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권하윤은 자기를 짓누르는 무게에 억지로 눈을 떴다. 민감한 감각이 사지까지 전해지더니 혼미한 그녀를 욕망의 물결 속으로 끌어들였다.민도준이 그녀의 목덜미를 깨물며 밭은 숨을 내뱉을 때 방금 든 정신은 다시 희미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뒤, 차가운 물로 샤워하고 나온 민도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권하윤을 일으켜 세웠다.“그만 자고 얼른 씻어.”여전히 밀려오는 피곤함에 권하윤은 몸을 일으켜 세워 놓기 바쁘게 자꾸만 이리저리 넘어졌다.“조금만 더 잘래요.”하지만 민도준이 그렇게 착하게 다른 그녀의 의견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권하윤을 둘러맨 채로 욕실로 향하더니 따뜻한 물을 틀었다.그 덕에 권하윤은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또다시 민도준의 손에 놀아났다.화가 난 권하윤이 다시 샤워하던 그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그것도 침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권하윤은 다급히 자기의 허리를 두르고 있는 민도준의 손을 툭툭 치며 사람이 왔다는 걸 암시했다.하지만 그는 권하윤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제멋대로 굴었다. 그의 청개구리 같은 행동에 화가 나 있던 그때 권하윤은 갑자기 민도준의 옷이 밖에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게다가 흐트러진 침대는 지금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일 게 뻔했다.그런 생각이 든 순간 권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녀는 잔뜩 놀란 얼굴로 민도준을 돌아보며 횡설수설했다.“밖에, 민승현일 거예요. 옷…….”하지만 민도준은 바람피우다 걸렸다는 자각도 없는 듯 권하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무서울 거 뭐 있어? 내가 동생 대신 제수씨 돌봐주는 건데. 승현이도 이해할 거야!”‘이해는 개뿔!’오늘은 이대로 죽는 건가하는 생각에 반쯤 포기하고 있을 그때, 방문의 손잡이가 몇 번 돌아가더니 곧바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똑똑똑-”‘문이 잠겨 있어? 문 잠근 기억이 없는데? 설마 도준 씨인가? 하긴, 어제 성은우가 왔다 갔으니. 그런데
권하윤의 능청스러운 표정은 가짜 그림으로 강민정을 곤경에 빠트리던 예전의 기억을 강제로 소환해 냈다. 이윽고 그녀는 악에 받쳐 손가락으로 권하윤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당장 내 돈 내놔! 안 그러면 나 지금 당장 승현 오빠한테 전화할 테니까!”억지를 부려대는 강민정의 모습에 권하윤은 말문이 막혔다.“아쉽게도 때를 잘못 찾았네.”“뭐?”강민정이 자세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권하윤 뒤에서 쑥 나오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아!”질질 끌려 나가는 동안 강민정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그렇게 한참을 끌려 나가던 그녀는 끝내 거실바닥에 내팽개쳐졌다.“누구야?”바닥에 벌러덩 넘어진 그녀는 뒹굴뒹굴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민도준을 발견한 순간 분노가 공포로 뒤바뀌었다.“민…… 민 사장님.”갓 욕실에서 나온 터라 몸에 아직도 열기와 습기가 돌고 있는 민도준은 마치 인간을 심판하는 신처럼 강민정을 내려다봤다. 그 모습은 평소보다도 더 위험했다.“자, 어디 계속 지껄여 봐. 어떻게 하겠다고?”자기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강민정은 극심한 공포에 벌벌 떨었고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조차 그녀의 공포는 덮지 못했다.때문에 다시 했던 말을 반복하기는커녕 온전한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민 사장님이 이렇게 대놓고 승현 오빠 집에서 권하윤이랑 관계를 맺는다고?’그 눈빛에 권하윤은 착하게 그녀를 일깨워 줬다.“민 사장님이 묻잖아요.”“저…… 저…….”강민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때 민도준이 인내심이 바닥나 귀찮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다음 순간 자기를 때릴 것만 같은 그의 동작에 강민정은 다급히 민도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저 그저 농담한 거예요. 저 절대 말하지 않아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음?”민도준은 마치 진짜로 그녀의 말을
권하윤은 두피가 찌근거렸지만 감히 표정으로 고통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오히려 나른한 목소리로 민도준의 비위를 맞췄다.“제가 무슨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그래요? 매일 도준 씨랑 같이 있고 싶다면 모를까.”“아아- 아파요-”갑자기 힘이 실린 민도준의 손에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힌 찰나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동작과는 확연히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오호, 내가 그렇게 좋아?”머리채가 잡힌 권하윤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비아냥 섞인 민도준의 눈빛을 억지로 바라봐야만 했다.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그녀는 오히려 민도준에게 바싹 붙으며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제가 도준 씨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모르는 거 아니잖아요?”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분명 보기에는 부드럽기만 데 어쩜 이렇게 가시가 돋쳤을까?’맨 처음 손에 잡았을 때는 몰랐는데 살 깊숙이 찔리고 나서야 그는 권하윤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고 착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너무 오래 지속된 적막에 권하윤이 속으로 중얼대고 있을 때 그녀의 허리를 감쌌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아-”권하윤을 힘으로 눌러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틈이 없을 정도로 바싹 붙고 나서야 민도준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당연히 알지.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의미심장한 말에 권하윤은 찔리기라도 하는 듯 움찔하더니 도저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민도준을 힐끗 보며 맞장구쳤다.“안다니 다행이네요.”이런 일이 있고 나자 민도준이 떠난 뒤 권하윤은 성은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고이 마음속에 접어두었다.어떻게 해야 성은우와 연락할 수 있는지 아는 건 둘째 치고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 그러느냐던 민도준의 말에 겁을 먹은 이유가 더욱 컸다.하지만 텅 빈 방을 둘러보다 보니 아직 그에게 고맙다는 말도 심지어 잘 가라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여러 가지 이유로 권하윤은 당시 도망칠 때 성은우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었다.
