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남자는 목소리마저 아까와는 달리 낮고도 허스키했다.하지만 그런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권하윤은 여전히 눈을 접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나한테 노래 선물하겠다고 했잖아.”“음?”남자는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노래 좋아해?”이미 술에 취한 권하윤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응, 그쪽 노래 듣기 좋아.”‘오마이 갓!’진소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해 힐끔힐끔 피하면서도 권하윤이 오빠의 손에 죽기라도 할까 봐 용기 내어 소리쳤다.“하윤 언니! 앞에 있는 사람 누구인지 잘 봐요!”‘누구? 그 젊은 대타 아니야?’권하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애써 초점을 찾았다. 하지만 상대방의 높은 키 때문에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었다.이윽고 권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명령했다.“고개 숙여 봐.”콧소리가 섞인 목소리에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과 초점을 잃어 애써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더해지자 얼어 있던 사람도 녹일 듯 귀여웠다.이에 남자는 끝내 고개를 숙이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자, 봤어?”사실 이번에도 권하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흐릿해진 시야 때문에 안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머리까지 흐리멍덩해져 당장이라도 베개를 베고 누워 자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눈을 스르르 감을 때 몸이 마구 흔들리더니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묻잖아. 제대로 봤어?”‘대타 주제에 센 척은!’“시끄러워.”권하윤은 불편한 듯 남자를 밀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나른해진 몸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양손이 남자의 가슴 위에 닿았다.심지어 잠꼬대처럼 내뱉은 한마디를 끝으로 전원이라도 꺼버린 것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그리고 그녀의 몸이 뒤로 젖히는 순간 허리에 손 하나가 둘러졌다.이윽고 모든 힘이 빠져나간 몸이 남자의 팔에 힘을 실은 채 뒤로 젖혀졌다. 일순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뒤로
방 안.민도준은 창가 앞에 선 채로 손가락 사이에 반쯤 탄 담배를 낀 채 눈을 가늘게 접고 생각에 잠겼다.털어버리지도 않아 길게 붙어있는 재는 이미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걸 설명해 주는 듯했다.분명 대낮이었지만 차창 너머에는 어젯밤의 화면이 투영되었더니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입가에 잔머리를 붙인 채 환하게 웃고 있던 여자의 모습이 다시 재생되었다.지금껏 그의 앞에서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모습은 소탈하고도 매력적이었으며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에 몸을 빼앗긴 듯 낯설었다.긴 손가락을 튕기자 위태롭게 붙어 있던 재가 후두둑 떨어졌고 입가에서 뱉어낸 희끄무레한 연기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눈동자 앞에서 흩터졌다.‘하, 재밌네.’“똑똑똑-”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보아하니 진소혜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한참을 꾸물대던 진소혜는 여전히 그녀를 무시하는 민도준의 등만 바라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왔어?”갑자기 적막을 깨는 목소리에 놀란 진소혜는 곧바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울상을 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오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난 하윤 언니가 기분이 꿀꿀해 보여서 기분 풀어주려고 했던 것뿐이야.”민도준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철 들었네.”칭찬 같지만 칭찬이 아닌 말에 진소혜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조용히 기다렸다.“네가 남을 위해 걱정을 덜어주는 살가운 성격인 줄 몰라봤네. 그렇다면 유심칩 복구하는 시간을 보름으로 줄이는 게 어때?”“보름?”말도 안 되는 요구에 진소혜는 꼬리라도 밟힌 듯 발끈했다.“그거 나 한 달 작업량이라고!”“열흘.”“열흘은 더 말이…….”“일주일.”반박은 오히려 명을 재촉하는 행동이라는 걸 파악한 진소혜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그제야 민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일주일 동안 수고해.”하지만 진소혜가 슬픔과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고 있을 때 민도준은 또 몇
권하윤의 말에 방 안은 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민상철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그때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아주 배짱이 두둑하더구나.”민상철의 갑작스러운 말에 권하윤은 알아듣지 못한 척 되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연기할 필요 없다. 내가 너를 부른 건 네가 그나마 똑똑한 아이여서 직접 말할 거라고 생각해서 부른 거니까. 하지만 네가 만약 내 호의를 무시하면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겠구나.”민상철은 권하윤에게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옆에 서 있던 집사를 불렀다.“장 집사, 끌고 나가.”‘데리고 나가도 아닌 끌고 나가라니.’만약 이대로 끌려 나간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순간 권하윤의 뇌리를 스쳤다 .이윽고 집사가 경호원을 불러오기 전에 그녀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할아버님.”그녀의 부름에 민상철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듯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잘 생각했지?”권하윤은 사실대로 말하려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아니지, 만약 정말 내 목숨을 노리는 거라면 이렇게 말장난하며 시간 끌 필요는 없잖아?’역시나 민상철의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외압을 가해 겁에 질려 진실을 토로하게 하려는 수법이라는 생각에 권하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전에 저희 언니와 민 사장님이 서로 왕래가 있어 공아름 씨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날도 마침 공아름 씨가 저를 불러내 상황을 물어보다가 마침 민 사장님을 만나 함께 떠나던 참에 매복 공격을 당한 겁니다. 만약 할아버님께서 물어본 물음이 이 상처에 대한 거라면 제 대답은 이것입니다.”이 말은 그녀가 충분한 고민 끝에 내뱉은 것이었다. 공아름이 민도준 때문에 권희연을 괴롭혔던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인 데다 민도준이 공아름을 만나러 가서 뭘 했는지도 당장에는 알아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아마 이것이 바로 민상철
