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권하윤의 목소리는 모두 남자의 손에 갇혀 새오 나오지 못했다.장소에 대한 불안함과 갑자기 민친 듯 달려드는 민도준에 대한 두려움이 한데 겹쳐 생리적인 눈물이 끝내 폭발했다.작은 흐느낌 소리가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흩어져 가련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오늘 민도준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밖을 힐끗거리더니 권하윤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때 갑자기 멀리서 불빛이 구석을 비춰왔고 가뜩이나 잔뜩 긴장했던 권하윤은 마치 뭍에 꺼내진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다가 끝내 힘이 빠져 의식을 잃었다.다행히 주차 구역을 찾는 차였기에 주위를 대충 살피다가 자리가 없자 바로 떠나버렸다.민도준은 눈물범벅이 된 권하윤을 힐끗 보더니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그녀를 차에서 안아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안.민도준은 뭔가를 발견한 듯 한 곳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 역시나.’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도 함께 문 사이로 사라졌다.점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던 구석진 곳의 검은 그림자는 가죽장갑을 낀 손을 꽉 그러쥐었다.-정신을 차린 권하윤이 가장 먼저 한 건 자기 몸을 검사하는 거였다.그리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누워있는 맞은 켠 소파에 앉은 민도준을 발견했다.하지만 아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그와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자기를 덮고 있던 외투를 걷어내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남자의 두 팔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화났어?”이윽고 남자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리며 그녀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아까는 장난친 거야. 화내지 마. 응?”권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 반해 민도준은 사람 하나 괴롭혀 죽여야만 끝내려던
권하윤은 민도준의 말에 깃든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채 오직 그가 묵인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고은지 씨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거 부인하지 않네.’순간 번한 결말에 헛된 희망을 품은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실망을 하고나니 어느새 머리도 맑아졌다.이윽고 눈을 들어 민도준을 볼 때 눈에는 몇 가닥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당연히 제가 가야 할 곳으로 물러나야죠. 그렇다고 도준 씨더러 양쪽 다 신경 쓰게 할 수는 없잖아요. 한두 번은 괜찮겠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간 도준 씨 몸이 남아나지 않을까 봐 걱정돼요.”분명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권하윤의 어조는 관심과 걱정이 가득했고 심지어 민도준의 어깨에 손까지 얹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그런 그녀의 행동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내 몸이 남아날지 아닐지는 하윤 씨가 시험해보면 되겠네.”그렇게 두 사람은 또다시 밤까지 엉겨 붙게 되었다.그 때문에 민도준의 등에는 권하윤이 “실수”로 긁은 손톱자국이 몇 가닥 보태졌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앙칼지다고 꾸짖기만 할 뿐 말리지는 않았다. 한참 지속된 행위에 어느새 비몽사몽 잠이 든 그때, 민도준이 권하윤을 흔들어 깨웠다.“일어나, 돌아가서 자.”“싫어요.”졸음이 몰려와 축 늘어진 권하윤은 휴게실 침대에 오히려 얼굴을 파묻었다.짙은 남색의 침대 시트 덕에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더 부각되었다.블랙썬의 휴게실 침대는 지금껏 민도준 혼자만 사용하던 거다. 그런데 오늘 긴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권하윤이 누워있자 조금 신선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나른한 몸이 또 작기는 얼마나 작은지 커다란 침대에 여백이 많이 남았고 쪼그리고 누운 모습은 마치 애완동물 같았다.하지만.민도준은 입꼬리는 차가운 곡선을 그렸다.‘애완동물이면 주인 즐겁게 해줘야지, 다른 들개를 끌어들이면 쓰나. 나한테 빌붙어서 밖에서는 다른 놈 끌어들이면 둘 다 때려죽이는 수밖에.’그는 손등으로 권하윤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하, 구석에서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하모니카 위에 백화점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거였다.그걸 보는 순간 권하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지난번에 분명 앞으로 다시 보지 못 할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마음이라도 바뀐 건가?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나?’불길한 생각에 권하윤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성은우가 적어준 주소는 오래된 쇼핑몰이다. 게다가 점심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하지만 서은우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에 권하윤은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입구에 피아노가 놓여있는 의류 매점을 지나는 순간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바로 이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심플한 스타일의 옷을 위주로 하는 매장이었기에 권하윤은 아무렇게나 옷 두 벌을 골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그렇게 고른 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문틈으로 상황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을 때 역시나 누군가 피팅룸으로 다가왔다.캡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얼굴 절반을 가리고 날카로운 턱만 드러낸 남자였다.그 순간 권하윤은 눈에 드리운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은우야!”“윤아!”성은우 역시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을 살짝 들어 권하윤을 바라봤다.자기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권하윤은 저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 났다.하지만 지금은 옛 기억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성은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눈을 깜빡이며 고인 눈물을 겨우 날려 보내고 난 뒤 권하윤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경성을 떠난다며? 무슨 일 있는 거야?”성은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꾹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어 높은 콧대를 드러냈다.“나랑 같이 떠날래?”“응?”권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내…… 내가 어떻게 떠나?”권씨 가문에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오빠의 몸도 채 낫지 않아 권씨 가문에서 지원해 주는 의료진의 도움을 떠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가짜 신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아 잘못 움직였다가는 모든 게 수
