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룸 안.저한테 추근대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투자자를 본 진가을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빙 둘러봤다.제 앞에 놓인 와인병을 보자 당장이라도 눈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힘껏 내리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왓다.하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깔고 사과하는 것뿐이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닙니다.”매니저 지하늘은 일을 그르친 진가을을 째려보더니 이내 아부하는 미소를 지으며 투자자를 바라봤다.“주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가을이 성격. 이렇게 화끈한 성격 때문에 더 좋아하셨잖아요.”하지만 주승범은 그런 매니저의 손마저 홱 뿌리치며 버럭 화를 냈다.“듣기 좋은 소리는 그만해! 애초에 이번 드라마 여주인공 자리 내어주면 진가을이 내 말 고분고분 들을 거라며?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지금 뭐 하자는 건가?”주승범의 말에 놀란 진가을은 고개를 홱 돌려 매니저를 바라봤다.“이번 여주인공은 감독님이 직접 뽑았다면서요?”제 발이 저려 눈을 슬슬 피하던 지하늘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가을아, 너도 이 바닥 입성한지 벌써 2년이 다 돼가잖아. 그런데 어쩜 그렇게 순진해? 얼른 주 대표님 모시고 가서 휴식해.”진가을은 서로 말을 맞춘 두 사람을 원망하듯 바라봤다. 이렇게 늙은 놈과 잠을 잘 바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술 마시고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이윽고 진가을은 테이블 위에 있는 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이 술 다 마시면 갈 수 있는 거죠?”현재 테이블에는 4병의 와인과 한 병의 도수 높은 양주가 놓여 있었다. 이 술을 모두 마실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만약 마시더라도 바보가 되거나 알코올 중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피둥피둥한 살이 소파와 거의 하나 될 것처럼 축 늘어 앉은 주승범은 얇은 천쪼가리만 달랑 걸친 여자를 제 품안으로 껴안았다.“재주가 있으면 어디 마셔 보던가. 마시지 못하겠으면 순순히 나 따라와야 할 거야.”주승범의 말이 떨어지자 진
주승범 일행은 진가을을 아는 체하는 한민혁을 보자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하고 버럭 화를 냈다.“어디서 같잖은게! 당장 나가지 못해?”하지만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민혁은 팔을 걷은 채 와인병을 손에 들었다.“술친구 필요한 거 아니었어? 내가 같이 마셔 줄게.”“이게 누굴 놀리나…….”주승범이 욕지거리를 내 뱉은 순간, 옆에 있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혹시 한민혁 사장님 아니세요?”그 말을 내뱉은 사람은 다름아닌 주승범의 비서였다. 일전에 주승범은 민도준이라는 연줄을 잡으려고 비서를 보내 알아보게 한 적이 있었다.그 때문에 주승범도 솔직히 민혁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방금 알아보지 못한 건 너무 변한 이미지 때문이었다. 민도준의 오른팔인 한민혁을 건드리는 건 민도준을 건드리는 거나 다름없다…….그걸 인지한 순간, 주승범은 낯빛이 싹 변하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한 사장님이셨군요, 나는 또 누구라고. 어떻게 귀한 분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얼른 앉으세요.”이윽고 테이블에 쓰러지다시피 엎드려 있는 정가을을 힐끗 보더니 이내 다시 아부하는 미소를 지었다.“가을이도 참, 진작 한 사장님 여자라고 말했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텐데.”평소 주승범 같은 사람을 가장 혐오하는 민혁은 경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누구 여자든 강제로 술 마시게 하는 건 안 되지. 참 뻔뻔하네.”분위기를 풀려고 했던 말을 오히려 사정없이 받아치자 주승범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한 사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 밑으로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이러는 건 주가을한테는 영광이죠.”“퍽이나. 술시중 들게 하는 게 영광이라고? 그럼 당신 어머니 모셔와 봐, 내 술시중 들라고 하게.”“뭐?”주승범이 화를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려는 순간, 비서가 막아 서며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그리고 그 순간, 민혁은 인사불성이 된 진가을을 일으켜 세우더니 주승범을 째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혼자