“그건…….”장 집사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더니 민상철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잘 모르겠습니다. 도준 도련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쉬운 것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만약 정말로 다섯째 작은 사모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오해를 사는 말은 쉽게 내뱉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그의 말에 조금 전 상황을 회상하던 민상철은 순간 심장이 쿡쿡 쑤셨다.“일부러 그 애를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누가 알겠나?”“허면 만약 도준 도련님과 다섯째 작은 사모님이 정말로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민상철은 일순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당연히 후환을 없애야지.”“그래도 도준 도련님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것도 어려운 일 아닙니까?”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장 집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이에 민상철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힐끗 째려봤다.“곁에 있어 줄 사람 하나 구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도준이 걔만 정상적으로 굴면 경성에 그 애 짝으로 엮어줄 처자 하나 없을까?”“혹시 이미 점 찍어 둔 처자가 있으십니까?”“그래. 그 애가 계속 이렇게 미친 듯 날뛰게 굴 수는 없지 않은가?”“하지만 도련님이 아마도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걱정 가득한 장 집사의 말투에 민상철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도준이 걔가 공씨 가문의 그 명 짧은 계집을 마음에 두지 않았었나? 그러니 이번 사람은 그 애도 분명 마음에 들 거네.”-“아버님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얼른 말해. 우리 승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더냐?”본채의 구석진 곳에서 강수연은 권하윤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대충 몇 마디로 얼버무린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강수연은 그녀에게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말하라고 압박을 가했다.이에 권하윤은 없는 말을 지어내 그녀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님께서 승현을 무척 아낀다면서 장차 큰일을 할 손자이니 저더러 잘 보필하라고 하셨습니다.”“그래, 아주 좋구나.”강수연은 권하윤의
“올라와.”간단한 세 글자를 내뱉고 창가로 사라진 민도준의 실루엣에 권하윤은 잠시 고민하더니 빗자루를 문 앞에 세워두고 옷을 여미더니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그러면서 계단을 밟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조마조마함을 감추지 못했다.‘나한테 흥미 없어진 거 아닌가? 왜 갑자기 부르지? 설마…… 내가 고의로 접근했다고 생각해서 괴롭히려는 건 아니겠지?’수만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그녀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심지어 도둑처럼 살금살금 움직이기까지 하는 바람에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도준이 피식 웃었다.“외간 남자 꼬실 때는 다리를 잘만 이용하더니 지금은 부러지기라도 했어?”‘외간 남자를 꼬셨다고?’계단 맨 위층에 서서 놀려대는 민도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권하윤은 자기가 그를 꼬시러 일부러 접근했다고 오해라도 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하지만 그렇다 한들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하게 그의 앞까지 다다른 뒤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모든 괴롭힘도 견뎌낼 것만 같은 고분고분한 모습은 하늘하늘 춤추던 어제의 모습과는 확연한 대비를 이루었다.이에 민도준은 재밌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담배를 끄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듣기 좋은 말을 잘만 하던 모습은 어디 갔어? 이젠 말도 하지 못하나?”입 안에 머금고 있던 매캐한 연기가 고스란히 권하윤에게 뿌려지자 그녀는 불편한 듯 눈을 깜빡이며 입을 삐죽거렸다.“예전에는 도준 씨가 저 싫어하지 않으니 그런 말도 서슴없이 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저 싫어하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하겠어요?”분명 억울함을 호소하는 말이었지만 왠지 매정한 민도준을 나무라는 말로 들렸다.이에 재미를 느낀 그는 손을 풀면서 안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몇 걸음 걸어갔을 때 여전히 동상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모셔 오기라도 해야 해?”하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에 권하윤은 자연적으로 따라나설 수 없었다
