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준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하윤을 빙글 돌렸다.“시간 없으니 말 들어.”이불 속에 얼굴이 파묻힌 채 하윤은 당황한 듯 손을 마구 허둥대며 뒤에 있는 남자를 밀었다.“급하다면서요. 이러지 마요.”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한 채 하윤의 허리를 잡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출장 가기 전에 기르던 식물에게 물은 줘야하잖아?”“그게 무슨…… 읍…….”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남자의 큰 손에 막혀 버렸다.“착하지? 자기 신경 쓸 시간 없으니 좀만 참아.”“…….”이윽고 도준은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며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옆에 우뚝 섰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도준은 가죽 벨트를 다시 차며 큰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정신 차리고 나서 혼자 씻어. 나 올 때까지 착하게 기다리고. 알았지?”이별의 아쉬움은 어느새 모두 흩어져 하윤은 귀찮은 듯 손등을 보이며 휘휘 저었다. 그건 빨리 가라는 손짓이었다.저를 내쫓는 하윤의 행동에도 도준은 트집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하윤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갈게.”……늦은 밤, 차 안에서 한참동안 기다린 한민혁은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아까는 급하다면서 당장 튀어 오라더니,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볼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설마 바람 맞힌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민혁은 제 옆을 힐끗 거리더니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형, 목은 왜 그래?”손으로 쓱 문지른 순간, 따끔한 느낌이 들자 도준은 이내 거울을 내려 제 목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목덜미에 손톱자국이 나 있는 게 아니겠는가?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윤이 버둥대며 긁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조금도 밑지려 하지 않는다니까.’“아무것도 아니야. 우선 출발해.”“오케이.”민혁은 도준을 계류장에 내려 주고 뒤따라 전용기에 오르려 했지만 도준이 그를 막아섰다.“너는 여기 남아 있어.”“아하, 알겠어. 걱정하지 마. 형 뒤뜰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 게, 절대 다른 놈이 안
장 형사는 어색하게 웃었다.“무슨 그런 농담을. 저는 그저 소통을 담당할 분입니다.”“아하, 제가 낯을 가릴까 봐 일부러 배려해 준 건가요?”도준은 서장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마음도 다 써주시고, 고맙네요.”이장훈은 도준의 미소에 소름이 돋아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해댔다.“다름이 아니라, 민시영 씨가 외부인과 결탁하여 회사 내부 기밀을 누설했다는 내부인의 신고를 받았습니다. 현재 민시영 씨는 그 일로 조사받고 있고요.”“그래요? 신고자가 누구죠?”“백제 그룹 사장입니다.”이상훈의 대답에 도준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아하, 임원이네요.”솔직히 촌수를 따지면 도준은 민병철한테 셋째 할아버지라고 해야 한다.민병철은 민성철의 가까운 형제이자 한 때는 가문의 주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줄을 잘못 서서 민재혁 네 식구와 어울린 것도 모자라 회사를 노려 계속 잔머리를 굴리는 인물이다.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도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노인 한 분이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심지어 저를 부축해주는 경찰관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며 큰 소리를 쳤다.“우리 민씨 집안에서는 절대 그런 야심을 품고 있는 버러지를 용납할 수 없어. 감히 그룹 이익에 손실을 내? 이건 반드시 엄히 스려야 한다고!”민병철은 저만의 세상에 빠져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도준이 온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누구를 말하는 거죠?”민병철은 제 앞에 나타난 도준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윽고 말까지 더듬었다.“아니……, 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솔직히 민병철은 이번 기회에 저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모두 쳐낼 작정이었다. 때문에 도준이 경성에 없는 틈을 타 시영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거다.그렇게 되면 시영이 가지고 있던 권리가 모두 저한테 돌아올 거고, 도준이 돌아온 뒤 그에게 맞설 수 있었으니까.하지만 도준이 이런 야밤에 경성에 나타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도준의 미소는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스산한 분위기를
