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도준은 허리 굽힌 민병철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러게 나이도 드신 분이 왜 권력 다툼에 끼어들었습니까? 진작 집에 돌아가 쉬셨으면 좀 좋아요? 이제 그만두겠다고 하시니 소원대로 해드리죠.”도준은 이내 두 손을 꽉 움켜쥔 민시영을 돌아봤다.“네가 사장직 맡을 수 있겠어?”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영은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최선을 다 할게.”그 말에 도준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의견 있는 분 있습니까?”역시나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방금 민병철 식구의 참상을 목격한 자라면 이 상황에 도준의 말을 거역할 리 없었다.“의견 없으시죠? 그러면 뭣들 하고 있습니까? 박수로 축하하지 않고?”“짝짝짝!”열렬한 박수 속에서 시영은 백제 그룹 사장으로 부임되었다.하지만 이들 중 물론 도준이 무서워 억지로 박수 치는 사람도 있지만 절반은 시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었다.이건 그간 회사에 입사해서 오너 일가라는 특권이 주어졌음에도 갑질 한번 하지 않고 심지어 직원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해온 시영에 대한 인정이었다.게다가 시영이 이끄는 부서는 매 분기마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기에 시영이 사장으로 부임하는 것에 사람들은 당연히 의견이 없었다.그렇게 이번 해프닝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막을 내렸다.……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한 것 때문에 시영이 인계 받을 업무는 적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퇴근하니 평소보다 1시간은 훌쩍 넘겼다.그러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자 구매팀 차장이 먼저 시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사장으로 부임되신 거 축하합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전에 제가 구매 건으로 문의드렸을 때 급하게 사인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두고 봤더니 역시나 그쪽에서 문제가 터졌더라고요.”“저는 단지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직접 결정한 건 임 차장님이잖아요. 차장님이 문제를 발견하고 제대로 된 결정 내려 주신 덕에 회사 손실을 막은 거죠.”싱긋 웃으며
송씨 저택.“헤어졌다고? 민시영이 너랑 헤어지자든?”양태린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전에는 너랑 결혼하려고 그렇게 수 쓰더니 이제와서 헤어져?”송민우는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 낮게 중얼거렸다.“시영 씨가 저 버렸어요.”“뭐라고?”아들의 말에 양태린은 펄쩍 뛰었다.“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제가 정말 재벌가 아가씨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네. 그런 더러운 꼴 당한 여자를 어느 집에서 며느리로 받아주겠어? 차라리 잘됐어!”이미 귀에 익을 정도로 들었던 말들이 이 순간 송민우에게 무척이나 거슬렸다.“엄마, 제발 시영 씨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돼요? 시영 씨 좋은 사람이에요, 다 제 잘못이라고요.”“뭐라고?”양태린은 너무 놀라 멍해졌다.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하, 내가 아들 잘못 키웠네. 내가 너를 얼마나 어렵게 키웠는지 알아? 그런데 민시영 때문에 엄마한테 그렇게 말해? 나 죽네, 나 죽어!”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던 송민우는 상심하는 양태린를 보자 또 마음이 약해졌다.“엄마…….”“그래, 차라리 죽어!”하지만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양태린의 눈에 맺혔던 눈물은 쏙 들어갔다.심지어 흠칫 놀라더니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금 돌아온 송경석의 눈치를 살피며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여보, 언제 왔어요? 어, 왜 돌아온다 말도 없었어요? 미리 말하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마중?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어떻게 얻어낸 계약 건인데, 하필이면 민 사장을 건드려?”송경석의 말에 양태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아니에요. 이게 다 민시영, 걔가 중간에서 방해한 거예요.”“헛소리 집어 치워!”송경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양태린을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당신이 둘째 숙모한테서 뒷돈 받고 지표를 함부로 고치지 않았으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일도 없었어! 계약 해지될 일도 없었고!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시영 양을 입에 담아.
