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를 하던 선생님들은 하윤의 연기에 감동해 곧바로 감상을 써 내려갔다.하윤이 고른 쪽지를 확인한 장해란이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정말 생동하게 표현했네요.”7명의 선생님 중 4명은 [생명의 끝]이라고 적었고, 몇 명은 [돌고 도는 인생], [짧은 인생]이라고 적었다.물론 조금의 차이가 존재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음악을 동작으로 표현하는데 이 정도는 정말 대단한 거다.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막 카메라 테스트를 진행했다.하윤이 뽑은 것은 ‘지젤’의 한 대목인데, 아름다운 시골 소녀 지젤이 자신과 교제한 농부가 이미 약혼을 한 귀족이라는 걸 발견하고 비통해하는 신이었다.이건 하윤이 요즘 느끼는 감적오가 무척 유사했기에 하윤은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음악이 흘러나오자 하윤은 곧바로 지젤로 변했다.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지젤은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한테 바로 빠져버렸다.하지만 세상에 두 사람의 사랑을 알리려는 순간, 약혼녀가 남자 주인공을 찾아오는 바람에 모든 게 가짜였다는 걸 알게 된다.사랑도, 꿈도, 모든 게 가짜였다.연기가 끝난 뒤, 하윤은 여전히 슬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그러던 그때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윤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돌아왔다.그 뒤 은정과 소은도 순서대로 들어가 오디션을 봤다.사실 세 명의 주인공 후보에 뽑힌 것만으로도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설명할 수 있다.소은의 역동적인 연기와 은정의 성숙한 연기 모두 칭찬을 받았다.오디션이 끝나고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선생님들은 점수를 집계하기 시작했다.긴장하지 않던 하윤마저 뭔가 토론하며 저희 쪽을 힐끔거리는 심사위원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긴장해 났다.심지어 벽에 걸린 시계도 점점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졌다.한바탕 마음 졸이고 나니 윤영미가 겨우 노트를 내려놓았다.“셋 다 고생했어. 완성도도 높고 모두 훌륭했어. 테크닉과 카메라 테스트 점수는 다들 비슷하
“죄송합니다. 죄송해요.”하윤이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연신 사과했다.그러다가 하윤을 보자 약 2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는 눈을 반짝였다.“어? 선배, 오전 오디션 끝났어요?”남자는 극단의 남자 무용수 임우진인데, 평소 훈련을 같이 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이다.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쌤들 식사하러 갔어. 너도 오디션 보러 왔어?”“네.”우진은 머리를 긁적였다.“선배가 여주인공으로 정해졌다면서요? 축하해요.”“고마워.”하윤은 싱긋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나 늦어서 먼저 돌아가 봐야 해.”“아, 네, 일 보세요.”“오후에 잘해.”하윤의 다정한 응원에 우진은 자신감이라도 생긴 듯 눈웃음을 쳤다.“네, 꼭 열심히 할게요!”...이 모습은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민혁은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지 얼마 안 되는 남자를 보며 어색한 듯 눈을 굴렸다.그때 도준이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아무 일 없다며? 이게 아무 일 없는 거야?”“이건 사고야, 사고. 하하하...”민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저 녀석은 어디서 튀어나왔대? 하필이면 지금 나타나서 나 엿 먹일 건 또 뭐야?’사실, 도준은 경성에 밀린 일이 많아 한번 돌아갔었다. 때문에 그동안 민혁이 해원에 남아 하윤을 감시했다.그런데 고작 반나절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한편, 밖으로 나온 하윤은 그동안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어쩌다 뜻대로 되는 일이 생겼으니 그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그러던 그때, 하윤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믿기지 않는 듯 길 건너편을 바라봤다.‘저 사람, 도준 씨인 것 같은데?’‘도준 씨가 왜 해원에 있지?’놀라움과 동시, 하윤은 하필 도준을 발견한 제 눈을 원망했다.하지만 도준 같은 사람은 존재감 때문에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다. 높은 키, 매혹적이면서도 진한 이목구비, 그리고 불량배 같으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까
