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오빠,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하윤이 경계하는 모습을 내비치자 석지환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그러니까 네 말대로 은채가 정말 주림과 교수님의 일과 연루되었다면 그걸 민 사장이 몰랐을까?”‘도준 씨…….’민도준이 흥덕 마을과 이성호가 투신한 빌딩에 모두 나타난 적이 있다면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꺼냈다.“난 도준 씨 믿어요. 도준 씨는 내가 다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석지환은 헛웃음이 나왔다.“이제 다 컸다더니 여전히 어린애네? 그때 민 사장은 너 알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너까지 고려하겠어?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두 사람 사이 이간질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너도 알았음 해서. 네가 나더러 은채 의심하라고 하는 게 내가 너더러 민 사장 의심하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하윤은 몇 마디 말로 공은채에 대한 석지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섰다.“좋아요. 증거가 없으니 오빠 난처하기 안 할게요. 그런데 하나만은 꼭 약속해 줘요. 내가 오늘 했던 말 공은채한테 말하지 않겠다고.”석지환은 피식 웃으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할까?”익숙한 동작은 순간 하윤의 옛추억을 소환했다. 학생 시절 승우가 바쁠 때면 항상 석지환이 승우 대신 하윤을 데리러 오곤 했는데 그때만 되면 하윤은 승우가 먹지 못하게 하던 음식을 몰래 사먹고는 석지환과 새끼 손가락 걸고 맹세하게 했었다.지난 추억에 코끝이 찡해난 하윤은 새끼 손가락을 내 밀어 석지환의 손가락을 감았다.……경매장을 나선 하윤은 천천히 걸으며 오늘 들은 일들을 소화했다.애초의 목적은 세뇌된 석지환을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제가 도리어 미궁속에 빠지게 된 것 같았다.‘공은채, 감히 내 식구 목숨을 도망치는 발판으로 삼아? 찢어 죽일 X.’공천하가 공은채의 꾀임에 넘어갔든 아니면 정말로 제 딸을 죽은 아내와 겹쳐 보았든, 딸이 몇
한민혁은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하윤의 앞을 가로막은 채 공은채와 대치했다. 그 모습은 제 새끼 지키는 암탉이 따로 없었다.“하윤 씨 먼저 가세요. 여긴 제가 막고 있을게요.”공은채는 아무 정서도 읽을 수 없는 담담한 눈으로 잔뜩 긴장한 민혁의 얼굴을 한번 훑었다.“민혁 씨, 아무리 그래도 저 도준 씨 약혼녀였던 사람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상사의 전 애인과 현 애인 사이에서 도준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 안 들리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하윤에게 말했다.“차 안에 히터 켜 놓고 있으니 먼저 타요.”“혹시 지환 오빠 찾아왔어?”“안 돼?”하윤은 민혁의 말을 무시한 채 공은채를 바라봤다. 그 시각 공은채도 하윤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얼핏 보면 채 얼지 않은 물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먹어봐야 얼마나 차가운지 알고, 목구멍으로 넘겨봐야 목구멍을 찢을 듯이 날카로운 얼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하윤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당연히 되지. 지환 오빠 여자친구잖아. 그런데 지환 오빠는 알아? 네가 지환 오빠랑 사귀면서 도준 씨를 위해 몸은 깨끗하게 남겨두고 있다는 거?”“…….”너무 충격적인 대사에 민혁의 동공은 일순 확대되었다. 심지어 너무 놀라 아무 말조차 하지 못했다.‘이, 이거 너무 자극적이잖아?’그날 일부러 하윤이 듣도록 말한 지라 하윤이 다시 그 일을 입에 담자 공은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받아 쳤다.“아하, 혹시 들었어?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넌 도준 씨랑 어울리지 않아. 도준 씨는 너처럼 평범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사람이야.”공은채의 말에 하윤은 화가나 웃음이 나왔다.“그럼 누가 더 어울리는데? 너?”“응.”“도준 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도준 씨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포악한지 나만 알거든.”공은채는 하윤을 힐끗 바라봤다“도준 씨가 힘든 나날을 보낼 때 곁에 있어준 사람도 나고 도준 씨가 이토록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걸 지켜본 사람도 나야. 그러니 나보다
한민혁의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석지환은 방금 전 자기가 얼마나 충동적으로 말했는지 알아챘다.“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하지만 이미 기운이 빠진 하윤은 더 이상 석지환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민혁을 돌아봤다.“우리 가요.”석지환을 째려본 민혁은 이내 대답했다.“그래요. 저런 사람들이랑 똑같이 굴면 안 되죠.”……차에 오른 민혁은 뒷좌석에 앉은 하윤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그리고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은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기를 귓가에 갖다 대고 말하는 순간 하윤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다. 딱 들어도 밖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모습이었다.곧이어 남자의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나지막한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귓가에 들려왔다.“정말 밖에 내 놓으면 안 되겠어. 나가기만 하면 넋이 나가서는, 또 누가 심기를 건드렸는데?”하윤은 머리를 창가에 기대더니 살짝 부딪쳤다.“아니에요.”“응? 옳고 그른 것도 판단 못하는 지환 오빠 때문 아니었어? 걱정돼서 구해주러 갔더니 오히려 여자한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서.”“알면서 왜 물어봐요?”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됐어. 뭐 그렇게 불쌍하게 있어? 성질 사납게 공은채 뺨도 때렸으니 손해 본 거 아니잖아.”그 말을 듣는 순간 방금 전까지 기운이 없었던 하윤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지금 누구더러 성질 사납다는 거예요? 설마 마음 아파서 그래요? 아하, 그래서 그러는 구나? 무슨 의도로 전화했나 했더니 역시나 옛 애인 대신해서 따지려는 거였네요!”도준은 테이블 위에 겹쳐 올려 놓았던 다리 위치를 바꾸면서 피식 웃었다.“한쪽만 편애하는 건 자기의 그 지환 오빠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도준의 가벼운 한마디는 마침 하윤이 답답했던 점을 지적했다.그건 편애가 맞았다.제가 아무리 많은 증거를 제시하든, 공은채의 말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든 석지환은 믿지 않을 테니까.이런 인식에 하윤은 좌절감이 들었다. 석지환이 주림과 제 아버지 같은 일을 당