권하윤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민도준이 그녀에게로 걸어갔다.그 순간 정원의 풀내음과 민도준의 담배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그녀를 덮쳐오는 바람에 원래도 뒤죽박죽이던 머리가 점점 더 복잡했다.이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쳤지만 몇 발짝 가지 못해 벽에 등이 부딪히고 말았다.민도준은 한가로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갔다.닿일듯 말듯한 거리에 오히려 더 숨이 막힌 권하윤은 자기를 짓누르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민도준은 그녀가 겁에 질렸다는 걸 알면서도 짓궂게 괴롭혔고 그녀의 허리 뒤쪽 벽에 손을 짚은 채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이윽고 그녀의 쇄골이 눈에 띌 정도로 바르르 떨리는 걸 보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랑 있으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한 것 같아 이제는 싫어졌어? 그래?”그의 모든 게 너무 존재감이 큰 탓에 권하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나서야 자기 목소리를 되찾았다.“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그저…….”하지만 한참을 우물대다가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하.”곧이어 남자의 입매에서 터져 나온 웃음은 싸늘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위험을 감지한 권하윤은 불안함에 고개를 들었고 다음 순간 그의 비아냥 섞인 눈빛과 마주치고 말았다.“정말 길들지 않네.”권하윤은 흠칫 몸을 떨면서 뭐라도 변명하고 싶었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들어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이윽고 그녀를 안고 있던 뜨거운 품도 싸늘하게 식어갔다.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채 그녀를 바라보는 가늘게 접은 눈에는 언뜻 살기가 지나갔다.오랫동안 그와 지내온 권하윤은 그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겁에 질린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마음속에 피어나던 따뜻한 감성마저 어느덧 흩어졌다.그녀의 겁먹은 모습에 민도준은 더욱 조급해 났다. 이윽고 목덜미에 난 혈관이 펄떡펄떡 뛰더니 피비린내 나는 기억 속의 장면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마치 그런 피 빨간 장면을 다시 그려야만 화를
민도준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한민혁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혹시 공씨 가문 가주의 오른팔과 왼팔이라던 그놈들 아닐까? 그러면 얼른 하윤 씨 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그러더니 갑자기 놀라기라도 한 듯 몸을 떨었다.하지만 그의 반응에 반해 민도준은 오히려 무덤덤했다. 그는 호들갑 떠는 한민혁을 힐끗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게 걱정되면 너희 집으로 데려가는 건 어때?”“응? 나…… 어…… 하하,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한민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더듬더듬 말을 보충했다.“그저 그놈이 원체 신출귀몰하는 데다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그래. 보통 애들이 막지 못할까 봐 그런 거지.”그의 말에 민도준은 긴 다리를 앞으로 내뻗으며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그 정도로 죽는다면 명줄이 거기까지라도 봐야지.”“어, 도준 형…….”정말로 손을 놓은 것처럼 행동하는 민도준을 보자 한민혁은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화가 났다.‘이렇게 신경 안 쓴다고 해놓고 진짜로 죽으면 나한테 책임 물을 거면서!’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끝내 똘마니 하나를 더 보내 권하윤 주위를 잘 감시하도록 명령했다.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는지 해가 지기도 전에 그는 직접 권하윤의 집 부근으로 가 경계를 살폈다.“민혁 형님, 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너희들이 믿음직스러우면 나도 이러지 않지.”한민혁은 망원경을 들고 권하윤의 집 부근을 살폈다.“일전에 말했던 수상한 차량은 어디 있는데?”조수석에 앉아 있던 똘마니는 그의 물음에 곧바로 맞은 쪽에 세워진 회색 차량을 가리켰다.“저기요. 형님 말대로 저희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똘마니가 가리키는 차량을 한참 동안 살폈음에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한민혁은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다시 한 번 명령했다.“놓치
일순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지더니 가슴이 쿵쾅거려 권하윤은 마음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하지만 그녀가 죽음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듯 가만히 있을 때 잔뜩 놀란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윤이?”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뜬 권하윤은 고개를 든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은우?”이건 그가 권하윤의 도주를 도운 뒤로 이루어진 첫 만남이었다. 때문에 권하윤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하지만 은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등 뒤에서 총알이 날아들더니 그는 갑자기 어깨를 움켜쥐었다.이윽고 그는 권하윤을 힐끗 보고는 곧장 창문으로 도망쳤다.그리고 그때 인기척 없이 나타난 민도준이 눈을 가늘게 접은 채 어두운 표정으로 권하윤을 이리저리 훑었다.“여기 가만히 있어.”그가 은우의 뒤를 쫓으려 하자 권하윤은 재빨리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가지 마요. 저 무서워요.”이윽고 그가 불쌍한 표정까지 지으며 그를 만류했지만 민도준은 인정사정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걸리적거리지 말고 손 놔.”하지만 허리에 두른 손은 아무리 뿌리쳐 내도 계속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그러더니 곧이어 등 뒤에서 불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버리고 가지 마요. 보고 싶었어요…….”마지막 한마디에 그녀의 팔을 떼어내던 손은 일순 멈칫했다.이윽고 민도준은 그녀를 자기 앞으로 끌어오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보고 싶었다고?”분명 그를 막으려고 생각해 낸 거짓 핑계였지만 위험한 상황에 곧바로 달려와 준 그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보고 싶었어요.”물기 어린 눈동자에는 여전히 놀라움이 가지시 않았지만 손은 떼어내는 족족 다시 민도준에게 달라붙었다.이에 창밖을 힐끗 살핀 그는 이미 때를 놓쳤다는 걸 직감하고는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찔러댔다.“건드릴 땐 반응 없다가 왜 하필 중요한 순간에 발정하고 난리야?”민도준이 아픈 곳을 다시 찔러대자 권하윤은 아예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