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하윤은 얼굴을 감싼 채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호텔문은 벽에 부딪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그 모습을 본 공은채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 안의 물건은 거의 다 깨져 있었고 도준은 세면대 옆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옷깃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목덜미에 난 상처는 그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야성미를 더해주었다.심지어 욕실 안에 흩어진 희뿌연 연기는 야릇한 분위기까지 연출했다.공은채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어 거치대에 걸어 놓고는 도준을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지 않고 오히려 도준과 같은 세면대에 기댄 채 그를 힐끔 쳐다봤다.“화가 나면 더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도준 씨는 어때요?”공은채는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데다 남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남자를 저한테 푹 빠지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런 공은채도 딱 한 번 실패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도준이다.물론 그때는 공씨 저택을 빠져나갈 계획을 짜느라 다른 데 집중할 수 없어서 실패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계획이 이제 막바지에 이른 데다, 공은채에게는 도준이 필요하다.몸과 마음이 도준을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도준이 꼭 있어야 한다.그리고 그런 날이 멀지 않다고 공은채는 속으로 생각했다.……“띠.”멀리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에 하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아까의 ‘분노’가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방금 아무 생각도 없이 단숨에 1층까지 달려 내려왔지만, 이 순간 다시 맨 위층의 유리창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갑갑해 났다.지금껏 도준에게 접근할 기회만 엿보던 공은채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 그럴 만했다.외로운 남녀가 같은 공간에 있는 데다, 하필이면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었으니…….아까 방으로 쳐들어갔을 때 본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하윤의 눈앞에 익숙한 길이 펼쳐졌다.‘여긴?’얼마 뒤 차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하윤이 예전에 자주 공연했던 극장 앞이었다.“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공태준은 입장권 한 장을 하윤에게 건넸다.“오늘 여기서 공연이 있대요. 기분 풀고 싶으면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하윤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표 뒤에 적힌 배우 명단에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의 이름이 있는 걸 보자 이내 흔들렸다.공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윤의 스승님과 같이 춤추던 친구들이었다…….하윤은 손가락 끝으로 입장권에 있는 이름을 살살 문질렀다. 만약 전에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위에 적인 이름은 중 아마 하윤의 이름도 있었을 거다.그 순간 스승님과 친구들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솔직히 그 보다는 기억 속 자기 모습이 그립기도 했다.하지만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마주쳤을 때 자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으니까.태준은 하윤의 갈등을 눈치채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제가 표 구매한 시간이 너무 늦어서 뒷자리 밖에 차지하지 못했어요. 뒷자리라도 괜찮다면 보러 가고요.”하윤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태준을 빤히 바라봤다. 이 순간에도 태준의 처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분명 제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이토록 완곡하게 설득하다니.……공연장 내부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좌석 번호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더니 하윤의 심장박동도 무용수들이 자리에서 뛰어오르고 착지할 때 함께 요동쳤다.이 공연을 보면 분명 감명만 받을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무대를 갈망하고 있었다는 건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저들 사이에 끼여 함께 무대를 채워나가고 싶다는 갈망이 들었다.공연은 역시나 매우 훌륭했고, 무대가 끝나자마자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그렇게 공연장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태준
