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뒤차의 경적이 준호를 정신 차리게 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운전했다.경찰서가 눈에 점차 들어오자, 준호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웠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았지만, 준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힘차게 한 글자를 뱉었다.“가!”“멀리 갈수록 좋아!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차 문이 열리더니 곧바로 닫혔다.은지는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준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이미 이렇게 될 줄 예상한 사람 같았다.준호는 세게 핸들을 치고 위에 엎드렸다. 그는 눈을 세게 감았다.준호가 중얼거렸다.“아버지, 혹시 이 세상에 원한이 남아 있어 아직 저승으로 가지 않으셨다면 저도 속시원히 데려가 주세요.”준호는 차에서 저녁까지 있었다. 중간에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지만, 준호는 못 들은척했다.저녁에 헤드라이트가 지나갈 때, 준호는 차라리 와서 자기를 박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준호는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희미한 정신으로 차에서 내렸다.그러자 신옥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준호야! 너, 꼴이 이게 뭐야?”준호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더니 기절하고 말았다.더운 여름이어서 준호가 차에서 두 날 동안 있었기에 산소도 부족했고 더위를 먹은 것이다. 준호는 한참을 기절해 있었다.신체가 건강했기에 견뎌냈지, 아니었으면 찐 만두가 됐을 것이다.병실 침대 옆에서 신옥영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준호야, 이게 무슨 고생이냐.”준호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머니, 제가 불효자입니다. 제가 고은지를 그냥 보냈어요.”“엄마 알아, 엄마 다 알아.”두 날 전, 다라가 신옥영을 찾아와 고발한 것을 들은 신옥영은 은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조금 편했지만, 표정 관리를 했다.“다라야, 준호도 이젠 성인이야. 내가 너랑 소현 씨 보낸 건 가서 일하라고 보냈지, 준호 감시하라고 보낸 거 아니야. 너희가 저택에 들어왔을 때, 주인장에 관한 모든 것을 밖에 소문내지 않겠다는 계약서도 썼
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에요? 무슨 비밀이 있는데요?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하세요?”신옥영은 손에 들고 있던 약을 준호에게 건네주었다.“준호야, 너 몸이 아직 회복이 덜 됐으니까, 먼저 회복하고 그건 이제 얘기해 줄게.”준호는 마음이 급해 침대에서 일어났다.“도대체 무슨 비밀인데요? 저한테 뭘 숨기신 거냐고요! 어머니, 빨리 알려주세요!”너무 큰 일이라 신옥영은 준호가 아직 회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충격을 받을까 봐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준호에게 퇴원하는 날에 알려준다고 했다.준호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기다리기로 했다.다행히 준호가 원래 몸이 좋고 어려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퇴원하는 날, 신옥영은 정소현에게 휴가를 하루 주었고 직접 준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한 상 차렸다.준호가 자리에 앉자, 그날 은지가 한 상 차림을 해놓고 자수하겠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준호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신옥영이 자기를 항상 예뻐해 줬기에 나쁜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해 시름을 놓고 식사를 했다.신옥영은 준호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고 준호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신옥영은 준호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말했다.“너 어렸을 때, 엄마가 다른 애 많이 먹는다고 칭찬했더니 네가 걔를 이기겠다고 단숨에 세 그릇이나 먹어서 토할 뻔했었잖아.”준호는 부끄러웠다.“엄마, 그건 다 어렸을 때 일이에요. 그거 말해서 뭐 해요?”“맞아, 언제 이렇게 컸지? 뭐든 다 잘하고, 훌륭해.”신옥영은 애정이 어린 눈으로 준호를 바라보았다.“너 어릴 때, 엄마는 널 교육 잘 못 할까 봐, 네 아버지처럼 정이 없을까 봐 무서웠어. 그리고 다른 애들처럼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을까 봐 두려웠는데, 넌 뭘 하던 다 잘 해냈지.”“제가 말을 안 들어서 어머니의 기대에 저버렸어요. 고은지가 살인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보내고, 전 아버지보다도 못해요.”신옥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준호야, 너 은지 씨
“제 친엄마요?”준호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머니잖아요.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 못 알아듣겠어요.”신옥영은 준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이 비밀 내가 무덤까지 갖고 가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자책하는 걸 보니까 얘기해야 할 거 같아.”신옥영은 잠시 머뭇거렸다.“사실 난 네 친엄마가 아니야.”준호는 깜짝 놀랐다.“네?”신옥영은 그때 일어났던 일을 준호에게 얘기해 주었다.자신의 친엄마가 신옥영을, 자식을 잃게 했고, 자신이 어떻게 신옥영의 곁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조금 지나 준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어머니, 지금 장난치는 거죠? 제가 어떻게 어머니 자식이 아니에요?”“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네가 내 자식이길 바란다. 그러나 네 친엄마는 내가 아니야.”신옥영의 표정을 보고 준호는 누군가에 의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몸이 산산조각 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준호가 물었다.“제 친엄마는요?”“돌아가셨어.”준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아버지가 그런 거예요?”“응.” 여기까지 말하자, 신옥영의 눈에 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나랑도 상관있어. 네 아버지가 아이를 나한테 주기 위해 네 친엄마를 죽게 만든 거야. 내가 알았을 때, 네 친엄마는 이미 돌아간 상태라, 내가 사람 시켜 해성시에 묻었어. 가서 보고 싶으면, 집사한테 물어봐.”이 말까지 듣자, 준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준호는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준호는 마치 자신이 단단한 토양 속에서 자란 풀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해면에서 자란 관상용 풀이었다. 준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신옥영은 준호가 충격을 받은 모습에 그의 손을 꼭 잡았다.“준호야, 네가 날 탓해도 엄마는 네 탓을 하지 않아. 이게 다 네 아버지가 저지른 죄야. 엄마가 너한테 이걸 얘기한 이유는 네가 죄책감을 느끼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런 거야. 사실 우리가 모두 가장 미안해하는 사람은 너야.”곽도원은 아무 죄 없는 아이로 자신의 죄를 막았다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