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 권다라는 은지가 자기를 비웃는 줄 알고 화를 냈다.“그게 뭐 좋다고? 도련님께서 우리보고 너 지켜보라고 했잖아, 난 시시각각 널 지켜볼 거야! 경고하는데, 무슨 짓 벌일 생각하지 마!”은지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럴 거면 내 옆에서 자지 그래?”“너!”다라는 화가 나 은지보고 기다리라고 한 뒤 다른 도우미 정소현을 찾으러 갔다.“엄마, 도련님께서 데리고 온 여자 돈 빚졌는데, 너무 당당해요. 엄마가 가서 도련님한테 좀 얘기해 봐요. 이런 여자를 도련님 옆방에서 재울 순 없어요. 혹시 무슨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떡해요?”정소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어이구, 도련님이 돈 빚졌다면 정말 빚진 줄 알아? 도련님께서 무슨 돈이 부족해서 그러겠어. 정말 돈을 받아내고 싶다면 경찰서에 보냈겠지, 집으로 데리고 오겠어? 들어올 때 도련님이 저 아가씨 트렁크 들어주고 옆방에서 재우는데, 무슨 사인지 모르겠어?”정소현의 말에 다라도 이상한 감을 느꼈다.정소현은 다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알았으면 저 아가씨한테 좀 잘해. 내가 너 도련님 좋아하는 거 아는데, 도련님은 곽씨 집안 도련님이야, 너처럼 보통 여자를 도련님이 좋아하시겠어?”다라는 기분이 나빴다.“엄마처럼 자기 자식 깔보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 도련님께서 자신에게 맞는 여자랑 만나면 모르겠어요. 저 여자도 보통 사람 아니에요? 왜 저 여자는 되고 저는 안 되는데요?”정소현이 웃었다.“딸아, 저 아가씨 어딜 봐서 보통 사람 같아? 저렇게 예쁘게 생겼으면 보통이 아닌 거야.”“근데...!”“됐어, 그만 해. 내가 너 보고 일 열심히 하라고 했지? 근데 네가 여기 와서 도우미를 꼭 하겠다면서 2년 낭비했잖아. 도련님께서 너 눈도 제대로 못 봤을 거다. 엄마 말 듣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정소현은 말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갔고 다라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화를 냈다.‘저 여자 딱 봐도 나이 많아 보이는구먼, 난 아직 젊으니까 해볼 만해!’다라는
다음날, 정소현이 은지를 깨우고 미안한 듯 말했다.“아가씨, 도련님께서 일어나서 아침 밥 차리래요.”간단하게 씻고 나서 정소현이 은지를 데리고 주방으로 갔다.“어제저녁에 식재료 다 준비해 두었으니까 바로 하시면 돼요.”은지는 무엇인가 떠오른 듯 정소현을 바라보았다.“권다라는요?”정소현이 다급히 대답했다.“어제 일은 이미 다 들었어요. 제가 다라 이모 불러서 애를 해성시로 돌려보내기로 했으니까, 저녁에 이모가 오면 바로 갈 겁니다. 제가 애를 너무 예쁘게 키워서 저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그때 신옥영이 정소현보고 남한성 와서 노후 생활을 하라고 하면서 딸도 같이 가도 된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 정소현은 엄청 미안하게 생각했다.아침 9시, 준호가 식탁에 앉아 1시간을 기다렸는데, 아침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다.준호는 참지 못하고 사람을 불러오려고 했는데, 은지가 그릇을 들고 왔다.준호의 앞에 빵 하나와 죽 한 그릇이 놓였다.준호는 은지가 다른 것도 내오길 기다렸는데, 그녀가 바로 자리에 앉아버렸다.준호는 깜짝 놀랐다.“한 시간에 이것밖에 못 만들었어?”은지는 죽을 가리키며 말했다.“밥솥으로 죽 만드는 데 한 시간 걸렸어.”‘뭐야? 죽도 밥솥으로 했어?’준호는 은지가 만든 아침을 먹으면서 화를 참았다. 준호는 밥을 먹자마자 은지가 할 일을 찾았다.“가서 저택의 모든 방 다 청소해, 다른 사람이 도와줘서는 안 돼!”준호는 말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은지는 빵과 죽을 다 먹고 정소현을 바라보았다.“청소도구 어디 있어요?”청소기 소리가 저택에서 마구 울렸다.2층에 있던 준호는 은지가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감정적으로 보면 준호는 은지를 좋아해서 몸과 마음이 다 은지와 가까워지고 한다.그러나 은지가 곽도원을 죽였다.준호는 어릴 때부터 신옥영의 고통을 느꼈기에, 은지와 이성희가 당한 일에 동정했다. 그러나 은지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저녁에 친구들이 준호를 부축해서 왔다. 정소현은 준호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어머나, 왜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거지?”친구들도 술에 취해 정소현에게 준호 잘 챙겨달라고 부탁한 뒤, 서로한테 의지하면서 비틀거리며 갔다.