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자연스럽게 민도준이 하루 종일 자기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한 번 만에 끝나 버렸다.하지만 권하윤은 오히려 이런 변화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설마 안 되나? 아니면 기력이 달리나?’온갖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안 되는 건 바로 배제할 수 있었다. 어찌 됐든 민도준이 그녀를 안을 때마다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그렇다면 나한테 흥미를 잃었나?’“무슨 생각해?”허리에 타월을 두른 채 욕실에서 걸어나온 순간 민도준은 침대에 앉아 멍때리고 있는 권하윤을 발견했다.먼저 씻겨 내보낸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축축한 머리를 어깨 위에 드리운 채 나른한 모습을 하고 있자 의문이 드는 건 당연했다.“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권하윤은 민도준의 그쪽 능력을 대놓고 의심할 배짱이 없었기에 그저 아무 일도 없는 듯 무해한 얼굴로 싱긋 웃었다.민도준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그 눈빛은 오히려 그 어떤 말보다도 더 무섭게 그녀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불 꺼.”‘오늘 밤은 여기에서 보내려나 보네.’다행히 민승현이 며칠 동안 집에 온 적이 없는 데다가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기에 권하윤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의견에 따랐다.하지만 침대에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권하윤은 불안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그녀의 눈은 오히려 더욱 똘망똘망해졌고 저도 모르게 뇌리에 자꾸만 이상한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성은우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잡히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다가 또 갑자기 공씨 가문의 누군가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두려워났다.‘날 죽이려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공아름이겠지?’다행히 성은우가 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다른 사람이 왔다면 그녀는 아마 도망치지 못했을 거다. 더욱이 공씨 가문 가주의 귀에 그녀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어갈 가능성까지 고려하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다.‘도준 씨가 오늘 여기에 남은 건 아마도 공아름이 이런 일을 벌일 거라는 걸 알아서겠지?’그 생각에 그녀는 어둠
‘이건…….’목에 닿았던 차가운 촉감이 순간 되살아나는 듯해 권하윤의 몸은 일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이거…….”하지만 그녀가 자세하게 만져보기도 전에 민도준은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착하지? 함부로 만지지 마.”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권하윤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왜 이런 걸 베개 밑에 숨기고 있지? 설마 날 죽이려는 건가?’품속의 여자가 경직된 것을 느낀 민도준은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달랬다.“얼른 자.”이미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베개 밑에 놓인 무기의 존재를 알게 되자 권하윤은 잠이 들 리 없었다.순간 조금 전에 겪었던 일들이 영화처럼 눈앞에서 재생되었다.민도준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녀더러 불을 끄라고 할 때부터 모든 건 이 무섭고 소름 끼치는 답을 가리키고 있었다.‘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 왔으면서 민도준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잊어버리다니. 진짜 나를 용서해 줬다고 생각하다니.’순간 덮쳐오는 공포는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트려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권하윤이 겁을 먹었다는 걸 발견한 민도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갑자기 방을 밝히는 눈 부신 빛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고 다시 뜨는 순간 민도준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에 겁을 먹은 권하윤은 몸을 슬금슬금 뒤로 빼며 그와 멀어지려고 애썼다.그때 민도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 뒤를 힐끗 살피며 입을 열었다.“더 물러나다간 떨어져.”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하윤은 중심을 잃고 뒤로 휘청 넘어졌다.“아-”그리고 그 순간 힘 있는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 들어 그녀를 원래 자리고 끌어왔다.권하윤은 가까이에 있는 민도준 때문에 버둥거리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가 갑자기 손에 힘을 주며 인내심을 잃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뭐 하는 거야? 내가 하윤 씨 죽이려고 했으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하긴, 민도준이 나 죽이려 한다면 난 도망칠 기회도 없겠지? 안돼. 흐트러져서는 안
권하윤은 숨을 죽인 채 민도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겨주던 남자가 입을 달싹이면서 짤막한 대답을 내뱉었다.“착하네.”겨우 정확한 선택지를 골랐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한참 뒤 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눌러 끈 민도준은 권하윤의 목덜미를 잡은 채 그녀를 자기 앞으로 돌려놨다.“피곤해?”이미 정신이 번쩍 든 권하윤은 성실하게 고개를 저었고 그녀의 동작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피곤하지 않으면 우리 다른 거 할까?”분명 권하윤의 의견을 물어보는 한마디였지만 민도준은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그녀의 다리를 벌리며 신음을 입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방 안에는 낮은 흐느낌 소리만 맴돌았다.하지만 그 덕에 권하윤의 쓸데없는 생각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민도준은 그녀의 상처가 눌리우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권하윤더러 여러 가지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하게 했다.‘그렇게 날 생각해 준다면 횟수나 좀 줄이라고!’권하윤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냈지만 조금 전의 교훈 때문에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동이 틀 때쯤 권하윤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녀의 눈초리에는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에게 호되게 당한 뒤라 그런지 더 이상 그의 품에 파고들지 않고 혼자 침대 끝에 쪼그린 채 잠들었다.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민도준은 피식 웃으며 손을 이불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권하윤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지만 그런데도 권하윤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보아하니 무척 피곤한 모양이었다.민도준은 담배를 들고 테라스로 향하더니 담배 한 갑이 바닥날 때까지 피워댔다.그러면서 희뿌연 연기를 내뿜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사람 하나 잡아 와.”권하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탓에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한 한민혁은 민도준의 전화를 받자 곧바로 고분고분 대답했다.“잡아야지. 당연히 잡아야지. 내가 당
