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채취 수, 시윤은 곧장 병실에 돌아가는 대신 복도 창가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확실히 수아의 말대로 해원에는 벌써 꽃들이 피어 있었다.물론 많은 편은 아니지만 경성보다 일찍 따뜻하져 벌써 봄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방금 바삐 뛰어다닐 때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조용해지니 이제야 경성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시윤은 결국 그 문을 열지 않았고, 운명에 이끌린 듯 해원으로 돌아왔다.‘이게 우리의 바뀌지 않는 운명인가 보네...’“윤아.”시윤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돌아섰다. 승우도 어느새 샘플 채취를 마치고 돌아왔다.“오빠.”승우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마음 아픈 듯 말했다.“여위었네.”그 말에 시윤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뚱뚱해지면 쌤이 욕해.”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승우를 빤히 바라봤다.“그러는 오빠야말로 멋있어진 것 같네. 혹시 형수는 언제 데려올 거야?”승우는 눈을 내리깔며 속내를 숨기려 했다.“급할 거 없어.”시윤이 떠난 1년 반 동안 승우는 제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예전에 바이올린 연습에 기울이던 노력을 모두 학생을 가르치는 데 기울였다. 심지어 전에 사용하던 연습곡도 리뉴얼하고 많은 기법도 새로 추가했다.그 뿐만 아니라 일전에 천재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덕에 많은 토크쇼에 초대되었고, 그 방송분이 공개되자 수많은 여자 후배들이 시윤에게 승우의 연락처를 물어보기까지 했다.심지어 수아는 잘생긴 것보다는 바이올린 켜는 남자가 좋다며 다리를 놔줄 걸 제안했지만 승우가 거절했다.물론 승우가 거절한 사람은 시윤의 후배뿐이 아니다. 그동안 지내오면서 시윤은 심지어 제 오빠가 이성과 가까이 지내는 걸 본 적이 없다.‘잠깐, 설마 오빠 남자가 취향인가?’승우는 갑자기 이상야릇해진 시윤의 표정을 보며 우스운 듯 물었다.“윤아, 너 표정 왜 그래?”시윤은 승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오빠, 저기 있잖아. 나 오픈 마인드라 형수는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아.”그 말에 승우는 잠깐 멍해 있다
보고지를 받은 두 사람은 곧장 주치의를 찾아갔다.그러자 보고지를 건네받은 의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두 분 모두 환자분 자녀가 맞나요?”“네.”시윤은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왜 그러시죠? 혹시 저희 모두 맞지 않나요?”“아니요.”의사는 승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드님은 매치가 잘 되니 이 보고서를 들고 간호사를 찾아가세요.”본인은 매치율이 떨어진다는 말에 시윤은 이내 실망했다. 물론 저와 오빠 중 누가 이식해 주든 결과는 같을 테지만 그래도 어머니에게 미안한 만큼 뭐라도 해주고 싶었으니까.하지만 결과가 나왔으니 시윤은 이내 받아들인 채 승우와 함께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의사가 시윤을 불러 세웠다.“따님분은 잠시만요. 환자분에 관해 전할 말이 있습니다.”‘뭐지? 다 끝났다고 했잖아?’시윤은 의아했지만 의사에 대한 존중과 믿음으로 남게 되었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의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따님분은 어머니와 매치가 전혀 안 되는 거로 나옵니다.”“그게 뭐가 문제인데요?”“정상적인 자녀라면 어머니와 적어도 절반 정도는 일치하다고 나와야 하는데, 따님분 같은 경우는 완전히 불일치로 나옵니다. 따님분은 환자분 친딸이 아닐 수 있어요.”“네?”시윤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선생님, 이 보고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제가 엄마 딸이 아니라니. 그럴 리 없어요.”의사는 견식이 많은지라 냉정하게 대답했다.“물론 따님분도 당연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겠죠. 하지만 양현숙 화자분이 따님분 친엄마가 아니라는 뜻입니다.”말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시윤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작 한마디로 20여 년간 엄마로 알고 지낸 사람을 남이라고 단정 짓다니.한참 동안 마음을 추스른 시윤은 겨우 다시 제 목소리를 찾았다.“그럼 제 오빠는요?”“오빠분은 양현숙 환자분과 모자 관계가 맞습니다.”벼락이라도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은 시윤을 보자 의사는 곧바로
