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은 싱긋 웃었다.“아빠, 지금 농담하는 거죠? 갑자기 투자를 중단한다면 전에 투자한 건 물거품이 되는데, 상대도 장사꾼인데 밑지는 장사를 할 리 없잖아요.”원준섭이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만약 YM그룹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 대가가 너무 크니까.모두 모여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무실 문 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아, 다들 바쁘신가 봐요?”도준을 본 원준섭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말을 더듬었다.“어, 민 사장이 여긴 어쩐 일인가?”그에 반해 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덤덤하게 웃으며 인사했다.“둘째 도련님, 언질도 없이 여긴 무슨 일이에요? 미리 말했더라면 뭐라도 준비할 텐데.”“이미 충분히 준비한 거 아니었어요?”도준이 뒤쪽을 힐끗거리자 민혁은 수진을 안으로 밀었다.그 힘에 몸을 비틀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선 수진은 아직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의아한 듯 도준을 바라봤다.“민 사장님, 혜정 이모는 왜 찾아왔어요?”수진이 너무 쉽게 두 사람이 친척 관계라는 걸 제 입으로 말해 버리자 혜정은 눈 밑에 그늘이 졌다. 그 순간 수진이 저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정체를 폭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생각한 건 혜정뿐만이 아니었다. 수진을 보는 원준섭은 이미 화가 치밀어 얼굴이 시뻘게졌다.하지만 상대에게 여자를 붙인 것만큼 비겁하고 낯부끄러운 게 없기에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어 원준섭은 화를 꾹 눌러 참았다.“여기까지 왔으면 손님이나 다름없는데, 앉게.”원준섭이 말한 건 당연히 소파에 앉으라는 뜻이었는데, 도준은 아주 자연스럽게 원준섭을 지나 회장 의자에 앉아버렸다. 심지어 다리를 꼰 채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빙글 돌아보기까지 했다.“의자가 별로네, 바꿔야겠어.”도준의 도발에 재한은 이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민 사장님, 그건 회장 의자이니 바꾸든 안 바꾸든 제 아버지 마음이에요.”도준은 재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눈꺼풀을 들어 비꼬아댔다.“난
“민도준!”슬픔에 잠긴 혜정의 목소리는 가늘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동안 잘 쓰고 있던 가면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분명 본인이 어부라고 생각했는데. 수진을 미끼로 삼아 제가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미끼는 알고 보니 민재혁이었다.도준은 사실 재혁을 바로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혁에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주어 혜정이 남편을 위해 제 가문까지 내걸게 만들었다. 그 결과 혜정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패했다.얼마 전 혜정이 몰래 재혁을 보러 갔을 때만 해도, 재혁은 초췌해진 얼굴과 달리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었다.그런데 이 순간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할 줄이야.부부가 돼서 남편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혜정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면서 민도준에게 반드시 소중한 것을 잃는 아픔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리라 다짐했다....YM그룹을 나와서부터 민혁은 도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며 쫑알댔다.“도준 형,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어?”도준은 민혁에게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댔다.“네 연기력을 어떻게 믿고?”“나 요즘 가을 씨한테서 연기 배워, 지금...”그때, 민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민 사장님!”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제 막 회의실에서 달려 나온 수진이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아까의 대화에서 대충 뭔가 눈치챈 수진은 나오기 바쁘게 도준에게 따져 물었다.“진작에 YM을 인수할 계획이었다면 전 뭐였어요? 그냥 바둑알이었어요?”“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지금까지 왜 살아있다고 생각하지?”수진은 도준이 그동안 저를 ‘총애’하던 게 모두 가짜인 것도 모자라, 원씨 가문을 먹으려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도준의 매정한 대답에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수진은 이를 악물었다.“아하, 이시윤이 민 사장님 떠난 것도 이래서... 아!”채 끝나지 못한 말은 외마디 비명으로 대체되었다
