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두 사람의 결말을 예상해서인지, 아니면 도준의 분위기에 휩싸여서인지 하윤은 점점 달아오르는 몸으로 도준에게 매달려 그와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다.심지어 침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현관 벽에 밀쳐진 채로 도준과 서로의 호흡을 나눴다.도준은 하윤의 목덜미에 울긋불긋한 꽃을 새기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제 품에 녹일 것처럼 굴었다.그러다 문뜩 거친 숨소리를 낸 순간, 흐리멍덩해 있던 하윤은 정신이 돌아왔는지 뒤늦게 몸부림쳤다.“여기서 싫어요... 침실에 들어가서...”도준은 하윤과 입술을 맞댄 채로 피식 웃었다.“나 지금 들어가고 있잖아.”“...”긴긴 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침실 안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는 방 안 공기마저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벽에 걸려진 벽시계에 뿌연 수증기가 한층 뒤덮였고, 분침과 초침은 헤어지기 싫은 것처럼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그러다 어느덧 새벽 5시가 되었을 때.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는 하윤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는 미처 치지 못한 커튼을 멍하니 바라봤다.“날이 밝았네...”낮게 중얼거리는 하윤의 뒤에서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에 입맞췄다.“저 샤워할래요.”하윤이 피곤한 듯 버둥거리며 이제 막 움직이려 할 때, 도준의 팔이 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제 품에 다시 내리 눌렀다.땀 맺힌 도준의 가슴과 하윤의 등이 꼭 붙는 순간 질척거리고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확 덮쳤다.“이따가 씻어.”도준의 욕망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하윤은 흠칫 몸을 움츠렸다.“저 병원 가야 해요.”도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하윤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아직 해도 안 떴어.”다시 창밖을 보니, 이제야 겨우 하늘이 밝아지더니 태양이 점점 구름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아침이 밝아오는 시각, 꼭 끌어안은 남녀.분명 로맨틱하고 따뜻해야 할 장면이지만 왠지 쓸쓸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6시반,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7시에 머리를 말리고 마지막 옷을 가방에 넣은 하윤
도준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솔직히 맞는 말이다. 도준은 분명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한들 어쩌겠나?‘규칙은 남을 위해 정하는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1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가뜩이나 얌전히 있지 못하는 하윤을 1년 동안 풀어주는 건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거랑 다를 게 없다.‘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곁에 가둬둘까? 안 될 것도 없지 않나?’‘나랑 결혼했으면 이렇게 될 거란 건 알았어야지.’‘나 건드린 그날부터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쯤은 알았어야지.’하지만 하윤을 놓아준 순간, 새하얗게 질린 하윤의 얼굴을 본 순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생각은 다시 사라져버렸다.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하윤을 진짜 부러뜨리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강제로 곁에 묶어두면 평생 미움을 받을 거고.‘수지가 안 맞네.’잠깐 멈춰 있던 도준은 끝내 현관에 걸려 있던 외투를 들어 하윤에게 입혀 주었다.하지만 너무 큰 덩치 차이 때문에 헐렁한 옷을 보며 하윤은 몸을 버둥댔다.“괜찮아요, 그렇게 안 추워요.”도준은 하윤의 몸부림을 무시한 채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오늘 눈 와.”이에 하윤도 결국은 인형처럼 도준에게 제 몸을 맡겼다.그러던 그때, 도준이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는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 봐.”뻣뻣한 자세로 문을 나선 하윤은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뭔가 눈치챈 듯 뒤돌아봤다.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도준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 순간 하윤은 갑자기 도준의 품속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고개만 돌리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그때,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하윤은 엘리베이터를 흘끗 보고는 추억이 담긴 집을 다시 바라봤다.하지만 추억에 젖어 있던 눈을 감았다 다시 뜨더니 굳은 결심이라도 내린 듯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이건 결국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다.빌라를 나서자 눈꽃이 몸 위로 떨어졌다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하윤은 고개를 들어
