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려다 줘서 고마워. 나 먼저 들어갈게.”차가 호텔 앞에 도착하자마자 하윤은 공태준과 작별했다.그때 하윤을 도와 문을 열어주던 태준이 뜬금없이 사과를 건넸다.“미안해요.”“뭐?”갑작스러운 한 마디에 하윤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태준은 차 문을 닫고 하윤 앞에 다가왔다.“은채 일, 대신 사과할게요.”공은채를 언급하자 하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신 사과한다고? 당신이 왜 사과해? 사과 한마디로 아버지 죽음을 그대로 묻어두라는 뜻인가?”“아니, 오해예요.”태준은 낮은 소리로 해명했다.“전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간 은채가 살아 있었다는 걸 속인 게 미안하다는 뜻이었어요. 그 때문에 윤이 씨가 고생했잖아요.”하윤은 태준이 이런 말을 먼저 꺼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그 순간 일부러 잊으려고 애쓰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태준의 말은 하윤이 그간 제 식구가 공은채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고 고생을 해왔는지 다시 상기시켜주었다.심지어 집에서 도망치려는 공은채의 욕심 때문에 하윤의 가족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피 흘리면서 희생당했다.그런데 그걸 도준마저 외면했다는 걸 생각하니 하윤은 숨이 턱 막혀 왔다.“할 말없으면 먼저 갈게.”“잠깐만요.”태준은 하윤을 불러 세우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공천하가 갇혀 있는 감옥 주소예요. 내일 오후 1시 면회 신청해 놓았으니 가보면 궁금했던 거 알 수 있을 거예요.”‘공천하…….’공은채가 그때 그런 일을 꾸민 건 공천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으니 그 당사자는 분명 다른 사람이 모르는 속사정을 알고 있을 게 뻔했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명함에 그려진 넝쿨이 하윤의 손을 점점 위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맞은편 차 안.운전석에 앉은 공은채는 도준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내가 뭐랬어요? 받을 거라고 했죠?”도준은 차창 너머로 태준의 손에서 명함을 받아 든 하윤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도준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순간 하윤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저기, 저 아직 씻지 않았어요.”“가서 씻고 와.”하윤은 말하면서도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준은 의외로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하지만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하윤은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고 욕실로 걸어가면서까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하윤이 막 욕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도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씻을 때 잘 준비해 둬. 또 울며불며 나 탓하지 말고.”“네.”갑작스러운 한마디에 삐끗한 하윤은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도망치듯 문을 닫아 버렸다.도준은 하윤의 콩알만한 심장을 비웃으며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때마침 그때, 소파 틈새에 있는 명함이 도준의 눈에 들어왔다.명함을 이런 곳에 숨겨둘 사람은 하윤일 게 뻔했다.‘결과는 고려하지도 않고 물건 숨기는 것도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원.’도준은 명함을 꺼내 힐끗 바라봤다.그 순간 귓가에 공은채의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또 알아 맞혀 보자면, 이시윤은 아마 내일 공천하 만나러 갈 거예요. 그것도 도준 씨 몰래.’마치 모든 걸 꿰고 있는 듯한 공은채의 말투에 도준은 순간 언짢았다.특히 하윤이 저를 배신할 거라고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하지만 하윤의 선택에 본인마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도준은 혀로 치열을 훑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어디 한번 보자고. 제대로 길들여졌는지.’그 시각, 하윤은 뜨거운 물을 맞으며 머릿속으로 온통 도준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직접 준비하라니!’아까는 정신이 없어 엉겁결에 대답했는데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이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일이 아니었다.지금껏 모든 걸 도준이 알아서 해줬는데 오늘 갑자기 스스로 하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도준이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려 한다는 걸 알아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쇼핑백 안에 든 것은 야한 속옷이 아니라 공연복이었다.