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은 동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공은채가 집안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진작 알았으면서도 어머니의 심장만 손에 넣으면 공은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무관심했다.하지만 그날, 공은채에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도준은 점차 공은채의 생일에 참석하면서 공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공은채는 도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도준 씨가 저를 얼마나 아껴줬는지 저 다 기억해요.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답을 주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도준 씨가 상처받았다는 것도 알고요. 저한테 보상할 기회 줄 수 있어요?”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윤의 가슴은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두 사람의 인연이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된 거였다니.’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준이 공은채를 거절하지 맗아야 한다. 도준을 온전히 차지했다고 경계를 풀어야만 공은채가 수술받을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으니까.하지만 그걸 눈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가 모든 걸 망칠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비틀거리며 돌아섰다.“철컥.”문을 닫자마자 힘 빠진 듯 소파에 엎드린 하윤은 도준이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도준은 밖에서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하윤의 허리를 툭툭 쳤다.“배가죽이 등에 붙겠어. 얼른 와서 이것부터 먹어.”하윤은 도준에게 제 뒤통수만 보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안 먹어요.”도준은 피식 웃었다.“오냐오냐 하니까 점점 기어오르네? 먹고 싶다고 굳이 가져다 달라고 했으면서 가져오니 먹기 싫다고?”하윤은 속이 답답하고 서러워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먹기 싫다고요. 차라리 때려요.”“짝!”제 엉덩이를 내리치는 때리는 남자의 모습에 하유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도준은 미첨 힘을 줄이지 않은 탓에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하윤은
하윤은 도준의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뭐가 10년 만에 본다는 거예요? 제가 공은채도 아니고, 도준 씨랑 10년 전에 만났을 리 없잖아요.”도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하윤을 보자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연주하면서 울던 게 누군데?”“피아노 배우면서 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에요?”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하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어? 이상하다? 제가 연주현서 울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도준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아 하윤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자기가 연주할 때 우는 울보라는 것만 아는 줄 알아? 겁쟁이인 것도 아는데? 잠깐 놀렸다고 뒤꽁무치 치는.”하윤은 점점 멍해졌다.“무슨 말이에요? 겁쟁이라니요? 지금 일부러 화제를 전환하는 거 맞죠? 미리 말해두는 데, 이번 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얼른 말해요. 공은채와 10년 전에 어디에서 만났는지!”“해원의 강남 콘서트홀. 홀 안이 너무 시끄러워 밖에서 산책하다가 마침 웬 꼬맹이가 초상 난 사람처럼 울며 연주하는 걸 들었거든.”‘남 콘서드홀? 초상?’‘왜 이렇게 익숙하지?’하윤은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그때 도준이 깊은 생각에 빠진 하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초상 난 것 같다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면서 반나절 연습하더라고.”그제야 하윤의 기억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해, 주 숙제에 불합격이라는 성적을 받은 하윤은 아버지에게 끌려 연습실로 갔었다.분명 오빠와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한 날 연습 때문에 갈수 없게 되자 하윤은 연습할수록 더 심하게 울어 댔다.그렇게 한창 슬피 울고 있는데 창밖에서 행인의 비아냥소리가 들려왔다.상대의 말투는 해원 본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제 갓 소년미를 벗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누가 들으면 연주가 아니라 초상 치른다고 해도 믿겠어.”심지어 비웃음도 가득 묻어 있었다.가뜩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더니 왜 또 못되다는 거야?”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내보이던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어? 잠깐만요. 그대 저를 만났다면서 공은채는 왜 그때 도준 씨가 자기를 만났다고 하는 거예요? 설마 저한테 겁주고 그 길로 공은채 만나러 간 거예요?”하윤의 상상력에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고?’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도준의 다리를 탁 내리쳤다.“알았어요! 도준 씨가 만났던 사람이 자기라도 공은채가 그랬다면서요!”귀찮은 듯한 도준의 콧소리에 하윤은 눈 앞이 캄캄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러니까 공은채는 도준 씨가 만났던 게 본인인 척 속여 제 발판으로 삼았다는 거네? 젠장!’“그러니까 도준 씨는 그 때문에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공은채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한 거예요?”입에 담배를 물고 있던 도준은 하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담배를 손에 쥐었다.“대체 나를 뭘로 본 거야? 연주곡 하나에 평생을 기약하다고? 그냥 연주 몇 번 들은 게 다야.”USB 영상에서 도준이 듣던 게 바로 공은채가 연주한 ‘기억’이었다.‘그러니까 도준 씨는 원래 내 연주를 들으려고 한 거였네?’그제야 모든 걸 알아차린 하윤은 가슴이 헛헛해 나며 구멍 났던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 덕에 시큰거리며 아프던 마음도 괜찮아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천하의 민도준이 사람을 잘못 보다니요?”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자기가 그때 도망만 안 쳤어도 내가 잘못 볼 리 있겠어?”하윤은 제 화를 풀 곳이 없어 속으로 화를 삭이며 팔짱을 꼈다.“그럼 언제 저라는 걸 알았는데요?”“그 정도로 엉망인 실력이 자기 말고 더 있을까?”“…….”솔직히 도준은 하윤에게 장난 친 거다. 지금 하윤의 연주 실력은 엉망이 아닐