결혼식 이후 성은찬이 공태준 쪽으로 넘어가면서 하윤은 더 이상 그를 만난 적이 없다.그런데 갑자기 은찬이 제 앞에 나타나자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던 성은우가 생각났다.‘은찬은 은우 동생이니 은우 소식을 알 거야.’하윤은 은우의 다리가 괜찮아졌는지 알고 싶었고, 지금 잘 지내고 싶은지 궁금했다.여러 가지 감정이 쌓여서인지 하윤은 저도 모르게 은찬이 사라진 쪽으로 뒤쫓아갔다.“잠깜만.”해원의 밤도 경성 못지 않게 시끌벅적했기에 사람들 사이를 지나자 은찬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사람들이 오가는 십자가에서 한참 동안 헤매고 있을 때, 하윤의 눈앞에 은찬의 모습이 또 언뜻 지나갔다.그 순간 하윤은 눈을 반짝이며 곧바로 뒤를 쫓았다.상대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최선을 다해 달린 하윤은 웬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그러고는 이내 직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혹시 열대여섯 정도 되는 남자애 못 보셨어요?”직원은 하윤을 위아래로 훑더니 대답했다.“따라오시죠.”이윽고 하윤을 데리고 웬 칸막이가 있는 룸 앞에 도착했다.“찾는 분이라면 이 안에 있습니다.”한참 동안 직원을 뒤따라오면서 하윤의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심지어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리죠. 지금 들어가면 방해가 될 테니까요.”하지만 하윤이 문 앞까지 도착했으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직원은 뭐가 그리 급한지 하윤을 다그쳤다.“찾은 분이 안에 있는데 정말 안 들어가실 겁니까?”직원이 이렇게 강요할수록 하윤은 룸 안에 뭔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 요구를 거절했다.“됐습니다.”하지만 하윤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윤이 씨.”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호칭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보는 순간 하윤의 흥분도 이내 사라졌다. 하윤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공태준이었다.“설마 일부러 은찬이를 이용해 나 여기로 데려온 거야?”태준의 옷차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평소에도 귀족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였지만
방금 전 분명 만두를 먹었는데 딸기 케익의 달콤한 냄새를 맡으니 하윤의 위는 눈치껏 자리를 내주었다.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크림에 잘게 썰린 딸기가 섞여 있어 마침 하윤의 입맛을 자극했다.그래서인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이거 어디 거야?”“제가 직접 만들었어요.”“직접?”공태준은 부드럽게 웃었다.“네, 오랫동안 배웠거든요. 오늘도 2개나 실패했어요. 다행히 이건 그나마 괜찮아서 가져온 거고.”태준의 말을 들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포크가 무겁게 느껴져 하윤은 이내 포크를 내려 놓았다.“공태준, 이럴 필요 없어. 나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그 말 벌써 수십 번은 했어요.”태준은 싱긋 웃었다.“사실 알잖아요. 제가 빚 갚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저 윤이 씨 좋아해요.”태준은 마치 하윤을 놀라게 할까 봐 겁이라도 나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겨우 잠재운 제 심장이 다시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도 있었다.그런 태준의 모습에 하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준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해야 했다. 그래야 공은채도 하루 빨리 경계를 풀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한 사람의 감정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공태준, 난 이미…….”“말하지 않아도 알아요.”태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그저 생일을 핑계 삼아 욕심 좀 채우려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말하지 마요.”태준은 손을 들어 케이크를 하윤 앞으로 밀었다.“얼른 케익 먹어요.”“그래.”아까까지만 해도 맛있던 케이크가 갑자기 질려 하윤은 대충 먹는 시늉만 하다가 끝내 포크를 내려 놓았다.그리고 하윤이 포크를 내려 놓은 그때, 태준도 따라서 포크를 내렸다.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은우 다리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빨리 걷지만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 문제없으니 안심해도 돼요.”안심? 어떻게 안심할 수 있단 말인가?한때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검으로 불리던 사람이
달리는 차 안에서 하윤은 뒤로 휙휙 지나가는 익숙한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지어 이 모든 게 꿈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하윤의 기억은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도 하윤은 지금처럼 차에 앉아 창밖의 경치를 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엄마가 해주기로 한 갈비찜을 떠올리고, 또 주말에 오빠와 함께 놀러갈 계획을 머리에 그렸다.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예쁜 야경은 마치 꿈처럼 점점 멀어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건 오직 제 그림자뿐이었다.하윤은 왠지 이 순간 도준이 보고싶어졌다.도준이 곁에 있을 때면 이렇게 외로운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런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잠깐.’그 순간 하윤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 났다.‘그러고 보니 이 일 도준 씨한테 말하지 못했네.’은찬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태준과 마주친 데다 모든 게 등 떠밀리듯 벌어진 바람에 이 모든 걸 도준에게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머리털이 삐죽 곤두섰다.지난 번 태준의 차에 올라타지 않았는데도 그런 꼴을 당했는데, 지금은 차에 올라탄 건 둘째 치고 은우를 보러 가는 길이니 그 결과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하윤은 옆을 힐끗거렸다. 태준은 태블릿으로 일처리를 하는 듯해 보였다.그걸 확인한 순간 하윤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도준과 나눈 대화창을 열었다.위에는 온통 하윤의 문자뿐이었다. 도준은 문자 대신 최근 했던 영상통화 기록이 전부였다.하윤은 이내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완곡히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리 완곡하게 말한다 한들 도준이 실어하는 포인트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이 일을 말한다면 도준은 당장 돌아오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도준이 은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 데다, 만약 은우가 해원에 있는 걸 알면 또 손을 쓸까 봐 두려웠다.‘아니면 말하지 말까?’‘도준 씨는 아직 경성에 있으니까 내일 돌아오면 다시 용서를 빌지 뭐