그것도 하윤이 공연 때마다 입던 발레 복.하지만 애석하게도 흰 스타킹이 없는 탓에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는 치마로 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로 말이다.그 때문에 안정감이 없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이렇게 입는 것보다 차라리 야한 속옷이 낫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하지만 숨어 있을 수도 없는 탓에 하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욕실 문을 나섰다.그리고 그 순간 밝은 불빛 때문에 하윤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도준은 방 안의 모든 불을 켠 채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심지어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유로운 모습은 하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하윤은 가슴을 가리고 있는 정교한 레이스를 불편한 듯 잡아당기며 모기 소리로 중얼거렸다.“다 갈아입었어요.”환한 불빛은 붉게 물든 하윤의 볼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여과없이 보여주었다.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은 하윤의 발목부터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끝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음, 춤 춰 봐.”‘춤?’하윤은 이런 꼴로 춤을 출 수 없어 어물쩍거리며 시간을 끌었다.“무대도 없는데 어떻게 춰요?”도준은 소파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얼른, 자기는 예뻐서 아무렇게 춰도 예뻐.”어물쩍 넘기려던 하윤은 도준의 말에 끝내 싫다는 말은 내뱉지 못한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평소 여자 마음 사려고 일부러 주접 멘트 날리지 않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여자들 다 죽어났겠네.’음악도 없이 춤 추려니 어색했는지 하윤은 음악을 틀고 싶다고 요구했고, 도준도 순순히 동의했다.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하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하지만 춤을 사랑하기에 그게 어떤 곳이든 이내 집중할 수 있었다.긴 팔을 쭉쭉 뻗으며 허리를 약간 숙이는 하윤의 모습은 백조가 따로 없었다.뒤로 높게 얹어야 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어깨에 드리우고 있어서 그런지 우아함은 덜했지만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다.제 자리에서 빙빙 돌 때,
“아, 그래? 그럼 계속 자.”“어, 잠깜만요.”하윤은 눈을 번쩍 떴다.“저 배고파요. 뭐 좀 먹고 싶어요.”“내려가서 먹자.”“움직이기 싫어서 그러는데, 도준 씨가 사다주면 안 돼요?”도준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위아래로 살폈다.그 모습에 하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뭐? 왜요? 도준 씨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꼭 부상자를 끌고 밥 먹으러 내려 가야겠어요?”하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준은 침대를 짚은 채 허리를 숙였다. 당장 사냥감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위협적인 자세로 서 있는 도준을 보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발을 구르며 뒷걸음 쳤고 목소리마저 점점 기어들어갔다.“안 돼요?”“뭐 먹고 싶은데?”“국수요.”“알았어.”도준은 곧바로 외투를 챙겨 입었다. 잘 빠진 어깨 라인을 보자, 역시 옷 태가 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이윽고 하윤은 차 키를 잡으려는 도준의 손을 꽉 잡으며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일찍 다녀와야 해요.”제 속내도 숨기지 못하는 하윤을 보자 도준은 하윤이 침대에서 내리지 못할 정도로 괴롭히고 싶었다.하지만 하윤은 도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계속 도준의 손을 감싸 쥐었다.도준은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하윤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말 참 많네.”……5성급 호텔에 묵으면서 레스토랑에 내려가 음식을 포장하는 건 솔직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5성급 호텔 조식은 영혼이 없다며 따뜻한 국물이 있는 국수가 먹고 싶다는 하윤 때문에 도준은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그런데 도준이 차 옆에 도착했을 때, 그 뒤에 주차되어 있던 흰색 마세라티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공은채가 싱긋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혼자예요?”도준은 공은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술집 여자 같은 멘트를 잘도 입에 담네.”공은채는 도준의 모욕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오더니 도준의 차에 기대섰다.이윽고 도준의 목에 난 손톱 자국을 훑으며 피식 웃었다.“그런 게 취향이면 나도