시윤의 표정에서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양현숙은 시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물었다.“물어봐, 뭐든 물어봐도 돼.”양현숙은 늘 그렇듯 다정한 말투로 말했지만 시윤이 오히려 말을 꺼내지 못했다.이에 고개를 돌려 양현숙의 눈을 피하고 나서야 끝내 입을 열었다.“엄마, 저 엄마 딸 아니에요?”양현숙은 미처 반응하지 못한 듯 싱긋 웃었다.“우리 딸이 어떻게 엄마 딸이 아니야?”하지만 웃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는지 어조가 조금 느려졌다.“어, 그건 왜 묻는 건데?”말을 꺼낸 마당에 시윤은 결실이라도 내린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엄마 빈혈이래요.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이 필요해서 오빠랑 같이 샘플 검사하러 갔는데 의사가 저랑 엄마의 세포가 완전히 불일치 하대요. 보고서 상으로만 보면 모녀가 아니래요.”시윤은 제가 말하고도 황당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 20몇 년간 엄마라고 불렀는데 고작 보고서 한 장으로 모든 걸 말살하려 하다니? 게다가 엄마든 아빠든 그동안 나를 얼마나 사랑해 줬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시윤은 제 말 때문에 어머니가 속상해하기라도 할까 봐 얼른 말을 보탰다.“그런데 보고서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저 인터넷에서 이런 기사도 몇 번 봤어요. 기계가 고장 났을 수도 있고.”한참 동안 말했는데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윤은 눈을 들어 양혀숙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빨갛게 물들어 있는 양현숙의 눈시울을 보고 흠칫 놀랐다.“엄마, 왜 그래요? 혹시 제가 헛소리했다고 화났어요? 다 제 탓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소리 안 할게요.”시윤은 심지어 양현숙의 손을 저에게 갖다대며 때리라고까지 했지만 양현숙은 오히려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이미 알았으니 엄마도 속이지 않으마. 너 내 친딸 아니야.”“...”시윤은 순간 머리가 ‘펑’하고 터지는 것만 같았다.‘네가 엄마 딸이 아니라고?’‘그럼 나는 누구지? 내 엄마 아빠는 어디 있지?’양현숙의 목소리는 솜이라도 끼어 있는 듯 흐릿하게 시윤의 귀에
몇 년 전, 이성호한테 그런 사고가 났을 때 양현숙은 암시했던 적이 있다.‘만약 네가 내 친자식이 아니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을 텐데. 차라리 지금이라도 떠나.”그때 시윤은 이렇게 대답했었다.“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만약 혼자 도망가서 다시는 가족들 못 보면 제 인생도 희망이 없어지잖아요. 엄마, 저 꼭 식구들 데리고 해원 벗어날 거예요.’사실 그때 이미 모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그 시각, 아이처럼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은 어머니를 보며 시윤은 자책하던 마음마저 사라졌다.본인이 양현숙의 친딸인지 아닌지는 사실 별 의미 없었다. 그동안 양숙이 저를 친딸처럼 키워준 덕에 원래 보육원에서 자라야 할 그녀가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보배로 자라왔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더 바랄 것도 없다.시윤은 먼저 양현숙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무슨 말 하시는 거예요? 지난 20여 년간 우리 가족이 저를 얼마나 아껴주고 사랑해 줬는데요. 친딸로 키워준 게 아니라, 후원해 주었다 해도 저 절대로 우리 가족 안 버려요! 엄마는 영워한 제 엄마예요.”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 앞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어느새 돌아왔는지 승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승우 손에 든 죽은 바닥에 떨어져 김을 폴폴 풍기고 있었고, 승우는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은 시뻘게져서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심지어 늘 듣기 좋던 맑은 목소리에 모래라도 섞인 듯 많이 갈라져 있었다.“엄마, 방금 뭐라 했어요? 윤이가 엄마와 아빠가 낳은 딸이 아니라니요?”양현숙은 너무 큰 반응을 보이는 이승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윤이 네 아빠랑 내가 낳은 딸이 아니야. 그런데 그동안 함께 지내왔으면 내 딸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앞으로도 동생 예뻐해야 한다, 알았지?”늘 다정한 성격을 갖고 있는 데다 시윤을 아끼던 승우라면 당연히 이 말에 두말없이 승낙했을