승우가 평소 즐겨 입던 흰 셔츠를 꺼내던 하윤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응, 당연하지. 옷장 문 안 열면 옷 어떻게 챙겨?”“필요 없어. 내가 집에 돌아가서 갈아입을 테니까 챙겨올 필요 없어.”“어? 나 병원 가는 김에 챙겨가는 거야. 옷도 이미 다 찾았어.”“필요 없다니까! 옷장 건드리지 마!”갑자기 터져 나온 성난 말투에 하윤은 손을 멈췄다.어릴 때부터 제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던 오빠였는데. 옷장이 아니라 오래 공을 들여 키운 게임 캐릭터를 달라고 해도 선뜻 주고, 핸드폰마저 바꿔 사용하던 오빠였는데 옷장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너무 수상했다.“오빠, 옷장에 손 좀 댄 거로 왜 그래?”그제야 승우도 자기가 너무 흥분했다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침착할 수 없는 상황에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이 나 대신 옷 골라주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 너 얼른 병원에 와. 내가 직접 돌아가서 갈아 입을게.”승우는 본인이 애원하는 말투로 말하고 있다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했다.오빠의 뜬금없는 태도에 의아했지만, 하윤은 끝내 승우의 말에 따랐다.“그럼 안 챙겨간다?”그제야 승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얼른 와.”“응,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하윤은 승우의 옷을 다시 제 자리에 걸어 두었다.하지만 문을 닫기 전 안쪽을 살펴보니 오빠의 그런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그냥 평범한 상자잖아,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지?’...하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양현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하윤을 본 승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윤아...”승우의 눈빛은 평온하고 여유롭던 평소와 달리 조급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너 괜찮지?“괜찮지 그럼,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하윤은 어리둥절한 듯 대답하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오빠 오늘 되게 이상한 거 알아? 대체 왜 그래?”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윤의 모습에 승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싱긋 웃었다.“미안해, 어제 잠을 설쳐서 조금 예민했나
하윤은 감정을 애써 억눌렀지만 도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엄마, 도준 씨가 앞으로 1년 동안 내 앞에 안 나타나겠다고 약속했어요. 아직은 이혼할 방법이 없어요, 미안해요...”흐느껴 울며 참회하는 하윤을 보자 양현숙은 눈을 감으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이혼하려 하는 게 엄마 때문이야? 아니면 네 생각이야?”“네?”하윤은 순간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딸을 보자 양현숙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미소 지었다.“엄마가 미안해. 어제 기분이 안 좋아 우리 딸한테 피해줬네. 꼭 이혼하라는 뜻 아니야. 만약... 만약 정말 민도준 사랑하면, 엄마는 괜찮아.”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그 사람 아빠를 죽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이성호의 얘기를 꺼내자 양현숙은 또 다시 흐느꼈다.“그래서 그러는 거야. 네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너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민도준이 너 좋아한다는 거 엄마 눈에도 보여, 너도 민도준 좋아하고. 만약 엄마 때문이라면 엄만 괜찮아.”“...”억지미소를 짓는 양현숙을 보자 하윤은 마음이 쓰라렸다.어머니의 희생이 오히려 하윤을 더 미안하게 했다.그 순간 갑자기 은우가 떠올랐다. 은우도 똑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내 운명까지 짊어질 필요 없어. 내 선택은 내가 직접 한 거야, 너랑 상관없어. 민도준과도 상관없고.’‘좋아하면 만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윤아,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따지고 보면 하윤의 사랑은 지금껏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었다.예전에는 운우였다면, 지금은 어머니다.이 감정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하윤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선택이에요.”“정말이야?”양현숙은 믿지 않았다.“네.”하윤은 눈을 내리깔았다.“나도 아버지를 죽게 만든 범인을 받아줄 수 없어요. 엄마, 우리 앞으로 우리 앞길만 봐요.”...이번 겨울의 첫눈으로 인해 해원은 한층 더 추워졌다.