“응, 시영이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 주주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지금 난리도 아니래.”도준은 가볍게 말했지만 듣는 하윤은 조급함이 휘몰아쳤다.“그럴 수가. 시영 언니 쪽은 지금껏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어요?”“하, 이게 다 그 개새X 때문이야.”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민시영과 케빈의 사이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혔다. 시영은 분명 케빈을 미워하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소란을 피운 게 회사의 임원진들인 데다 그 수가 적지 않다는 말에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그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혹시 진작 계략을 세워 둔 건 아니에요? 도준 씨가 경성을 오래 떠나 있어서 기회를 틈탔을 수도 있잖아요.”제 생각을 말하던 하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이게 다 저 때문이에요.”어깨를 들썩이며 외투를 걸치던 도준은 잔뜩 풀이 죽어 죄책감을 느끼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게 왜 자기 탓이야? 쓸데없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얼른 와서 옷 입고 출발하자.”눈깜짝할 사이에 준비를 마친 도준은 여전히 꾸물대는 하윤을 도와 옷을 입혔다.하지만 이제 막 팔을 들어 옷을 입으려던 하윤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어? 잠깐만, 도준 씨가 떠나면 그 일기를 지환 오빠한테 보여줄 수 있잖아.’만약 도준이 있다면 절대 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도준이 없다면 달랐다.갑자기 든 생각에 하윤은 팔을 내렸다.“도준 씨 혼자 돌아가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뭐라고?”남자의 목소리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다.등불을 등진 채 하윤을 집어 삼킬 것처럼 바싹 붙어 있어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하윤은 버둥대며 일어나더니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뻗어 도준의 목을 감쌌다.“제가 따라가면 도준 씨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그래요. 저는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도준 씨가 다녀올 때까지 절대 아무 사고도 치지 않을게요. 맹세!”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집중하지 못할까 봐 그러는
도준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하윤을 빙글 돌렸다.“시간 없으니 말 들어.”이불 속에 얼굴이 파묻힌 채 하윤은 당황한 듯 손을 마구 허둥대며 뒤에 있는 남자를 밀었다.“급하다면서요. 이러지 마요.”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한 채 하윤의 허리를 잡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출장 가기 전에 기르던 식물에게 물은 줘야하잖아?”“그게 무슨…… 읍…….”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남자의 큰 손에 막혀 버렸다.“착하지? 자기 신경 쓸 시간 없으니 좀만 참아.”“…….”이윽고 도준은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며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옆에 우뚝 섰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도준은 가죽 벨트를 다시 차며 큰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정신 차리고 나서 혼자 씻어. 나 올 때까지 착하게 기다리고. 알았지?”이별의 아쉬움은 어느새 모두 흩어져 하윤은 귀찮은 듯 손등을 보이며 휘휘 저었다. 그건 빨리 가라는 손짓이었다.저를 내쫓는 하윤의 행동에도 도준은 트집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하윤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갈게.”……늦은 밤, 차 안에서 한참동안 기다린 한민혁은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아까는 급하다면서 당장 튀어 오라더니,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볼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설마 바람 맞힌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민혁은 제 옆을 힐끗 거리더니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형, 목은 왜 그래?”손으로 쓱 문지른 순간, 따끔한 느낌이 들자 도준은 이내 거울을 내려 제 목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목덜미에 손톱자국이 나 있는 게 아니겠는가?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윤이 버둥대며 긁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조금도 밑지려 하지 않는다니까.’“아무것도 아니야. 우선 출발해.”“오케이.”민혁은 도준을 계류장에 내려 주고 뒤따라 전용기에 오르려 했지만 도준이 그를 막아섰다.“너는 여기 남아 있어.”“아하, 알겠어. 걱정하지 마. 형 뒤뜰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 게, 절대 다른 놈이 안