시윤이 왜 미안한지 되물을 새도 없이 승우는 몸을 돌려 황급히 병실을 떠났다.시윤은 그런 승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오빠가 왜 갑자기 저러지?’한편 승우는 그 길로 곧장 집으로 돌아가 미친 듯 상자를 뒤져 편지를 찾아 꺼내 들었다.새빨갛게 충혈된 데다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볼 수 없었지만 그 속에 적인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승우의 심마로 되어 보지 않아도 줄줄 외울 수 있었다.[여보, 승우가 윤이한테 남매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듯하오. 혈육을 나눈 남매 사이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니 큰 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꼭 윤이에게 전해주오...]바로 이 말 때문에 승우는 이 편지를 따로 꽁꽁 숨겨두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밤마다 이 편지를 어머니에게 들키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다.특히 시윤이 자기가 믿고 의지하던 오빠가 저를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는지 느끼고 역겨워하는 모습.심지어는 이 편지를 손에 들고 역겹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오빠가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역겨워요.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그때 교통사고로 확 죽어버리지 그랬어요.’ 라는 말을 퍼붓는 꿈을 꿀 때면 너무 고통스러웠다.시윤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심지어 아버지도 모두 함께 서서 차갑고도 경멸에 찬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꿀 때면 승우는 설명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매번 그의 심장은 낱낱이 파헤쳐져 그 속에 숨어 있는 기형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요 몇 년뿐만 아니다.솔직히 동생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승우는 이런 날이 올까 봐 늘 불안해했었고, 그래서 더 좋은 오빠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심지어 시윤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에도 오빠의 입장으로 조언도 해주고 위로도 해줬다.그런데 그간의 모든 게 갑자기 무의미해졌다.그와 시윤은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다.그러니까 그때 조금만 더 용기 내어 다가갔더라면 뒤의 모든 게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승우는 편지를 손에
양현숙의 말에 시윤은 가슴이 요동쳤다.‘다시 화해하라고?’‘화해하면 도준 씨가 치료 안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하지만 설레기도 잠시, 시윤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그렇게 한참 동안 생각하던 시윤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엄마, 저 아빠랑 혈연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지난 20 몇 년 동안 아빠가 저한테 준 사랑은 진짜잖아요. 저도 아빠 정말 존경하고요. 만약 아빠가 친 아빠가 아니라는 이유로 바로 모른 척하는 건 너무 비겁해요.”“아빠는 신경 안 쓰실 거야...”“엄마.”시윤은 양현숙의 말을 잘랐다.“저 집에 가서 집부터 챙겨 올게요.”말을 마친 시윤은 뭘 더 말하려는 양현숙을 뒤로 한 채 곧바로 병실을 나섰다.하지만 문을 닫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물론 피를 나눈 부녀지간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양현숙과 이성호 부부가 시윤을 진심으로 대한 건 사실이다.양현숙이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도준을 받아주라고 하는 것도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고, 시윤이 도준을 다시 받아줄 수 없는 것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어머니더러 살인범을 마주하라고 할 수 없으니까.어쩌면 도준이 이성호를 죽게 만든 그날 두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안 좋게 정해졌을지도 모른다.마음을 가다듬은 시윤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집안은 온통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시영은 요즘 학업 때문에 학교 숙소에서 지내느라 집에 오지 않는다. 때문에 승우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한 시윤은 거실 불을 켜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러다가 승우의 방을 지날 때 희미하게 생 나오는 방 안 불빛을 빌어 안에 승우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것도 침대에 기댄 채 바닥에 넋을 잃은 채로.시윤은 어리둥절했다.“오빠?”승우는 시윤의 목소리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빛을 등지고 있은 탓에 얼굴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오후에 자기의 출생을 처음 알았을 때 시윤은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해 승우를 관찰할 겨를이 없었다,그런데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윤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 이건 왜 다 꺼냈어?”