하윤이 들어갔을 때 안에는 윤영미와 지난번 오디션에서 봤던 두 선생님 외에 처음 보는 얼굴도 4명이나 늘어났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외국인이었다.4 대의 카메라가 사각에 세워져 있는 데다, 주위가 어두컴컴하여 현장에는 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하윤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심사위원들을 향해 허리 숙이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하윤의 인사에 지난번 오디션 때 봤던 여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또 만났네요.”하윤은 윤영미를 향해 도움을 갈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이분은 장해란 선생님이셔, 이번 ‘지젤’ 안무를 짠 안무가 선생님.”“장 선생님, 안녕하세요.”“네, 안녀앟세요.”장해란은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우선 기본기부터 체크할까요? 이제 곧 나오는 음악에 맞춰 데벨로페와 애티튜드 등과 같은 기본기를 보여주세요...”“준비되었으면 시작하겠습니다.”음악이 흐르자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기본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지난번 즉흥 공연 때는 극단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힘들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몰입했다. 팽팽한 발끝과 안정적인 코어, 심지어 동작 하나하나 모두 완벽했다.게다가 단순한 기본기뿐만 아니라 음악에 따라 호흡을 바꾸며 박자에 녹이기까지 했다.지난번에 하윤의 기본기를 지적했던 남자 선생님은 하윤의 모습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많이 발전했네요. 기계적인 동작이 아니라 본인만의 생각도 깃들어 있는 것 같고. 발전이 너무 빠른데요.”그때 윤영미가 자랑스러운 듯 끼어들었다.“발전한 게 아니라 원래 수준으로 돌아온 거예요. 얘가 몇 년 동안 시간을 낭비해 이제야 다시 본모습을 되찾았거든요.”음악이 멈추자 하윤은 마무리 인사를 했고,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긴 뒤 다음 테스트인 감정 전달로 넘어갔다.장해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여기 테스트할 상황극이 적혀 있으니 하나 추첨해서 보여주세요. 연기는 자유롭게 하면 돼요. 심사위원 분들은 시윤 양의 연기로 연상되는 키워드를 적을
심사를 하던 선생님들은 하윤의 연기에 감동해 곧바로 감상을 써 내려갔다.하윤이 고른 쪽지를 확인한 장해란이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정말 생동하게 표현했네요.”7명의 선생님 중 4명은 [생명의 끝]이라고 적었고, 몇 명은 [돌고 도는 인생], [짧은 인생]이라고 적었다.물론 조금의 차이가 존재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음악을 동작으로 표현하는데 이 정도는 정말 대단한 거다.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막 카메라 테스트를 진행했다.하윤이 뽑은 것은 ‘지젤’의 한 대목인데, 아름다운 시골 소녀 지젤이 자신과 교제한 농부가 이미 약혼을 한 귀족이라는 걸 발견하고 비통해하는 신이었다.이건 하윤이 요즘 느끼는 감적오가 무척 유사했기에 하윤은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음악이 흘러나오자 하윤은 곧바로 지젤로 변했다.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지젤은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한테 바로 빠져버렸다.하지만 세상에 두 사람의 사랑을 알리려는 순간, 약혼녀가 남자 주인공을 찾아오는 바람에 모든 게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된다.사랑도, 꿈도, 모든 게 가짜였다.연기가 끝난 뒤, 하윤은 여전히 슬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돌아왔다.그 뒤 은정과 소은도 순서대로 들어가 오디션을 봤다.사실 세 명의 주인공 후보에 뽑힌 것만으로도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설명할 수 있다.소은의 역동적인 연기와 은정의 성숙한 연기 모두 칭찬을 받았다.오디션이 끝나고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선생님들은 점수를 집계하기 시작했다.긴장하지 않던 하윤마저 뭔가 토론하며 저희 쪽을 힐끔거리는 심사위원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긴장해 났다.심지어 벽에 걸린 시계도 점점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졌다.한바탕 마음 졸이고 나니 윤영미가 겨우 노트를 내려놓았다.“셋 다 고생했어. 완성도도 높고 모두 훌륭했어. 테크닉과 카메라 테스트 점수는 다들 비슷하
