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잠시 멍해졌다.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그의 말에 아무런 입장도 없는 권하윤은 하려던 말을 삼키며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그래요. 조심해 가요.”“그래. 몸 괜찮아지면 문자 해.”흔들림 없는 권하윤의 표정에 민도준은 장난기 섞인 말투를 툭 내뱉었다.농담 섞인 말은 마치 냉수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쏟아졌고 두 사람은 그저 몸뿐인 관계라는 걸 낱낱이 보여주었다.권하윤은 갑자기 북받쳐 오는 감정을 겨우 목구멍으로 삼킨 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오늘 밤 재밌게 노세요.”“…….”살짝 올린 입꼬리는 마치 천근이라도 되는 듯 문이 닫히는 순간 이내 무너져 내렸고 아까까지만 해도 맛있다고 생각했던 수프는 이미 차갑게 식어 기름이 위에 둥둥 떠오른 바람에 역겨워 났다.권하윤은 숨을 깊게 들이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음식을 모두 버렸다.손을 씻고 고개를 드는 순간 거울에는 새하얗게 질린 본인의 모습이 비쳐있었다. 그 모습에 권하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이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진짜 민도준 씨밖에 없다고 생각해?”그녀는 휴지를 뽑아 젖은 손을 닦고는 물에 젖어 나른하게 된 휴지를 다시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민시영에게 문자를 보냈다.[만약 저 대신 거래 기록 하나만 지워주면 손잡을게요.]만약 민도준이 그녀에게 점차 흥미를 잃어간다면 그녀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때문에 그녀는 절대 민도준에게 본인과 문태훈이 거래한 걸 들켜서는 안 됐다.-“퍽.”“퍽퍽-”민도준은 링 위에 쓰러진 상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움직였다.땀방울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주위에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다음.”고개를 돌려 입에 낀 마우스피스를 뱉으며 내뱉은 그의 한마디에 아래에서 지켜보던 한민혁이 손을 휘휘 젓자 링 위의 남자가 밖으로 실려 나갔다.“도준 형, 벌써 일곱 사람 째야. 오늘 여기 더 이상 형과 스파링할 사람 없어.”그의 조심스러운 말투에도 민도준은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턱을 살짝 들
“하윤 씨가 공씨 가문 사람과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민시영은 디저트 하나를 포크로 집어 올리더니 미소를 머금은 채 권하윤을 바라봤다.그녀의 말에 권하윤은 우물거리던 동작을 멈추고는 과일 티로 입안의 느끼함을 눌렀다.“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해원에 있는 공씨 가문과 엮이겠어요.”“하긴.”여전히 변함없는 권하윤의 표정에 민시영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보아하니 문태훈이 또 더러운 수단으로 돈을 요구했겠죠.”민시영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 권하윤은 솔직히 그 돈의 행방을 숨기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때문에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둔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사실 권씨 가문이 조 사장이 관리하는 홍옥정과 거래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곳을 드나드는 걸 문태훈 씨가 발견하는 바람에…….”말을 채 끝맺지는 않았지만 민시영은 바로 알아들었다.그녀는 공아름과 사이가 좋기에 문태훈이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권하윤의 그런 말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그녀는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씨 가문도 위험천만한데 권씨 가문도 좋은 곳은 아니네요. 요즘 권희연 씨가…….”민시영은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이내 주제를 전환했다.“하윤 씨가 민승현과 곧 결혼할 몸인데도 권 여사가 놓아주지 않는다니 놀랍네요.”그녀의 말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민시영이 권씨 가문 내부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야망이 큰 사람이니 당연히 밖에서 들리는 소문을 모두 꿰뚫고 있을 테니까.'그런데 희연 언니 일이라니…….’지난번 병원에서 권희연을 봤던 일이 떠올라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혹시 희연 언니한테 무슨 일 있어요?”“정말 몰라요?”민시영은 흠칫 놀라더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권하윤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하윤 씨. 이 일은 하윤 씨 언니한테 직접 물어봐요.”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권하윤도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두