다음날, 승우의 생일이 다가왔다.양현숙이 아직 퇴원하지 않은 탓에 결국 식구 모두 병원에서 생일을 축하하기로 결정했다.그리고 시윤이 예약한 케이크를 가지러 갔을 때, 마침 수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선배, 선배! 빨리요! 뉴스 봤어요?”‘뭐야? 또 무슨 연예인이 스캔들이라도 터졌나?’시윤은 속으로 생각하며 대충 물었다.“무슨 뉴스인데?”“선배 전남편이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기사 났어요. 미쳤다고!”그 말에 시윤은 멍해 있다가 이내 전화를 끊고 검색 사이트를 켰다.아니나 다를까 각종 검색 사이트는 이미 백제 그룹 대표가 결혼 후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기사로 도배되었다.원래 이런 기사는 회사에서 해명을 하기 마련인데, 하필이면 이 사실을 공표한 사람이 민씨 집안 식구인 원혜정이었다.영상 속 혜정은 도준이 정신질환을 앓은 지 한참이 되며, 일전에 친동생을 피범벅이 될 때까지 때렸고, 친할아버지인 민상철을 화병으로 죽게 만든 데다, 당숙과 숙모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서술했다. 심지어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내인 시윤이 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사람이 남편 도준이라는 걸 알아서라고 말했다.시윤은 그 영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원혜정이 왜 갑자기 앞뒤 가리지 않고 정면충돌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솔직히 말하면 원씨 가문과 민씨 가문은 관계가 복잡하여 혜정이 이렇게 폭로해 버리면 자기 집안 식구뿐만 아니라 자기마저 포기하는 것과 같다....그룹 결정권자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기사는 비즈니스와 연예 기사의 실검을 모두 장악했다.심지어 시윤이 케이크를 들고 병원에 돌아왔을 때, 병원 문 앞에서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이시윤 씨,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게 민 사장님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민 사장님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민 사장님 곁을 떠난 게 살인범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인가요?”“아버지를 죽게 만든 게 민 사장님이라고 하던데, 복수할 생각을 한 적 있나요?”“...
전화 건너편에서 승우는 다급한 목소리로 시윤을 관심했다.“윤아, 괜찮아? 아무 일 없는 거지?”시윤은 차 문을 힐끗 바라봤다. 뒷좌석은 앞쪽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하윤은 주먹을 꽉 쥐며 아무 일 없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오빠를 위해 산 케이크가 다 망가져 버렸어. 일부러 오빠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맛으로 샀는데, 아까워서 어째?”“블루베리?”승우는 어리둥절했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블루베리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목이 붓는다. 그 순간 뭔가 눈치챈 승우는 잔뜩 경계하는 듯 물었다.“윤아, 너 혹시 주변에 무슨 문제 생겼어?”“응.”시윤의 시야는 점점 흐릿해졌지만, 내려오는 눈까풀을 열심히 뜨며 창밖을 바라봤다.“나 지금 택시 타고 예흥 빌라고 가는 중이야.”승우는 걱정이 앞섰지만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알았어. 꼭 조심해.”한편,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은 순간 시윤은 손에 힘이 빠졌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시야가 흐려져 액정마저 보이지 않았다.본능적으로 도준의 번호를 눌렀지만 아무리 상황을 설명하려 해도 타자를 할 수조차 없어, 결국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숫자 1을 눌러 보냈다.마치 처음 도준에게 구조 요청을 하던 그때처럼....그 시각, 경성 백제 그룹.시영은 도준과 여론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이번 기사는 원혜정이 직접 영상을 찍어 폭로한 거라 상황이 복잡해. 원혜정이 민씨 집안 식구라는 것 때문에 말에 신빙성이 높아 바로 기사 내리면 오히려 인정하는 꼴밖에 안 돼. 내가 민제혁의 범죄를 저지른 증거와, 원혜정이 곁에서 도운 증거를 싹 다 모았으니까 보복을 위해 일부러 헛소문 퍼뜨린 거로 대응하자. 그러고 나서 내가 지훈이랑 같이 나서서 해명할게.”“응.”“그리고...”스크롤을 내리던 시영은 기사를 확인하며 도준의 눈치를 살폈다.“결혼 생활이 위기를 맞이했다는 건 형수가 직접 나서서