다음 날.권하윤은 자기를 짓누르는 무게에 억지로 눈을 떴다. 민감한 감각이 사지까지 전해지더니 혼미한 그녀를 욕망의 물결 속으로 끌어들였다.민도준이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며 밭은 숨을 내뱉을 때 방금 든 정신은 다시 희미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뒤,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나온 민도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하윤을 일으켜 세웠다.“그만 자고 얼른 씻어.”여전히 밀려오는 피곤함에 권하윤은 몸을 일으켜 세워 놓기 바쁘게 자꾸만 이리저리 넘어졌다.“조금만 더 잘래요.”하지만 민도준이 그렇게 착하게 다른 그녀의 의견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권하윤을 둘러맨 채로 욕실로 향하더니 따뜻한 물을 틀었다.그 덕에 권하윤은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또다시 민도준의 손에 놀아났다.화가 난 권하윤이 다시 샤워하던 그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그것도 침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권하윤은 다급히 자기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민도준의 손을 툭툭 치며 사람이 왔다는 걸 암시했다.하지만 그는 권하윤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그의 청개구리 같은 행동에 화가 나 있던 그때 권하윤은 갑자기 민도준의 옷이 밖에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게다가 흐트러진 침대는 지금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일 게 뻔했다.그런 생각이 든 순간 권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잔뜩 놀란 얼굴로 민도준을 돌아보며 횡설수설했다.“밖에, 민승현일 거예요. 옷…….”하지만 민도준은 바람피우다 걸렸다는 자각도 없는 듯 권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무서울 거 뭐 있어? 내가 동생 대신 제수씨 돌봐주는 건데. 승현이도 이해할 거야!”‘이해는 개뿔!’오늘은 이대로 죽는 건가하는 생각에 반쯤 포기하고 있을 그때, 방문의 손잡이가 몇 번 돌아가더니 곧바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똑똑똑-”‘문이 잠겨 있어? 문 잠근 기억이 없는데? 설마 도준 씨인가? 하긴, 어제 성은우가 왔다 갔으니. 그런데
권하윤의 능청스러운 표정은 가짜 그림으로 강민정을 곤경에 빠트리던 예전의 기억을 강제로 소환해 냈다. 이윽고 그녀는 악에 받쳐 손가락으로 권하윤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당장 내 돈 내놔! 안 그러면 나 지금 당장 승현 오빠한테 전화할 테니까!”억지를 부려대는 강민정의 모습에 권하윤은 말문이 막혔다.“아쉽게도 때를 잘못 찾았네.”“뭐?”강민정이 자세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권하윤 뒤에서 쑥 나오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아!”질질 끌려 나가는 동안 강민정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그렇게 한참을 끌려 나가던 그녀는 끝내 거실바닥에 내팽개쳐졌다.“누구야?”바닥에 벌러덩 넘어진 그녀는 뒹굴뒹굴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민도준을 발견한 순간 분노가 공포로 뒤바뀌었다.“민…… 민 사장님.”갓 욕실에서 나온 터라 몸에 아직도 열기와 습기가 돌고 있는 민도준은 마치 인간을 심판하는 신처럼 강민정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은 평소보다도 더 위험했다.“자, 어디 계속 지껄여 봐. 어떻게 하겠다고?”자기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강민정은 극심한 공포에 벌벌 떨었고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조차 그녀의 공포는 덮지 못했다.때문에 다시 했던 말을 반복하기는커녕 온전한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민 사장님이 이렇게 대놓고 승현 오빠 집에서 권하윤이랑 관계를 맺는다고?’그 눈빛에 권하윤은 착하게 그녀를 일깨워 줬다.“민 사장님이 묻잖아요.”“저…… 저…….”강민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때 민도준이 인내심이 바닥나 귀찮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다음 순간 자기를 때릴 것만 같은 그의 동작에 강민정은 다급히 민도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저 그저 농담한 거예요. 저 절대 말하지 않아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음?”민도준은 마치 진짜로 그녀의 말을
권하윤은 두피가 찌근거렸지만 감히 표정으로 고통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오히려 나른한 목소리로 민도준의 비위를 맞췄다.“제가 무슨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그래요? 매일 도준 씨랑 같이 있고 싶다면 모를까.”“아아- 아파요-”갑자기 힘이 실린 민도준의 손에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힌 찰나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동작과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오호, 내가 그렇게 좋아?”머리채가 잡힌 권하윤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비아냥 섞인 민도준의 눈빛을 억지로 바라봐야만 했다.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그녀는 오히려 민도준에게 바싹 붙으며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제가 도준 씨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요?”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분명 보기에는 부드럽기만 데 어쩜 이렇게 가시가 돋쳤을까?’맨 처음 손에 잡았을 때는 몰랐는데 살 깊숙이 찔리고 나서야 그는 권하윤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너무 오래 지속된 적막에 권하윤이 속으로 중얼대고 있을 때 그녀의 허리를 감쌌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아-”권하윤을 힘으로 눌러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틈이 없을 정도로 바싹 붙고 나서야 민도준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당연히 알지.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의미심장한 말에 권하윤은 찔리기라도 하는 듯 움찔하더니 도저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민도준을 힐끗 보며 맞장구쳤다.“안다니 다행이네요.”이런 일이 있고 나자 민도준이 떠난 뒤 권하윤은 성은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고이 마음속에 접어두었다.어떻게 해야 성은우와 연락할 수 있는지 아는 건 둘째 치고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그러느냐던 민도준의 말에 겁을 먹은 이유가 더욱 컸다.하지만 텅 빈 방을 둘러보다 보니 아직 그에게 고맙다는 말도 심지어 잘 가라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여러 가지 이유로 권하윤은 당시 도망칠 때 성은우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었다.