“내려.”도준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명령했다.하지만 공은채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왜 그렇게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에요? 와아프가 화낼까 봐 그래요? 걱정 말아요. 당장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도준은 공은채를 힐끗 바라봤다.“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공은채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더니 도준에게 건네 주었다.공은채가 가리킨 핸드폰 액정에는 사진이 떠 있었는데, 공태준이 하윤을 빤히 바라보며 매너 있게 문을 열어주는 장면이었다.그리고 다음 사진 역시 같은 주인공 두 사람이 극장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남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눈물을 훔치는 여자를 향해 티슈를 건네 주고 있었다. 그때 공은채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참, 오빠가 그러는데 본인의 격려 덕에 시윤이 다시 무대에 서기로 결심했대요. 도준 씨도 이제 곧 무대에서 춤 추는 시윤을 볼 수 있을 거예요.”도준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미간을 팍 좁혔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은채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도준처럼 소유욕 강한 사람은 자기 여자가 무대에서 춤 추는 걸 원치 않을 게 뻔하다. 더욱이 다른 남자의 도움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면 더더욱 용납하지 못할 거다.아까 있었던 일에 이번 일까지 더해지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꿈의 유혹과 애인의 기분 중 대체 뭘 고를까?’공은채는 손을 들어 차 안에 달린 액세사리를 살짝 건드렸다. 귀여운 스타일은 딱 봐도 하윤이 걸어놓은 게 뻔했다.“나한테 손 안 대는 건 뭐라 안 할 테니, 같이 저녁 먹어요. 이건 괜찮죠?”……“이 가게 음식 입에 맞는지 한번 먹어 봐요.”태준은 이미 잘게 썬 스테이크를 하윤의 앞에 건네 주었다. 선분홍 육즙이 흘러나오는 고기를 보면서도 하윤은 입맛이 없는 듯 포크로 푹푹 찌르며 좀처럼 입에 대지 않았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준은 얼른 웨이터를 불러 미리 주문했던 디저트부터 내오라고 부탁했다. 곧바로 올라온 디저트를 거부감
도준이 자리에 앉자 공은채도 따라서 공태준 곁에 앉았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널찍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비좁아 졌고, 네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묘한 기류에 하윤은 의자에 기대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하지만 한창 당황하고 있을 때 도준이 갑자기 하윤의 머리를 꽉 잡은 채 제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어디 말해 봐. 방금 공 가주랑 뭐 먹었어?”“앵두 치즈 케익이요.”“맛있었어?”하윤은 곁눈질로 공은채를 흘겨보더니 일부러 토라진 듯 버럭 대답했다.“네, 엄청 맛있었어요.”“그래?”“저기요, 지금 말한 앵두 치즈 케익 10조각 주세요.”곧이어 테이블은 케익으로 가득 찼다.그때, 도준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좋아하면 다 먹어.”이런 비아냥 섞인 말투는 너무 진짜 같아 하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 채 기계적으로 케익을 입에 밀어 넣었다.양식 레스토랑이라 다행히 일 인분 양이 많지 않았지만 이제 막 하나를 다 먹자마자 도준이 옆에서 두번째 접시를 들이 밀었다.“낭비하지 말고 계속 먹어.”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준은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민 사장님, 사람 너무 몰아세우는 거 아닙니까?”“뭐 마음 아프다 이건가? 그럼 대신 먹어주든지.”태준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린 채 케익 한 조각을 제 앞에 가져와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하지만 도준은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공은채에게 메뉴를 건내 주었다.“먹고 싶은 거 골라.”공은채는 도준의 관심에 놀랐는지 잠깐 넋 놓고 있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해산물 샐러드면 돼요.”“그거 갖고 되겠어?”그 말에 공은채는 고개를 숙인 채 케익을 먹고 있는 하윤을 바라보며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오기 전에 배불리 먹었잖아요.”모두 성인 남녀인 데다, 너무 야릇한 말투에 하윤은 당연히 공은채가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심지어 사레까지 걸려 쉴 새 없이 기침하다가 포크를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태준은 고민도 없이 자리에서