“지금...”이제 막 어디 있냐고 물으려던 하윤은 두 사람의 현재 관계를 떠올리자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1년 동안 안 만날 거라면서요?”떠들썩한 소리 속, 남자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느긋했다.“만난 건 아니지, 우연히 마주친 거지.”도준의 말투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뻔뻔했다. 심지어 룰을 어긴 것에 대한 미안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하윤은 그런 도준을 보며 참지 못한 듯 물었다.“극단 앞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거라고요?”“응.”“...”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라는 생각에 하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볼 일 없을 테니 전화 끊을게요.”“잠깐만.”도준은 사람들 사이에 언뜻언뜻 보이는 작은 머리통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주인공으로 뽑히면 사탕 주겠다고 했잖아.”“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사탕 안 먹어요.”“다 큰 어른인거 알아. 어른이 먹는 사탕이야.”“지금 그걸...”‘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따지려는 순간, 안내음이 울렸다.“다음 역은 의성입니다. 내리실 분들은 미리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목적지에 도착하여 하윤도 내릴 준비를 해야 했다.아직 집에서 저를 기다릴 엄마를 생각하자 하윤은 다시 입을 꾹 다물고는 인파를 따라 입구로 향했다.그때, 누군가 시간에 쫓기는 듯 급히 지나가면서 밀치는 바람에 하윤은 몸을 비틀거렸고, 때마침 뒤에서 남자가 손을 뻗어 하윤을 받쳐주었다.익숙한 품이 등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도준인 걸 알 수 있었다.다음 순간, 남자의 손은 기회라도 엿보는 듯 점점 노골적으로 하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제 품에 가두었다.이윽고 뜨거운 숨결이 귀에서 느껴지며 귓바퀴를 훑었고, 도준의 손길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면서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제야 하윤은 흠칫 놀라 버둥댔다.“이거 와요.”“너무 붐벼서 그럴 수 없어.”도준은 하윤의 어깨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녀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나 제대로 서지 못해서 그러는데, 좀 기댈게.”
하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양현숙만 보였다.“오빠는 어디 갔어요?”그 질문에 양현숙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오빠는 학교에서 바로 레스토랑으로 갈 거래. 요즘 엄청 바쁘거든.”승우가 참관 수업을 열기 시작한 뒤로부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학부모들이 날로 늘어났다.그도 그럴 게, 티켓 구하기도 어렵던 연주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참관 수업을 한다니, 자식을 연주자로 키우려는 부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관수업에 참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그중에는 심지어 예술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학생들마저 여럿 있었다.때문에 승우는 일주일 동안 꽉 찬 스케줄로 강의를 준비해야 했다.심지어 줄을 서서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해오는 사람들을 제외한 상황이었는데도, 이 정도로 바쁜 일과를 보내야 했다.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만약 팔을 다치지 않았다면 승우는 지금쯤 세계적인 무대에서 공연을 하느라 참관 수업을 열 시간조차 없었을 거다. 그러니 선생님이 된 이 상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고 나서야 겨우 도착한 승우는 꽃다발을 하윤에게 내밀었다.“축하해.”“뭐야? 지각했으면서 꽃으로 퉁치려는 거야?”하윤은 꽃향기를 맡더니 콧방귀를 뀌었다.그 말에 승우는 피식 웃었다.“선물은 내가 월급날 사줄게.”그제야 하윤은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때 옆에 있던 양현숙이 끼어들었다.“차용증이라도 써, 네 오빠 월급 꽤 높아, 절대 봐주지 마.”교장은 일인당 16만원이라는 가격으로 승우의 강연 가격을 정해주었다. 소비 수준이 높은 해원에서 스타 강사라는 이름으로 사람당 20만원에서 40만원을 받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16만원은 무척 합리적인 가격이다.게다가 자녀 교육에는 늘 열과 성의를 다하는 부모님들이 아들 딸을 위해 이렇게 대단한 여주자의 강의에 돈을 쓰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하지만 결국은 학생이 너무 많이 모이는 바람에, 많은 부모님들은 아는 사람끼리 소조를 묶어 2대1 과외까지 신청했다
