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들려오지 않는 일순 불안해 난 권하윤은 핸드폰의 신호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때 조수석 문이 달칵 열렸다.“어, 누구…….”한마디를 채 내뱉지도 못한 채 나머지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고 물기 도는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민도준은 혼이 나간 듯 놀란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나 보고 싶다며? 기쁘지 않은가 봐?”잠깐 넋을 잃고 있던 권하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당연히 기쁘죠. 그냥, 너무 놀란 것뿐이에요…….”“음?”민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뭐라도 할까 봐 그래? 하윤 씨 뭐 잘못한 것도 없잖아. 안 그래?”남자의 목소리는 권하윤의 나약한 심장을 고공으로 뿌렸다가 다시 가슴으로 처박았다.이에 권하윤은 자기와 성은우의 암호를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쉴 새 없이 최면을 걸었다.‘은우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충분한 자신감이 있는 체 틀림없어. 도준 씨는 그저 내가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서 의구심에 따라온 걸 거야.’“왜 자꾸 절 놀래켜요?”권하윤은 그제야 입을 삐죽거리며 여상스럽게 애교부렸다.그런 그녀를 보던 민도준은 입가에 호를 그리며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그때 권하윤은 기회를 틈타 손에 쥐고 있던 호떡을 그의 앞에 건네며 입을 열었다.“아직 따듯해요. 드셔보세요.”마치 뇌물이라도 바치는 듯 눈을 반짝거리며 얼른 먹어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리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호떡 두 개를 힐끗 바라봤다.“뭐야?”“호떡이요. 저 오래전부터 이거 먹고 싶었거든요.”권하윤은 비닐봉지를 풀어헤치며 말을 이어갔다.“여기 어렵게 찾은 거예요. 도준 씨 것도 하나 사서 블랙썬에 갖다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마침 만났네요.”은연중에 자기가 왜 이곳에 있는지 설명한 그녀는 종이컵에 담은 호떡을 민도준 입가에 가져가더니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 그를 다그쳤다.“얼른 입 벌려요.”따라 해 보라는 식으로 빨간 입술을 “
“저…….”잠깐의 정적이 흐르더니 싸늘한 기운이 권하윤을 감쌌다.그제야 그 침묵 때문에 꼬리를 숨기려다 들킴 여우 신세가 됐다는 자각이 들었다.그녀가 묻지 않았던 건 성은우가 이미 민도준 쪽 사람이 뒤를 밟고 있다는 걸 알려줬기 때문이다.하지만 그 이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다.민도준은 재촉하지도 않고 여유로운 듯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아까만 해도 민도준에게 끌려 무릎에 앉아 음식을 나눠 먹던 권하윤은 잠깐의 경악 뒤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았다.그리고 작은 얼굴을 쳐들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도준 씨가 사람을 보내 저 보호해 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저녁에도 갑자기 나타난 거잖아요.”말하는 동시에 손을 살살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도준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저 다 알아요.”그때, 옷깃이 살짝 흔들며 느끼지 못 할 정도의 작은 바람이 불었다.멀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으며 야시장의 불빛이 권하윤의 눈에 비쳐 반짝거렸다.그 모습은 마치 기름에 튀긴 길거리 음식처럼 해롭지만 유혹적이었다.두 쌍의 눈이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고 있었고 오래 지속되는 침묵에 권하윤의 호흡은 어느새 흐트러졌다.긴장과 불안 속에서 실낱같은 설렘이 억지로 밀려 들어오더니 갑자기 환한 야시장의 불빛이 커다란 손에 가려졌다.이윽고 권하윤이 놀라 입을 살짝 벌린 틈으로 남자의 말캉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조금 전 보여줬던 침략적인 모습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내일 민씨 저택 갈 때 안에 옷 적게 입어. 하기 편하게끔.”키스로 이미 뜨거워진 귀와 얼굴은 민도준의 말에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권하윤은 나지막하게 “네”라고 대답했다.그녀가 그런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민도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의 심장이 저릿해 날 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살짝 웃었다.“점점 더 밝히네.”그리고 그는 권하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도준이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거실에 들어섰다.“이런, 다들 도착했네요.”