“못 찍었다니요?”경성의 한 별장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어제 그년 뒤를 미행했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아무것도 못 찍을 수 있어요?”강민정은 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자 전화 건너편에서 사립 탐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마지막에 사람을 놓치는 바람에 못 찍었어요. 요즘 의뢰가 너무 많아 매일 쫓아다닐 수 없는데 다른 사람 알아봐요.”“뚜뚜뚜-”“여보세요? 이봐요!”상대가 정말로 전화를 끊어버리자 강민정은 미칠 지경이었다.민씨 저택에서 쫓겨난 뒤로 그녀는 반쪽짜리 민씨 집안 아가씨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고아로 전락했다.솔직히 그녀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을 텐데 그녀는 자기가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게다가 언제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주던 민승현마저 지금껏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자 가뜩이나 의지할 곳 없는 강민정은 점점 두려움에 시달렸다.그런데 이 모든 일을 벌인 사람은 자기 사촌 오빠를 차지한 채 민씨 집안 며느리 타이틀을 누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권하윤에 대한 원망만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그녀는 매일이다시피 권하윤의 흉측한 사진을 건져 그녀를 패가망신시키겠다고 맹세했다.그리고 마침 어제 사립 탐정이 권하윤의 뒤를 따라붙었다는 연락을 받은 강민정은 설레는 마음에 계속 기다렸지만 끝내 상대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그것도 모자라 오늘 아침 더 이상 의뢰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말을 해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순간 원망에 찬 강민정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안 하겠으면 말라지! 경성에 사립 탐정이 그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며칠 동안 강민정은 단숨에 여러 사립 탐정을 찾아다니며 권하윤이 바람을 피우는 증거를 찍어오면 2천만 원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했다.이번에는 틀림없이 무언가를 건져낼 거라고 자신하던 그녀에게 들려온 건 그만두겠다는 사람들의 연락뿐이었다. 일정이 빡빡하다는 핑계 아니면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말이다.일련의 시련을
블랙썬.“민혁 형님, 안녕하십니까?”이른 새벽 한민혁이 방문에 들어서자 로건이 높은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한민혁은 목을 손으로 슥 베는 동작을 하며 눈을 희번덕였다.“쉿!”“쉬 마려우십니까?”멍한 표정을 지으며 천진하게 물어보는 로건의 모습에 한민혁은 뒷목을 잡더니 그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그가 이렇게 긴장한 건 연속 나흘 동안 민도준이 시킨 일을 조사했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때문에 그는 며칠동안 민도준만 만나면 숨어다니곤 했다.그리고 오늘도 마침 도망가려고 준비하던 그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한민혁, 들어와.”‘하이고, 그럴 줄 알았다.’한민혁은 운명을 받아 들이리가도 한 듯 방에 들어서더니 고개를 숙인 채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도, 도준 형.”“요즘 아주 바쁜가 보네.”핸드폰을 힐끗거리며 내뱉은 민도준의 말에 한민혁은 그자리에 얼어붙어 울상을 지었다.“도준 형, 나 진짜 열심히 했어.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도 그 돈이 어디 갔는지 나오지 않는다고.”민도준은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바라봤다.“12시 전에 알아 와. 안 그러면 12시 후에 복싱장에서 봐.”죽은의 통첩을 받은 한민혁은 당장 달려 나가 고액의 보험을 살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영정사진은 어떤 거로 쓰라고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방금 받은 문자를 확인하기 바쁘게 정신 없이 민도준에게 달려갔다.“도준 형, 찾았어!”핸드폰 액정에 명확히 찍혀있는 돈의 행방을 보는 순간 민도준의 눈에는 웃음기가 언뜻 지나갔다.“해외라고?”“응. 어쩐지 찾아내기 어렵다 했어.”민도준의 위험한 눈빛을 감지한 한민혁은 식은땀을 닦으며 어색한 한마디를 던졌다.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도준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오늘 동림 부지는 네가 나 대신 가.”“뭐? 형은 어디 가려고?”한민혁의 말에 민도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거짓말쟁이의 혀를 잘라