바닥에 앉아 있던 승우는 천천히 눈을 들어 시윤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고 눈가는 어느새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는 평소 단정하고 상냥하던 오빠와는 거리가 멀었다.시윤을 바라보는 승우의 눈에는 시윤이 그간 저를 오빠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던 모습들이 언뜻언뜻 지나갔다.유치원 문 앞에서 그를 꼭 안고 울던 모습,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며 쪼르르 달려와 고자질하던 모습, 중학교 때 밖에 나가 놀기 위해 두 손을 꼭 모으고 도와달라고 부탁하던 모습, 그리고 고등학교 때 제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반항하던 모습...한 장면 한 장면 모두 눈앞에 있는 시윤과 겹쳐 보였다. 빼어난 외모와 단단한 마음, 모든 게 너무 완벽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가슴에 사무치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승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가볍게 물었다.“윤아,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해? 나... 좋아해?”이 질문을 승우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숨겨 두었다. 너무 오래 숨겨두고 있어 마치 캐비닛 뒤에 떨어져 있던 진주 목걸이처럼, 미처 감상도 하기 전에 덮쳐 오는 먼지 때문에 기침하고 눈을 뜨지 못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승우의 질문에 시윤의 안 좋은 예감은 더욱 강렬해졌다. 이에 잠깐 머뭇대다 진지하게 말했다.“오빠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오빠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이렇게 좋은 오빠가 있다고 다 부러워했어. 내가 엄마 아빠 사이에서 난 친딸이든 아니든 난 오빠를 친 오빠로 생각할 거야.”질문한 순간부터 숨죽이고 대답을 기다리던 승우는 시윤의 답이 떨어지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굳게 닫힌 눈꺼풀 사이에서 눈물이 새어 나왔다.승우도 사실 시윤이 저를 그저 오빠로 생각한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윤이 저를 좋아하면 어떨까? 만약 남매 사이 때문에 마음을 내비
‘그 편지만 꺼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을 거야.’순간, 승우의 마음속 어두운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그래, 나 빼고 편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어.’‘내가 다시 오빠로 돌아가면, 시윤의 실망하는 표정도 볼 필요 없고 계속 만날 수 있어.’승우에게는 이거면 충분했다.그렇게 마음속 생각을 천천히 찍어 누를 때, 시윤이 갑자기 승우의 팔을 잡아 들었다.“오빠? 나 때문에 팔 다친 건 아니지? 아프면 꼭 나한테 말해야 해.”시윤의 말투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맑고 깨끗한 두 눈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승우를 비추었다.시윤은 그가 어릴 때부터 아끼던 동생이며, 그 누구보다 더 소중히 여겨왔다. 그런데 사리사욕 때문에 시윤이 고통을 겪게 할 수 없었다.승우는 눈을 내리깔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시윤아, 모레 내 생일이야.”승우가 갑자기 생일 얘기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시윤은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긴장을 풀었다.‘내가 친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라 갑자기 혼란을 느꼈나 보네.’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응, 알아. 내가 오빠 주려고 선물도 준비했어. 이번엔 진짜 선물이야.”승우는 한시름 놓은 듯한 시윤의 표정을 보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그래, 나도 너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나중에 알게 될 거야.”승우는 끝내 편지를 내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기적이고 싶었다. 적어도 시윤의 마지막 생일이 지날 때까지는.나중에 시윤이 알게 되고 관계를 끊자고 하든, 아니면 죽으라고 하든, 모두 응당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했다....늦은 밤, 시윤이 해원의 거리를 지나 병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그때.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밤길을 환히 비춰주며 도시의 네온사인과 함께 칠흑 같은 통유리창 안쪽을 비추고 있고경성에서 민혁은 유리창 옆에 선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도준 형, 시윤 씨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대, 그래서 떠난 거야. 사실 떠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