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하나 남은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눈길을 돌려 주위를 훑던 그는 끝에 앉은 권하윤에게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긴 머리를 어깨 뒤에 드리운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아무런 반응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계속 흔들리는 귀걸이는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그제야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테이블을 툭툭 쳤다.“사람도 다 도착했는데 다들 수저 드시죠.”늦게 온 그가 오히려 건들건들한 태도로 주인행세를 하자 민상철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를 꾸짖었다.“고씨 집안 어르신들이 여기서 너 하나 기다렸는데 인사도 안 드려?”민도준은 눈을 들어 맞은 편에 앉은 고창호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었다.“아, 어르신도 계셨네요.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분명 의문구로 말을 끝났지만 그는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계속 이어 나갔다.“어르신은 절대 저희 할아버지처럼 심장마비로 쓰러진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연회를 여네 마네 하며 고생을 사서 하지 마세요. 밥상머리에서 갑자기 병이라도 도져 봐요.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마저 죄인 되지 않겠습니까?”“…….”그의 말에 거실은 일순 적막이 흘렀다. 심지어 맨 끝에 앉은 권하윤은 눈앞이 캄캄해 났다.‘어떻게 이리 바람 잘 날 없지?’아니나 다를까 민상철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만약 고씨 집안사람들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상을 엎었을 기세였다.다행히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고창호는 미소를 지으며 중재에 나섰다.“이런, 내가 눈치가 없었네. 상철 형님을 너무 오래 못 봐서 같이 먹고 즐길 생각으로 불쑥 찾아오다 보니 그 일을 잊었군. 그래도 같은 핏줄이라고 형님 생각해 주는 건 민 사장밖에 없네. 자, 내가 잘못했으니 벌주 한잔 마시지.”조그만 흠도 찾을 수 없는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다시 사르르 녹았다.그 시각 권하윤은 속으로 늙은 여우
고창호는 눈빛을 반짝이며 미소 지었다.“그렇네. 은지야, 얼른 민 사장한테 인사드려야지.”고은지는 그의 말을 따라 고분고분 민도준 쏙으로 걸어갔지만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몸을 약간 수그렸다.무뚝뚝한 얼굴에 괴팍한 성격, 그리고 그녀가 오늘 입고 있는 무채색 치마까지 더해지자 잒만 고인을 떠올리게 했다.민도준이 그녀를 훑어보고 있던 그때, 민상철이 입을 열었다.“안 그래도 내가 마침 과학기술 단지를 도준한테 맡길까 하는데, 앞으로 우리 두 가문이 더 가까워지겠군.”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끊더니 다시 이어갔다.“그런데 도준이는 아직 과학기술 단지에 대해 익숙하지 않을 테니, 용재 네가 얘 좀 잘 가르쳐 봐.”민상철의 말을 듣고 나니 권하윤은 오늘 이 자리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게 뭘 위해서인지 눈치챘다.마치 불과 물처럼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한 가지 일을 맡긴다는 건 그 둘에게 싸움을 붙이려는 뜻이나 다름없다.하지만 과학기술 단지의 핵심 기술은 모두 고씨 가문에서 제공하기에 민도준이 이 기회에 고은지와 관계를 확정 지으면 어려움을 극복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역시 계략가네.’민도준이 공은채에 대한 감정, 과학기술 단지의 이익, 그리고 첫째네와 둘째네의 경쟁, 민상철은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주무른 셈이다.‘인정하자. 도준 씨가 고은지 씨한테 흥미를 느끼는 건 당연해. 도준 씨는 언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돼 있어.’그리고 그게 누구든 권하윤은 아닐 거다.아무리 그녀가 민승현과 파혼을 한다 해도 예비 제수씨에서 아내로 된다는 건 넘기 힘든 강이니 말이다.더욱이 민씨 가문에서는 이런 추악한 일이 가문에 벌어지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을 거다.하물며 공은채와 이렇게나 닮은 고은지까지 나타났으니…….아무리 생각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민도준이 고은지가 가까이하는 걸 거절하지 않고 민상철의 말을 듣는 걸 보고 있자니 권하윤의 마음은 씁쓸해 났다.이윽고 더 이상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그러던 그때, 민상철과
