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호는 눈빛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그렇네. 은지야, 얼른 민 사장한테 인사드려야지.”고은지는 그의 말을 따라 고분고분 민도준 쏙으로 걸어갔지만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몸을 약간 수그렸다.무뚝뚝한 얼굴에 괴팍한 성격, 그리고 그녀가 오늘 입고 있는 무채색 치마까지 더해지자 잒만 고인을 떠올리게 했다.민도준이 그녀를 훑어보고 있던 그때, 민상철이 입을 열었다.“안 그래도 내가 마침 과학기술 단지를 도준한테 맡길까 하는데, 앞으로 우리 두 가문이 더 가까워지겠군.”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끊더니 다시 이어갔다.“그런데 도준이는 아직 과학기술 단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을 테니, 용재 네가 얘 좀 잘 가르쳐 봐.”민상철의 말을 듣고 나니 권하윤은 오늘 이 자리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게 뭘 위해서인지 눈치챘다.마치 불과 물처럼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한 가지 일을 맡긴다는 건 그 둘에게 싸움을 붙이려는 뜻이나 다름없다.하지만 과학기술 단지의 핵심 기술은 모두 고씨 가문에서 제공하기에 민도준이 이 기회에 고은지와 관계를 확정 지으면 어려움을 극복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역시 계략가네.’민도준이 공은채에 대한 감정, 과학기술 단지의 이익, 그리고 첫째네와 둘째네의 경쟁, 민상철은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주무른 셈이다.‘인정하자. 도준 씨가 고은지 씨한테 흥미를 느끼는 건 당연해. 도준 씨는 언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돼 있어.’그리고 그게 누구든 권하윤은 아닐 거다.아무리 그녀가 민승현과 파혼을 한다 해도 예비 제수씨에서 아내로 된다는 건 넘기 힘든 강이니 말이다.더욱이 민씨 가문에서는 이런 추악한 일이 가문에 벌어지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을 거다.하물며 공은채와 이렇게나 닮은 고은지까지 나타났으니…….아무리 생각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민도준이 고은지가 가까이하는 걸 거절하지 않고 민상철의 말을 듣는 걸 보고 있자니 권하윤의 마음은 씁쓸해 났다.이윽고 더 이상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그러던 그때, 민상철과
담배가 타들어 가며 빨간 불빛을 내뿜더니 곧이어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현장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었다.목적에 도달한 민상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리 늙은이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흩어져.”흩어지기 전 민상철은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넌 오늘 늦었으니 고 어르신을 대신해서 은지나 데려줘.”마침 일어서는 순간 이 소리를 들어버린 권하윤은 잠시 멈칫했다.하지만 그녀가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민도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데려다주라고요? 저를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가벼운 말투는 곧바로 민상철의 화를 불러왔다.“행실 똑바로 해! 은지는 고씨 가문 둘째 아가씨야. 네가 밖에서 만나는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참한 애 놀라게 하지 마!”약 2초간 멍해 있던 권하윤은 끝내 고개를 떨군 채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을 본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하, 억울하긴 한가 봐.’눈길은 치맛자락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발목에 멈춰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며 느긋하게 일어섰다.“요구가 참 많네. 그래요. 할아버지 말 들을게요. 제가 이렇게 효도한다니까요.”“…….”문밖.저택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민시영은 권하윤을 끌어당기며 나직이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과학기술 단지는 우리 가문 수익 중 3분의 1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파트예요. 도준 오빠가 거절하지 않은 건 고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고씨 가문 기술이 필요했던 걸 거예요.”“시영 언니, 그런 말 저한테 안 해도 돼요.”권하윤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게다가 그녀는 민도준이 고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한은.하지만 이런 말들을 민시영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민시영도 그녀가 자세한 얘기를 피한다는 걸 눈치채고 싱긋 웃었다.“하긴, 둘째 오빠 성격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결과가 빨리 정해지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두 사람이 대화
“도착했네. 제수씨, 고생했어.”뒷좌석 문이 열리자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고 권하윤의 마음도 덩달아 서늘해졌다.어슴푸레한 밤, 달빛을 밟으며 아파트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화기애애하고 어울렸다.그 두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권하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려던 그때 문자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주차할 곳 찾아 나 기다려.]‘기다리라고? 적어도 시간 단위로 끝내던 사람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한다고?’그녀가 아무리 그 시간과 여유가 있다 해도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다.당연하다는 듯 문자를 무시한 그녀는 핸들을 틀었다.하지만 그녀가 그러기를 알기라도 한 듯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도망치기 전에 다리 필요 없는 거로 간주할 게.]“…….”막 길목을 지난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다시 핸들을 꺾어 커피숍 앞에 주차했다.일 분, 일 초…… 끝나지 않는 기다림에 점점 답답해 난 권하윤은 결국 차 문을 열고 공기를 쐬었다.그리고 반 시간 뒤 끝내 차키를 뽑고 차에서 내렸다.“버블티 하나 주세요.”달짝지근한 액체가 씁쓸하던 혀끝을 감싸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버블티를 들고 차에서 한참 동안 멍때리던 권하윤은 점점 생각에 잠겼다.대타를 찾는 사람은 자기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민도준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가 고은지를 선택한 사실은 변함없었다.‘비슷한 사람에게조차 이렇게 대하는 데 공은채 본인에게는 어떻게 대했을까? 나 뭐로 비기지?’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시간쯤 기다렸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하지만 권하윤은 고개도 쳐들지 않고 바닥난 버블티를 계속 빨아댔다.민도준이 차에 오르자 고은지가 차에 올랐을 때 나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분명 은은한 향이었지만 그녀의 코끝은 향기에 자극됐다. 서늘한 향기가 민도준의 몸을 감돌다가 공중에서 휘발되고 있다는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뭘 그렇게 열심히