뚝- 뚝-텅 빈 페공장 안, 하수관 아래로 물이 떨어지고, 구석에 모인 쥐들은 탐욕스럽게 바닥의 더러운 구정물을 핥고 있다.시윤이 눈을 떴을 때, 손발은 이미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밧줄은 발목부터 무릎까지 칭칭 휘감고 있었고, 팔도 똑같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감고 있었다.게다가 온몸이 도관에 묶여 도망치고 싶어도 도저히 도망이 아니라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깼어?”그때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밧줄을 어찌나 꽁꽁 묶었는지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웠다.“원혜정?”혜정은 마치 아량이라도 베푸는 듯 시윤의 앞에 다가와 대답했다.“그래. 오랜만이야, 다섯째 동서. 아, 아니지. 이제는 둘째 동서라고 해야지? 세상일 참 모른다니까.”혜정의 진짜 모습을 진작 알고 있던 시윤은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혜정의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회포를 풀려고 나 납치한 거 아니잖아?”혜정은 가볍게 웃었다.“회포는 당연히 풀어야지. 그런데 네 사람 모두 한데 모이면 그때 하자고.”시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사람?”“응. 재혁 씨가 먼저 갔거든, 나도 따라가려고. 재혁 씨가 평생 민도준을 놓지 못했으니 민도준도 같이 데리고 내려갈 생각이야.”줄줄 읊어 내리던 혜정의 얼굴에는 옅은 수심이 서려 있었다.“사실 동서는 어찌 보면 억울할 텐데, 민도준을 끌어들이려면 어쩔 수 없었어.”“민재혁도 도준 씨를 이기지 못했는데, 본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모략으로 승부를 보면 당연히 안 되지.”시윤을 응시하는 혜정의 눈에는 일순 광기가 어렸다.“그런데 감정을 내세우면 한번 해볼 만한 싸움일지 누가 알아?”혜정이 저를 미끼로 삼았다는 걸 알아챈 시윤은 마음이 조급해져 일부러 비아냥거렸다.“우리 벌써 헤어진 지 1년이 넘었는데, 도준 씨가 나 때문에 죽을 거라고 생각해?”“안 될 것도 없지.”혜정은 시윤을 빤히 바라봤다.“동서가 얼마나 예쁜데. 민도준이 동서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동서를 위해 죽으라고 하면 죽
혜정의 계획을 들은 시윤은 숨이 턱 막혔다.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화학 원료 탱크는 마치 시한폭탄처럼 죽음의 그림자를 띠고 있었다.그걸 본 순간, 시윤의 심장은 불안한 듯 요동쳤지만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 도준 씨가 여기를 찾는다면 미리 조사했을 거야.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 발 들일 리 없을 거고.”혜정은 꽁꽁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시윤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내기할까? 내가 여기 불 질렀을 때, 민도준이 동서 구하러 올지 안 올지.”...“도준 형, 찾았어. 원혜정이 시윤 씨를 폐 화학공장으로 끌고 갔어.”“가자.”그때, 내비에서 위치를 확인한 조관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도준을 막아섰다.“잠깐, 여기 문제 있어요. 이곳, 몇 년 전에 큰 사고가 터져 사장이 도망친 공장이에요. 안에 있는 화학 연료는 가연성에 용해도 되지 않아 화학 탱크에 넣어 보관해야 하는 것들이고. 자연 폭발을 막기 위해 문에 안전장치도 한 상태라 안쪽에서 열지 않으면 밖에서 억지로 열기 어려워요.”조관성의 설명이 한창 이어질 때, 도준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원혜정이었다.이런 순간에도 혜정은 여전히 나긋나긋한 말투였다.“둘째 도련님, 지금쯤 우리가 있는 곳 찾았죠? 난 둘째 도련님처럼 모질지 않아 동서 아직 살려뒀어요. 만약 보고 싶으면 반 시간 줄 테니까 그 시간 내에 도착해요.”혜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시윤의 목소리가 곧장 울려 퍼졌다.“안 돼요! 오지 마요! 도준 씨를 해치려는 거예요!”그 말에 잠깐 멈칫하던 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뭐,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안 와도 돼요.”그때, 도준의 가볍고도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원혜정, 날 죽이고 싶잖아. 기회 줄게.”“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난 혼자라서 사람 많은 거 무섭거든요. 그러다 손이 떨려 문 못 열면 큰일이니 혼자 와요. 반경 2킬로미터 안은 모두 공터라 훤히 보이니, 사람 보이는 즉시 문 닫을 거예요.”뚜뚜뚜-