저녁 9시, 민혁은 도준을 배웅하러 공항으로 향했다.최근 민씨 집안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민시영 혼자서는 놈들을 상대하지 못해 도준이 직접 나서야 했다.그때 민혁이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저기, 도준 형, 걱정하지 마. 내가 하윤 씨 주위에 수컷은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잘 감시할게. 모기라도 수놈이면 바로 죽여버릴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의 핸드폰이 반짝이더니, 위에 [하윤 씨]라는 세 글자가 떴다.그것도 이렇게 늦은 야밤에 말이다.도준은 그 순간 민혁을 빤히 바라봤다.“모기라도 수놈이면 어쩌겠다고?”민혁은 몸을 흠칫 떨며 울상을 지었다.‘하윤 씨, 전화를 해도 왜 하필 지금 하세요?’그러다가 속으로 울부짖으며 전화를 받았다.“네, 하윤 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시간을 확인하니 밤 9시가 넘었다. 그제야 하윤은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혹시 지금 예기하기 어렵나요? 그럼 내일 다시 얘기해요.”“아니요. 지금 말하셔도 돼요.”이 상황에 확실히 얘기하지 않으면 민혁은 오늘부로 가을과 연인 관계를 쫑내게 될지도 몰랐다.하지만 민혁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하윤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혹시 내일 만날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제가 찾아 갈게요.”민혁은 순간 식은땀이 흘러 감히 옆으로 시선을 도리지도 못했다.“저... 저는 무슨 일로...”“도준 씨 물건 돌려주고 싶은데, 대신 부탁하려고요.”그 말에 민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일 때문에 전화한 거였구나. 놀랐잖아요.”민혁의 말에서 하윤은 곧바로 뭔가 눈치챘다.“혹시 지금 같이 있어요?”“어, 네. 지금 옆에 있는데...”민혁이 우물쭈물 말하는 사이, 도준이 어느새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왔다.“선물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갖다 버려.”“...”전화를 끊은 하윤은 짜증 나는 듯 핸드폰을 내팽개 치고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됐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떠날 건데 뭐.’...일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다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혁이 끼어들었다.“저희도 갈 곳이 있거든요. 그 뭐야, 사업 때문에.”그러니까 앞으로 4시간 동안 도준과 함께 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사업 때문이라고? 누가 속을 줄 알고.’하윤은 속으로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통로를 막고 있을 수 없었기에 얼른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자리에 앉은 순간 수아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어? 선배, 어쩐지 극단 식구들이랑 같이 앉지 않는다 했더니, 이미 약속한 사람이 있었네요.”앞뒤 좌석에 모두 극단 식구들인데, 수아가 높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하나 둘 고개를 빼 들고 하윤 쪽을 돌아왔다.심지어 소은도 헤실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아하, 형부였네요. 선배, 벌건 대낮부터 형부랑 애정표현 하면 나 같은 솔로는 어쩌라고 그래요?”그때 뒤에 앉은 후배도 고개를 쑥 내밀었다.“선배 남편 어디 있는데? 앞에서 다 봤으면 들어가, 우리도 좀 보게.”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들자 하윤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고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옆에 앉은 도준은 여전히 여유롭게 행동하며 ‘배려 깊게’ 하윤의 안전벨트까지 매주기 시작했다.도준의 커다란 손은 하윤의 허리를 느긋하게 쓸더니, 가까워진 탓에 긴장하여 움푹 파인 하윤의 쇄골로 시선을 옮겼다.“여보, 안전에 주의해야지.”하윤은 이런 다정함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은 탓에 반항하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그렇게 하윤을 놀리고 있을 때, 도준의 시선은 한 곳에 멈췄다.약 20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두 사람 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흥분한 듯 말을 거는 다른 후배들과 달리, 그 남자애는 오히려 약간 허탈해 보였다.민혁도 마침 임우진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지난번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오늘 보니 확실하네!’그런데 민혁이 발을 뻗어 우진을 넘어뜨리려고 할 때 도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그렇게 예뻐요?”도준의 날카로운 눈빛은 우진의 가면을 사정없이 찢어버렸다. 순간
