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시영은 한숨을 내쉬며 장현정과 마주 보며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문밖에서 물을 가져오던 케빈은 방 안의 대화를 듣고 미간을 찡그렸다.시영이가 망가졌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케빈은 왜 장현정이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 순간 케빈의 눈앞에는 자신이 총을 들고 몇 사람을 주저 없이 쏘아 죽이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그 사람들은 큰집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영은 큰집의 사람들이 모두 민도준의 손에 죽었다고 했는데 케빈은 왜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까.더구나 케빈은 큰집이 돈을 주고 데려온 사람이기에 그렇게 대놓고 큰집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케빈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생일 파티 날의 소문은 결국 퍼져 나갔다.소문에 시영이가 보디가드 때문에 어머니를 병들게 했다고 떠들썩했다.시영은 이전에 항상 멋진 여성의 이미지를 선보였고 백제그룹의 주축이었으며, 사방팔방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하지만 갑자기 보디가드와의 문제로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녀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시영 언니 같은 여자가 어떻게 연애에 미쳐있을 수 있지?][그러게, 간교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영 누나는 모르는 건가?][혹시 그동안의 이미지가 다 거짓이었나? 사실 전혀 능력 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몰라.][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이대로라면 가정마저 파탄 나 버릴 지도 몰라.][내 딸이 이랬으면 그냥 때려죽였을 거야.][민씨 가문의 딸이 보디가드를 좋아한다고? 진짜 웃기네.][이런 머리로 어떻게 백제그룹을 이끌겠어?]...순식간에 인터넷에는 수많은 악플이 쏟아졌고, 그중에는 시영이가 권력을 잡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숨어 있었다.시영은 회사의 부대표로서 여러 인터뷰와 상회에 자주 참석했다. 이런 공적 이미지에 흠집이 생기면 회사는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시영은 이전까지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왔기에 갑자기 한가해진 상황이 조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날, 시영은 인터넷의 여러 댓글을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가려졌다.“아가씨, 그만 보세요.” 고개를 들자 케빈이 서 있었다. 비록 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지만 시영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소파에 기대었다. “걱정 마. 이 정도 댓글로는 상처받지 않으니까. 이 사람들은 왜 다른 여자들의 결혼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정말 웃기는 사람들이네.”“능력 있는 남자 대표가 가난한 여자와 결혼하면 다들 부러워하고 축복해 주면서 그 대표가 여자면 연애에 눈이 먼 멍청한 여자라고 비난을 하다니.” “결국 여자를 결혼의 부속품으로만 여기는 거잖아. 여자가 자기보다 능력이 낮은 남자와 결혼하면 가치가 떨어지고, 지위가 높은 상대와 결혼하면 신데렐라가 된다는 거지. 내가 왜 내 가치를 다른 사람을 통해 평가받아야 하는 거지?”케빈은 시영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케빈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이번 일의 영향이 너무 크다면, 제가...”“케빈!”시영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내가 말했잖아. 우리 관계는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케빈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그러면 괜한 걱정하지 마.”“저는 아가씨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아가씨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고 싶어요.”시영은 케빈이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시영은 그에게 손짓을 하며 가까이 오게 했다. 케빈이 몸을 숙이자 시영은 그에게 입맞춤을 하려는 듯 고개를 들었지만, 케빈이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오려 할 때 케빈을 밀어내며 손에 들고 있던 체리를 입에 넣어주었다.차가운 체리가 입에 들어가자 케빈은 잠시 멈칫했다.시영은 웃으며 말했다. “방금 공수해 온 거야, 맛 좀 봐.”케빈이 조금 실망하면서 일어나려 할 때 시영은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과일이라
케빈은 전쟁으로 엉망이 된 곳에서 태어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금지된 물건들을 더 많이 접했었다. 선배가 말하길, 그런 것들은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중독될 뿐이라고 여기고 시도해 보지만 그런 중독은 심장에 구멍을 내어 무엇이든지 채워 넣게 만든다. 양심, 가족, 사랑, 돈, 생명을 모두 앗아갈 때까지.케빈은 항상 선배의 말을 기억하며 절대로 사람을 중독시키는 물건에 손대지 않았다. 단, 시영만은 예외였다. 처음 중독의 징조를 느낀 것은 자신이 시영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가끔 휴가를 받아 시영 곁에 있지 않아도 될 때 그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난원을 한 바퀴씩 돌며 마치 집을 찾지 못한 강아지처럼 헤맸다.그들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분명 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케빈의 중독은 점점 더 심해졌다. 가까워질수록 더 가까이 가고 싶었고 가질수록 더 많이 원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케빈은 품 안에 있는 시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물고 있었고, 그런 시영의 모습은 그를 매료시켰다. 시영이가 자신을 사랑하든 미워하든 상관없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케빈은 그녀 곁에 영원히 있을 수 있다....일은 점점 더 커져갔다. 여론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영의 측근이 그녀를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시영이 떠난 후, 회사는 몇 날 며칠 동안 혼란에 빠졌고 모든 프로젝트가 보류되었다. 하지만 이때 시영의 측근이 갑자기 나서서 그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단순히 휴가를 간 시영은 갑자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녀의 권력이 나눠지기 시작하면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어질 것이다.이 소식은 곧 장현정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는 즉시 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영, 엄마가 오씨 가문이랑 상의했어. 네가 동의한다면 곧바로 너와 준석의 약혼식을 열 거야. 그러면