미안한 기색은커녕 되려 억울한 듯 두 손을 들어 올린 도준은 싱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다들 보셨죠? 저는 위협을 받아 정당방위를 한 것뿐입니다. 제가 피해자라고요.”장 형사는 배를 끌어안은 채 연신 앓음 소리를 내는 민병철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도준을 번갈아 보며 아픈 머리를 눌렀다.“민 사장님, 민시영 씨의 조사가 끝났다고 하는데, 우선 그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습니까?”그렇게 되어, 도준은 이내 장 형사를 따라 취조실로 향했다.그걸 본 민병철은 또 지팡이로 땅을 쿵 내리 찍으며 버럭 소리쳤다.“나 오늘 여기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민시영을 빼낼 생각 하지 마!”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민병철의 모습에 도준이 입꼬리를 올렸다.“여기서 지키고 있기 전에 우선 일어나 나고 말씀하시죠?” “…….”민병철의 고함 소리는 이미 저 멀리 걸어간 도준과 장 형사의 귀에까지 들렸다.도준을 만나기 전, 시영은 곧바로 심문을 끝마친 상태였다.늦은 밤 갑자기 끌려와 조사를 받았음에도, 시영의 옷차림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도준을 본 순간 흔들림 없던 시영의 얼굴에 파란이 일었다.“오빠……, 미안해. 걱정했지?”도준은 취조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이번 사건 덮죠? 사람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취조를 담당한 경찰은 도준이 누구인지 몰라 장 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장 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풀려나는 가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기 전 또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그 사람은 다름 아니라 겨우 일어난 민병철이었다.“민시영이 회사 기밀을 누설했어. 이대로 풀어줄 수 없다고!”도준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갔다. 하지만 손만 들었는데 민병철은 잔뜩 쫄아서 연신 뒷걸음쳤다.“기밀? 누구 기밀?”“당연히 백제 그룹 기밀이지!”“아하.”도준은 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그럼 백제 그룹이 누구 거죠?”민병철이 더 이상 대꾸하지
살짝 굳어진 송민우의 얼굴에 어색함이 더해졌다.“네, 저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좀 보수적이라서요. 이런 일에 연루되는 걸 원치 않으셔서 시간이 좀 지체되었습니다.”하긴, 송씨 집안 부자는 그나마 시영에게 예의를 갖추지만 송경석의 부인 양태린은 겉으로 뭐라 한 적은 없지만 늘 시큰둥해했다.지난 번 프러포즈 파티에서 시영에게 무례를 범한 그 사촌도 사실은 양태린 쪽 친척이다. 그런 자리에서 서슴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봐서는 뒤에서 시영의 호박씨를 얼마나 깠을지 짐작할 수 있다.게다가 예전에는 그나마 재벌가 아가씨라는 신분 때문에 뭐라 하지 않았을 테지만, 사건에 연루된 지금, 더 이상 시영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었을 거였다.눈치 빠른 시영은 당연히 송민우의 말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중간에서 난처했겟네요.”그 말을 듣자 송민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시영 씨는 항상 이렇게 제 마음을 이해해 주네요. 가요, 제가 데려다 줄게요.”시영은 송민우의 손을 슬쩍 피했다.“저 오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먼저 돌아가요.”도준을 내세우자 송민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얘기 잘 나눠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네, 안전 주의해요.”송민우는 도준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을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쫄아 어색한 폴터 인사만 남긴 채 떠나갔다.차 후미등이 어둠속에서 사라지자 도준은 이내 조소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저런 것도 마음에 들어?”시영은 눈을 내리 깔았다.“결혼이 원래 이런 거잖아.”도준은 손에 쥔 라이터를 빙빙 돌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꼭 그렇지만은 않아.”도준의 편안한 말투에 옆에서 듣고 있던 시영마저 따라서 미소 지었다.“오빠는 결혼 생활이 행복한가 보네?”도준은 대답 다신 시영을 바라봤다.“사흘간 휴가 줄 테니까 해결할 일 있으면 해결하고 와. 또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했다간 그