“공은채가 이미 먹었다고 했잖아요! 둘이 뭐 했어요?”민도준은 잔뜩 화난 권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자기가 나 다 뽑아먹어서 남아나지 않는데 어떻게 가능하겠어?”뜨거운 숨결에 귀까지 빨갛게 된 하윤은 얼른 도준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사람 참 뻔뻔해.”……뭐가 어찌됐든 연기는 계속해야 했기에 두 사람은 따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하지만 먼저 성큼성큼 나가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왠지 모르게 속상했다.도준이 호텔에 돌아왔을 때 하윤은 여전히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도준은 얼른 하윤을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고작 이거로 삐졌어? 그럼 이틀 뒤에는 어떻게 버티려고 그래?”홱 고개를 돌린 하윤은 잔뜩 놀란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이게 고작 에피타이저라고?’“이틀 뒤에 왜요?”“사실 공은채가 바란 건 오늘 우리 관계가 완전히 나빠지고 자기가 떠난 뒤 그 틈에 나 꼬시는 거였거든.”그런 상황을 생각하니 하윤은 가슴이 답답해났다.그때 도준이 하윤의 턱을 들어 올렸다.“기분 안 좋아? 그럼 기분 좋은 얘기해볼까? 오늘 공태준과 공연 보러 갔다며? 아니지, 무대 다시 서게 된 게 더 기쁜 일이겠지?”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준의 품에 안겨 있던 하윤은 말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다리를 한데 모으며 군기 바짝 잡힌 모습을 보여주었다.“아니에요, 제 말 좀 들어봐요.”조심스럽게 말하는 하윤을 보며 도준은 입에 담배를 문 채 고개를 살짝 젖히며 끄덕였다.“그래, 말해 봐. 듣고 있으니까.”하윤은 다시한번 말을 조직해 오후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도준에게 설명했다.하지만 말을 할수록 기가 죽었다. 그도 그럴 게, 저도 잘한 거 하나 없으며 도준만 탓했으니.그 이유 때문인지 방금까지만해도 버럭버럭 화내며 따지고 들던 하윤은 이내 누그러들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도준의 다리 위에서 내려가고 싶었다.하지만 도준이 이내 움직이려는 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아직 얘기 안 끝
순간 마음에 따뜻한 물결이 일렁였고 시큰한 느낌이 콧잔등을 타고 올라왔다.난류가 심장을 파고 들었다 사지로 퍼져 나가 온 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하윤은 팔과 다리를 도준의 몸에 칭칭 감으며 푸딩 같은 입술로 도준에게 입맞췄다.“여보, 여보…….”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에 하윤의 모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져 듣는 사람의 마음조차 녹을 지경이었다.도준은 저한테 자꾸만 칭칭 감겨오는 하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가만히 있어. 뭐 잘못했는지 계속 말해야지, 왜 갑자기 발정 나고 이래?”낯부끄러운 도준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하윤의 심정은 날아갈 듯했으니까.솔직히 도준은 예전에도 하윤이 하고 싶어하는 건 뭐든 하라고, 절대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 있다.하지만 그때는 너무 황홀하고 꿈만 같아 믿기지 않았다.게다가 도준의 눈치를 보는데 습관이 된 터라 뭐든 동의를 구하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믿기지 않기보다 진심으로 기뻤다. 평등이란 이런 것인 줄 처음 알았다.그때 도준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하윤을 소파에 고정시켰다.“그러다 하늘로 날아가겠어?”기뻐서 발을 동동 구르던 하윤은 반항하기는커녕 도준의 목에 손을 둘렀다.“네, 도준 씨가 그렇게 만들어줬잖아요.”도준은 활짝 웃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멍청하긴.”“그럼 저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제 목을 안은 채로 마구 흔들어대는 하윤의 닭살스러운 말에 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하윤은 쉽사리 그의 목을 놓아주지 않았다.“대답해봐요.”“하, 자기가 공태준이랑 붙어 다니는 것도 다 참았는데 사랑하냐고 물어?”도준의 맘에 하윤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우스운 얘기가 아니었는데 하윤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때 도준이 하윤을 들어 올렸다.“왜? 진짜 바보가 된 거야?”하윤도 웃느라 진이 빠졌는지 숨을 헐떡이며 도준의 어깨에 기댔다.“아니거든요. 도준 씨가 제 복수 도와주는 거 지켜봐
