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의논할 뿐이었지만 민병철은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민시영을 향해 소리쳤다.“누가 너더러 들어오래?”“저 회사 기획부장이에요. 다른 사람 허락 따위 구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민병철 사장이 지금부로 해고되었음을 선포합니다.”시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회사 사장은 주임보다 급이 높은 임원을 해고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저 해고하겠으면 오빠한테 동의 구해요.”그 말에 민병철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내가 백제 그룹에서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몇 십 년 전 형님과 이 회사를 일궈낼 때 민도준은 태어나지도 않았어! 게다가 우리 회사는 배신자 따위 필요 없어! 당장 나가! 나가지 않으면 경비 부를 테니까!”분노 섞인 고함소리가 회의실 안을 메웠다가 이내 농담 섞인 웃음 소리 때문에 끊겼다.“잘 아시네, 그렇다면 얼른 준비해서 나가세요.”“…….”도준이 들오자 시끄러웠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심지어 민병철은 도준을 보는 순간 맞았던 갈비뼈가 찌끈거렸다. 하지만 이내 도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채고는 낯빛이 어두워졌다.“내가 백제 그룹을 위해 몇 십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백제 그룹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네 말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도준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그래서 그동안 연봉 탔잖아요, 배당금도 받았잖아요. 집안 식구란 식구는 모두 회사에 끌어들였으면서 어디서 억울한 척해요?”늘 가식적인 가면으로 저를 꽁꽁 싸매고 있던 회사 사람들은 도준의 말에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회사에서 지위와 권력으로 남을 누르기만 하던 민병철은 더할 나위 없었다. 심지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게 진 것도 모자라 옆에 있던 무역팀 부장이 부축하지 않으면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그, 그건 회사에 인재를 들여온 것뿐이야!”“인재라고요?”도준은 옆을 힐끗 쳐다봤다.“들어와요.”곧이어 두 경비원에게 꽁꽁 묶인 젊은 남자
“하긴,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직접 가르쳐 보세요. 제가 만족한다면 이번 일은 그대로 묻어드리죠.”도준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을 하자 민병철은 도준이 대충 편의를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는 민현준을 꾸짖는 척 목소리를 높였다.“것 봐, 그러게 왜 그런 같잖은 여자들과 어울려서는 이 할아비까지 너 걱정하게 해? 앞으로 눈 크게 뜨고 사람 제대로 봐, 알았어?”“알았어요.”“하.”도준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 뚜껑을 닫았다.“설마 이거로 끝낼 생각 아니죠?”회의실 안을 꽉 메운 임원진들 앞에서 저보다 한참 어린 도준에게 사정할 수 없었던 민병철은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게 이 상황에 사장을 하면 앞으로 아랫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면 뭘 원하는 거지?”“제가 뭘 원하냐고요?”도준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경비원의 허리 춤에 있는 막대기를 가리키며 머리를 까딱거렸다.“민병철 사장님께 그거 갖다 드려요.”“제가 바라는 거 별거 없어요. 민현준의 다리를 부러뜨리면 이번 일은 넘어가 드리죠.”“쾅!”도준의 말에 민병철은 분에 겨워 막대기를 쳐냈다.“민도준! 너 사람 그렇게 무시하지 마!”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막대기는 마침 도준의 발 앞에 굴러왔다.그 막대기를 밟으며 자리에서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의 시선도 따라서 위로 올라갔다.검은 막대기를 손에 든 도준의 모습은 소름 돋을 정도로 섬뜩해 민병철의 기세마저 꺾어 버렸다.“지…… 지금 뭐하는 거지?”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저요? 이러려고요.”말과 동시에 도준은 손에 든 막대기를 힘껏 휘둘렀다.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러 퍼졌다.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몰아 쉬었고 곧이어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아! 내 다리…… 아!”도준은 몽둥이를 손바닥에 툭툭 내리치며 민병철을 향해 웃었다.“손자라고 손 못 댈 것 같아 제가