담배가 타들어 가며 빨간 불빛을 내뿜더니 곧이어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며 현장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었다.목적에 도달한 민상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우리 늙은이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흩어져.”흩어지기 전 민상철은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넌 오늘 늦었으니 고 어르신을 대신해서 은지나 데려줘.”마침 일어서는 순간 이 소리를 들어버린 권하윤은 잠시 멈칫했다.하지만 그녀가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민도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데려다주라고요? 저를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가벼운 말투는 곧바로 민상철의 화를 불러왔다.“행실 똑바로 해! 은지는 고씨 가문 둘째 아가씨야. 네가 밖에서 만나는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참한 애 놀라게 하지 마!”약 2초간 멍해 있던 권하윤은 끝내 고개를 떨군 채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그 모습을 본 민도준은 피식 웃었다.‘하, 억울하긴 한가 봐.’눈길은 치맛자락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발목에 멈춰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며 느긋하게 일어섰다.“요구가 참 많네. 그래요. 할아버지 말 들을게요. 제가 이렇게 효도한다니까요.”“…….”문밖.저택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민시영은 권하윤을 끌어당기며 나직이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과학기술 단지는 우리 가문 수익 중 3분의 1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파트예요. 도준 오빠가 거절하지 않은 건 고씨 가문 둘째 아가씨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고씨 가문 기술이 필요했던 걸 거예요.”“시영 언니, 그런 말 저한테 안 해도 돼요.”권하윤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게다가 그녀는 민도준이 고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한은.하지만 이런 말들을 민시영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민시영도 그녀가 자세한 얘기를 피한다는 걸 눈치채고 싱긋 웃었다.“하긴, 둘째 오빠 성격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결과가 빨리 정해지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두 사람이 대화
“도착했네. 제수씨, 고생했어.”뒷좌석 문이 열리자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고 권하윤의 마음도 덩달아 서늘해졌다.어슴푸레한 밤, 달빛을 밟으며 아파트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화기애애하고 어울렸다.그 두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권하윤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조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려던 그때 문자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주차할 곳 찾아 나 기다려.]‘기다리라고? 적어도 시간 단위로 끝내던 사람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한다고?’그녀가 아무리 그 시간과 여유가 있다 해도 남이 먹다 버린 음식을 먹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다.당연하다는 듯 문자를 무시한 그녀는 핸들을 틀었다.하지만 그녀가 그러기를 알기라도 한 듯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도망치기 전에 다리 필요 없는 거로 간주할 게.]“…….”막 길목을 지난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다시 핸들을 꺾어 커피숍 앞에 주차했다.일 분, 일 초…… 끝나지 않는 기다림에 점점 답답해 난 권하윤은 결국 차 문을 열고 공기를 쐬었다.그리고 반 시간 뒤 끝내 차키를 뽑고 차에서 내렸다.“버블티 하나 주세요.”달짝지근한 액체가 씁쓸하던 혀끝을 감싸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버블티를 들고 차에서 한참 동안 멍때리던 권하윤은 점점 생각에 잠겼다.대타를 찾는 사람은 자기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민도준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가 고은지를 선택한 사실은 변함없었다.‘비슷한 사람에게조차 이렇게 대하는 데 공은채 본인에게는 어떻게 대했을까? 나 뭐로 비기지?’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시간쯤 기다렸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하지만 권하윤은 고개도 쳐들지 않고 바닥난 버블티를 계속 빨아댔다.민도준이 차에 오르자 고은지가 차에 올랐을 때 나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분명 은은한 향이었지만 그녀의 코끝은 향기에 자극됐다. 서늘한 향기가 민도준의 몸을 감돌다가 공중에서 휘발되고 있다는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그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뭘 그렇게 열심히
