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영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헤어지는 것조차 뒤에 숨어 엄마 말을 따르다니 저랑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시영의 말을 듣던 사모들은 곧바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끔씩 약하다는 둥, 마마보이라는 둥 하는 단어까지 튀어나왔다.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되려 당한 양태린은 얼굴이 싸늘해진 채로 대꾸했다.“나는 그저 민우가 마음이 여려 여자가 울면 마음 약해질까 봐 대신 나선 거야. 제가 가질 수 없다고 이렇게 폄하할 필요는 없잖니?”시영은 더 이상 양태린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제가 끼고 있던 다이아 반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 놓았다.“민우 씨가 직접 오지 않았으니 이 청혼 반지는 여사님께서 대신 전해주세요.”자리에서 일어나 미련없이 떠나가던 시영은 다시 몸을 돌려 싱긋 웃으며 말을 보탰다.“참, 그리고 한가지 말 못한 게 있는데, 이거 제가 껴본 반지 중에서 알이 제일 작은 거였어요.”송씨 가문의 몇십 개 집안 중, 민씨 집안의 재력을 능가하는 집안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시영이 떠난 뒤에도 양태린의 낯빛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뭐라고요? 송민우가 그 자식 안되겠네!”호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던 하윤은 송씨 집안 식구들의 악행을 듣자마자 핸드폰을 꽉 그러쥐며 몸을 빙글 돌렸다.“경성에 있으면서 해원에서 운전해 간 사람보다 늦게 도착하다니 얼마나 성의 없는지 안 봐도 뻔하네요.”당장이라도 달려와 송민우를 물어 뜯을 것처럼 화내는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사람 진심이 다 그렇지 뭐.”“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평생을 약속했으면서 어떻게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어요? 자꾸 말 돌리지 말고 계속 말해 봐요. 그래서요? 송씨 집안 식구가 시영 언니를 불러내 파혼한 다음은요?”계속 꼬치꼬치 캐묻는 하윤을 당해내지 못해 도준은 아예 송씨 집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그걸 듣고 있던 하윤은 화를 냈다가 가끔은 시영을 동정하기도 하고 쉴새 없
하윤은 차에 오르자마자 재촉했다.“지환 오빠가 개인적으로 여는 경매 맞아요? 혹시 들킨 건 아니죠?”“걱정 붙들어 매세요. 이미 시뮬레이션도 끝냈으니까. 이따 맨 뒤쪽으로 달려가면 제가 밖에서 망 볼 게요. 절대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막을 게요.”한민혁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하윤은 만족스러운 듯 가방 안의 일기책을 톡톡 두드렸다. 심지어 가는 길 내내 석지환 앞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차는 이내 경매장 뒷문에 도착했다.석씨 집안은 보석 사업부터 시작해 점차 몸체를 키워왔다. 게다가 이제는 수많은 경매장까지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막 해외에서 귀국한 석지환이 가업을 발전시키려면 이곳저곳 많이 둘러봐야 하는 건 당연했다.마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석지환은 제 앞에 나타난 하윤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시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하윤은 안쪽으로 고개를 쑥 들이 밀고 방 안을 살피며 말했다.“지환 오빠. 여기 오빠만 있는 거 맞죠?”“응, 왜 그래? 무슨 불시 점검이라도 하러 왔어?”석지환은 농담조로 말했다.“선배 참 농담도 잘하네요.”하윤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 치며 안으로 들어가 공은채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살폈다.그러다 진짜로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했다.석지환은 하윤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문을 닫으며 말했다.“대체 뭘 찾는 거야?”하윤은 그제야 몸을 돌려 사뭇 진지한 투로 말했다.“지환 오빠, 저 사실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요.”석지환은 하윤을 의자로 안내했다.“응, 우선 앉아. 나도 마침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지난 번에 미처 말하지 않고 공은채와 너를 만나게 한 거 내 잘못이야. 솔직히 그날 너한테 설명하고 싶었는데 밖에 손님들이 많기도 했고 민 사장님이 곁에 있어줄 거니까 올라가지 않았어. 설마 화난 건 아니지?”석지환은 이승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하윤을 키우다시피 했기에, 하윤과 대화할 때면 늘 동생 달래듯 다정하게 말하곤 한다.하윤은 익숙한 말투에 가