케빈은 손에 들고 있는 치킨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장현정은 치킨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가져가도 마찬가지잖니!”“아가씨는 바삭한 걸 좋아하십니다.”장현정은 케빈의 고집스러움에 화가 치밀었다. ‘어떻게 우리 시영이처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애가 이 목석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장현정은 밀려오는 화를 참으며 말했다. “바삭하지 않으면 다시 사 오면 되잖니! 난원에 잠시 다녀오기만 할 거니까 잠깐이면 돼!”케빈은 위층을 한번 보고도 여전히 장현정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아가씨께 어디 가는지 말씀드려야 합니다.”“이놈!”장현정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케빈, 지금 시영이가 너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몰라? 아직도 시영을 좋아한다면 나랑 같이 가!” “아가씨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먼저 아가씨께 어디 가는지 말씀드려야 합니다.”“거기 서!”장현정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케빈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장현정은 케빈이 정말 자신을 두고 가려고 하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렇게 고집스러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케빈은 그녀를 무시하고 올라탔다.“너! 끝까지 가겠다는 거야?”장현정은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탔고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또다시 케빈을 단둘이 보게 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체면을 내려놓고 말했다. “케빈! 네가 시영이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너도 시영이가 너랑 만나면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을지 알잖아! 나는 이제 네 일에 신경 쓸 마음도 없으니 시영이가 준석이와 약혼만 하면, 너희 둘의 일은 눈감아줄 수 있어!”장현정은 큰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케빈은 여전히 같은 대답을 했다.“전 아가씨 말씀을 따르겠습니다.”장현정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넌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준석이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인지 알잖아! 준석이는 좋은 가정 출신이고 너를 받아주
케빈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할 말이 많았지만 결국 한마디만 했다. “아가씨, 닭 다리는 다 팔렸습니다.”시영은 이 말을 듣자 웃음을 터뜨렸다. “닭 다리가 없으면 없는 거지. 표정 보면 혼이라도 빠져나간 줄 알겠어.”시영은 그의 손에서 치킨을 받아들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바삭한 껍질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케빈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뭐 하러 멍하니 서 있어? 와서 나한테 기대.”케빈은 멍하니 서 있다가 시영에게 다가갔다. 시영의 몸에서 나는 장미 향이 그를 휘감아 더욱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하지만 장현정의 말이 계속 그의 귀에 맴돌았다. '그때의 일이라...’그의 아가씨는 민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이자, 밝고 빛나는 존재였다. 케빈은 어둠 속에서 시영을 항상 우러러보았다. 그녀는 케빈에게 있어서 고귀하고 완벽한 존재였다. ‘도대체 누가 아가씨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케빈은 분명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계속해서 시영의 절박한 구조 요청이 환청으로 들려왔다.밤이 되었다.케빈이 침대 정리를 마치자 시영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불 꺼.”케빈은 불을 껐고 아직 정신을 차라기도 전에 침대 위에서 분노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케빈! 지금 뭐 하는 거야!”케빈은 불을 끄고 난 후 자기도 모르게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케빈 스스로도 놀랐다. 왜 자신이 여기에 앉아 있는지, 불을 끄고 난 후 몸이 자동으로 이렇게 앉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더 중요한 것은, 시영이 이에 대해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탁- 불이 켜졌다.시영은 케빈이 보디가드로서 자신의 역할을 지키며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케빈의 옷깃을 잡고 뺨을 때렸다.“제대로 된 침대가 있는데 왜 바닥에서 자려고 해! 제대로 된 사람을 놔두고 왜 개처럼 굴어!”시영은 미친 듯이 케빈을 때렸다. 시영의 손톱 끝이 케빈의 얼굴을 긁자 피가 흘러내렸다. 시영은 그의 옷깃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시영은 원래 매우 유혹적인 여인이었고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강단 있는 성격과 요염한 매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이다. 이런 매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이 케빈의 앞에서만 보이는 건 다소 낭비인 셈이었다.시영이가 특별히 유혹할 필요도 없이 케빈은 자발적으로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바쳤다. 만약 시영이가 기분이 좋아 보상해 주는 날이면 케빈은 마치 천국에 있는 듯했다. 그는 마치 사슬에 묶인 개처럼 미친 듯이 시영을 사랑했다. 자신이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면서도 시영을 미친 듯이 소유하려 했다.밤과 낮의 경계에서, 침실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케빈은 침대에 누워 끝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 느낌은 매우 기묘했다. 케빈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깨어날 수 없었다.