“엄마, 저 이미 시영 씨한테 청혼도 했어요. 게다가 제가 좋아하는 건 시영 씨지 백제 그룹과는 상관없어요.”“너 엄마가 화병 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양태린은 버럭 소리쳤다.“그런 더러운 추문에 휘말리지 않으면 권력이 없어도 내가 뭐라 안 해.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겉으로 너를 축하하고 뒤에서 얼마나 수군댈지 네가 몰라서 그래!”“이제는 손에 쥔 권력도 없으니 사람들마다 짓밟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라고. 이러면 내가 사모 모임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겠어?”하지만 송민우는 여전히 양태린을 설득하려고 애썼다.“엄마, 시영 씨 정말 좋은 여자예요. 저도 시영 씨 좋아하고요. 시영 씨가 모든 걸 잃은 이 시점에 제가 헤어지자고 하면 제가 뭐가 되겠어요?”“뭐가 되든 그게 중요해? 이건 네 평생이 달린 문제야!”양태린의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너는 신경 쓰지 마. 내가 내일 식사 약속 잡고 말 꺼낼 테니까.”“그건 좀…….”“뭘 머뭇거려? 엄마가 화병으로 죽는 꼴 보고싶어서 그래? 그래, 몇 십년 동안 뼈빠지게 고생해서 키웠더니 남의 자식이었네, 이러고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엄마, 절대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건강 주의하고요.”“내가 건강 챙겨 뭐해? 그 여자랑 결혼하겠으면 앞으로 이 에미는 없는 셈 쳐!”“아니…….”한창 고민하던 송민우는 끝내 타협했다.“우선 알겠어요. 그런데 시영 씨한테 예의만은 지켜 줘요.”시영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반대하는 어머니의 앞에서 대충 헤어진 척하고 화가 가라앉으면 다시 만나면 그만이라고 송민우는 생각했다.……다음 날.송민우의 초대를 받은 시영은 점잖은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양태린은 시영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평소 사모 모임에 자주 가던 찻집에서 작속을 잡았다.약속장소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들이 시영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저를 향하는 시선들을 무시한 채 시영은 등을 곧게 펴고 미소 지으며 맨 안쪽으로 걸어갔다.“어머님, 오래 기다리셨죠?”
민시영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헤어지는 것조차 뒤에 숨어 엄마 말을 따르다니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시영의 말을 듣던 사모들은 곧바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끔씩 약하다는 둥, 마마보이라는 둥 하는 단어까지 튀어나왔다.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되려 당한 양태린은 얼굴이 싸늘해진 채로 대꾸했다.“나는 그저 민우가 마음이 여려 여자가 울면 마음 약해질까 봐 대신 나선 거야. 제가 가질 수 없다고 이렇게 폄하할 필요는 없잖니?”시영은 더 이상 양태린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제가 끼고 있던 다이아 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민우 씨가 직접 오지 않았으니 이 청혼 반지는 여사님께서 대신 전해주세요.”자리에서 일어나 미련없이 떠나가던 시영은 다시 몸을 돌려 싱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참, 그리고 한가지 말 못한 게 있는데, 이거 제가 껴본 반지 중에서 알이 제일 작은 거였어요.”송씨 가문의 몇십 개 집안 중, 민씨 집안의 재력을 능가하는 집안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시영이 떠난 뒤에도 양태린의 낯빛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뭐라고요? 송민우가 그 자식 안되겠네!”호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던 하윤은 송씨 집안 식구들의 악행을 듣자마자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몸을 빙글 돌렸다.“경성에 있으면서 해원에서 운전해 간 사람보다 늦게 도착하다니 얼마나 성의 없는지 안 봐도 뻔하네요.”당장이라도 달려와 송민우를 물어 뜯을 것처럼 화내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사람 진심이 다 그렇지 뭐.”“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평생을 약속했으면서 어떻게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어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계속 말해 봐요. 그래서요? 송씨 집안 식구가 시영 언니를 불러내 파혼한 다음은요?”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하윤을 당해내지 못해 도준은 아예 송씨 집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그걸 듣고 있던 하윤은 화를 냈다가 가끔은 시영을 동정하기도 하고 쉴새 없