“아빠가 공은채를 도우려고 했다는 게 무슨 뜻이죠?”“그게…….”입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삼킨 채 되묻자 석지환이 설명하기 시작했다.공은채가 석지환에게 얘기한 이야기는 이러했다. 두 사람은 사생관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는 데다 공은채의 상황을 알게 된 이성호가 공은채의 도망을 도우려 했다고.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걸 공천하가 알게 되었고 그러한 비극이 생겼던 거다.공천하는 이성호에게 보복하기 위해 학생들을 매수해 그의 이름에 먹칠했고 자살하지 않으면 그의 가족이 화를 입게 될 거라고 협박하면서 투신 자살을 종용했다.하지만 이성호가 투신한 뒤 공천하는 이성호의 가족을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점점 망가트렸다.그걸 들은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 모든 게 너무 말이 되니까. 심지어 공은채에 대한 공천하의 집착이라면 이러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하지만 그 배후는? 게다가 공은채는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하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석지환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은채도 이 일에 죄책감을 품고 있어, 심지어 자살 시도도 했었고.”“자살이요?”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윤이 믿지 않는 눈치에 석지환이 증언했다.“은채 팔목에 재해 흔적이 있어. 공씨 집안 사람들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공은채가 아버지를 따라 죽으려고 했다는 걸 충동적으로 말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이미 제가 한 일에 그럴싸한 변명을 붙였는데, 하윤이 그런 말을 했다면 오히려 공은채를 비방한 것밖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어쩐지 석지환의 여자친구 신분으로 당당하게 내 앞에 나타난다 했어.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다 짜 놓았던 거네.’“그래서요? 그간 어디 있었대요?”“교수님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어렵사리 다시 살아난 뒤 죽은 척하고 공씨 저택을 떠나 살았대. 그곳에서 공은채라는 이름도 신분도 숨기고 지내다가 나랑은 우연한 기회에 만난
텅 빈 제 소매를 보자 석지환의 눈에 파문이 일었다.원래라면 그해 골든 홀에서 스승인 이성호와 함께 연주해야 할 사람은 석지환이다.하지만 무대 일주일 전, 그에게 사고가 난 거다.그날은 신입생 환영회였다. 원래 학생 대표로 환영회에 연주해야 할 주림은 그날 저녁 갑자기 열이 나면서 무대를 석지환에게 부탁했다.집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을 늘 돌보던 석지환은 주림의 부탁에 동의한 것도 모자라 약국에서 약까지 사 들고 공연이 끝나면 가져다주려고 했다.하지만 약을 다시 주림에게 전해준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신입생 환영회 무대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무대에서 연주하던 석지환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니까. 물론 목숨은 건졌지만 그 사고로 한쪽 팔을 영원히 잃었다.당사자뿐만 아니라 목격자의 마음에도 큰 그림자로 남은 이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곤 한다.회상을 멈춘 석지환은 눈을 감았다.“나도 이 일이 단순한 사고인 줄로만 알고 있었어. 마약 공은채가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모른 채로 살았겠지.”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던 하윤은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뭐라고요? 누가 말해줬다고요?”“은채.”“…….”공은채를 언급하자 추억 속에 잠겨 있던 석지환의 눈은 다시금 빛났다.그러더니 갑자기 물었다.“윤아, 네 눈에 나는 어떤 사람이야?”잠깐 멈칫하던 하윤이 대답했다.“다정하고 친절하고 다른 사람 챙길 줄 아는 큰오빠 같은 사람이요.”석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어. 그런데 은채가 그러더라. 사실 나는 다른 사람 보살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팔을 잃은 뒤 석지화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취약했다. 겉으로 팔을 잃은 게 아무 일도 아닌 척해왔지만 매번 균형을 잃고 넘어질 때면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웠다.그래도 늘 혼자서 고통을 묵혀왔는데, 공은채를 만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당시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두 사람은 그저 해외에서 오랜만에 만난 학교 동문