도준은 마개를 딴 물병을 내려 놓으며 잔뜩 긴장한 하윤의 얼굴을 바라봤다.“왜? 무슨 일 있어?”도준은 하윤에게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오직 하윤이 무슨 변명을 대며 저를 따돌릴지 궁금했을 뿐.제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하윤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큰 결심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만약 오후에 시간 되면 저랑 같이 공천하가 수감된 감옥에 가줄 수 있어요?”도준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다.“공천하가 수감된 감옥?”“네.”곧이어 하윤은 공태준한테서 명함을 받은 사실을 빠짐없이 털어 놓았다. 심지어 다 말하고 난 뒤 잘못을 한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까지 했다.“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또 거절할까 봐 말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어제 말할 기회도 없어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하윤은 고개를 든 채 불상한 눈으로 도준을 바라봤다.“화 내지 마요. 네?”하윤은 도준과 공은채가 저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 운명이라도 맡기듯 조심스럽 진심을 내보였다.그제야 도준은 어제 하윤이 했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저 도준 씨 사랑해요. 하지만 무서워요.’‘하, 이런 뜻이었어?’사실 하윤을 놓고 내기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하윤의 반응을 보기 위해 도준은 성은우한테도 내기를 제안했었다. 그때도 도준은 단지 구경꾼이었고 하윤은 도준이 짜놓은 판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버둥대는 바둑에 불과했다…….곧이어 공은채의 말도 도준의 뇌리를 세게 강타했다.‘우리가 저를 두고 어떤 판을 짰는지도 모르고 저랑 같은 처지인 벗이 희생당했다고 무너지는 꼴이라니…….’하윤은 확실히 저를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주위에 있는 사람이 다칠 때마다 저 때문이라고 자책해 왔다.깊은 함정에 빠진 게 저인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저를 두고 내기하는 줄 도 모르고 도준한테 독을 먹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분명 가장 큰 피해자가 저인
하윤은 싱글벙글 웃으며 도준의 목을 끌어안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여보.”마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도준은 하윤을 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누가 보면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줄 알겠네. 뭐 하러 그렇게 조심스럽게 말해?”하윤은 도준의 품에 안긴 채 발을 굴렀다.“그냥 도준 씨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호칭을 바꾸자니 왠지 존중하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요.”“쓸데없는 생각은 참 많이 해.”도준은 하윤의 말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하윤은 도준의 다정한 모습이 좋은지 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애교 부렸다.“혹시 화난 건 아니죠?”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윤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되물었다.“내가 무서워?”‘어제 했던 대화는 다 지난 거 아니었나?’갑작스러운 언급에 하윤은 도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손으로 대충 표시하며 얼버무렸다.“조금요.”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하윤의 손을 꼭 감싸 쥐며 하윤이 손가락으로 표시한 작은 틈마저 닫아버렸다.“이만큼도 무서워할 거 없어.”하윤은 어안이 벙벙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도준을 바라봤다.“앞으로 싫으면 싫다 직접 말해. 곤란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도준은 매혹적이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하윤을 빤히 바라보며 그동안 꿈에 그리던 약속을 해주었다.그 모습에 하윤은 넋이 나간 듯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정말이에요?”“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같을 줄 알아? 내가 약속한 거 언제 안 지키는 거 봤어?”하긴, 지난 일을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한 뒤로 도준은 한 번도 하윤의 지난 잘못을 언급한 적이 없다.심지어 하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모두 주었고.그 때문에 하윤은 이 순간이 더 믿기지 않았다.“그럼 만약 제가 도준 씨 말 안 들으면요? 일부러 성깔 부리면…….”“마음대로 해.”하윤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도준을 바라봤다.‘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이정도 신분 차이라면 도준이
