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두 남녀의 모습은 꽤 아름다웠다.곧이어 사진을 확대해본 한민혁은 혀를 끌끌 찼다.‘쯧쯧, 도준 형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하윤 씨밖에 없을 거야.’‘어? 잠깐. 그런데 진가을이 나한테 왜 이걸 보냈지?’하지만 민혁이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문자 하나가 곧이어 도착했다.[이건 내가 외출할 때 우연히 본 거예요. 그쪽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미리 일러두는 거예요. 너무 충격 받지는 마요.]문자를 본 민혁은 오히려 더 어리둥절해 조심스럽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이거 지극히 정상적인 거 아니에요? 내가 이걸 보고 왜 충격 받는다는 거예요?]문자를 받은 진가을은 너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이게 정상이라고? 설마 너무 당해서 이미 익숙해졌다는 말인가? 좀 불쌍하네!’그렇게 비교해 보니 식사 자리에서 만나기 싫은 사람 비위를 맞춰주던 제 상황이 오히려 더 괜찮아 보일 지경이었다.하지만 뭐라 위로의 말을 보내려는 순간,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저, 다시 우리 얘기하는 건 어때요? 혹시 언제 시간 돼요? 제가 영화랑 밥 쏠게요. 서로 알아가면 좋잖아요.]그 문자를 보는 순간 민혁에 대한 진가을의 인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뭐야? 부부가 서로 터치 안 한다는 건가? 어이없네! 완전 쓰레기잖아!’저도 모르는 사이에 쓰레기 남편 타이틀을 받은 민혁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 또다시 ‘자요?’라는 문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보냈다.하지만 그 순간 문자 옆에 빨간 느낌표 하나가 나타났다.‘뭐야? 나 차단했어?’충격을 받은 민혁은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 제 얼굴을 확인했다.‘설마 이 머리가 그렇게 양아치 같아 보이나?’……“띵.”이른 아침, 핸드폰 알람음이 침실 안에 이어지던 정적을 깨뜨렸다.애써 눈을 뜬 하윤은 이내 알람을 꺼버리고 엉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하지만 침대에서 내리려는 순간, 등 뒤에 있던 도준이 하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등이 남자의 가슴팍에 세게 부딪히는 순간, 귓가에서
병원 문 앞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이미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각종 방송사 로고를 붙인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들은 저마다 생방송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심지어 한 여기자는 카메라를 향해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위기의 순간 서로를 만나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공은채 씨와 민도준 씨의 사랑 이야기는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은채 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민도준 씨가 직접 병원까지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도준 씨는 며칠 후 수술을 앞둔 공은채 씨를 직접 병원으로 데려오고 있는 중이랍니다…….”옆에 있던 남기자도 질세라 멘트를 이어나갔다.“공씨 가문이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은채 씨를 몰락한 재벌녀로 부르고 있는데, 아직 뒤를 봐주는 애인이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두 기자가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멘트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멀리서 다가오는 차를 가리키며 소리쳤다.“저기 왔어!”……오전 10시.“선배, 선배, 혹시 오늘 실검 봤어요?”이제 막 리허설을 마친 하윤은 땀을 닦으며 잔뜩 흥분한 수아를 바라봤다.“뭐 또 좋아하는 아이돌이 실검에 오른 거야?”“아니요! 이번 상대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이거든요!”수아는 말하면서 핸드폰을 하윤의 앞으로 쑥 내밀었다.“이거 봐요,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요?”속으로 또 수아가 좋아하는 연예인이겠거니 생각하며 핸드폰을 받은 하윤은 액정에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보는 순간 미소가 굳어버렸다.하지만 그런 하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수아는 여전히 잔뜩 흥분해서 상황을 성명하기 시작했다.“해원에서 유명한 재벌이던 공씨 가문, 선배도 알죠? 전에 공씨 가문이 쫄딱 망했는데, 글쎄, 그 집 아가씨의 약혼남이 경성의 민 사장이래요. 두 사람 너무 어울리지 않아요?”“인터넷을 찾아봤더니 두 사림이 해외에서 일어난 폭동 현장에서 만나 민 사장이 공은채를 구해줬대요. 그런데 공은채가 제 건강이 민 사장한테 누가 될까 봐 몰래 해외