민상철은 민도준의 허세 부리는 말투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시간 없으면 만들어 내!”버럭 소리를 지른 민상철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민도준이 원체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는 게 생각이 났는지 화를 가라앉히며 말을 보탰다.“너 백제 과학기술 단지 맡고 싶어 했잖아. 네가 내일 오면 그 건 고려해 볼게.”심심한 듯 라이터를 만지작대던 민도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접었다. 하지만 장난기 섞인 껄렁한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없었다.“오호, 우리 영감 오늘 무슨 일로 이렇게 시원시원하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지옥에 가 설명하기 어려울까 봐 선행이라도 베풀려고 그러나?”“너!”민상철은 일순 눈앞이 아찔해 났다.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숨을 크게 돌린 뒤 목소리를 내리깔았다.“그건 너희 부모님이 일궈낸 피 같은 회사야. 너 설마 다른 사람 손에 넘길 생각이야?”민도준은 눈썹을 치껴올렸다. 그렇다고 민상철이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불러내는 게 대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기는 했다.이에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주먹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할아버지 체면을 봐서 갈게요. 이번에 저한테 신세 졌다는 거 기억하세요.”“뚜뚜뚜-”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상철은 순간 화가 거꾸로 치밀어 올랐고 심장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 시각 치솟아 오르는 심장박동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민혁이다.그는 조심스럽게 문틈 사이로 방 안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준 형, 지금 시간 있어?”“말해.”눈도 들지 않은 채 말하는 상대에 한민혁은 비좁은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안전거리를 확보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그게 뭐냐면. 내가 애들 데리고 권하윤 씨 집 부근에서 수색해 봤는데 성은우는 못 찾았어.”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던 한민혁은 민도준이 화를 낼까 봐 한마디 더 보충했다.“그런데 이미 쥐새끼도 못 빠져나가게 경계하고 있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나무 그림자만이 바람에 날려 흔들거렸다.하지만 권하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하모니카가 놓인 모양을 확인하더니 차를 틀었다.느릿느릿 전진하는 와중에 그녀는 계속 주위의 경계를 살피며 뭔가를 찾았다.신호등을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긴 도로를 온종일 주행했지만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그러던 중 양쪽 거리에 펼쳐진 녹색 풍경이 점차 호화로운 고급 빌라로 변화되면서 어느 낡은 도시지역에 도착했다.몇 개의 작은 골목을 지나자 앞길을 막고 있는 장터가 보였다.시장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름진 튀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데? 아마 여기겠지?’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녁 식사 무렵이라 그런지 시장을 누비는 노인들 외에도 퇴근한 직장인과 하교한 학생들이 상가 앞에 모여들었다.권하윤은 어느새 그 틈에 녹아들어 장을 보는 듯 이리저리 둘러봤다.하지만 길지 않은 거리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에도 주위에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설마 아직 안 도착했나?’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거리에서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건 너무 튀는 행동이었기에 권하윤은 작은 상가 앞에서 줄이라도 서야겠다고 결심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호떡을 파는 작은 수레 하나가 눈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 앞으로 걸어갔다.노릇노릇 구워진 호떡 사이에서 좔좔 흐르는 속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싹 돌았다.때문에 그저 앞에 서 있기만 하러던 권하윤은 주섬주섬 돈을 꺼냈다.앞에 줄을 선 학생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러던 그때 옆에서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기 들려왔다.“하나요.”“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호떡 사장의 담담한 말투와 달리 권하윤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곧바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