민상철은 민도준의 허세 부리는 말투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시간 없으면 만들어 내!”버럭 소리를 지른 민상철은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민도준이 원체 말을 안 듣는 사람이라는 게 생각이 났는지 화를 가라앉히며 말을 보탰다.“너 백제 과학기술 단지 맡고 싶어 했잖아. 네가 내일 오면 그 건 고려해 볼게.”심심한 듯 라이터를 만지작대던 민도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접었다. 하지만 장난기 섞인 껄렁한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없었다.“오호, 우리 영감 오늘 무슨 일로 이렇게 시원시원하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지옥에 가 설명하기 어려울까 봐 선행이라도 베풀려고 그러나?”“너!”민상철은 일순 눈앞이 아찔해 났다.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숨을 크게 돌린 뒤 목소리를 내리깔았다.“그건 너희 부모님이 일궈낸 피 같은 회사야. 너 설마 다른 사람 손에 넘길 생각이야?”민도준은 눈썹을 치껴올렸다. 그렇다고 민상철이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불러내는 게 대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기는 했다.이에 그는 잠깐 침묵하더니 주먹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할아버지 체면을 봐서 갈게요. 이번에 저한테 신세 졌다는 거 기억하세요.”“뚜뚜뚜-”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상철은 순간 화가 거꾸로 치밀어 올랐고 심장박동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 시각 치솟아 오르는 심장박동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은 또 있었으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민혁이다.그는 조심스럽게 문틈 사이로 방 안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준 형, 지금 시간 있어?”“말해.”눈도 들지 않은 채 말하는 상대에 한민혁은 비좁은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와 안전거리를 확보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그게 뭐냐면. 내가 애들 데리고 권하윤 씨 집 부근에서 수색해 봤는데 성은우는 못 찾았어.”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던 한민혁은 민도준이 화를 낼까 봐 한마디 더 보충했다.“그런데 이미 쥐새끼도 못 빠져나가게 경계하고 있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나무 그림자만이 바람에 날려 흔들거렸다.하지만 권하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하모니카가 놓인 모양을 확인하더니 차를 틀었다.느릿느릿 전진하는 와중에 그녀는 계속 주위의 경계를 살피며 뭔가를 찾았다.신호등을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그녀의 심장도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긴 도로를 온종일 주행했지만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그러던 중 양쪽 거리에 펼쳐진 녹색 풍경이 점차 호화로운 고급 빌라로 변화되면서 어느 낡은 도시지역에 도착했다.몇 개의 작은 골목을 지나자 앞길을 막고 있는 장터가 보였다.시장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름진 튀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는데? 아마 여기겠지?’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저녁 식사 무렵이라 그런지 시장을 누비는 노인들 외에도 퇴근한 직장인과 하교한 학생들이 상가 앞에 모여들었다.권하윤은 어느새 그 틈에 녹아들어 장을 보는 듯 이리저리 둘러봤다.하지만 길지 않은 거리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에도 주위에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설마 아직 안 도착했나?’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거리에서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건 너무 튀는 행동이었기에 권하윤은 작은 상가 앞에서 줄이라도 서야겠다고 결심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호떡을 파는 작은 수레 하나가 눈에 들어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 앞으로 걸어갔다.노릇노릇 구워진 호떡 사이에서 좔좔 흐르는 속을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싹 돌았다.때문에 그저 앞에 서 있기만 하러던 권하윤은 주섬주섬 돈을 꺼냈다.앞에 줄을 선 학생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러던 그때 옆에서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기 들려왔다.“하나요.”“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호떡 사장의 담담한 말투와 달리 권하윤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곧바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계속 들려오지 않는 일순 불안해 난 권하윤은 핸드폰의 신호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때 조수석 문이 달칵 열렸다.“어, 누구…….”한마디를 채 내뱉지도 못한 채 나머지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고 물기 도는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민도준은 혼이 나간 듯 놀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나 보고 싶다며? 기쁘지 않은가 봐?”잠깐 넋을 잃고 있던 권하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당연히 기쁘죠. 그냥, 너무 놀란 것뿐이에요…….”“음?”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뭐라도 할까 봐 그래? 하윤 씨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 안 그래?”남자의 목소리는 권하윤의 나약한 심장을 고공으로 뿌렸다가 다시 가슴으로 처박았다.이에 권하윤은 자기와 성은우의 암호를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쉴 새 없이 최면을 걸었다.‘은우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충분한 자신감이 있는 체 틀림없어. 도준 씨는 그저 내가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서 의구심에 따라온 걸 거야.’