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 어려운 터라 지하철을 타기로 결정한 하윤은 잔뜩 토라져 중얼거렸다.“뭐? 카리스마 사장님과 재벌녀의 사랑? 웃기고 있네. 평범한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설겠나?”깊은 생각에 빠진 하윤은 길가에 선 차창이 내려간 것도 눈치채지 못하 채 혼잣말만 중얼댔다.그러던 그때.“쯧쯧.”비아냥 섞인 소리에 정신이 하윤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차 뒷좌석이 앉은 남자가 하윤의 눈에 들어왔다.“타.”하윤은 화를 참은 채 차에 올랐지만 유독 도준에게만 시선을 주지 않았다.잔뜩 토라진 하윤의 목을 돌려 저와 눈을 맞춘 도준은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한참동안 기다렸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거야?”“본인이 운전한 것도 아니면서.”하윤은 입을 삐죽거리며 이내 의자 앞으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고생했어요……, 민혁 씨?”그러다가 검게 변한 민혁의 머리에 놀란 듯 되물었다.“머리가 왜 이래요?”민혁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빨간 불에 걸린 틈을 타 고개를 돌렸다.“누가 양아치 같다고 해서 까맣게 염색했어요. 하윤 씨가 보기에는 어때요?”민혁은 잘생긴 미남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남성미 있는 스타일이다.하지만 전에 빨간 머리 때문에 겉보기에 불량해 보였는데 검은 색으로 염색하니 오히려 대형견을 연상케 하는 데다 더 활기 찬 모습이었다.“더 멋있어졌는데요. 물론 그 구멍 뚫린 청바지만 갈아 입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네?”민혁은 구멍이 뚫린 무릎 위치를 긁적거렸다.“이게 얼마나 멋있다고 그래요?”“아무리 그래도 모든 바지가 다 구멍 뚫린 거면 조금 심한 거 아니에요?”민혁도 하윤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되물었다.“그럼 구멍 뚫린 청바지가 아니면 뭘 입죠?”“아니면 나중에 저랑 같이 쇼핑할래요? 제가 봐 줄게요.”“그거 좋은데…….”말을 하던 민혁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 이내 입을 다물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저녁식사 사간이 되어 가는데, 어디 레스토랑이라
도준은 긴장한 나머지 표정까지 일그러진 하윤을 보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볼살을 꼬집었다.“공은채는 제 목숨 끔찍이 아껴, 만약 눈치챘다면 순순히 입원할 리 없지.”확실히 그런 게 맞지만 하윤은 여전히 불안했다.그런데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음식배달을 온 민혁이 초인종을 눌렀다.하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발을 들어 도준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얼른 가서 가져와요.”도준은 그런 하윤의 다리를 한 손으로 잡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이제는 자연스럽게 나를 부려먹네?”다리를 뒤로 뺄 수 없게 되자 하윤은 오히려 발을 구르며 떼를 썼다.“얼른요. 식으면 맛없어요.”민혁은 겉보기에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일처리는 항상 깔끔하다. 갈비를 포장하는 것만으로도 민혁의 그런 면을 보아낼 수 있었다. 도자기 그릇에 음식을 담아온 것도 모자라 식을까 봐 겉에 은박지까지 두른 덕에 갈비 맛은 식당에서 직접 먹는 것과 거의 유사했다.게다가 민혁은 특별히 도준과 하윤의 입맛에 맞는 음식 몇 가지를 더 사오기까지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을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마치 집에서 직접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맛있는 음식을 먹은 덕분인지 하윤의 기분은 전보다 꽤 좋아졌다.하지만 얼마 먹지 못하고 그릇을 내려놓더니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도준을 바라봤다.도준은 그런 하윤을 흘깃거리며 되물었다.“고작 그만큼만 먹는 거야? 뭐 고양이도 아니고.”하윤도 솔직히 먹고 싶었지만 아쉬운 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이번주 금요일 공연이 있거든요. 윤 쌤이 몸매에 대한 요구가 워낙 엄격한 분이라 살찔까 봐 그래요”그 말에 도준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그 가느다란 팔다리를 하고 그게 지금 할 말이야? 누구는 힘쓰면 부러질까 봐 걱정돼 미치겠는데. 그게 어딜 봐서 살찐 거야? 얼른 더 먹어.”안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 하윤은 도준의 설득에 이내 젓가락을 들고 갈비 하나를 짚으며 중얼거렸다.“그럼 하나만 더 먹을게요.”마지막 한나라고 큰소리까지 떵떵 친 하윤은