“띠리링.”한민혁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진가을을 불렀다.“이봐요, 싸가지, 그쪽 약 가져왔어요.”그러면서 목을 빼들고 안을 살펴봤다.“어? 사람은 어디 갔지?”“아, 바닥에 떨어졌네.”침대 옆으로 걸어간 민혁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진가을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참 개구리도 아니고, 이건 무슨 자세야?”진가을을 안아 침대 위로 올려준 민혁은 지하늘이 준 약병을 열었다.“이봐요, 약 먹어요. 그래야 내일 노래할 거 아니에요.”인사불성이 된 진가을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민혁은 어쩔 수 없이 친히 약까지 먹여주고는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겨우 끝났네. 난 참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하지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진가을의 물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래 할 바엔 끝까지 해야지.’민혁은 이내 부엌으로 가 빈 컵에 물을 따라서 진가을의 방으로 돌아왔다.하지만 물을 들고 나타났을 때, 진가을은 또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뭐가 불편한지 몸까지 배배 꼬기 시작했다.“하, 왜 또 떨어졌대? 좀 얌전히 자면 안 되나?”심지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민혁이 저를 침대위로 끌고 가려고 하자 그를 꼭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계속 혼잣말로 ‘더워’라고 중얼거리면서.이렇게 예쁜 여자가 제 품에 안기자 민혁은 순간 날아갈 듯했다. 하지만 입으로는 거절했다.“이러면 안 돼요. 제가 비겁하게 인사불성인 사람을 덮치는 것 같잖아…… 어!”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진가을이 갑자기 덮쳐 오는 바람에 민혁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그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나기까지 했다.상대의 적극적인 모습에 민혁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제 허리 위에 가로 타고 있는 진가을을 보며 경고하기 시작했다.“아니, 이러지 말고 우리 말로 해결해요.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충동적으로…… 읍읍…….”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멍해진 민혁은 잠깐 숨돌릴 틈에 다시 말을 이었다.“제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니에요! 경고하는
이른 아침.하윤은 약효 덕에 푹 자고 깨어났지만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아팠다.하지만 이제 곧 극단에서 메이크업을 받아야 하기에 간단히 세수만 하고 문을 나섰다.그렇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하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진가을을 보자마자 하윤은 반가운 듯 웃으며 인사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혹시…….”하윤은 자연스럽게 안부를 물으려고 했지만 진가을은 고개를 홱 돌리며 마치 하윤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에 하윤은 의아했지만 하려던 마을 이내 목구멍으로 삼켰다.‘연예인이다 보니 추태 부린 게 쪽팔려서 그러나 보지.’이윽고 가볍게 넘기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1층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진가을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초췌한 하윤의 얼굴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혹시 잘 못 잤어요?”하윤은 어제 생각을 하니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네, 속이 안 좋아서요.”하지만 제 감정에만 사로잡혀 어색하게 변한 진가을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어, 남편분이 보살펴주지 않았어요?”민도준의 얘기를 꺼내자 하윤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아니요. 어제 안 들어왔어요. 일이 바쁜가 봐요, 뭐 괜찮아요.”억지 미소를 지으며 애써 자신을 설득하는 하윤을 보자 진가을은 점점 목을 움츠린 채 아무 마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에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달려나갔다.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하윤은 의아하기만 했다.하지만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밀려든 일 때문에 그런 해프닝은 이내 잊어버렸다.오후 1시.하윤은 다른 무용수들과 함께 무대 뒤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자 한 통 없는 핸드폰을 보자 순간 화가 치밀었다.‘이번에 돌아왔다가 봐, 침대에 절대 못 오르게 할 거야!’하지만 하윤이 한창 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있던 수아가 핸드폰을 들고 헤실 웃어댔다.“어떡해, 너무 스윗하잖아.”이윽고 하