호텔에서 나온 하윤은 왠지 마음이 홀가분해져 발걸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하지만 공은채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저를 관찰하고 있을 걸 생각하자 이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도준 ‘몰래’ 나온 거니 당연히 한민혁한테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없었기에 하윤은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았다. 그러던 그때 하윤은 갑자기 좋은 수가 번쩍 떠올랐다.‘잠깐, 공은채도 사람 그렇게 잘 모함하는데, 나도 똑같이 돌려줘야지.’하윤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핸드폰을 꺼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핸드폰 액정을 두드렸다. 것 보기에는 분명 어플로 콜택시를 부르는 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석지환에게 문자를 보낸 거였다.[제가 지난 번에 말했던 말 기억해요? 공은채가 오빠 몰래 도준 씨 만나고 다닌다던 말. 만약 흥미 있으면 호텔로 구경하러 와요.]이렇게 남긴 문자 아래 호텔 주소와 룸 번호를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문자를 보낸 뒤 하윤은 자연스럽게 콜택시 어플을 열어 택시를 부르면서 무심코 주위를 둘러봤다.‘공은채, 그러게 누가 남의 남자 꼬시래? 너도 한번 당해 봐.’하윤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서자 하윤은 얼른 차 안으로 들어갔다.……한편, 하윤의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석지환의 눈은 복잡했다.믿음은 마치 루퍼트 왕자의 눈물과 같아 단단한 부분은 총알도 꿰뚫을 수 없지만 약한 꼬리 부분은 살짝 누르기만해도 부서지기 마련이다.하윤이 처음 공은채에 대해 말했을 때, 석지환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저를 어둠 속에서 꺼내 준 여자를 그렇게 악독한 여자와 연관 지을 수 없으니까. 그가 알던 공은채는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해원에 돌아오고 나서 공은채가 제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 번번이 눈에 들어왔다.이런 저런 방법으로 저를 구슬려 껍데기만 남은 공씨 집안과 손을 잡게 하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솔직히 석지환도 순탄치 못한 공은채의 운명과 한순간 망해버린 공은채의 집안 때문에 그녀를 더 동정한다. 하지만 매
오후 1시 반.하윤은 공태준이 준 명함대로 공천하가 수감된 감옥을 찾았다.이 곳에 수감된 사람은 모두 경제사범들이기에 환경은 그나마 괜찮았다. 태준이 미리 손쓴 덕분에 하윤은 공천하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공천하는 전에 보던 때보다 많이 변해 있었다. 얼굴은 핼쓱해졌고 옷차림도 더 이상 고급 정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덤덤하고 도도했다.하윤을 본 순간 공천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알고 싶어서 찾아왔지?”공천하가 이렇게 말하다면 하윤도 내외할 필요가 없었다.“당신이 우리 아빠 죽였어?”“이성호 친구를 찾아가 돈 좀 찔러주면서 내 계획대로 움직여달라고 꼬드긴 걸 말한다면 맞아. 그런데 투신한 건 멘탈 약한 네 아비를 탁해!”“닥쳐!”하윤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우리 아빠는 반평생 음악밖에 모르던 분이셨어. 그런데 그런 분한테 그렇게 더러운 누명을 씌우다니! 당신이 사라미야?”격양된 하윤의 반응에도 공천하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딸이 미쳐서 아비보다 더 늙은 남자와 살겠다는데 그럼 어떡해? 은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 선에서 이성호한테 교훈을 주려면 그러는 방법 밖에 없었어.”공천하는 제 딸을 유혹한 남자한테 이정도 벌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모든 게 공은채가 꾸민 짓이라는 건 모르는 듯했다.기운 없이 앉아 있는 공천하를 보자 하윤은 문득 지금 화를 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하윤은 깊은 숨을 들이켜면서 질문을 이어 나갔다.“그럼 공은채는 왜 하필 우리 아빠와 같이 살겠다고 고집했지? 대체 왜?”“은채의 친모 염옥란은 해원 제일의 미녀였어…….”그 때문에 부잣집 귀공자든 아니면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든 모두 염옥란에게 구애했었다.하지만 염옥란의 마음 속에는 오직 공천하 뿐이었다.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염옥란이 공태준을 임신했다. 그때만해도 공천하는 아직 가주가 아니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