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진가을 씨, 집에 계세요?”하윤은 28층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숨어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는 민혁을 힐끗 보았다.“진가을 씨 안 계시나 봐요.”민혁은 진가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계셨다면 반드시 제가 당한 만큼 갚아줄 거예요!”하윤은 민혁의 처참한 얼굴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혁은 좀 민망한 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좀 이따 싸가지가 돌아오면 꼭 좀 물어봐 주세요.”“네, 알겠어요.”민혁이 떠난 뒤 하윤은 혼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집안은 또 텅 비어있었다.그녀는 입맛이 없어서 컵 라면을 조금만 먹었다.하윤은 넋을 잃은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안 오시려나?’띵!핸드폰에 현지 뉴스 푸시가 하나 떴다.[왕자와 공주의 동화 같은 사랑.]기자가 쓴 그들의 이야기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다.하윤은 글에 첨부된 사진들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병원의 옥상을 생일 파티 현장으로 꾸며졌고, 공은채는 긴 드레스를 입은 채 도준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다.비록 먼 곳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분위기가 엄청 좋았다.댓글에는 온통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내용들뿐이었다.하윤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핸드폰을 끈 후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욕실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하윤은 음악을 틀고 머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그녀가 도준을 너무 신경 쓴 탓인지, 조그마한 소식조차 그녀를 무너뜨릴 것 같았다.‘윤 쌤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절대 손해 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해.’‘불꽃을 따라 이대로 사라지시지 그래!’“허.”갑자기 들려오는 웃는 듯한 소리에 하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팔짱을 낀 채 욕실 문 앞에 기대어 있는 도준을 발견했다.도준은 마침 그대로 노출된 그녀의 어깨와 목을 쳐다보며 놀
도준의 상의는 이미 물에 젖어 그의 튼튼한 가슴 근육을 드러냈다.그는 호흡이 가쁜 하윤을 보더니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닦았는데, 손엔 피가 조금 묻어있었다.도준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빨이 왜 이렇게 뾰족한 거야?”하윤도 자신이 이렇게 세게 물었을 줄은 몰랐다.하지만 요 며칠 도준이가 한 일을 떠올리자, 사과하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돌려 귀머거리인 척했다.그녀는 흠뻑 젖은 상의를 벗는 도준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뭐 하시는 거예요!”젖은 상의를 바닥에 던지자 ‘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욕실의 조명이 엄청 밝았는데, 그 불빛은 그대로 도준의 보리 색 피부에 쏟아졌다.도준은 욕망이 가득 찬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마사지해준다고 했잖아.”그가 욕조에 들어오자 욕조의 수위가 덩달아 올라갔고, 그는 도망가려는 하윤을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피부색과 몸매는 물속에서 더욱 남달라 보였다.하윤은 한동안 몸을 담그고 있었기에 얼굴이 불그스레했다. 도준이가 그녀의 머리핀을 빼내자, 그녀의 긴 머리가 그대로 욕조 안에 담겨 더욱 유혹적이었다.도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쥐고 키스하려고 했다.하지만 하윤은 이번만큼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하윤이 발버둥 칠수록 도준은 더욱 흥미를 느끼게 되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말했다.“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화난 거 있으면 좀 이따 이야기해도 되잖아.”그는 분명 하윤과 ‘관계’를 맺으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그러자 하윤은 화가 나서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저랑은 몸만 섞으시려는 거예요? 도준 씨는 도대체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자기 때문에 화가 나 눈물을 흘리는 하윤을 보자, 그는 일단 하던 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당연히 내 아내로 보는 거지. 그래서 이렇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하러 온 거잖아.”하윤은 그의 뻔뻔한 모습에 기가 막혔다.“어젯밤엔 전화 한 통 없이 집에 안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인터넷에 온통 도윤 씨와 다른 여