밖으로 걸어 나왔더니 하윤 앞에 보인 건 복도에서 꽃을 든 채 하윤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였다.남자는 잘빠진 체격에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편한 복장 차림인데도 귀족의 느낌이 물씬 났다. 그 옆을 지나가는 무용수들은 저마다 남자를 힐끗힐끗 돌아보기 바빴다.하지만 잔뜩 부풀었던 하윤만은 공태준을 본 순간 이내 평온해졌다.‘하긴, 이제 곧 성공하는데, 이때 나타나서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지.’“윤이 씨, 다시 복귀한 거 축하해요.”말을 마친 태준은 하윤에게 꽃다발을 건넸다.꽃은 장미가 아닌 백합이었다. 축하의 의미로 건네는 꽃이라 하윤도 이내 받아 들었다.“고마워.”태준은 무대 화장으로 인해 더 요염해진 하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바쁜데 가서 준비해요. 저는 다시 관중석으로 돌아갈게요.”하윤도 더 이상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무대 뒤로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지 않자 하윤네 순서가 다가왔다.무대 위에 오르기 전 잔뜩 긴장해 있던 하윤은 무대 조명이 켜지고 따뜻한 열기가 얼굴에 느껴지는 순간 다시 저만의 세상을 되찾은 기분이었다.열정, 땀, 음악, 무대, 그리고 박수 소리.물론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무대 위에서 턴을 돌 때마다 하윤은 마음이 가볍고 상쾌했다.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무용수들이 단체로 커튼콜을 할 때, 무대 아래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좌석은 여전히 꽉 차지는 않았지만 허리 숙여 무대 인사를 할 때, 하윤은 밀려오는 쾌락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하지만 무대 인사를 끝내고 내려가려고 할 때,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극단 멤버들을 불러 세웠다.“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리 해원 발레단은 성립된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몇 십년 동안 수많은 무대를 선보였는데 항상 자금 문제로 투어 활동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죠? 이에 공태준 사장님이 발레단을 위해 예술 재단을 설립해 후원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앞으로…….”사회자의 말에 극단 식구들은 저마다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공태준은 고개를 돌려 하윤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직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성공하면 그때 공유하도록 하죠.”그 순간 무대 아래에서 또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고 심지어 일부 관객들은 태준을 응원하기까지 했다.새로운 커플에 관심을 가진 듯 하윤을 툭툭 건드리던 수아는, 하윤의 눈빛에 이내 고분고분해졌다.이윽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하윤은 극단 식구들과 함께 무대를 내려갔다.하지만 하윤이 대기실에 들어가기 전, 태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윤이 씨.”하윤의 선배와 후배들은 그 모습에 이내 뭔가 깨달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윤은 이런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태준과 할 말이 있었기에 복도를 가리켰다.그렇게 복도에 멈춰선 순간, 하윤이 입을 열기 전에 태준이 한 발 빠르게 말을 꺼냈다.“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갑작스러운 사과에 하려던 마들이 모두 목구멍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하던 하윤은 끝내 입을 열었다.“공태준, 내가 말했잖아. 우리 어울리지 않는다고.”“알아요. 제가 재단 설립한 것도 다른 뜻 없어요. 그저 윤이 씨가 난처한 상황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립한 거예요. 친구로서 윤이 씨가 안전했으면 좋겠어요.”지난 번 자선 공연 얘기가 나오자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을 구겼다.그날 하윤은 갑작스럽게 불려간 건데, 그 자리에서 하필 도준과 공은채를 만났다. 게다가 또 하필이면 누군가 추근대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고. 너무 많은 우연이 겹치자 모든 게 일부러 계획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생각해도 공은채가 일부러 하윤을 불러내 곽도원의 눈에 띄게 했고, 또 저와 도준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았다.그 생각에 하윤은 태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러는 거 혹시 공은채의 잘못에 대한 보상이야?”“은채요?”태준은 어리둥절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태준을 보자