“그게…….”권하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가리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사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 승현이가 그쪽이 영 별로라서 그래요.”“뭐? 그게 무슨!”강수연은 곧바로 얼굴을 찡그러며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어머님이 말하라고 했잖아요.”사뭇 진지해 보이는 권하윤의 표정에 강수연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여자로서 그녀도 이런 문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아들의 이런 문제는 본인이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웠다.“진짜냐?”그녀는 오만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한껏 낮춘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어머님, 제가 이런 일로 어떻게 장난치겠어요?”권하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더니 몇 마디 더 보충했다.“그런데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서 물어보지는 마세요. 만약 심리상의 문제인데 어머님께서 대놓고 물어보면 스트레스 때문에 더욱 문제가 커지면 안 되잖아요.”권하윤이 민승현을 “생각해 주는” 모습을 보자 강수연의 표정은 그제야 조금 풀렸다. 하지만 걱정이 됐는지 신신당부했다.“이 일 절대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너희 집 식구한테도 안돼!”“알겠어요. 그러면 아이에 관한 일은 어떻게…….”“급할 거 없어. 아직 젊으니까.”“알겠어요, 어머님.”권하윤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아들이 이런 문제가 있으니 강수연은 마치 큰 꼬투리라도 잡힌 듯 권하윤에게 예전처럼 막 대하지 못했다.“너 운전했지? 나 병원에 좀 데려다줘.”찻집 문을 나서는 순간 강수연은 어깨에 걸친 숄로 몸을 더욱 감싸며 물었다.사실 그녀는 운전기사더러 데려다 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아들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할까 봐 권하윤더러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걸 선택했다.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허둥대는 예비 시어머니의 모습에 권하윤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길 건너편에 세워진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표정이
골목 하나만 돌면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민도준의 차는 점점 가까이 붙어오자 권하윤은 끝내 목숨을 내놓기라도 한 듯 포기했다. 하지만 때마침 내비게이션에 찍힌 병원 이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순간 희망이 보인 권하윤은 강수연이 보든 말든 상관하지도 않은 채 빨간 신호등이 걸린 틈에 민도준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그녀의 작전이 먹혀들었는지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다시 시동을 걸 때 뒤에 따라붙던 차량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형 마트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그제야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병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그 시각, 민도준은 방금 받은 문자를 빤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우리 지금 비뇨기과로 갈 건데 도준 씨 차가 이런 곳에 나타났다가 만약 누구한테 발각되기라도 하면 이미지에 타격을 입으면 어떡해요.]‘하, 쪼그만 게 말은 잘한다니까. 혀를 잘라버려도 계속 이렇게 재밌을지 모르겠네.’민도준은 글로브 박스 안에 넣어두었던 가위를 꺼내 손가락에 낀 채 빙빙 돌렸다.메스 소재로 된 날은 유난히 날카로웠고 날 경계에는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건 오래된 핏자국이 말라붙은 거였다.그 핏자국을 본 순간 민도준의 눈은 마치 흥분에 젖은 듯 반짝거렸고 체내에 숨어 있던 잔인한 DNA가 기승을 부리며 날뛰었다.한편, 길 건너편에서 강수연은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백안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 눈을 가리고 턱을 스카프 안으로 파묻었다.“여기서 기다려.”“저…….”그녀는 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 문을 닫고 병원을 향해 걸어갔다.그 순간 권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민도준에게 전화했다.몇 초간 울리는 연결음에도 그녀의 속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이윽고 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내뱉었다.“도준 씨?”“응.”느긋한 목소리에는 여유가 묻어났다.하지만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병원 입구를 힐끗거리며 가장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갔어요?”“왜? 보고 싶어?”‘보고 싶긴!’너무 긴장된 나머