도준은 이런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후, 가볍게 그녀의 이마를 툭 치며 말했다.“그래, 용서해 줄게.”하윤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도준도 서둘러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 말했다.“간병인과 경비원의 짓이었어.”간병인과 경비원은 의사보다 더 접근하기 쉬웠고 매수하기도 쉬웠다.하지만 그녀가 경비원과 간병인을 빌어 무언가를 꾸며내기라도 한다면, 분명 엄청난 후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이에 하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공은채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청 위험한 사람이었다.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은채를 지켜보아야 한다.도준이 눈치 빠르지 않았다면, 이번 수술은 실패되었을 지도 모른다.그는 하윤의 찌푸러진 얼굴을 보더니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인상 쓰면 주름 생길라. 내가 모두 안배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병원에 수술 내막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분명 괜찮을 거야.”“하지만 요 며칠 내가 병원에서 지켜봐야 될 것 같으니, 자주 돌아오지 못해도 이해해 줘야 해. 알겠지?”도준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린 하윤은 도준에게 살짝 기대고는 콧방귀를 뀌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그럼 꼭 주의하셔야 해요. 과한 스킨십은 절대 금지예요!”도준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그리고 뜨거운 호흡으로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걱정 마, 과한 스킨십은 당신이랑만 할 거야.”분명히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준은 오랫동안 굶은 늑대처럼 하윤에게 달려들었다.욕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후, 두 사람은 침실로 향했다.도준은 침대 위에 누운 그녀의 가는 목에 입을 맞추었고, 그의 넓은 등은 그녀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가슴의 근육에는 땀방울이 맺혀 가슴골을 따라 떨어졌다.도준의 엄청난 욕망을 알아차린 그녀는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았다.“안 돼요. 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리허설도 해야 돼요.”도준은 살짝 풀린 눈꺼풀로 그
그날 밤, 하윤은 억지로 ‘춤을 추고’, 남자의 온갖 회유에 넘어가 사진까지 찍었다.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사진 속 여자는 고혹적인 느낌을 띠고 있었고, 스탠드 등의 빛을 받은 공연복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리본으로 가린 눈, 살짝 벌리고 있는 빨간 입술, 주먹만 한 작은 얼굴까지 등불 아래에서 더욱 매혹적이었다.심지어 허리라인까지 찍혀 있는 사진은 남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까지 했다.다음날 아침, 침대 머리맡에서 그 사진을 본 하윤은 순간 폭발하고 말았다.“어,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손을 쑥 내밀어 하윤의 옆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든 도준이 경박한 미소를 지었다.“왜? 예술적이잖아.”그러더니 사진을 느긋하게 감상하면서 말을 이었다.“자기가 무대 위에 있을 때랑 별반 다를 것도 없는데.”“이게 다를 게 없다고요?”하윤은 사진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이건 차마 눈 뜨고 볼 수도 없다고요.”“어디가?”도준은 하윤이 사진을 빼앗으려는 걸 교묘하게 피했다.“옷도 다 제대로 입고 있고, 충분히 보수적이잖아.”“그런데 우리 그때 분명…”그때를 떠올리자 하윤의 얼굴을 화끈 달아올랐다. 머릿속에 그날의 화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도준이 하윤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우리가 뭐 했는데? 말해 봐.”‘누가 저처럼 그리 뻔뻔스러운 줄 아나?’“아무튼, 그닥 좋은 일은 아니었잖아요.”하윤이 얼버무렸다.그러자 도준이 웃으며 사진으로 하윤의 얼굴을 툭툭 쳤다.“자기가 말 안 하면 누가 알아?”“그래도 안 돼요!”하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도준은 하윤의 뒷통수를 어루만지더니 제 가슴에 내리 눌렀다.“내가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리가 없잖아. 착하지? 이건 그냥 내가 눈요기로 삼을 거야.”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던 하윤은 잠시 조용해졌다. 도준이 이제 며칠 동안은 자주 오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이상 투정 부릴 수도 없어, 그저 조용히 도준의 따뜻한 품을 느꼈다