정소현이 준호를 부축해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서 부축할 수 없었다. 정소현은 할 수 없이 은지를 찾으러 갔다.“아가씨, 도련님께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같이 부축해 주실 수 있을까요?”은지가 거실에 오자마자, 진한 술 냄새를 맡았다. 준호가 술에 취해 있었지만, 조용히 소파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평소에 계속 부대에서 생활했기에 자세가 아주 반듯했다.은지는 엄청 날씬했지만 힘은 셌다. 은지가 도와주었기에 준호를 침대에 눕힐 수 있었다.정소현은 한숨을 돌렸다.“아가씨, 저는 가서 해장국 좀 끓여올 테니까, 아가씨께서 도련님 좀 봐주세요.”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정소현이 가고 은지는 서 있는 것이 힘들어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준호가 누운 지 얼마 안 되고부터 목 부분을 잡아당겼다. 숨을 쉬기 힘든 모양이었다.은지가 준호 옷의 단추를 두 개 풀어주고 다시 앉으려고 하는데, 준호가 은지의 손목을 잡았다.준호의 빛이 나는 눈을 보고 은지가 말했다.“단추 풀어주는 중이야.”“고은지?”“응.”준호는 은지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시름을 놓았지만, 손목은 놓지 않았다. “나 손목 아파.”준호는 은지의 다리를 베고 은지의 손을 잡아다가 자기 머리에 놓았다. 준호는 은지의 허리를 껴안았다.“고은지, 나 머리 아파.”술에 취해서인지 준호는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곽도원을 걸려들게 하기 위해 은지는 마사지하는 법을 전문적으로 배웠었다. 그래서 준호는 편한 듯 은지를 더욱 꽉 안았고 더운 숨을 은지의 배에 내뿜었다.은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준호에게 마사지를 해주었다.준호는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마셔 그는 지금 곽씨 저택으로 돌아
방에서 은지는 마사지를 다 해주고 준호의 머리를 옆으로 움직이려고 했는데, 준호가 은지를 더 꽉 안았고 은지의 품에 더 깊이 들어갔다. 준호는 머리를 은지의 어깨에 기대고 그녀의 목에 입맞춤했다.정소현이 해장국을 들고 들어오다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소현은 해장국을 문 앞에 놓고 말했다.“아가씨, 해장국 다 됐어요.”은지는 준호에게 눌려 움직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알겠어요. 제가 마시게 할 테니까 나가세요.”“네.”정소현이 문을 닫고 나갔다.은지가 일어나려고 했는데, 준호가 너무 무거워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뜨거운 숨결이 은지의 목을 간지럽혔고 준호의 몸이 엄청 뜨거웠다. 준호를 옆으로 몇 번 밀었지만 밀리지 않았다. 준호는 은지의 손을 잡아다가 자기 몸 위에 놓으면서 중얼거렸다.“왜 이렇게 차가워.”은지는 준호가 덮치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손을 녹여주고 있었다.“고은지,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너 혹시 뱀이 사람으로 변한 거야? 왜 몸이 계속 이렇게 차?”‘왜 차냐고?’은지는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한겨울에 얇은 옷만 입고 이성희에게 쫓겨나 따듯한 가게를 찾아다녔었다.가게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들어가면 아주 따듯했다. 살을 에는 듯이 추운 밖과 비교하면 지옥과 천국이었다.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밖으로 쫓겨났다.은지는 처음에 손님을 맞이하는 가게가 왜 자신을 내쫓는지 몰랐다.그러나 후에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은지가 너무 꾀죄죄하게 입고 있었고 몸이 너무 더러워 손님들에게 영향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이 너무 추워서 은지는 정말 얼기 일보 직전에만 들어가서 몸을 좀 녹였다. 그리고 누군가 내쫓으려고 하면 제 발로 나왔다.그렇게 가게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긴 겨울을 지냈다....이때 은지의 손이 준호에 의해 준호의 가슴팍에 놓였고 무척 뜨거웠다.준호는 여전히 ‘뱀’에 관해 중얼거리고 있었다.은지가 힘겹게 빠져나와 해장국을 들고 준호에게 먹여주려고