창가 쪽 자리에 앉은 탓에 하윤은 제 쪽으로 바싹 다가오는 도준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그러다 고개만 살짝 숙이면 입술이 닿을 위치까지 가까워지자 무의식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그 순간 위쪽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여기 밖인데, 키스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눈 떠.”하윤은 그제야 자기가 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버럭 소리쳤다.“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1년 동안 안 볼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나 갖고 장난 친 거예요?”하윤이 조금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이자 도준은 왠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에 하윤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면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자기가 이번에 해외로 가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데, 배웅해 주는 것도 허락 안 할 거야?”곧이어 도준은 긴 손가락으로 하윤의 코를 꼭 집었다.“몇 시간도 안 돼? 왜 이렇게 인색해졌어?”점점 쌓여가던 하윤의 분노는 도준의 몇 마디에 모두 꺼져버렸다. 심지어 솜을 내리친 것처럼 허무하기까지 했다.제 인생을 통제하고, 부속물처럼 생각하던 도준이 지금은 오히려 모든 걸 맞춰주며 기회만 엿보고 있으니.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만 하는 도준에게 익숙해진 하윤은 처음 겪는 도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랐다.한참 동안 말이 없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피식 웃으며 어르고 달랬다.“지금까지 자기만 조건 내걸었잖아. 이번엔 내가 부탁해도 돼?”그 말에 하윤은 순간 경계했다.“뭔데요?”“간단해.”도준은 하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돌돌 말며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계속 지금처럼 본인을 가두고 있어, 담장 밖으로 나갈 생각 하지 말고.”하윤은 잠깐 멍해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무슨 헛소리예요?”이제 막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도준은 하윤의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리더니 엄지 손가락으로 하윤의 입가를 문질렀다.“바람 피우지 마. 그랬다간 상대를 죽여버릴 지도 모르니까.”도준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말투는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그때 잠깐 생각하던 하윤이 입을 열었다.“지금 임우진을 말
항구 도시에 도착하자 공항에는 이국적인 얼굴도 많이 눈에 띄었다.커다란 공간 속 누군가는 재회하고 누군가는 헤어지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이별을 앞둔 커플이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모녀가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었다.게다가 일부 사람은 스케치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어 대는가 하면 배웅을 해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런 환경이라 그런지 이별의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하지만 왠지 모르게 하윤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그 때문에 냉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이 오히려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하윤은 겨우 입을 열었다.“나 이제 가야 해요.”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랜 비행으로 다소 창백해진 하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품에 끌어안았다.하윤은 눈을 내리깔며 제 손에 있는 반지를 바라봤다.빨간 루비는 투명하고 깨끗했으며 반짝반짝 빛나 유독 아름다웠다.서로 가장 뜨겁게 사랑할 때 받은 그 반지는 두 사람의 이별과 만남의 증거와도 같다.‘이것도 주인한테 돌려줘야겠네...’하윤은 반지를 빼 도준의 옷주머니 속에 넣었다.그러고는 도준이 반지를 꺼내려고 하자 손목을 잡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살짝 들어올린 하윤의 눈은 무척이나 평온했다.“도준 씨, 나 놔줘서 고마워요.”“...”지난번에도 하윤은 이렇게 집을 떠났었다. 하지만 그때의 하윤은 적어도 눈에 미련과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태연함과 감사함만 남았다.‘놔줘서 고맙다고?’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지금 그 인사를 받고 영영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뜻이야?”하윤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동의하든 하지 않든, 도준 씨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려 한다면 내가 무슨 수로 저항하겠어요?”지난번과 이번만 해도 그렇다. 아무일 없다는 듯 나타나 하윤의 마음을 어질러 놓고 아직 저 때문에 잠 못 이룬다는 걸 굳이 확인했으니.어찌보면 도준은 하윤을 달래는 거겠지만, 하윤한테는 이 모든 게 상처고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