시윤은 혜정의 말을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혈육도 상관하지 않고, 민재혁 같은 사람 때문에 모든 걸 걸겠다고?”시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한 표정에 혜정은 가볍게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다른 사람은 민도준이 잔인하고 포악하고 인간성 없다고 하는데, 동서도 민도준 사랑하잖아.”“도준 씨는 달라.”“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재혁 씨를 보거든.”혜정은 싱긋 웃으며 시윤을 바라봤다.“내가 재혁 씨를 만난 게 14살 때였거든. 그때 재혁 씨는 내 외할머니 손에 떠밀려 우리집에 방문했었어. 그리고 난 마침 이복동생인 원재한에게 밀려 분수대에 빠졌었지. 그런데 원재한이 하인들을 불러 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어. 그때 겨울이었는데, 내 기억 속에 가장 추운 겨울이었거든.”“그때 민재혁이 구해줬어?”“아니.”혜정은 기억을 더듬으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재혁 씨는 사람들이 떠난 뒤 나를 구해줬어. 원재한과 충돌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았거든. 원재한의 뒷배는 새엄마였으니까. 그 뒷배가 없어지면 원재한도 나랑 똑같아질 수 있었어.”시윤은 그 순간 우연히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원준섭과 결혼한 아내는 모두 일찍 죽는다는 소문, 심지어 두 아내 모두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원혜정의 어머니는 아마 진짜로 병사했을지도 모르지만, 원준섭의 어머니는...“나중에 재혁 씨가 적합한 여자를 찾아줬고, 그 여자가 새엄마로 들어온 뒤로 난 더 이상 매맞지도 않고 밥 굶는 일도 없어졌어.”이야기를 이어나가던 혜정의 눈빛이 일순 부드러워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차가워졌다.“재혁 씨가 그랬거든, 나랑 평생 함께할 거라고. 그래서 그 사람 찾으러 내려가려는 거야.”혜정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동안 몰래 밧줄을 푸는 시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동서, 힘 빼지 마. 그 밧줄 특수 제작한 거라 절대 못 끊어. 안에 와이어가 있거든.”그러다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시간 거의 다 됐네.”
혜정은 태연한 눈빛을 한 채 아예 몸부림도 치지 않았다. 그저 싱긋 웃으며 눈빛으로 도관 쪽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갈 뿐.“저기...”도준은 답을 듣기 바쁘게 혜정을 옆으로 밀쳐버리고는 시윤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그걸 본 시윤은 다급하게 소리쳤다.“얼른 가요! 여기 곧 있으면 폭발해요.”소리를 치는 와중에 깜빡이는 숫자를 확인하니, 시간은 어느새 01:30를 가리켰다.도준이 몸을 쪼그리고 앉아 밧줄을 풀기 시작하자 시윤은 미친 듯 소리 질렀다.“안 돼요. 얼른 가요.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요! 이거 안에 와이어가 있어 풀 수 없어요!”분명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도준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왜? 나랑 같이 죽는 것도 싫어?”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말없이 점점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봤다. 그때, 도준이 칼 한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 칼은 몇 년 전 도준이 시윤의 혀를 잘라버리겠다고 겁줄 때 꺼냈던 칼이다.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슨 재질로 되어 있는지 와이어는 쉽게 끊어졌다.그 순간 어두웠던 시윤은 얼굴이 환해졌다.도준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밧줄을 모두 잘라냈다.00:55.손과 발에 묶여 있던 밧줄이 모두 끊어졌다는 기쁨을 미처 누릴 새도 없이, 시윤은 다시 절망으로 빠져버렸다.전에 두꺼운 밧줄로 꽁꽁 묶여 있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밧줄 아래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절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희망 뒤에 다가온 절망이라고 했던가? 이 순간, 시윤이 딱 그랬다.그때 구석에서 혜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하하.”“내가 준비한 서프라이즈 어때? 마음에 들어?”이 모든 건 혜정이 일부러 꾸민 짓이다. 도준에게 제가 느꼈던 절망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00:29.시간을 확인한 시윤은 힘껏 도준을 밀어냈다.“얼른 도망쳐요!”하지만 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칼과 힘을 이용해 억지로 수갑을 끊이려 했다.남의 생사를 쥐고 주무르던 두 손은 날카로운 수갑의 모서리에 베어 피가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