민도준은 역시나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뜨거운 손으로 권하윤의 서늘한 피부를 쓸어올렸다.“이 장소가 어때서?”그러면서 눈을 들어 비뇨기과라고 쓰여 있는 병원 간판을 힐끗 바라봤다.“다른 사람이 날 보면 오해할 수 있다며? 그러니까 하윤 씨가 마침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되겠네.”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깼다는 걸 알아챈 권하윤은 눈앞이 캄캄해 났다.어쩌면 매번 민도준이 손해를 보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잊는지.강수연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먼저 민도준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두 손으로 남자의 손을 꽉 잡으며 입을 열었다 .“도준 씨가 남자답다는 걸…… 증명할 필요가 뭐 있어요?”그녀는 한편으로 병원 문 앞을 힐끔거리며 민도준의 비위를 맞췄다.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에 원을 그리면서 머리를 굴리는 권하윤의 모습에 민도준은 순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권하윤의 사람을 달래는 솜씨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몇 마디 말에 민도준마저 정말로 한 번만 용서해 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저 생각뿐이었다.민도준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손을 거둬들이자 권하윤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솔직히 민도준과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여야 할 줄 알았는데 그가 바로 물러나자 살짝 안도했다.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민도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래. 그만 놀릴게. 우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그의 섬뜩한 미소에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났다. 이윽고 마음속의 경보가 울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뭐라고요?”그때 마침 싸늘한 빛이 반짝이더니 민도준의 손에 뭔가 나타났다.권하윤이 그 물건을 제대로 보기 전에 민도준이 그녀의 목을 잡는 바람에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는 차가운 가위의 날을 권하윤의 얼굴에 대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착하지, 혀 내밀어.”이러한 상황에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권하윤의 항의에 민도준은 선심 쓰듯
권하윤의 숨결은 미세하게 떨렸다.“그 돈은 해외로 송출한 거 맞아요. 그런데 도준 씨가 생각한 그런 게 아니라 물건을 구매한 거예요.”“응?”민도준은 두려움 때문에 촉촉하게 젖어 드는 권하윤의 눈가를 한참 구경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물건이길래 그런 수고를 자처했을까?”“제가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잖아요. 직접 보여줄게요. 어때요?”권하윤은 상의하는 말투로 간절히 말했다.민도준은 좋은지 나쁜지 대답하는 대신 그녀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빤히 쳐다봤다.이런 반응은 그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갔다.그는 권하윤이 애교를 부리거나 불쌍한 척할 거라고 생각했지 이토록 차분하게 설명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시간을 끌지도 않고 직접 보여주겠다고까지 하다니. 순간 그도 권하윤이 숨겨둔 카드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일분일초가 흐르는 동안 권하윤은 강수연이 병원에서 나왔는지 확인해야 하는 동시에 눈앞에 닥친 위험도 경계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일 분은 마치 일 년처럼 느껴졌다.한참이 지나서야 민도준은 그녀의 입가에 대고 있던 가위를 내려놓았다.“그래. 오늘 마침 시간이 남아도는데 천천히 놀아보자고.”겨우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낸 권하윤은 마치 큰 고비를 넘긴 듯 심호흡을 하더니 맥없는 목소리로 상의했다.“그럼 혹시 별장에서 기다리면 안 돼요? 제가 먼저 어머님 본가에 모셔다드려야 해서.”권하윤의 말에 민도준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었다.“나 떼어내려는 수작이었어? 참 피곤하지도 않나 봐?”한차례의 수난을 겪고 나서인지 권하윤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기진맥진해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반쯤 포기한 듯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만약 기다리지 못하겠다면…….”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은 그때 민도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권하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살펴댔다.강수연이 병원에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나 언제든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만약 이 장면을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