“왜 자꾸 절 놀래켜요?”권하윤은 그제야 입을 삐죽거리며 여상스럽게 애교부렸다.그런 그녀를 보던 민도준은 입가에 호를 그리며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그때 권하윤은 기회를 틈타 손에 쥐고 있던 호떡을 그의 앞에 건네며 입을 열었다.“아직 따듯해요. 드셔보세요.”마치 뇌물이라도 바치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얼른 먹어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호떡 두 개를 힐끗 바라봤다.“뭐야?”“호떡이요. 저 오래전부터 이거 먹고 싶었거든요.”권하윤은 비닐봉지를 풀어헤치며 말을 이어갔다.“여기 어렵게 찾은 거예요. 도준 씨 것도 하나 사서 블랙썬에 갖다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마침 만났네요.”은연중에 자기가 왜 이곳에 있는지 설명한 그녀는 종이컵에 담은 호떡을 민도준 입가에 가져가더니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다그쳤다.“얼른 입 벌려요.”따라 해 보라는 식으로 빨간 입술을 “
“저…….”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싸늘한 기운이 권하윤을 감쌌다.그제야 그 침묵 때문에 꼬리를 숨기려다 들킴 여우 신세가 됐다는 자각이 들었다.그녀가 묻지 않았던 건 성은우가 이미 민도준 쪽 사람이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려줬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이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민도준은 재촉하지도 않고 여유로운 듯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아까만 해도 민도준에게 끌려 무릎에 앉아 음식을 나눠 먹던 권하윤은 잠깐의 경악 뒤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그리고 작은 얼굴을 쳐들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도준 씨가 사람을 보내 저 보호해 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저녁에도 갑자기 나타난 거잖아요.”말하는 동시에 손을 살살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도준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저 다 알아요.”그때, 옷깃이 살짝 흔들며 느끼지 못 할 정도의 작은 바람이 불었다.멀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야시장의 불빛이 권하윤의 눈에 비쳐 반짝거렸다.그 모습은 마치 기름에 튀긴 길거리 음식처럼 해롭지만 유혹적이었다.두 쌍의 눈이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고 있었고 오래 지속되는 침묵에 권하윤의 호흡은 어느새 흐트러졌다.긴장과 불안 속에서 실낱같은 설렘이 억지로 밀려 들어오더니 갑자기 환한 야시장의 불빛이 커다란 손에 가려졌다.이윽고 권하윤이 놀라 입을 살짝 벌린 틈으로 남자의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조금 전 보여줬던 침략적인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내일 민씨 저택 갈 때 안에 옷 적게 입어. 하기 편하게끔.”키스로 이미 뜨거워진 귀와 얼굴은 민도준의 말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권하윤은 나지막하게 “네”라고 대답했다.그녀가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민도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의 심장이 저릿해 날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살짝 웃었다.“점점 더 밝히네.”그리고 그는 권하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도준이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거실에 들어섰다.“이런, 다들 도착했네요.”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하나 남은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던 그는 끝에 앉은 권하윤에게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긴 머리를 어깨 뒤에 드리운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아무런 반응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계속 흔들리는 귀걸이는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그제야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테이블을 툭툭 쳤다.“사람도 다 도착했는데 다들 수저 드시죠.”늦게 온 그가 오히려 건들건들한 태도로 주인행세를 하자 민상철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를 꾸짖었다.“고씨 집안 어르신들이 여기서 너 하나 기다렸는데 인사도 안 드려?”민도준은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은 고창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아, 어르신도 계셨네요.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분명 의문구로 말을 끝났지만 그는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계속 이어 나갔다.“어르신은 절대 저희 할아버지처럼 심장마비로 쓰러진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연회를 여네 마네 하며 고생을 사서 하지 마세요. 밥상머리에서 갑자기 병이라도 도져 봐요.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마저 죄인 되지 않겠습니까?”“…….”그의 말에 거실은 일순 적막이 흘렀다. 심지어 맨 끝에 앉은 권하윤은 눈앞이 캄캄해 났다.‘어떻게 이리 바람 잘 날 없지?’아니나 다를까 민상철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약 고씨 집안사람들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상을 엎었을 기세였다.다행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고창호는 미소를 지으며 중재에 나섰다.“이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상철 형님을 너무 오래 못 봐서 같이 먹고 즐길 생각으로 불쑥 찾아오다 보니 그 일을 잊었군.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고 형님 생각해 주는 건 민 사장밖에 없네. 자, 내가 잘못했으니 벌주 한잔 마시지.”조그만 흠도 찾을 수 없는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다시 사르르 녹았다.그 시각 권하윤은 속으로 늙은 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