권하윤은 그제야 성은우의 행동은 자기와 선을 긋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민도준을 등지고 있는 성은우를 보자 가슴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아 말없이 민도준과 성은우를 번갈아봤다.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데굴데굴 구르는 그녀의 눈동자는 존재감이 아주 컸다.그리고 역시나 민도준은 그걸 발견했다. 그는 성은우에게 가려진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머리통에 총 겨눠져 있는 거 느끼지 못했나? 할 말 있으면 유언이라도 남겨 내가 대신 전해줄게.”장난기 섞인 말투를 보아하니 그녀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고 또 한편으로는 성은우가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어떤 것이든 권하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이 시각, 매장에는 민도준 외에 유일한 출구를 막고 있는 로건도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성은우가 무사히 빠져나가는 건 더욱 어려웠다.잠깐의 고민 끝에 권하윤은 자기의 다리를 꼬집으며 억지로 눈물을 짜냈다.“도준 씨, 저 무서워요.”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민도준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은우에게 자기를 잡을 기회를 주는 거였다.그런데 그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로건은 권하윤이 겁도 없이 성은우에게 등을 보이자 다급하게 주의를 주었다.“하윤 씨! 움직이면 안 됩니다!”“아!”눈 깜짝할 사이에 성은우는 팔로 그녀의 목을 둘렀다.협박이 담긴 동작에 권하윤은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듯했다. 물론 머리에는 권총이 닿아 있었지만 말이다.“민 사장님, 저는 공씨 가문 가주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 길을 비켜주시죠.”성은우의 얼굴은 모자에 반쯤 가려졌지만 그의 살의는 감추지 못했다.물론 그 살의는 권하윤을 향한 게 아니라 민도준을 향한 거였다.하지만 민도준은 그의 협박에 신경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자아냈다.“길을 비켜주는 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그런데 내가 호의를 베풀면 그걸 갚을 능력은 되고?”그리고 그때 소음관을 장착한 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앞에 나타나더니 낮은 소리를 내며 권하윤의 귀 옆을 지나갔
“지금?”민도준은 끝 음을 길게 끌었다. 그는 권하윤에게 일분일초가 지옥처럼 느껴질 걸 알았지만 일부러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새하얗게 질린 권하윤의 얼굴을 한참 동안 훑어보던 민도준은 그녀의 턱을 들어 자꾸만 피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며 권하윤의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기더니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자기야, 뭐가 그렇게 급해? 자꾸 그렇게 보채면…….”바싹바싹 타들어 가던 권하윤의 심장은 민도준이 잠깐 멈칫하는 순간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그녀가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을 그때, 민도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날 원하는 것 같잖아.”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권하윤은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숨이 막혀왔다.산소가 부족한 머리는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고 오직 성은우를 어떻게 하면 위험에서 벗어나게 할지만 생각했다.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로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짓이야?”고개를 돌려보니 성은우가 팔을 곧게 편 채 총구로 민도준을 가리키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권하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그저 입만 뻐금거릴 뿐 성은우를 말려야할지 민도준을 말려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위험에 노출된 민도준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권하윤의 긴 머리카락을 돌돌 감으며 장난쳤다.심지어 큰 손으로 비단결 같은 그녀의 머리 사이를 누비며 느긋하게 행동하더니 성은우를 바라봤다.“왜? 설마 내가 총 쏘는 법도 가르쳐 줘야 해?”상대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듯한 그의 말투는 극도로 모욕적이었다.이에 성은우는 총을 쥔 손에 힘을 주더니 점점 방아쇠를 당겼다.하지만 권하윤의 공포에 질린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몇 초간 침묵하더니 손의 힘을 뺐다.이윽고 총은 그의 손가락에서 팽글팽글 돌다가 손끝을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권하윤의 눈시울은 붉어졌고 목구멍은 마치 커다란 돌멩이가 막고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권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민도준이 천천히 허리를 펴며 자기를 내려다보는 걸 바라봤다.“아직도 집에 가고 싶어? 데려다줄까?”농담 섞인 그의 말에 권하윤의 심장은 덜컹 내려앉았다.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민도준은 시계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내가 지금 블랙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자식이 나한테 총 겨눈 일만으로도 로건이 그 자식 죽이고도 남을 거야. 내가 돌아가면 며칠 데리고 놀 수는 있고.”이윽고 그는 시선을 권하윤에게로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돌아갈까? 말까?”바로 죽이거나 괴롭혀 죽이는 것 중에 선택하라는 뜻이었다.