준호는 은지가 자기를 씻겨 주는 것에 고집을 부리며 샴푸며, 바디 워시를 은지의 손에 집어넣었다.몸은 씻기 쉬웠지만 준호의 키가 은지보다 훨씬 컸기에 머리를 감겨주기 힘들었다. 감겨주다가 준호 눈에 비누가 들어가 한참을 징징댔다.이렇게 힘들게 씻는데도 준호는 여전히 은지 보고 씻어달라고 했다. 씻겨주는 은지가 더 힘든지, 씻음을 받는 준호가 더 힘든지는 알 수 없었다.겨우 다 씻겨 주고 은지도 샤워하고 싶어 준호보고 나가 있으라고 하고 싶었다.은지가 말도 꺼내기 전에 준호가 말했다.“너 잘 못 씻어주네, 내가 너 씻어줄 테니까, 보고 잘 배워.”준호는 은지의 옷을 다 벗기고 바디 워시로 몸을 씻기고 머리도 감겨주었다.준호의 거친 손길에 은지가 장발하고 있었다면 다 빠져버렸을 것이다.거품을 다 씻어버리자, 눈앞에 안개가 자욱했다. 준호는 은지를 바라보더니 더 취한 것 같았다.“예뻐.”은지는 이런 칭찬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칭찬을 했던 사람들은 은지를 상품으로 보지 않으면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준호는 은지의 얼굴을 감싸고 사랑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지, 나 너 좋아해, 정말 좋아해.”은지의 눈빛이 흔들렸다.준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은지는 잘 알고 있었다.사실 은지가 복수를 하기 위해 살길을 남기려고 준호에게 접근했었다.곽도원이 죽은 뒤에 혹시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은지의 목숨은 산 사람에게 넘겨지기 때문이다.곽도원 같은 사람의 아들도 곽도원처럼 나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 은지는 죄책감이 없었는데, 준호는 곽도원과 달랐다.준호가 은지의 몸만 노린 것이라면 은지도 준호를 이용하면 되는데, 지금 마음을 은지에게 줘버려 곤란하게 된 상황이었다.준호를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두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은지는 준호를 손 떼게 할 방법이 있다. 그러나 위험이 따랐다.은지는 위험한 일을 가장 싫어한다.은지는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보았고 준호는 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소현이 웃으며 대답했다.“도련님, 급해 마세요. 아가씨께서 도련님을 위해 아침 식사 준비했어요. 지금 아래층에서 도련님 기다리고 계세요.”준호는 한시름 놓았지만,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왜 저런대?”준호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은지가 죽을 그릇에 뜨고 있었다. 이번에는 밥솥으로 한 죽이 아닌, 직접 끓인 죽이었다.식탁에는 네 가지 반찬이 정교하게 놓여 있었다.준호는 의심스러운 듯 은지를 한번 보았다.‘오늘 왜 저렇게 평소답지 않지? 밥에 독 탄 거 아니야?’은지는 준호가 의심하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모두 한 번씩 먹었다.준호의 의심이 깊어졌다.‘독을 안 탔으면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은지는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먼저 먹어, 다 먹고 할 얘기 있어.”준호는 은지를 한참 바라보았다.‘도우미 하는 게 힘들어서 빌려나?’준호는 시름 놓고 아침 식사를 즐겼다. 준호는 죽으로 술 때문에 힘든 속을 달랬다.그는 먹으며 은지를 바라보았다. 은지의 지금 모습은 마치 현처양모 같았다. 준호는 이런 일들이 없이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지 생각했다.준호는 생각하다가 짜증이나 밥맛이 떨어졌다.“무슨 할 얘기 있으면 해.”은지는 입을 닦고 얘기했다.“나 자수하려고.”말이 끝나자마자, 준호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이 그릇에 빠졌다.“뭐라고? 뭘 하러 간다고?”“자수하러 간다고.”은지는 평온하게 얘기했다.“나 생각해 봤는데, 이렇게 너랑 집에서 이런 관계로 있기보다 경찰서 가서 자수하면 네 고민을 없앨 수 있잖아.”준호는 은지의 말을 이해했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네 말은, 감옥에 가더라도 내 옆에서 도우미는 하기 싫다. 이거야?”“네가 딱 이렇게 이해하겠다면 그렇게 이해해.”“너!”준호는 눌러뒀던 감정이 폭발했다.“고은지, 넌 내가 너 감옥에 못 보내서 안 보내는 줄 알아? 아버지를 죽인 여자를 불쌍하게 여길 거 같아? 꿈 깨!”“난 상관없어. 난