하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무력감이 몰려왔고 어디로 가든 앞길이 막힌 미로에 갇힌 기분이었다.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석지환은 하윤이 제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운을 뗐다.“나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 주림이 성질머리는 좀 있어도 순수하고 착한 동생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은채 말에 의하면 주림이 그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정신 상태도 불안정해서 나를 경쟁 대상으로 여겼나 봐. 그리고 은채가 주림을 위로하려고 가까이했더니 자꾸 둘이 사귀는 거로 착각해 은채도 나중에 멀어졌다고 하더라고.”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일기의 존재가 순식간에 내놓을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공은채의 완벽한 포장 덕에 일기를 꺼낸다 해도 석지환은 그게 모두 주림의 억측이라고 여길 테니까.다시 입을 열었을 때 하윤의 목소리는 많이 가라앉았다.“공은채는 주림 선배가 한 짓인 거 어떻게 알았대요?”“우연히 알았나 봐. 은채가 나보다 먼저 귀국했는데 그때 주림의 룸메이트를 만났대. 그런데 룸메 말로는 주림이 그때 아팠던 게 아니었대.”석지환이 아무리 다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를 입에 담을 때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주림은 나 대신 교수님과 무대에 서기 위해서 이런 일을 꾸몄던 거야.”석지환이 사고를 당하면서 주림이 그 기회를 잡은 건 사실이다.때문에 모든 게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양상이 되어버렸다.순간 손발이 꽁꽁 묶인 기분이 들어 하윤은 어떻게 해야 이 국면을 만회할 지 몰랐다.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고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아버지의 사인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하윤의 마음은 이미 심란했다. 방금까지도 애써 침착해야 한다고, 공은채의 진짜 모습을 밝혀야 한다고 자기에게 최면을 걸었다.하지만 지금, 그 마지막 희망마저 깨져버렸다.‘내 가족은 그저 공은채의 손에 놀아날 운명인 걸까?’하윤은 눈앞이 깜깜하여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석지환의 질문이 정곡을 찔러왔다.“시윤아, 주림이 지금 경성에
지난 몇 년 간 지옥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하윤은 가족을 이끌고 지금껏 살아 남았다.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지만 전에는 본 적도 없는 세상의 추악한 면모를 보았고, 그로 인해 점점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게, 하윤에게 인생은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이었으니까.공태준이든 공은채든 아니면 민도준이든 모두 이 게임의 설계자라면 하윤은 그 속에 갇혀 살길을 찾아 헤매는 플레이어에 불과했다.세 사람처럼 상위자의 시야도 없었기에 생사의 기로에서 매순간 허덕이기 바빴다.그리고 지금도, 만약 도준이 하윤을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지 않았다면 하윤은 아마 계속 그 심연 속에서 허덕였을 거다.……분명 제 과거를 얘기면서 하윤은 마치 남 얘기하듯 무덤덤했다.그리고 무덤덤하게 제 이야기를 풀어가는 하윤을 보면서 석지환은 하윤이 더 이상 제가 알던 천진난만하던 동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석지환 기억 속의 하윤은 분명 매일 이승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였다.게다가 승우는 그런 하윤을 무척 아꼈다. 등 하교할 때마다 데리러 가고 데리러 오고, 조금만 아프면 달래서 재우고 먹이면서 엄마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돌봤다.그래서 석지환은 매번 동생이 시집가면 승우도 혼수로 함께 따라가겠다며 놀려댔었다.그런 보살핌 속에서 자란 하윤은 애교 많은 꼬맹이였고 뭐든 오빠 의견을 따르는 귀여운 동생이었다.하지만 현재, 하윤은 이미 석지환과 승우가 보지 못한 곳에서 천진난만하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온갖 시련을 겪어도 아픈 기색도 내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석지환은 미안한 마음이 앞서 하윤의 팔을 꼭 잡았다.“미안해. 오빠들이 너 지켜주지 못했어. 막 해외에 도착한 1년 간은 나 혼자 좌절에 빠져 너희가 이런 고생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오빠가 미안해.”석지환이 아직도 지난 나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하윤은 이내 확신이 들어 간절히 말했다.“제가 어떻게 오빠를 탓하겠어요. 오빠도 피해자잖아요.”“피해자? 