도준은 손쉽게 30킬로그램이나 되는 샌드백을 막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하윤을 보며 피식 웃었다.“설마 이 샌드백이 자동으로 자기 비켜갈 거라고 생각한 거야?”그제야 조심스럽게 눈 한쪽을 가늘게 뜬 하윤은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난 걸 확인하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처음이라서 그런 거잖아요. 다시 해요.”도준이 손을 살짝 움직이자 모래 주머니는 다시 하윤 쪽으로 움직였다.아까보다 작은 폭으로 움직이는 샌드백을 보자 하윤은 이내 힘을 다해 쳐냈다.연습하는 동안, 하윤이 받지 못할 것 같을 때면 도준은 대신 모래 주머니를 잡아 주었다가 다시 던져주며 연습을 도왔다.그렇게 약 반시간쯤 연습하고 나니 하윤의 목덜미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생기가 흘러 넘쳤다.도준은 흔들거리는 샌드백을 손으로 잡으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하윤을 훑었다.“이제 몸도 풀었으니 진짜 사람과 대결해야지.”아무 생각없이 동의하려던 하윤은 일전에 도준에게 여기저기 얻어터져 불구가 되었던 사람을 떠올리자 이내 겁을 먹었다.“저 맷집이 약하니 사살해야 해요.”하윤의 그런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그래, 최대한 노력해 볼게.”“그런데 왜 손에 글러브도 안 해요?”도준은 눈썹을 위로 치켜 올렸다.“자기랑 하는 데 글러브가 왜 필요해?”도준이 제 실력을 무시하자 하윤은 욱해서 도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렸다.하지만 그걸 가볍게 피해버린 도준은 하윤의 허리를 느긋하게 문질렀다.“무계 중심이 흔들리잖아. 그래서야 사람을 어떻게 때리려고 그래?”“이건 무효예요. 다시 해요!”하윤은 손을 휘휘 저으며 생떼를 부렸다.하지만 아무리 다른 동작으로 공격해도 결과는 똑같았다.몇 번을 시도해도 도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의 손에 농락당한 하윤은 도준의 손이 제 옷 안을 파고들 때 꽉 붙잡았다.“뭐하는 거예요? 운동한다면서요?”도준은 손쉽게 하윤의 반항을 가볍게 누르며 농담을 내뱉었다.“이것도 운동이잖아, 땀을 이렇게 많이
석지환이 건넨 가방을 손에 든 하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석지환이 방금 한 말뿐이었다.“경성이요? 거긴 뭐 하러요?”“답 찾으러.”석지환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끝내 대답했다.하지만 그 말에 하윤은 오히려 더 어리둥절했다.“무슨 답이요?”석지환은 더 이상 하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말머리를 돌렸다.“시윤아, 만약 나한테 벌어진 일이 너한테도 벌어지면 넌 어떻게 할래?”오늘 건넨 첫마디부터 애매모호해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더 알아들을 수 없었다.“무슨 뜻이에요? 혹시 공은채 말하는 거예요?”석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에 하윤은 미간을 좁히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지환 오빠, 도준 씨는 공은채와 달라요.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결혼도 했고요. 그런 가정도 하기 싫어요.”하윤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자 석지환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어……, 아니다, 못 들은 거로 해. 나 며칠 동안 해원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 나중에 네 공연 보러 올게.”비록 석지환의 말에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그래도 상대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이웃집 오빠인지라 하윤은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혹시 혼자가요? 도준 씨한테 도움 청해볼까요? 그러면 오빠도 더 편할 거고.”“아니야, 내가 경성에 간다는 건 누구한데도 말하지 마. 내 개인적인 일 처리하러 가는 거니까. 다른 사람 알게하고 싶지 않아.”‘하긴, 요즘 지환 오빠 상태도 안 좋은데, 기분전환 하러 가는 건지도 모르지.’하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안전 조심해요.”멀리 떠나가는 석지환의 뒷모습과 텅 빈 팔소매를 번갈아 보며 하윤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현재 가는 곳마다 도준과 공은채에 관한 소식이라서 석지환은 아마 하윤보다 더 괴로울 거다.‘아직도 지환 오빠 여자친구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지. 차라리 기분전환 할 겸 외출하는 것도 좋지.’차에 오른 하윤은 뒷좌석에서 도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도준 씨는요?”“