다라는 어제저녁에 해성시에 도착했고 오늘 아침 일찍이 곽씨 저택으로 갔다.집사는 다라를 보고 깜짝 놀랐다.“다라? 너 남한성에 소현 씨랑 같이 있지 않았어?”다라는 대충 얼버무렸다.“그, 저택에 돌아오고 싶어서요. 집사님, 저 새 자리 안배해 주세요!”집사는 잠시 생각했다.‘남한성 쪽에 일도 적고 엄마랑 같이 지내는데, 지금 갑자기 돌아온 거 보면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텐데.’집사가 담담히 말했다.“사모님께서 나가신 뒤, 국장님도 안 계셔서 도우미가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 도우미들 자르려고 해서 자리 안배는 불가능할 거 같아. 일단 집에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어. 자리 나면 연락할게. 다른 일자리도 좀 찾아보고.”집사가 거절하자, 다라는 은지의 일에 대해 아직 알아내지 못해 가려고 하지 않았다.“집사님, 저 할 얘기 있어요!”다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 국장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요.”집사는 다라의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다라야, 국장님께서는 지병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신 거야. 밖에서 떠도는 소문으로 그런다면 도련님이던, 나던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아니, 제 말은 국장님께서 고...!”“그만!”집사는 엄숙하게 말했다.“주인집에서 그렇게 오래 일을 하고도 아직도 무슨 말은 해도 되고, 무슨 말은 꺼내지 말아야 하는지 몰라? 입 잘못 놀려서 큰 해를 입지 않도록 해! 나가!”...다라는 욕을 한바탕 먹고 억울하고 화가 났다.다라는 가지 않고 몰래 전에 친했던 희진을 불러냈다.희진은 다라를 보고 깜짝 놀랐다.“다라야, 너 왜 돌아왔어?”“그건 상관 말고, 나 물어볼 거 있어. 국장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알지, 국장님께서는 지병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셨어.”희진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다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다라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지라고 알아?”“은지 사모님?”은지의 말이 나오자, 희진은 조금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당연하지, 전에 내가 은지 사모
남한성에서 정소현이 주방에 들어서자, 은지를 잡아당기고 있는 준호를 보고 준호가 은지를 때리려는 줄 알고 급히 말렸다.“도련님, 아가씨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했는데, 마음속으로는 도련님 많이 생각하고 계세요.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준호는 은지를 팽개쳤다.“날 생각한다고? 난 쟤가 나 빨리 죽었으면 하는 것 같아!”은지는 의자에 내팽개졌고 아픈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소현 씨, 먼저 나가 계세요.”정소현은 은지를 보고 또 준호를 보고 걱정이 됐지만, 자신이 그저 도우미라고 생각되어 먼저 나가 있기로 했다.준호는 짜증이 나는 듯이 몇 바퀴 돌더니 담담한 은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화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진 것 같았다.은지의 눈에 현재의 준호가 몹시 우스울 것 같았다. 은지가 곽씨 집안을 휘둘러 놓고 곽도원까지 죽였는데, 지금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준호다.‘고은지가 저렇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내가 지금 뭘 고민하는 거야?’은지가 말한 것처럼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총살을 당하던 감옥에 있던 그것은 다 은지가 받아야 할 죗값이다.은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준호는 아직도 아쉬운 모양이었다.준호가 진정하고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은지를 바라보았다.“자수하겠다는 걸로 내 손에 빠져나가고 싶은 거라면, 네 생각이 틀렸어. 내가 널 집에 도우미로 남긴 게 너에 대한 최대의 존중이야. 우리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편하게 살게 놔둘 거 같아? 네가 날 떠나고 싶다면 그러면 넌 감옥 밖에 갈 수 없어.”준호는 몸을 옆으로 돌려 주먹을 쥐었다.“고은지, 너 정말 자수할 거야?”“응.”은지의 간결한 대답을 들은 준호는 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그래,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준호가 먼저 차에 탔고 그는 백미러로 은지를 봤다. 은지는 별장에서 나와 좌, 우로 둘러보지도 않았고 바로 차에 탔다.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준호는 내비게이션에 경찰서를 치고 목적지로 운전했다.멀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