하윤은 차에 오르자마자 재촉했다.“지환 오빠가 개인적으로 여는 경매 맞아요? 혹시 들킨 건 아니죠?”“걱정 붙들어 매세요. 이미 시뮬레이션도 끝냈으니까. 이따 맨 뒤쪽으로 달려가면 제가 밖에서 망 볼 게요. 절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막을 게요.”한민혁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하윤은 만족스러운 듯 가방 안의 일기책을 톡톡 두드렸다. 심지어 가는 길 내내 석지환 앞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차는 이내 경매장 뒷문에 도착했다.석씨 집안은 보석 사업부터 시작해 점차 몸체를 키워왔다. 게다가 이제는 수많은 경매장까지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막 해외에서 귀국한 석지환이 가업을 발전시키려면 이곳저곳 많이 둘러봐야 하는 건 당연했다.마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석지환은 제 앞에 나타난 하윤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시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하윤은 안쪽으로 고개를 쑥 들이 밀고 방 안을 살피며 말했다.“지환 오빠. 여기 오빠만 있는 거 맞죠?”“응, 왜 그래? 무슨 불시 점검이라도 하러 왔어?”석지환은 농담조로 말했다.“선배 참 농담도 잘하네요.”하윤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 치며 안으로 들어가 공은채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폈다.그러다 진짜로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석지환은 하윤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문을 닫으며 말했다.“대체 뭘 찾는 거야?”하윤은 그제야 몸을 돌려 사뭇 진지한 투로 말했다.“지환 오빠, 저 사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요.”석지환은 하윤을 의자로 안내했다.“응, 우선 앉아. 나도 마침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지난 번에 미처 말하지 않고 공은채와 너를 만나게 한 거 내 잘못이야. 솔직히 그날 너한테 설명하고 싶었는데 밖에 손님들이 많기도 했고 민 사장님이 곁에 있어줄 거니까 올라가지 않았어. 설마 화난 건 아니지?”석지환은 이승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하윤을 키우다시피 했기에, 하윤과 대화할 때면 늘 동생 달래듯 다정하게 말하곤 한다.하윤은 익숙한 말투에 가
“아빠가 공은채를 도우려고 했다는 게 무슨 뜻이죠?”“그게…….”입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삼킨 채 되묻자 석지환이 설명하기 시작했다.공은채가 석지환에게 얘기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두 사람은 사생관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는 데다 공은채의 상황을 알게 된 이성호가 공은채의 도망을 도우려 했다고.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걸 공천하가 알게 되었고 그러한 비극이 생겼던 거다.공천하는 이성호에게 보복하기 위해 학생들을 매수해 그의 이름에 먹칠했고 자살하지 않으면 그의 가족이 화를 입게 될 거라고 협박하면서 투신 자살을 종용했다.하지만 이성호가 투신한 뒤 공천하는 이성호의 가족을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점점 망가트렸다.그걸 들은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 모든 게 너무 말이 되니까. 심지어 공은채에 대한 공천하의 집착이라면 이러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하지만 그 배후는? 게다가 공은채는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하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석지환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은채도 이 일에 죄책감을 품고 있어, 심지어 자살 시도도 했었고.”“자살이요?”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윤이 믿지 않는 눈치에 석지환이 증언했다.“은채 팔목에 재해 흔적이 있어. 공씨 집안 사람들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공은채가 아버지를 따라 죽으려고 했다는 걸 충동적으로 말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이미 제가 한 일에 그럴싸한 변명을 붙였는데, 하윤이 그런 말을 했다면 오히려 공은채를 비방한 것밖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어쩐지 석지환의 여자친구 신분으로 당당하게 내 앞에 나타난다 했어.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다 짜 놓았던 거네.’“그래서요? 그간 어디 있었대요?”“교수님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어렵사리 다시 살아난 뒤 죽은 척하고 공씨 저택을 떠나 살았대. 그곳에서 공은채라는 이름도 신분도 숨기고 지내다가 나랑은 우연한 기회에 만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