성은찬은 싱긋 웃었다.‘맞아요, 잘 생겼죠? 형이 마음에 둔 사람만 없었으면 누나 소개시켜 주는 건데.’“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 애도 있어.”그 말에 여자는 번쩍 정신을 차렸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자 은찬이도 헤실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안 보이는데요.”……얼마 뒤 이제 막 하교한 학생들이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학교 공연 때문에 하모니카를 구매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이에 너무 바쁜 나머지 은찬은 또 은우를 불러냈다.하윤은 거리를 두고 바삐 움직이는 두 형제를 바라봤다.그때, 옆에 있던 공태준이 눈치껏 자리를 비키며 말했다.“차에서 기다릴게요.”태준이 떠나기 바쁘게 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졌다.이 순간 어떤 심정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은우가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게 솔직히 기뻤다. 하지만 열심히 하모니카를 포장하는 은우의 모습을 보자 아무리 눈치 없는 하윤이라도 은우가 저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하지만 은우는 그 마음을 한 번도 고백한 적이 없다. 그저 하윤이 필요할 때 나타나 도와주고 모든 일을 말없이 해결해주고 또 자취를 감추고…….그런 은우에게 하윤이 빚진 건 다리뿐만이 아니다.그 시각, 맞은편.포장을 끝낸 은우는 손님을 떠나보내고 난 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테이블을 정리했다.“너지? 윤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게.”은우의 말에 은찬은 모르는 척 잡아뗐다.“어? 누구 말하는 거야?”하지만 은우의 날카로운 눈빛을 참지 못하고 끝내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형이 가게 일부러 여기 차렸으면서. 이렇게 만날 거란 거 몰랐다고 할 건 아니지?”은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맞은편을 살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여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하늘거렸다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하윤이 나무 뒤에 숨었을 때부터 은우는 눈치챘다.은찬의 말도 솔직히 틀린 건 아니다. 가게를 이 곳에 차린 건 확실히 하윤을 위한 거였다. 하지만 만나기를 바랐던 건 아니다.하윤이 저를 보기 원하
눈물을 훔치고 있던 여자의 눈은 어느새 당황스러움으로 대체되었다.“도, 도준 씨…….”빛을 등진 채 우뚝 서 있는 도준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기분을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런 도준을 본 하윤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애써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성에 있어야 할 도준이 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하윤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혹시 이제 막 도착해서 저 찾아온 거예요?”도준은 슬금슬금 움직이며 제 시선을 가리려고 애쓰는 하윤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하윤의 머리 위를 지나 건너편에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니, 불륜 현장 덮치러 왔는데?”하윤은 모든 게 들통났다는 걸 인지하고는 얼른 도준의 팔을 잡았다.“저 은우 만나지 않았어요. 그냥 여기서 조금 봤을 뿐이니까 화내지 말아요.”다급하게 해명하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더니 팔을 들었다. 그 동작 때문에 팔짱을 끼고 있던 하윤은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내가 화내는 게 두려운 거야? 아니면 빡 쳐서 저 개자식한테 뭐라도 할까 봐 무서운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저 새X 편들다니 여전하네.”분명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하윤은 마치 천근도 더 되는 무게가 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저 은우랑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도준 씨랑 저 이미 결혼도 했는데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딴 마음 품을 수 있겠어요? 저 믿어 줘요. 저 정말 멀리서 보기만 했어요.”도준은 믿어주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그 동작에 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꼬리에 살짝 손이 닿는 느낌이 들 뿐 더 이상의 동작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리고 그 시각, 도준은 손가락 끝에 묻었다 바람에 이내 사라져 버린 하윤의 눈물을 보더니 시뻘게진 하윤의 눈시울을 바라봤다.“왜? 나랑 결혼한 게 그렇게 억울해? 여기 숨어서 옛 애인 보며 몰래 울만큼?”하윤은 허둥지둥
“핑계가 안 떠오르지?”“안 떠오르면 직접 만나서 말해.”도준은 말하면서 하윤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당장이라도 팔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잡은 탓에 하윤은 아무리 버둥대도 도준을 뿌리칠 수 없었다.“그러지 마요. 우리 돌아가요. 네?”“그래. 저 개자식만 만나면 바로 돌아가자고.”아무리 애원하고 뿌리쳐도 도준을 막을 길 없자, 하윤은 급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불쑥 내뱉었다.“도준 씨가 매번 이렇게 저 강요하지 않으면 저도 은우한테 빚지고 살 필요 없었잖아요. 은우 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돼요?”하윤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던 도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뭐라고?”“내 말 틀렸어요?”하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솔직히 하윤도 잘 알고 있다. 은우도 저도 모두 실수로 바둑판에 발을 들인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거, 이 치열한 판 속에서 살아 남는 것조차 힘든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만약 공은채가 죽었다면 하윤도 이토록 원망스럽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잘 살아서 돌아다니는 공은채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언젠가는 이 바둑판에서 희생당할 보잘것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은우와 하윤이다.하지만 은우는 제가 하윤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본인 손으로 제 다리에 구멍을 내는 걸 불사하면서까지.이건 은우가 도준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힘이다.사실 하윤이 바라는 건 별거 없다. 그저 은우의 생활이 방해받지 않는 거. 그 하나면 된다.‘그런데 왜 그것마저 안되냐고?’도준은 아무 말없는 하윤을 빤히 바라봤다. 직접 묻지 않아도 하윤이 속으로 그 개자식을 대신해 억울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이미 갈라졌던 흔적에 또다시 금이 가기 시작했다.도준은 하윤을 잡아 끌던 손을 풀고 담배를 꺼내 들었다.“또 말해 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한꺼번에 말해.”하윤은 어리둥절해졌다.“뭐라고요?”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