 권하윤의 가는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얘기? 나 지금 바쁜데. 그냥 말해.”성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잖아요. 저처럼 어둠 속에서만 사는 개 때문에 윤이한테 상처를 입힐 가치가 없지 않나요?”자기를 비하하는 그의 발언에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권하윤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민도준이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권하윤을 괴롭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그는 자기처럼 천박한 사람 때문에 언짢아할 필요 없다는 걸 애써 어필했다.하지만 잔인하고 대단하기로 유명한 성은우가 자기 품에 안긴 여자를 위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민도준은 혀로 볼을 꾹 밀며 화를 삭였다.“그러지 뭐. 성은우 킬러님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는데 시간은 줘야지 않겠어?”그는 권하윤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다가 톡톡 두드렸다.“밖에서 기다려.”하지만 권하윤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나가면 다시는 성은우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로건, 끌어내.”“하윤 씨, 나가시죠.”민도준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로건이 권하윤의 시선을 막아섰다.그러다가 여전히 버티고 서있는 그녀를 보고는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조사를 끝낸 비서는 자료를 들고 공태준을 찾아온 순간까지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듯 쉴 새 없이 눈을 비벼댔다.그 표정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싶었다.“가…… 가주님.”그의 떨리는 부름 소리에 의자가 빙 돌더니 공태준의 시선이 비서가 쥐고 있는 자료에 멈췄다.“이리 가져 와.”“어, 네.”잠시 뒤.종이의 가장자리는 손끝에 눌려 구겨졌고 고개를 숙인 탓에 눈에 드러난 모든 감정이 모두 가려졌다.그렇게 약 30초간 흘렀을 때 공태준의 목소리가 끝내 들려왔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비서도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했는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아마도 경성에 있는 권하윤 씨와 이시윤 씨가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이건 많이 닮은 게 아니라 아예 똑같은 수준이었다.만약 옆에 권하윤이 어린 시절부터 겪은 기록을 표시하지 않았다면 공태준은 아마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하지만 이시윤과 다른 건 권하윤은 어릴 적부터 가문의 영향으로 재벌가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거다.그리고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권하윤과 민승현이 약혼했을 때 찍은 웨딩사진이 있었다. 외적으로 봤을 때 꽤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공태준은 믿기지 않는 듯 다시 한 장 한 장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이 자료들 모두 사실이야?”“저도 권씨 가문에서 이런 사람을 일부러 만들어 낸 건 아닌지 의심은 가지만 알아본 데 의하면 권하윤 씨는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경성에서 나고 자라 지금껏 대외적인 활동도 끊긴 적 없다고 합니다.”한참을 설명하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아마 그저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하지만 공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사진 한 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들었다.“문태훈 불러 와.”“아, 그렇네요. 문태훈 씨가 아름 아가씨와 함께 경성에 갔었으니 분명 권하윤 씨를 만난 적 있을 겁니다. 바로 불러오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움직였다.얼마 전 문태훈은 의식을 잃은 채 해원에 실려 왔었다.
비서는 공태준의 말에 깜짝 놀랐다.어찌 됐든 문태훈은 그래도 가주 곁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버린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가주님 뜻은…….”“그래.”비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혹시 문태훈 씨를 의심하는 겁니까? 제가 다시 물어볼까요?”“필요 없어.”공태준의 말투는 무덤덤했다.“눈 한쪽이 멀었으니 이젠 쓸모없어졌어.”“네, 가주님.”비서가 나가자 공태준은 자료를 다시 펼치며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을 손으로 살살 매만졌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손끝이 아려오더니 작은 상처 사이로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얇고 부드럽기만 하던 종이가 살을 베어 가장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 거다.그 순간 그의 귓가에는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기억을 고스란히 접어둔 그는 엄지로 검지를 쓱 문질렀다. 일순 약한 통증이 점점 퍼져 가슴을 파고들었다.-블랙썬.연약한 여인은 몸을 한껏 움츠린 채 휴게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꼭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흘러 나와 붉은 뺨을 적셨다.“제…… 제발요…… 은우 죽이지 마세요…….”“…….”“민혁 형님, 하윤 씨 왠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로건은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와 마찬가지로 쪼그려 앉아 있는 한민혁을 바라봤다.그리고 그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물음에 한민혁은 어이없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고맙네. 네가 말 안 했더라면 이상한 줄 몰랐겠어.”“하하, 그렇죠?”“…….”한민혁은 로건의 말에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려 권하윤을 바라봤다.보아하니 열이 펄펄 끓는 것 같아 민도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권하윤이 하필이면 잠꼬대마저 성은우의 이름을 불러대는 바람에 한민혁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만약 민도준이 이걸 들으면 또 발칵 뒤집힐 게 뻔했으니까.하지만 계속 시간을 끄는 것도 방법이 아니기에 한도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끝내 민도준에게 말하기로 결심했다.이윽고 그는 심심한 듯 손장난을 치는 로건에게로 눈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