민도준은 허리 굽힌 민병철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러게 나이도 드신 분이 왜 권력 다툼에 끼어들었습니까? 진작 집에 돌아가 쉬셨으면 좀 좋아요? 이제 그만두겠다고 하시니 소원대로 해드리죠.”도준은 이내 두 손을 꽉 움켜쥔 민시영을 돌아봤다.“네가 사장직 맡을 수 있겠어?”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영은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최선을 다 할게.”그 말에 도준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의견 있는 분 있습니까?”역시나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방금 민병철 식구의 참상을 목격한 자라면 이 상황에 도준의 말을 거역할 리 없었다.“의견 없으시죠? 그러면 뭣들 하고 있습니까? 박수로 축하하지 않고?”“짝짝짝!”열렬한 박수 속에서 시영은 백제 그룹 사장으로 부임되었다.하지만 이들 중 물론 도준이 무서워 억지로 박수 치는 사람도 있지만 절반은 시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었다.이건 그간 회사에 입사해서 오너 일가라는 특권이 주어졌음에도 갑질 한번 하지 않고 심지어 직원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해온 시영에 대한 인정이었다.게다가 시영이 이끄는 부서는 매 분기마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기에 시영이 사장으로 부임하는 것에 사람들은 당연히 의견이 없었다.그렇게 이번 해프닝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막을 내렸다.……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한 것 때문에 시영이 인계 받을 업무는 적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퇴근하니 평소보다 1시간은 훌쩍 넘겼다.그러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자 구매팀 차장이 먼저 시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사장으로 부임되신 거 축하합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전에 제가 구매 건으로 문의드렸을 때 급하게 사인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두고 봤더니 역시나 그쪽에서 문제가 터졌더라고요.”“저는 단지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직접 결정한 건 임 차장님이잖아요. 차장님이 문제를 발견하고 제대로 된 결정 내려 주신 덕에 회사 손실을 막은 거죠.”싱긋 웃으며
송씨 저택.“헤어졌다고? 민시영이 너랑 헤어지자든?”양태린은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전에는 너랑 결혼하려고 그렇게 수 쓰더니 이제와서 헤어져?”송민우는 마치 혼이라도 나간 듯 낮게 중얼거렸다.“시영 씨가 저 버렸어요.”“뭐라고?”아들의 말에 양태린은 펄쩍 뛰었다.“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제가 정말 재벌가 아가씨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네. 그런 더러운 꼴 당한 여자를 어느 집에서 며느리로 받아주겠어? 차라리 잘됐어!”이미 귀에 익을 정도로 들었던 말들이 이 순간 송민우에게 무척이나 거슬렸다.“엄마, 제발 시영 씨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돼요? 시영 씨 좋은 사람이에요, 다 제 잘못이라고요.”“뭐라고?”양태린은 너무 놀라 멍해졌다.그러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하, 내가 아들 잘못 키웠네. 내가 너를 얼마나 어렵게 키웠는지 알아? 그런데 민시영 때문에 엄마한테 그렇게 말해? 나 죽네, 나 죽어!”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던 송민우는 상심하는 양태린를 보자 또 마음이 약해졌다.“엄마…….”“그래, 차라리 죽어!”하지만 때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양태린의 눈에 맺혔던 눈물은 쏙 들어갔다.심지어 흠칫 놀라더니 잔뜩 겁먹은 얼굴로 방금 돌아온 송경석의 눈치를 살피며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여보, 언제 왔어요? 어, 왜 돌아온다 말도 없었어요? 미리 말하면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마중?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어떻게 얻어낸 계약 건인데, 하필이면 민 사장을 건드려?”송경석의 말에 양태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아니에요. 이게 다 민시영, 걔가 중간에서 방해한 거예요.”“헛소리 집어 치워!”송경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양태린을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당신이 둘째 숙모한테서 뒷돈 받고 지표를 함부로 고치지 않았으면 이런 사단이 일어날 일도 없었어! 계약 해지될 일도 없었고!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시영 양을 입에 담아.