바쁘기만 하던 리허설이 끝나자 하윤은 옷을 갈아입고 캐비닛 문을 닫았다.그러던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린 하윤은 목을 빼 들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사람이 없자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이제야 저같이 하찮은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생겼나 보네요?”전화 건너편에서 곧장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어느 집 하찮은 사람이 자기처럼 이래? 아무리 찾아도 10번 중에 8번은 없고, 아주 살판 났지?”하윤은 이내 불만을 표했다.“누가 살판났다고 그래요? 공연한 거거든요. 게다가 저는 요즘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나는 꿈도 못 쫓아요?”그 말에 도준이 피식 웃으며 투덜거렸다.“아주 기어오르네?”요즘 온라인에 도준과 은채의 ‘열애’ 소식이 일파만파 퍼져 사이트 검색어를 장악한 수준이지만, 수술 날짜가 다가와 하윤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달력을 본 하윤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내일이면 목요일이네요.”“응, 내일 오후 1시에 수술이네.”이렇게 오래 기다린 것도 모두 내일을 위한 거다.수술이 끝나면 하윤과 도준도 더 이상 이렇게 몰래 만나는 일도, 더 이상 연기할 필요도 없다.걱정도 많았지만 한편으로 기대된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내일 집에서 기다릴게요.”잔뜩 긴장한 하윤의 말투를 눈치챈 도준은 문뜩 건드리고 싶어져 툭 말을 꺼냈다.“기다리기만 하려고? 다른 건 없어?”며칠 동안 보지 않은 데다 나지막한 도준의 목소리까지 들어버리니 하윤은 온 몸이 찌릿해나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그럼 또 뭘 원하는데요?”도준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뭘 원하는 건 아니고, 벗고 기다리면 돼.”하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통화가 끝난 뒤 발걸음은 훨씬 가벼워졌다.그런 가벼운 발걸음도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본 순간 멈춰 버렸지만.“공태준?”태준은 지금까지 늘 하윤을 쫓아다니다시피 하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공연장에 간식을 사
“그날은...”말을 하던 태준은 갑자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던 은채의 부탁이 생각나 말을 삼켜버렸다.말을 하다 마는 태준을 보자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말 못하겠나 봐?”태준은 하윤의 실망하는 표정에 이내 부정했다.“그런 건... 아니에요.”그도 그럴 게, 태준의 눈에 하윤은 늘 착하고 무해한 사람이었으니까. 한참 생각하던 태준은 끝내 실토하기로 결심했다.“은채가 수술할 때 가족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그 뒤의 말을 하윤은 듣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에 온통 태준이 병원에 가면 내일 할 수술이 보통 수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거라는 생각뿐이었다.마침 정오의 태양이 내리쬐는 바람에 하윤은 눈앞이 아찔해났다.고개를 숙이고 내면의 당황함을 애써 숨기며 이 상황을 어떻게 막을지 부단히 머리를 굴렸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윤을 보더니 이랬다 저랬다 하는 저한테 실망한 줄 알고 말을 덧붙였다.“속이려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동생을 잘 돌보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하지만 수술 후면 남남으로 지내자고 말했어요.”하윤은 두 사람이 연을 끊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태준이 그 수술에 영향을 끼칠까 봐 불안할 뿐.하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간단한 수술인 줄 알고 있는 와중에, 가뜩이나 총명한 공태준과 공은채에게 틈이라도 보이면 발각되기 십상이니까.마음을 가라앉힌 하윤은 고개를 들고 침착하게 말했다.“친동생이니 관심하는 건 이해해. 난 바빠서 이만 가볼게.”이윽고 말을 마친 뒤 곧장 떠나갔다. 저한테 등을 보인 하윤의 뒷모습을 보며 태준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차 안.남기는 태준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화내던가요?”태준은 점점 멀어져가는 실루엣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끝내 대답했다.“내 탓이야. 연을 끊었다고 했으며서 제대로 끊어내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니까.”태준의 뒤를 항상 따라다니기에 당연히 태준이 은채와 남매의 연을 끊으려 한다는