공태준은 제가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가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일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윤영미의 극단은 수입이 적은 데다 지출이 많아 유지되기 매우 힘들었으니까.때문에 뭐가 됐든 재단 설립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텐데, 윤영미는 하필 그 호의를 거절해 버렸다.어릴 때부터 재벌로 살아온 태준은 제 투자를 거절하는 사람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교양 있는 말로 제 목적을 설명했다.“혹시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재단 설립에 따로 필요한 게 없으니. 오히려 재단이 설립되면 앞으로 관객이나 좌석 상황에 목맬 필요도 없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지 않습니까?”“그렇다면 더더욱 안 됩니다. 저희가 공연하는 건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인데 그걸 신경 쓰지 말라니요. 만약 그렇게 극단을 유지하면 빈 껍데기나 다른 없습니다. 공태준 사장님의 뜻은 잘 이해했으니, 마음만 받겠습니다.”윤영미의 완강한 뜻에 태준의 미소는 살짝 옅어졌다.“그렇다면 저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이윽고 하윤을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윤영미가 미리 차단했다.“여기서 뭐하고 있어? 얼른 가서 옷 갈아입지 않고!”흠칫 놀란 하윤은 그제야 다급히 대답했다.“어, 네!”하윤이 떠난 뒤 윤영미의 눈빛은 곧바로 형형하게 빛났다.“사적으로 몇 마디 할게요.”“네, 말씀하시죠. 경청하겠습니다.”“그럴 것까진 없네요. 그저 간단한 충고니까.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공적인 자리에서 이익을 내세워 강요하면 안 되죠. 그건 너무 양아치 같은 짓 아닙니까? 말로는 상대보다 하위에 있다지만 상대를 압박하는 걸 보니 참 비겁하더군요.”“진심과 목적 있는 호의에 대해 잘 배우기 전에는 저희 극단 찾아오지 마세요.”말을 마친 윤영미는 힘찬 발걸음으로 떠나버렸다. 결국 홀로 남겨진 태준은 창가에 서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분명 환한 달빛이 고스란히 그에게 떨어졌지만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좀처럼 읽어낼 수 없었다.……극단을 떠난 태준은 차 뒷좌
병실에 앉아 있던 공은채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공태준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자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맹군이기도 하다. 때문에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공은채는 이내 사과했다.“오빠, 미안해. 그런데 나 좀 믿어 줘. 나 이시윤 다치게 하지 않아. 그저 도준 씨에 대해 단념하고 정당한 이유로 오빠 곁에 갈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 이번에 재단을 설립했으니 오빠도 앞으로 극단에 자주 찾아갈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서로 좋은 거잖아.”공은채가 아무리 멋들어진 말로 회유해도 태준은 제 동생이 저를 이용하려 든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그 순간 눈시울을 붉히던 하윤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 가슴이 쓰라렸다.분명 지켜주려던 상대인데, 오히려 상처만 주게 된 꼴이라니.제 욕심 때문에 공은채와 손을 잡아 사랑하는 사람의 혼인을 망치고, 의지할 곳을 빼앗은 데다 온갖 수모를 겪게 한 건 다른 아닌 공태준 자신이었다.그러면서 구원자라도 되는양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단.그 순간 제 투자를 거절한 윤영미의 결정이 이해가 되었고 저 자신이 너무 비열하게 느껴졌다.눈을 질끈 감은 태준은 씁쓸함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은채야, 난 너와 내가 피를 나눈 가족이라 너를 다 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제 보니 네 눈에는 진작 가족이 없었네. 그렇다면 가식적인 남매관계도 유지할 필요 없겠어.”공은채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당황한 기색으로 물들었다.“오빠, 지금 그거 무슨 뜻이야? 설마 남매 관계를 끊자는 거야?”“응.”태준의 답변에 공은채는 헛웃음이 났다.“오빠, 오빠가 이시윤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곁에 두고 지켜주려던 거 아니었어? 이제 곧 성공하는데 왜 또 포기하겠다는 거야? 이러면 그때 별장에서 이시윤 보내줬을 때랑 뭐가 달라?”“3년 전 한번 놓아줬다가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잖아. 그런데 또 똑 같은 일 반복하고 싶어? 이번에 다시 포기하면 앞으로 이런 기회 두 번 다시없을 거야. 오빠 똑똑한 사람이잖아, 어떻게 선택해야 할 지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