“네? 저는 왜 기다려요?”도준은 의아해하는 하윤의 이마를 손으로 튕겼다.“너무 오래 해서 머리가 어떻게 됐어? 곧 이혼할 부부가 같이 자는 거 봤어?”‘아, 아직 연기를 해야 하지?’그제야 하윤은 순순히 옷을 챙겨 입고 잔뜩 풀이 죽어 도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우리 이제 오랫동안 못 보는 거죠?”싸우고 헤어진다면 앞으로 다시 만날 이유는 없으니까.이미 하이라이트까지 왔으니 하던 연기를 끝마쳐야 비로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도준은 부드러운 하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많아서 한 달이면 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응?”한 달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솔직히 전에도 헤어진 적 있지만 이번에는 그 헤어진 동안 도준이 다른 여자와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하윤은 손을 놓기 싫어졌다.“한 달은 너무 길어요.”“이 일이 쉬운 줄 알았어?”도준은 피식 웃었다.“이미 병원에는 미리 손써뒀어. 심장이식하기 전에 한동안 약을 먹고 검사도 해야 해서 한달도 짧은 거야.”하윤도 이 일은 급하게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공은채의 성격은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니까. 오늘만 놓고 보더라도 일부러 저와 도준이 꼭 붙어 있는 모습을 보게 하고 또 공태준을 불러와 하윤이 ‘꿈’을 이루도록 도와줬다.공은채가 하윤의 스승이었던 윤영미의 극장을 찾아냈다는 건, 하윤이 춤을 좋아하고 또 윤영미한테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윤영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고.만약 상대가 원래의 도준이었다면 하윤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정말 다행이네…….’하윤은 침대 모퉁이에 앉아 도준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제가 뭘 하든 괜찮다고 도준이 미리 약속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떠나기 전 하윤은 도준의 목을 끌어안고 애교부렸다.“그런데 제가 간다는데 왜 슬퍼하지도 않아요? 저 빨리 보내고 공은채랑 밀회라도 즐기려고…… 아아아, 아파요.”도준은 하윤의 볼을 꼬집었다.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띵’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맨 위층에 도착했다.“그럼 들어가세요. 무슨 일 있으면 저 부르고요.”“그래요. 고마워요.”손을 저으며 인사한 뒤 엘리베이터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던 민혁은 1층을 누르자마자 제 어깨에 걸려 있는 하윤의 가방을 발견했다.“어? 하윤 씨 가방 주는 거 깜빡했네.”이내 다시 취소하려고 했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그러다가 28층에 도착했을 때, 웬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쓴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곧바로 내리려고 고개를 빼들고 확인했지만 맞은편의 엘리베이터는 27층에 멈춰 있었다. 이윽고 민혁은 다시 고개를 뒤로 빼며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려고 결심했다.하지만 제 편의만 챙기느라 그 동작이 얼마나 의심스러웠는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그 시각 진가을은 빨간 머리를 한 남자가 밖을 두리번거리며 관찰하다가 제 앞에 막아선 채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리자 덜컥 겁이 났다.벌써 밤 11시인 데다, 밀폐된 공간에 수상한 남자와 단 둘이 있으니 진가을은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더욱이 민혁의 어깨에 메고 있는 여성용 가방을 보자 시간이 너무 늦게 흐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어, 도준 형, 사람은 이미 데려다 놨어.”“에이, 나 못 믿어? 걱정하지 마, 따라붙은 사람 없어.”사람은 데려다 놨어…….따라붙은 사람 없어…….생각할수록 진가을은 제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는 사람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가방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스프레이를 꺼내 들었다.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민혁은 통화가 끝난 뒤 이상한 낌새를 채고 뒤를 돌아봣다. 그리고 그 순간, 스프레이가 그의 얼굴에 흩뿌려졌다.“아!”“씨X 뭐야??”민혁은 물론 도준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80은 족히 넘는다. 그런 남자가 저를 향해 걸어오자 진가을은 1층에 도착하자마자 힘껏 소리쳤다.“살려주세요! 여기 양아치가 쳐들어왔어요!”“…….”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비원은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쏜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