“죄송합니다. 죄송해요.”하윤이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연신 사과했다.그러다가 하윤을 보자 약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는 눈을 반짝였다.“어? 선배, 오전 오디션 끝났어요?”남자는 극단의 남자 무용수 임우진인데, 평소 훈련을 같이 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이다.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쌤들 식사하러 갔어. 너도 오디션 보러 왔어?”“네.”우진은 머리를 긁적였다.“선배가 여주인공으로 정해졌다면서요? 축하해요.”“고마워.”하윤은 싱긋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나 늦어서 먼저 돌아가 봐야 해.”“아, 네, 일 보세요.”“오후에 잘해.”하윤의 다정한 응원에 우진은 자신감이라도 생긴 듯 눈웃음을 쳤다.“네, 꼭 열심히 할게요!”...이 모습은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민혁은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는 남자를 보며 어색한 듯 눈을 굴렸다.그때 도준이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아무 일 없다며? 이게 아무 일 없는 거야?”“이건 사고야, 사고. 하하하...”민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저 녀석은 어디서 튀어나왔대? 하필이면 지금 나타나서 나 엿 먹일 건 또 뭐야?’사실, 도준은 경성에 밀린 일이 많아 한번 돌아갔었다. 때문에 그동안 민혁이 해원에 남아 하윤을 감시했다.그런데 고작 반나절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한편, 밖으로 나온 하윤은 그동안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어쩌다 뜻대로 되는 일이 생겼으니 그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그러던 그때, 하윤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믿기지 않는 듯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저 사람, 도준 씨인 것 같은데?’‘도준 씨가 왜 해원에 있지?’놀라움과 동시, 하윤은 하필 도준을 발견한 제 눈을 원망했다.하지만 도준 같은 사람은 존재감 때문에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다. 높은 키, 매혹적이면서도 진한 이목구비, 그리고 불량배 같으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까
“지금...”이제 막 어디 있냐고 물으려던 하윤은 두 사람의 현재 관계를 떠올리자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1년 동안 안 만날 거라면서요?”떠들썩한 소리 속, 남자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느긋했다.“만난 건 아니지, 우연히 마주친 거지.”도준의 말투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뻔뻔했다. 심지어 룰을 어긴 것에 대한 미안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하윤은 그런 도준을 보며 참지 못한 듯 물었다.“극단 앞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거라고요?”“응.”“...”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라는 생각에 하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볼 일 없을 테니 전화 끊을게요.”“잠깐만.”도준은 사람들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작은 머리통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주인공으로 뽑히면 사탕 주겠다고 했잖아.”“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사탕 안 먹어요.”“다 큰 어른인거 알아. 어른이 먹는 사탕이야.”“지금 그걸...”‘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따지려는 순간, 안내음이 울렸다.“다음 역은 의성입니다.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목적지에 도착하여 하윤도 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아직 집에서 저를 기다릴 엄마를 생각하자 하윤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는 인파를 따라 입구로 향했다.그때, 누군가 시간에 쫓기는 듯 급히 지나가면서 밀치는 바람에 하윤은 몸을 비틀거렸고, 때마침 뒤에서 남자가 손을 뻗어 하윤을 받쳐주었다.익숙한 품이 등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도준인 걸 알 수 있었다.다음 순간, 남자의 손은 기회라도 엿보는 듯 점점 노골적으로 하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품에 가두었다.이윽고 뜨거운 숨결이 귀에서 느껴지며 귓바퀴를 훑었고, 도준의 손길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면서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제야 하윤은 흠칫 놀라 버둥댔다.“이거 와요.”“너무 붐벼서 그럴 수 없어.”도준은 하윤의 어깨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녀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나 제대로 서지 못해서 그러는데, 좀 기댈게.”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