장 형사는 어색하게 웃었다.“무슨 그런 농담을. 저는 그저 소통을 담당할 분입니다.”“아하, 제가 낯을 가릴까 봐 일부러 배려해 준 건가요?”도준은 서장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마음도 다 써주시고, 고맙네요.”이장훈은 도준의 미소에 소름이 돋아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해댔다.“다름이 아니라, 민시영 씨가 외부인과 결탁하여 회사 내부 기밀을 누설했다는 내부인의 신고를 받았습니다. 현재 민시영 씨는 그 일로 조사받고 있고요.”“그래요? 신고자가 누구죠?”“백제 그룹 사장입니다.”이상훈의 대답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아하, 임원이네요.”솔직히 촌수를 따지면 도준은 민병철한테 셋째 할아버지라고 해야 한다.민병철은 민성철의 가까운 형제이자 한 때는 가문의 주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줄을 잘못 서서 민재혁 네 식구와 어울린 것도 모자라 회사를 노려 계속 잔머리를 굴리는 인물이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도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노인 한 분이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심지어 저를 부축해주는 경찰관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며 큰 소리를 쳤다.“우리 민씨 집안에서는 절대 그런 야심을 품고 있는 버러지를 용납할 수 없어. 감히 그룹 이익에 손실을 내? 이건 반드시 엄히 스려야 한다고!”민병철은 저만의 세상에 빠져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도준이 온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누구를 말하는 거죠?”민병철은 제 앞에 나타난 도준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윽고 말까지 더듬었다.“아니……, 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솔직히 민병철은 이번 기회에 저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모두 쳐낼 작정이었다. 때문에 도준이 경성에 없는 틈을 타 시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거다.그렇게 되면 시영이 가지고 있던 권리가 모두 저한테 돌아올 거고, 도준이 돌아온 뒤 그에게 맞설 수 있었으니까.하지만 도준이 이런 야밤에 경성에 나타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도준의 미소는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스산한 분위기를
미안한 기색은커녕 되려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올린 도준은 싱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다들 보셨죠? 저는 위협을 받아 정당방위를 한 것뿐입니다. 제가 피해자라고요.”장 형사는 배를 끌어안은 채 연신 앓음 소리를 내는 민병철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도준을 번갈아 보며 아픈 머리를 눌렀다.“민 사장님, 민시영 씨의 조사가 끝났다고 하는데, 우선 그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그렇게 되어, 도준은 이내 장 형사를 따라 취조실로 향했다.그걸 본 민병철은 또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 찍으며 버럭 소리쳤다.“나 오늘 여기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민시영을 빼낼 생각 하지 마!”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민병철의 모습에 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여기서 지키고 있기 전에 우선 일어나 나고 말씀하시죠?” “…….”민병철의 고함 소리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간 도준과 장 형사의 귀에까지 들렸다.도준을 만나기 전, 시영은 곧바로 심문을 끝마친 상태였다.늦은 밤 갑자기 끌려와 조사를 받았음에도, 시영의 옷차림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도준을 본 순간 흔들림 없던 시영의 얼굴에 파란이 일었다.“오빠……, 미안해. 걱정했지?”도준은 취조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이번 사건 덮죠? 사람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취조를 담당한 경찰은 도준이 누구인지 몰라 장 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장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풀려나는 가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기 전 또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그 사람은 다름 아니라 겨우 일어난 민병철이었다.“민시영이 회사 기밀을 누설했어. 이대로 풀어줄 수 없다고!”도준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갔다. 하지만 손만 들었는데 민병철은 잔뜩 쫄아서 연신 뒷걸음쳤다.“기밀? 누구 기밀?”“당연히 백제 그룹 기밀이지!”“아하.”도준은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그럼 백제 그룹이 누구 거죠?”민병철이 더 이상 대꾸하지
살짝 굳어진 송민우의 얼굴에 어색함이 더해졌다.“네, 저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좀 보수적이라서요. 이런 일에 연루되는 걸 원치 않으셔서 시간이 좀 지체되었습니다.”하긴, 송씨 집안 부자는 그나마 시영에게 예의를 갖추지만 송경석의 부인 양태린은 겉으로 뭐라 한 적은 없지만 늘 시큰둥해했다.지난 번 프러포즈 파티에서 시영에게 무례를 범한 그 사촌도 사실은 양태린 쪽 친척이다. 그런 자리에서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봐서는 뒤에서 시영의 호박씨를 얼마나 깠을지 짐작할 수 있다.게다가 예전에는 그나마 재벌가 아가씨라는 신분 때문에 뭐라 하지 않았을 테지만, 사건에 연루된 지금, 더 이상 시영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을 거였다.눈치 빠른 시영은 당연히 송민우의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중간에서 난처했겟네요.”그 말을 듣자 송민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영 씨는 항상 이렇게 제 마음을 이해해 주네요. 가요, 제가 데려다 줄게요.”시영은 송민우의 손을 슬쩍 피했다.“저 오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먼저 돌아가요.”도준을 내세우자 송민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얘기 잘 나눠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네, 안전 주의해요.”송민우는 도준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쫄아 어색한 폴터 인사만 남긴 채 떠나갔다.차 후미등이 어둠속에서 사라지자 도준은 이내 조소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저런 것도 마음에 들어?”시영은 눈을 내리 깔았다.“결혼이 원래 이런 거잖아.”도준은 손에 쥔 라이터를 빙빙 돌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꼭 그렇지만은 않아.”도준의 편안한 말투에 옆에서 듣고 있던 시영마저 따라서 미소 지었다.“오빠는 결혼 생활이 행복한가 보네?”도준은 대답 다신 시영을 바라봤다.“사흘간 휴가 줄 테니까 해결할 일 있으면 해결하고 와. 또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다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