병원.“상황이 이대로 안정되면 다음주 목요일 바로 수술할 수 있습니다.”검사 보고를 확인하던 원장이 짤막한 결론을 내놓자 도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다음주 목요일로 정해요.”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공은채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이내 되물었다.“혹시 지금 수술하면 성공 확률은 얼마인가요?”“90퍼센트 이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희 병원의 심장내과는 국내 최고 수준이니 저희 말대로 약만 꾸준히 먹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하면 성공 확률은 매우 높습니다.”원장의 말에도 공은채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어찌됐든 현재 겨우 제가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었는데, 이대로 일이 틀어지면 안 됐으니까.원장을 포함한 의료진이 떠나자 공은채는 이내 도준을 바라봤다.“수술할 때 제 곁에 있어줄 거죠?”“응.”도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요 며칠동안 저를 매일 보러 오는 도준 덕에, 공은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에 말투도 많이 가벼워졌다.“그럼 됐어요. 도준 씨가 곁에 있으면 저는 늘 위험에서 벗어났었으니까.”이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도준이 살이 있는 부처처럼 공은채를 항상 지켜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유일하게 모든 걸 동원해서 그녀를 살려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설령 공은채에게 죽을 고비가 찾아와도 도준은 저승길이라도 찾아와 그녀를 다시 끌어냈다.솔직히 이런 도준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하지만 공은채에게 남은 이런 소녀 같은 마음은 진작 염옥란과 함께 죽었다. 공은채는 남자를 믿지 않고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사랑 따위 믿지 않는다. 그녀가 믿는 건 오직 손에 쥐고 있는 것뿐이다.하지만 지금, 그런 공은채에게도 왠지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도준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 어찌됐든 도준처럼 모든 걸 갖춘 사람과 함께라면 남은평생 편하게 살 수 있기도 하고, 무너진 공씨 가문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으니까.공은채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한편 룸 안.저한테 추근대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투자자를 본 진가을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빙 둘러봤다.제 앞에 놓인 와인병을 보자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왓다.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고 사과하는 것뿐이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닙니다.”매니저 지하늘은 일을 그르친 진가을을 째려보더니 이내 아부하는 미소를 지으며 투자자를 바라봤다.“주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가을이 성격. 이렇게 화끈한 성격 때문에 더 좋아하셨잖아요.”하지만 주승범은 그런 매니저의 손마저 홱 뿌리치며 버럭 화를 냈다.“듣기 좋은 소리는 그만해! 애초에 이번 드라마 여주인공 자리 내어주면 진가을이 내 말 고분고분 들을 거라며?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지금 뭐 하자는 건가?”주승범의 말에 놀란 진가을은 고개를 홱 돌려 매니저를 바라봤다.“이번 여주인공은 감독님이 직접 뽑았다면서요?”제 발이 저려 눈을 슬슬 피하던 지하늘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가을아, 너도 이 바닥 입성한지 벌써 2년이 다 돼가잖아. 그런데 어쩜 그렇게 순진해? 얼른 주 대표님 모시고 가서 휴식해.”진가을은 서로 말을 맞춘 두 사람을 원망하듯 바라봤다. 이렇게 늙은 놈과 잠을 잘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술 마시고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이윽고 진가을은 테이블 위에 있는 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이 술 다 마시면 갈 수 있는 거죠?”현재 테이블에는 4병의 와인과 한 병의 도수 높은 양주가 놓여 있었다. 이 술을 모두 마실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만약 마시더라도 바보가 되거나 알코올 중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피둥피둥한 살이 소파와 거의 하나 될 것처럼 축 늘어 앉은 주승범은 얇은 천쪼가리만 달랑 걸친 여자를 제 품안으로 껴안았다.“재주가 있으면 어디 마셔 보던가. 마시지 못하겠으면 순순히 나 따라와야 할 거야.”주승범의 말이 떨어지자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