권하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민도준이 입을 열었다.“설마 내 그 동생이야? 아니면 다른 사람?”다른 사람이라는 단어를말 할 때 민도준의 어조는 뭔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 의미심장했다.그리고 권하윤은 왠지 그 다른 사람이 바로 성은우를 가리키는 거라고 느껴졌다.‘설마 나랑 은우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걸 알았나? 에이, 설마. 알아냈다면 내가 이렇게 무사히 앉아있지 못했을 거야.’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권하윤은 과감하게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승현은 제 약혼남이에요. 약혼남한테 이런 이벤트정도 해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오, 그렇긴 하지.”민도준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러고 보니 잊을뻔했네. 요즘 임신 준비한다고 했지? 걔 애라도 낳아주게?”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반박하기도 그렇고 더욱이 화가 나 있었기에 권하윤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당연하죠. 안 그러면 뭐 다른 사람의 애를 낳아주겠어요?”앞뒤 가리지 않고 질러버린 권하윤은 민도준이 자기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허리를 툭툭 쳤다.“얼른 운전해.”이런 반응은 오히려 의외였다.그제야 권하윤은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운전석에 다시 앉았다.‘하긴, 내가 애를 낳든 말든 도준 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일순 가슴이 답답했지만 한참을 운전하고 나서야 권하윤은 민도준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곧바로 고개를 돌려 물으려 할 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블랙썬으로 가.”‘진짜 블랙썬으로 가는 거네.’권하윤은 소리 없이 입을 삐죽거렸다.그 뒤로 블랙썬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도착했어요. 안까지 마중하지는 않겠어요…….”“주차장으로 가.”권하윤은 그의 당연한 듯한 어투에 울컥했다.‘설마 날 운전기사로 보고 있잖아!’이윽고 그녀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 몇 걸음 더 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스스로
그 뒤로 권하윤의 목소리는 모두 남자의 손에 갇혀 새오 나오지 못했다.장소에 대한 불안함과 갑자기 민친 듯 달려드는 민도준에 대한 두려움이 한데 겹쳐 생리적인 눈물이 끝내 폭발했다.작은 흐느낌 소리가 흔들리는 차체 때문에 흩어져 가련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오늘 민도준은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밖을 힐끗거리더니 권하윤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며 그녀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때 갑자기 멀리서 불빛이 구석을 비춰왔고 가뜩이나 잔뜩 긴장했던 권하윤은 마치 뭍에 꺼내진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다가 끝내 힘이 빠져 의식을 잃었다.다행히 주차 구역을 찾는 차였기에 주위를 대충 살피다가 자리가 없자 바로 떠나버렸다.민도준은 눈물범벅이 된 권하윤을 힐끗 보더니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그녀를 차에서 안아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 안.민도준은 뭔가를 발견한 듯 한 곳을 힐끗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 역시나.’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도 함께 문 사이로 사라졌다.점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던 구석진 곳의 검은 그림자는 가죽장갑을 낀 손을 꽉 그러쥐었다.-정신을 차린 권하윤이 가장 먼저 한 건 자기 몸을 검사하는 거였다.그리고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무서워?”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권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누워있는 맞은 켠 소파에 앉은 민도준을 발견했다.하지만 아까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면 그와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아 자기를 덮고 있던 외투를 걷어내고 아무 말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남자의 두 팔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화났어?”이윽고 남자는 그녀를 자기 쪽으로 돌리며 그녀의 코를 쥐고 흔들었다.“아까는 장난친 거야. 화내지 마. 응?”권하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 반해 민도준은 사람 하나 괴롭혀 죽여야만 끝내려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