케빈은 자신이 시영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때로는 다투고 며칠 후 다시 웃으며 화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시영을 붙잡고 집에 일찍 돌아가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존심을 세우며 말했다. “다음 주 내 열여덟 번째 생일에 와줘야 해. 그리고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해.”“좋아.”케빈은 자신이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시영의 생일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케빈은 그저 구석에서 멀리서 시영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곳이 그의 자리였다.케빈이가 시영의 열여덟 살 성년이 된 모습을 보려고 할 때 갑자기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시영이 그의 코를 잡고 있었다. 시영은 그가 깨어난 것을 보고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난 이미 깼는데 넌 아직 자고 있는 게 말이 돼?”“아침 준비하겠습니다.”아침을 먹고 나서 시영은 옷을 사러 나가겠다고 말했다. “매일 출근해서 정장 아니면 슬랙스만 입으니 질려버렸어. 예쁜 원피스 좀 사서 너한테 보여줄게, 어때?”케빈은 시
오준석은 시영의 차가운 태도에 잠시 놀라더니 말했다.“어머니께서 계속 너를 걱정하셨어. 어제는 또 몸이 안 좋으셔서 나랑 우리 엄마가 병원에 모시고 갔었어. 하루 종일 돌봐드렸더니 이제 많이 좋아지셨지.”시영은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에 자연스레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참 불효녀야. 전혀 몰랐네.”이 말을 들은 오준석은 기운을 차리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어머니도 네가 걱정되셔서 그러시는 거야.”“그렇지.” 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네가 나 대신 우리 엄마를 돌보는 걸 맡아줬으면 해. 네가 하루 돌봐줬더니 엄마가 많이 좋아지셨다며? 마침 나도 시간이 없으니까 네가 간병인을 해주는 게 어때?”오준석은 잠시 당황하며 억지로 웃었다. “시영아, 방금 그 말 농담이지?”“아니. 아까 너도 케빈을 칭찬했었잖아. 난 너라면 분명히 좋은 간병인이 될 거라고 믿어.”이 말을 들은 오준석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시영아, 너와 케빈 씨와의 관계가 좋다는 걸 알아. 하지만 가족 간의 일을 모른척할 수는 없잖아. 만약 내가 너희에게 방해가 된다면 가짜로 결혼을 해도 되잖아. 내가 너를 도와주면 그동안의 노력들이 헛되지 않을 수 있어.”이 말을 듣자 시영은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를 빠뜨렸어.”“뭐?”시영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야지.”오준석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난 그냥 친구로서 너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그게 이유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친구가 아니잖아.”시영은 오준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대신 말해줄게. 너는 몇 년 전에 집을 떠나서 스스로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지. 하지만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와 보니 네 누나가 이미 집안을 잘 관리하고 있었던 거야.”오준석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만약 내가 집안을 원했다면 처음
시영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오준석을 보며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오준석, 넌 이미 선택을 했으니 그 선택을 소중히 여겼어야 했어. 너무 욕심을 부리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시영은 말을 마치고 미련 없이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오준석의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시영! 넌 나랑 다를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그 보디가드를 위해 모든 걸 바칠수 있을 것 같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될 거야! 그때 되면 너도 나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거라고!”오준석의 말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붉어진 그의 눈시울에는 창피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고통이 서려 있었다. 사랑을 배신하고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으니 정말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없었다....그날 밤, 파파라치들이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오자마자 네티즌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재벌 집 아가씨가 보디가드와 연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미 인터넷에서 뜨거운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시영처럼 커리어 우먼으로 불리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디가드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 했다.기자가 올린 사진은 총 네 장이었다. 두 장은 시영과 케빈이 식사하는 모습이었고, 세 번째 장은 케빈이 카메라를 발견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는 모습, 마지막 한 장은 시영이 그걸 본 후 당당하게 케빈의 팔짱을 끼고 브이를 하는 사진이었다.시영이가 평소에 인터넷에 선보인 이미지는 항상 프로페셔널하고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케빈 옆에 있자 왠지 더 여성스러운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 속의 시영은 웨이브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치고, 물결치는 라인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시영 옆의 남자는 야수처럼 강인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요즘 젊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꽃미남은 아니었지만, 차가운 이미지와 단단한 몸매는 시영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원래 비난이 가득했던 분위기는 이 사진들을 통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저 보디가드, 꽤 멋있는데...][멋있어봤자 보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