권하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도준이 입을 열었다.“설마 내 그 동생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다른 사람이라는 단어를말 할 때 민도준의 어조는 뭔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 의미심장했다.그리고 권하윤은 왠지 그 다른 사람이 바로 성은우를 가리키는 거라고 느껴졌다.‘설마 나랑 은우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걸 알았나? 에이, 설마. 알아냈다면 내가 이렇게 무사히 앉아있지 못했을 거야.’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권하윤은 과감하게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승현은 제 약혼남이에요. 약혼남한테 이런 이벤트정도 해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오, 그렇긴 하지.”민도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잊을뻔했네. 요즘 임신 준비한다고 했지? 걔 애라도 낳아주게?”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반박하기도 그렇고 더욱이 화가 나 있었기에 권하윤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당연하죠. 안 그러면 뭐 다른 사람의 애를 낳아주겠어요?”앞뒤 가리지 않고 질러버린 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허리를 툭툭 쳤다.“얼른 운전해.”이런 반응은 오히려 의외였다.그제야 권하윤은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운전석에 다시 앉았다.‘하긴, 내가 애를 낳든 말든 도준 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일순 가슴이 답답했지만 한참을 운전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민도준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으려 할 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랙썬으로 가.”‘진짜 블랙썬으로 가는 거네.’권하윤은 소리 없이 입을 삐죽거렸다.그 뒤로 블랙썬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도착했어요. 안까지 마중하지는 않겠어요…….”“주차장으로 가.”권하윤은 그의 당연한 듯한 어투에 울컥했다.‘설마 날 운전기사로 보고 있잖아!’이윽고 그녀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 몇 걸음 더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스스로
그 뒤로 권하윤의 목소리는 모두 남자의 손에 갇혀 새오 나오지 못했다.장소에 대한 불안함과 갑자기 민친 듯 달려드는 민도준에 대한 두려움이 한데 겹쳐 생리적인 눈물이 끝내 폭발했다.작은 흐느낌 소리가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흩어져 가련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오늘 민도준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밖을 힐끗거리더니 권하윤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때 갑자기 멀리서 불빛이 구석을 비춰왔고 가뜩이나 잔뜩 긴장했던 권하윤은 마치 뭍에 꺼내진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다가 끝내 힘이 빠져 의식을 잃었다.다행히 주차 구역을 찾는 차였기에 주위를 대충 살피다가 자리가 없자 바로 떠나버렸다.민도준은 눈물범벅이 된 권하윤을 힐끗 보더니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그녀를 차에서 안아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안.민도준은 뭔가를 발견한 듯 한 곳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 역시나.’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도 함께 문 사이로 사라졌다.점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던 구석진 곳의 검은 그림자는 가죽장갑을 낀 손을 꽉 그러쥐었다.-정신을 차린 권하윤이 가장 먼저 한 건 자기 몸을 검사하는 거였다.그리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누워있는 맞은 켠 소파에 앉은 민도준을 발견했다.하지만 아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그와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자기를 덮고 있던 외투를 걷어내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남자의 두 팔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화났어?”이윽고 남자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리며 그녀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아까는 장난친 거야. 화내지 마. 응?”권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 반해 민도준은 사람 하나 괴롭혀 죽여야만 끝내려던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깃든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채 오직 그가 묵인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고은지 씨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거 부인하지 않네.’순간 번한 결말에 헛된 희망을 품은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실망을 하고나니 어느새 머리도 맑아졌다.이윽고 눈을 들어 민도준을 볼 때 눈에는 몇 가닥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당연히 제가 가야 할 곳으로 물러나야죠. 그렇다고 도준 씨더러 양쪽 다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잖아요. 한두 번은 괜찮겠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간 도준 씨 몸이 남아나지 않을까 봐 걱정돼요.”분명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권하윤의 어조는 관심과 걱정이 가득했고 심지어 민도준의 어깨에 손까지 얹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그런 그녀의 행동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내 몸이 남아날지 아닐지는 하윤 씨가 시험해보면 되겠네.”