그게 무슨 뜻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오빠,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하윤이 경계하는 모습을 내비치자 석지환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그러니까 네 말대로 은채가 정말 주림과 교수님의 일과 연루되었다면 그걸 민 사장이 몰랐을까?”‘도준 씨…….’민도준이 흥덕 마을과 이성호가 투신한 빌딩에 모두 나타난 적이 있다면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꺼냈다.“난 도준 씨 믿어요. 도준 씨는 내가 다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석지환은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다 컸다더니 여전히 어린애네? 그때 민 사장은 너 알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너까지 고려하겠어?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두 사람 사이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너도 알았음 해서. 네가 나더러 은채 의심하라고 하는 게 내가 너더러 민 사장 의심하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하윤은 몇 마디 말로 공은채에 대한 석지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좋아요. 증거가 없으니 오빠 난처하기 안 할게요. 그런데 하나만은 꼭 약속해 줘요. 내가 오늘 했던 말 공은채한테 말하지 않겠다고.”석지환은 피식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할까?”익숙한 동작은 순간 하윤의 옛추억을 소환했다. 학생 시절 승우가 바쁠 때면 항상 석지환이 승우 대신 하윤을 데리러 오곤 했는데 그때만 되면 하윤은 승우가 먹지 못하게 하던 음식을 몰래 사먹고는 석지환과 새끼 손가락 걸고 맹세하게 했었다.지난 추억에 코끝이 찡해난 하윤은 새끼 손가락을 내 밀어 석지환의 손가락을 감았다.……경매장을 나선 하윤은 천천히 걸으며 오늘 들은 일들을 소화했다.애초의 목적은 세뇌된 석지환을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제가 도리어 미궁속에 빠지게 된 것 같았다.‘공은채, 감히 내 식구 목숨을 도망치는 발판으로 삼아? 찢어 죽일 X.’공천하가 공은채의 꾀임에 넘어갔든 아니면 정말로 제 딸을 죽은 아내와 겹쳐 보았든, 딸이 몇
한민혁은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하윤의 앞을 가로막은 채 공은채와 대치했다. 그 모습은 제 새끼 지키는 암탉이 따로 없었다.“하윤 씨 먼저 가세요. 여긴 제가 막고 있을게요.”공은채는 아무 정서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눈으로 잔뜩 긴장한 민혁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민혁 씨, 아무리 그래도 저 도준 씨 약혼녀였던 사람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상사의 전 애인과 현 애인 사이에서 도준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 안 들리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하윤에게 말했다.“차 안에 히터 켜 놓고 있으니 먼저 타요.”“혹시 지환 오빠 찾아왔어?”“안 돼?”하윤은 민혁의 말을 무시한 채 공은채를 바라봤다. 그 시각 공은채도 하윤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얼핏 보면 채 얼지 않은 물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먹어봐야 얼마나 차가운지 알고, 목구멍으로 넘겨봐야 목구멍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얼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하윤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당연히 되지. 지환 오빠 여자친구잖아. 그런데 지환 오빠는 알아? 네가 지환 오빠랑 사귀면서 도준 씨를 위해 몸은 깨끗하게 남겨두고 있다는 거?”“…….”너무 충격적인 대사에 민혁의 동공은 일순 확대되었다. 심지어 너무 놀라 아무 말조차 하지 못했다.‘이, 이거 너무 자극적이잖아?’그날 일부러 하윤이 듣도록 말한 지라 하윤이 다시 그 일을 입에 담자 공은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 쳤다.“아하, 혹시 들었어?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넌 도준 씨랑 어울리지 않아. 도준 씨는 너처럼 평범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사람이야.”공은채의 말에 하윤은 화가나 웃음이 나왔다.“그럼 누가 더 어울리는데? 너?”“응.”“도준 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도준 씨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포악한지 나만 알거든.”공은채는 하윤을 힐끗 바라봤다“도준 씨가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곁에 있어준 사람도 나고 도준 씨가 이토록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걸 지켜본 사람도 나야. 그러니 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