그의 물음에 권하윤은 마치 반으로 쪼개져 저울 위에 올려진 느낌이었다.한참을 침묵하던 그녀는 끝내 조금이라도 더 살아 있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적어도 살아 있으면 희망이라도 있을 테니까.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고통이 전해지자 권하윤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도준 씨가 바쁘다는데 제가 어떻게 붙잡고 있겠어요? 아니면 저도 같이 블랙썬으로 가는 게 어때요?”“오늘 왜 이렇게 치댈까?”민도준은 손가락으로 권하윤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그의 말에서 동의하는지 아닌지 뜻을 알아내지 못하자 권하윤은 그의 옷깃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도준 씨랑 헤어지기 싫어서 그러죠.”민도준은 자기의 옷깃을 꼭 잡고 있는 권하윤의 손을 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별장에서 기다려. 일 끝내고 바로 보러 갈게.”이건 권하윤이 원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당장 블랙썬으로 가 성은우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지 별장에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의미심장하게 그를 훑어보더니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그리고 한순간 권하윤은 장소를 빌려준 값을 손에 받아 든 사장님과 함께 그곳에 남아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봤다.-백화점을 떠난 권하윤은 차에서 안절부절못했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성은우가 고문이라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파고들었다.‘설마 직접
로건은 아무런 경계도 없이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도망치지 못하게 제대로 가뒀어요. 지금쯤 아마 전기구이가 다 됐을 거예요.”“전기요?”로건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권하윤은 그게 고문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사람을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지만 죽기보다 못한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는 점점 무너졌다.일전에 민도준의 말을 듣고 성은우가 권하윤과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한민혁은 권하윤의 표정 변화에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이윽고 마음속에서 민도준이 이번에 제대로 된 연적을 만났다는 경고등이 번쩍거렸다.그는 눈알을 몇 번 굴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저기, 하윤 씨,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제가 도준 형 불러올게요.”부드러운 미소는 로건을 향할 때 인내심을 잃은 닦달로 바뀌었다.“다 처먹었으면 얼른 일어나!”하지만 로건은 조금 남은 도시락통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나 아직 배 안 부른데.”한민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로건의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고 싶었다.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던 순간 노크소리가 들려왔다.“민혁 형님, 여기 계시네요. 온종일 찾았습니다. 민 사장님이 형님 부르십니다.”“왜?”“사장님이 어디서 얻어왔는지 비싸 보이는 피아노 하나를 방으로 옮기겠다고 합나다. 그런데 우리가 뭘 알아야죠. 그러니 형님이 얼른 가보세요.”한민혁은 똘마니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피아노?”‘도준 형이 언제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었지?’“설마 형님이 피아노도 쳐?”“어…….”말을 전하러 온 남자는 권하윤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얼버무렸다.“아마 고은지 씨가 쓰려는 것 같아요.”공기 중에 순간 어색함이 감돌았다.한민혁은 쓸데없는 물음을 물어본 자기의 뺨을 때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때문에 로건을 혼낼 겨를도 없이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나가서 얘기해.”권하윤은 솔직히 한민혁에게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특수 제작된 의자에 성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고 양팔은 각기 의자에 묶여 있었다.게다가 다리를 따라 축 드리운 전깃줄까지 눈에 들어오자 권하윤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졌다.다행히 어두운 불빛 때문에 로건은 그녀의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행객을 데리고 참관하는 가이드처럼 방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하윤 씨, 이게 바로 기계 스위치에요. 누르면 전류가 1분간 흐를 거예요. 하지만 연속 누르면 안 돼요. 바로 콱 죽어버릴 수 있거든요.”하윤 씨라는 세글자를 듣는 순간 수그리고 있던 성은우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일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당연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사인과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로건은 열정적으로 설명했다.“제가 한 번 보여줄게요.”그가 빨간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권하윤은 즉시 그를 막았다.“잠깐만요!”“네?”로건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리며 약 2초간 멈칫하다가 뭔가 알아차린 듯 활짝 웃었다.“직접 해보시려고요? 이리 와 봐요.”“저…….”권하윤은 당연히 누를 리 없었다. 어떤 핑계를 댈까 생각하고 있던 그때 힘 있는 손 하나가 그녀의 앞을 쑥 지나 버튼을 눌러버렸다.잇따라 한껏 눌러 참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성은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까의 짤막한 신음을 끝으로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순간 권하윤은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와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의 등 뒤에서 민도준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권하윤은 성은우를 걱정하면서도 갑자기 나타난 민도준에 겁을 먹어 한참 동안 입을 뻐금거리다가 끝내 그를 불렀다.“도, 도준 씨, 저 점심을 배달하러 왔다가 도준 씨가 바쁘다고 해서…….”찔리는 게 있는 듯 부연 설명을 보태다가 머뭇거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말을 대신 이어 나갔다.“오, 그러다가 심심해서 구경하러 왔어?”자기가 말하려던 말이 상대의 입에서 먼저 나오자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