그렇게 두 사람은 또다시 밤까지 엉겨 붙게 되었다.그 때문에 민도준의 등에는 권하윤이 “실수”로 긁은 손톱자국이 몇 가닥 보태졌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앙칼지다고 꾸짖기만 할 뿐 말리지는 않았다. 한참 지속된 행위에 어느새 비몽사몽 잠이 든 그때, 민도준이 권하윤을 흔들어 깨웠다.“일어나, 돌아가서 자.”“싫어요.”졸음이 몰려와 축 늘어진 권하윤은 휴게실 침대에 오히려 얼굴을 파묻었다.짙은 남색의 침대 시트 덕에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더 부각되었다.블랙썬의 휴게실 침대는 지금껏 민도준 혼자만 사용하던 거다. 그런데 오늘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권하윤이 누워있자 조금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나른한 몸이 또 작기는 얼마나 작은지 커다란 침대에 여백이 많이 남았고 쪼그리고 누운 모습은 마치 애완동물 같았다.하지만.민도준은 입꼬리는 차가운 곡선을 그렸다.‘애완동물이면 주인 즐겁게 해줘야지, 다른 들개를 끌어들이면 쓰나. 나한테 빌붙어서 밖에서는 다른 놈 끌어들이면 둘 다 때려죽이는 수밖에.’그는 손등으로 권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하, 구석에서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하모니카 위에 백화점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거였다.그걸 보는 순간 권하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지난번에 분명 앞으로 다시 보지 못 할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마음이라도 바뀐 건가?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나?’불길한 생각에 권하윤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성은우가 적어준 주소는 오래된 쇼핑몰이다. 게다가 점심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하지만 서은우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에 권하윤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입구에 피아노가 놓여있는 의류 매점을 지나는 순간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바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심플한 스타일의 옷을 위주로 하는 매장이었기에 권하윤은 아무렇게나 옷 두 벌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그렇게 고른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문틈으로 상황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을 때 역시나 누군가 피팅룸으로 다가왔다.캡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얼굴 절반을 가리고 날카로운 턱만 드러낸 남자였다.그 순간 권하윤은 눈에 드리운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은우야!”“윤아!”성은우 역시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을 살짝 들어 권하윤을 바라봤다.자기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하지만 지금은 옛 기억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성은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눈을 깜빡이며 고인 눈물을 겨우 날려 보내고 난 뒤 권하윤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경성을 떠난다며? 무슨 일 있는 거야?”성은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꾹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어 높은 콧대를 드러냈다.“나랑 같이 떠날래?”“응?”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내…… 내가 어떻게 떠나?”권씨 가문에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오빠의 몸도 채 낫지 않아 권씨 가문에서 지원해 주는 의료진의 도움을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가짜 신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아 잘못 움직였다가는 모든 게 수
권하윤은 그제야 성은우의 행동은 자기와 선을 긋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민도준을 등지고 있는 성은우를 보자 가슴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아 말없이 민도준과 성은우를 번갈아봤다.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데굴데굴 구르는 그녀의 눈동자는 존재감이 아주 컸다.그리고 역시나 민도준은 그걸 발견했다. 그는 성은우에게 가려진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머리통에 총 겨눠져 있는 거 느끼지 못했나? 할 말 있으면 유언이라도 남겨 내가 대신 전해줄게.”장난기 섞인 말투를 보아하니 그녀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성은우가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어떤 것이든 권하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이 시각, 매장에는 민도준 외에 유일한 출구를 막고 있는 로건도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성은우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더욱 어려웠다.잠깐의 고민 끝에 권하윤은 자기의 다리를 꼬집으며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도준 씨, 저 무서워요.”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민도준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은우에게 자기를 잡을 기회를 주는 거였다.그런데 그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로건은 권하윤이 겁도 없이 성은우에게 등을 보이자 다급하게 주의를 주었다.“하윤 씨! 움직이면 안 됩니다!”“아!”눈 깜짝할 사이에 성은우는 팔로 그녀의 목을 둘렀다.협박이 담긴 동작에 권하윤은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물론 머리에는 권총이 닿아 있었지만 말이다.“민 사장님, 저는 공씨 가문 가주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 길을 비켜주시죠.”성은우의 얼굴은 모자에 반쯤 가려졌지만 그의 살의는 감추지 못했다.물론 그 살의는 권하윤을 향한 게 아니라 민도준을 향한 거였다.하지만 민도준은 그의 협박에 신경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다.“길을 비켜주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그런데 내가 호의를 베풀면 그걸 갚을 능력은 되고?”그리고 그때 소음관을 장착한 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앞에 나타나더니 낮은 소리를 내며 권하윤의 귀 옆을 지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