요즘 가을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귀가하곤 하는데, 그 목적은 하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마침 밖에서 파파라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급히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가을은 얼른 목도리를 위로 당기며 제 얼굴을 더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그때, 하윤이 위아래로 꽁꽁 싸맨 여자를 훑어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었다.“혹시 진가을 씨 아니세요?”이미 들킨 마당에 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을 수도 없는지라, 가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어,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가을은 상대가 가을이라는 걸 확인하자 곧장 자리를 내주었다.“마침 잘 됐네요. 할 얘기가 있었는데.”할 얘기가 있었다는 짤막한 한마디에 가을은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할 얘기?’한민혁의 본처에게 불륜을 들켜 치욕을 당하던 악몽이 현실로 한 발 다가왔다.하지만 잘못을 했으면 인정해야지 숨을 수는 없었다.결국 가을은 큰 결심을 내린 듯 이를 악물었다.’“그래요.”30층.가을은 제 집보다 몇 배나 더 화려한 하윤의 집 내부를 보고 속으로 감탄했다.‘하윤 씨처럼 예쁜 여자가 그런 남자를 만나는 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돼지가 황금 돼지였을 줄이야.’하윤은 테이블 쪽으로 향하더니 다정하게 물었다.“뭐 마실래요? 오렌지 주스 아니면 따뜻한 차?”‘따뜻한 차?’‘만약 얘기하다 화가 뻗쳐 물이라도 뿌리면 내 얼굴 망가지는 거잖아...’덜컥 겁이 난 가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렌지 주스요.”잠시 뒤, 하윤은 주스를 가을 앞에 놓고는 그 옆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가을 시, 혹시 민혁 씨 알아요?”‘왔구나.’가을은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하윤이 저를 뭐라 욕하든 참아야 하노라고 속으로 암시했다.하지만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긴장해하는 가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하윤은 민혁을 도와 말하기 시작했다.“사실 민혁 씨가 가끔 말은 좀 짓궂게 해도 사람은 진짜 좋거든요.
“그러니까...”민혁은 가을을 보자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특히 이제 막 인터뷰를 마친 탓에 세련된 메이크업을 한 가을은 연예인 포스를 물씬 풍겨 눈을 뗄 수 없었다.한창 우물쭈물하던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겹겹이 쌓여 있는 종이 상자를 보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참! 이사한다면서요? 어디로 가요?”그 말을 들은 가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걸 물어요? 당신 같은 쓰레기만 안 만났어도 이사까지 할 필요 없었잖아요! 마음에 드는 전세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민혁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저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 있는데요? 왜 저 때문에 이사해요?”“이사 안 하면요? 쓰리썸이라도 하려고요? 내가 아무리 내연녀 연기를 했어도 그렇지, 진짜 내연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아니, 이건 그쪽이 그런 능력이 돼도 제 조건이 안 맞는데, 내연녀라니요?”“내연녀가 아니면 뭔데요? 이혼하고 나랑 결혼이라도 할 거예요?”민혁은 가을의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 잠깐 휴전하자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잠깐만요. 왜 이렇게 알아듣지 못하겠지? 제가 언제 결혼했는데요?”가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하, 이제 솔로 행세를 하시겠다? 그쪽 와이프가 나를 내연녀로 채용까지 하던데, 결혼한 걸 부정한다고? 이거 완전 양아치네!”이제야 가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은 민혁은 어이없다는 듯 자기를 가리켰다.“내 와이프?”“아니면요? 제 와이프게요?”민혁은 웃픈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었다.“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배짱이 없거든요. 그 사람 제 형수님이에요, 도준 형 아내. 저는 잠깐 경호원 겸 기사 노릇 하고 잇는 거고.”한창 설명을 하고 있자니 민혁은 입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가을은 오히려 팔짱을 끼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소설을 써요, 아주!”민혁은 조급해났다.“아니, 소설이라니. 하윤 씨는 정말 도준 형 와이프, 내 형수님이라니까요?”“아하, 위층에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