결혼식 이후 성은찬이 공태준 쪽으로 넘어가면서 하윤은 더 이상 그를 만난 적이 없다.그런데 갑자기 은찬이 제 앞에 나타나자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던 성은우가 생각났다.‘은찬은 은우 동생이니 은우 소식을 알 거야.’하윤은 은우의 다리가 괜찮아졌는지 알고 싶었고, 지금 잘 지내고 싶은지 궁금했다.여러 가지 감정이 쌓여서인지 하윤은 저도 모르게 은찬이 사라진 쪽으로 뒤쫓아갔다.“잠깜만.”해원의 밤도 경성 못지 않게 시끌벅적했기에 사람들 사이를 지나자 은찬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사람들이 오가는 십자가에서 한참 동안 헤매고 있을 때, 하윤의 눈앞에 은찬의 모습이 또 언뜻 지나갔다.그 순간 하윤은 눈을 반짝이며 곧바로 뒤를 쫓았다.상대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최선을 다해 달린 하윤은 웬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그러고는 이내 직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혹시 열대여섯 정도 되는 남자애 못 보셨어요?”직원은 하윤을 위아래로 훑더니 대답했다.“따라오시죠.”이윽고 하윤을 데리고 웬 칸막이가 있는 룸 앞에 도착했다.“찾는 분이라면 이 안에 있습니다.”한참 동안 직원을 뒤따라오면서 하윤의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심지어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아닙니다. 밖에서 기다리죠. 지금 들어가면 방해가 될 테니까요.”하지만 하윤이 문 앞까지 도착했으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직원은 뭐가 그리 급한지 하윤을 다그쳤다.“찾은 분이 안에 있는데 정말 안 들어가실 겁니까?”직원이 이렇게 강요할수록 하윤은 룸 안에 뭔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 요구를 거절했다.“됐습니다.”하지만 하윤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문이 활짝 열렸다.“윤이 씨.”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호칭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보는 순간 하윤의 흥분도 이내 사라졌다. 하윤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공태준이었다.“설마 일부러 은찬이를 이용해 나 여기로 데려온 거야?”태준의 옷차림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평소에도 귀족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였지만
방금 전 분명 만두를 먹었는데 딸기 케익의 달콤한 냄새를 맡으니 하윤의 위는 눈치껏 자리를 내주었다.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크림에 잘게 썰린 딸기가 섞여 있어 마침 하윤의 입맛을 자극했다.그래서인지 하윤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이거 어디 거야?”“제가 직접 만들었어요.”“직접?”공태준은 부드럽게 웃었다.“네, 오랫동안 배웠거든요. 오늘도 2개나 실패했어요. 다행히 이건 그나마 괜찮아서 가져온 거고.”태준의 말을 들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포크가 무겁게 느껴져 하윤은 이내 포크를 내려 놓았다.“공태준, 이럴 필요 없어. 나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그 말 벌써 수십 번은 했어요.”태준은 싱긋 웃었다.“사실 알잖아요. 제가 빚 갚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저 윤이 씨 좋아해요.”태준은 마치 하윤을 놀라게 할까 봐 겁이라도 나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겨우 잠재운 제 심장이 다시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것도 있었다.그런 태준의 모습에 하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준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해야 했다. 그래야 공은채도 하루 빨리 경계를 풀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한 사람의 감정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공태준, 난 이미…….”“말하지 않아도 알아요.”태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그저 생일을 핑계 삼아 욕심 좀 채우려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말하지 마요.”태준은 손을 들어 케이크를 하윤 앞으로 밀었다.“얼른 케익 먹어요.”“그래.”아까까지만 해도 맛있던 케이크가 갑자기 질려 하윤은 대충 먹는 시늉만 하다가 끝내 포크를 내려 놓았다.그리고 하윤이 포크를 내려 놓은 그때, 태준도 따라서 포크를 내렸다.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를 닦더니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은우 다리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 빨리 걷지만 않으면 겉보기에 아무 문제없으니 안심해도 돼요.”안심? 어떻게 안심할 수 있단 말인가?한때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검으로 불리던 사람이
달리는 차 안에서 하윤은 뒤로 휙휙 지나가는 익숙한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지어 이 모든 게 꿈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하윤의 기억은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그때도 하윤은 지금처럼 차에 앉아 창밖의 경치를 봤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엄마가 해주기로 한 갈비찜을 떠올리고, 또 주말에 오빠와 함께 놀러갈 계획을 머리에 그렸다.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예쁜 야경은 마치 꿈처럼 점점 멀어졌다. 여전히 남아 있는 건 오직 제 그림자뿐이었다.하윤은 왠지 이 순간 도준이 보고싶어졌다.도준이 곁에 있을 때면 이렇게 외로운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었는데 말이다. 심지어 그런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잠깐.’그 순간 하윤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 났다.‘그러고 보니 이 일 도준 씨한테 말하지 못했네.’은찬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태준과 마주친 데다 모든 게 등 떠밀리듯 벌어진 바람에 이 모든 걸 도준에게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머리털이 삐죽 곤두섰다.지난 번 태준의 차에 올라타지 않았는데도 그런 꼴을 당했는데, 지금은 차에 올라탄 건 둘째 치고 은우를 보러 가는 길이니 그 결과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하윤은 옆을 힐끗거렸다. 태준은 태블릿으로 일처리를 하는 듯해 보였다.그걸 확인한 순간 하윤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도준과 나눈 대화창을 열었다.위에는 온통 하윤의 문자뿐이었다. 도준은 문자 대신 최근 했던 영상통화 기록이 전부였다.하윤은 이내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완곡히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무리 완곡하게 말한다 한들 도준이 실어하는 포인트뿐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이 일을 말한다면 도준은 당장 돌아오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도준이 은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닌 데다, 만약 은우가 해원에 있는 걸 알면 또 손을 쓸까 봐 두려웠다.‘아니면 말하지 말까?’‘도준 씨는 아직 경성에 있으니까 내일 돌아오면 다시 용서를 빌지 뭐
성은찬은 싱긋 웃었다.‘맞아요, 잘 생겼죠? 형이 마음에 둔 사람만 없었으면 누나 소개시켜 주는 건데.’“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 애도 있어.”그 말에 여자는 번쩍 정신을 차렸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자 은찬이도 헤실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안 보이는데요.”……얼마 뒤 이제 막 하교한 학생들이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학교 공연 때문에 하모니카를 구매하러 온 학생들이었다. 이에 너무 바쁜 나머지 은찬은 또 은우를 불러냈다.하윤은 거리를 두고 바삐 움직이는 두 형제를 바라봤다.그때, 옆에 있던 공태준이 눈치껏 자리를 비키며 말했다.“차에서 기다릴게요.”태준이 떠나기 바쁘게 하윤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졌다.이 순간 어떤 심정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은우가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게 솔직히 기뻤다. 하지만 열심히 하모니카를 포장하는 은우의 모습을 보자 아무리 눈치 없는 하윤이라도 은우가 저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하지만 은우는 그 마음을 한 번도 고백한 적이 없다. 그저 하윤이 필요할 때 나타나 도와주고 모든 일을 말없이 해결해주고 또 자취를 감추고…….그런 은우에게 하윤이 빚진 건 다리뿐만이 아니다.그 시각, 맞은편.포장을 끝낸 은우는 손님을 떠나보내고 난 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테이블을 정리했다.“너지? 윤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게.”은우의 말에 은찬은 모르는 척 잡아뗐다.“어? 누구 말하는 거야?”하지만 은우의 날카로운 눈빛을 참지 못하고 끝내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형이 가게 일부러 여기 차렸으면서. 이렇게 만날 거란 거 몰랐다고 할 건 아니지?”은우는 고개를 살짝 들어 맞은편을 살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여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하늘거렸다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하윤이 나무 뒤에 숨었을 때부터 은우는 눈치챘다.은찬의 말도 솔직히 틀린 건 아니다. 가게를 이 곳에 차린 건 확실히 하윤을 위한 거였다. 하지만 만나기를 바랐던 건 아니다.하윤이 저를 보기 원하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