“은채야, 우선 얼음찜질 하고 있어. 내가 이따 의사 불러줄게.”공은채는 얼음주머니를 받아 쥐어 얼굴에 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살을 살짝 찌푸린 모습에서 불편해한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석지환은 마음이 아파 공은채 옆에 앉았다.“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다 봤잖아.”공은채는 한참 동안 찜질을 하다가 얼음 주머니를 내려 놓았다.“내가 교수님을 해쳤다고 미워하는 것 같아. 이런 일 당해도 싸지 뭐.”공은채가 오히려 모든 죄를 제가 떠안는 모습에 석지환은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아니야. 이건 다 공천하 짓이잖아. 너도 피해자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지환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공은채가 그의 어깨에 기댄 것이었다. 그 순간, 공은채한테서 나는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석지환을 그물처럼 감쌌다.“나 이해해줘서 고마워.”석지환에게 고마운 게 아니라 석지환이 저를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오해당한 게 억울하다는 걸 충분히 나타냈다.그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철렁 내려앉아 석지환은 손을 들어 공은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동안 고생한 거 알아. 나도 이런 거 원치 않아. 너무 자책하지 마.”공은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석지환의 위로를 듣기만 했다.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난 네가 시윤이 만난 뒤로 나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없잖아.”석지환은 피식 웃었다.공은채는 그런 석지환의 어깨에서 일어나더니 애교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두 사람 나 없는 데서 내 뒷담화 하지 않았어?”말을 꺼내려는 순간 석지환은 엄지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하윤과 약속한 증거였다.다시 눈을 내리 깐 석지환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시윤은 그저…… 네가 교수님 해쳤다고 오해하고 있어. 그게 뒷담화는 아니잖아.”석지환이 여전히 하윤의 편을 들자 공은채는 미간을 좁혔다.“그럼 주림 데려오는 건 물어봤어?”석지환은 잠시 머뭇거렸다.“주림의 정신이 아직 온전치 못하대.
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나처럼 호강만 할 줄 아는 쌀벌레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도준은 나른하게 침대 머리에 기대 되물었다.“누가 자기더러 쌀벌레래?”“누구긴 누구겠어요? 도준 씨 전 약혼녀죠. 자기는 도준 씨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며 걱정도 나눠줬는데 나처럼 호강만 할 줄 아는 여자는 도준 씨랑 어울리지 않는대요.”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걱정을 나눴다고? 그 정도 능력이 되면 집구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겠어? 그런 말도 믿어?”하윤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투덜거렸다.“뭐 어쩌겠어요? 도준 씨를 늦게 알게 된 제 잘못이죠. 도준 씨 걱정도 나눠주지 못하고.”“하.”장난기 섞인 웃음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핸드폰을 쥐고 있는 하윤의 손마저 찌릿찌릿하게 했다.“자기가 미리 나타났어도 난 응석받이를 데리고 싸우러 다닐 생각 없어. 껍질이라도 까지면 또 얼마나 달래 줘야 한다고.”하윤은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지금 제가 도준 씨 발목 잡는다는 거예요?”“당연하지.”하지만 하윤이 화를 내기 전에 도준이 느긋하게 말했다.“맨날 자기한테 홀려 침대에서 기운 다 쏟으면 어떻게 일을 제대로 하겠어?”“말은 똑바로 해야죠. 누가 누굴 홀린다는 거예요?”시끄러운 소리는 전화기를 통해 두 방안의 적막을 깨트렸다.……다음날 아침.경성의 추운 겨울 기온 때문인지 백제그룹 대문을 들어선 사람들은 저마다 찬공기를 몸에 휘감은 채 오돌오돌 떨었다.하지만 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한 쌍의 모자는 유독 어울리지 않았다.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이번에 프로젝트 부장이 새로 부임됐다면서? 왜 나와서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송민우는 저들을 보는 시선에 어색한 지 자꾸만 몸을 숨겼다.“가서 물어보면 되죠.”그러다가 한참 뒤 프런트 직원에게 물어보고 돌아왔다.“지금 회의 중이래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회의 끝나는 대로 우
사무실 안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건너편, 가죽 광택을 띤 회전 의자는 마침 문을 등지고 있었다.양태린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부 섞인 웃음을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부장님,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니죠?”그러면서 준비해온 선물을 슬쩍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오늘 새로 부임했다고 해서 작은 선불 좀 준비했습니다. 저희 마음이니 받아 주세요.”그 말소리가 떨어지는 찰나,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빙 돌아 앉았다. 분명 자리에 앉아 상대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양 여사님, 다 아닌 사이에 뭘 이런 선물까지 준비합니까?”민시영을 본 순간 양태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너…… 네가 여기 어떻게, 너는…….”한참을 더듬거렸지만 양태린은 온전한 문장조차 구사하지 못했다.그러자 시영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제가 뭐요? 회사에서 쫓겨났다고요? 오빠랑 말다툼 좀 해서 홧김에 한 말인데, 어떻게 그걸 믿어요?”양태린의 얼굴은 순간 당황함으로 물들었다.“그게…….”그 시각, 문 앞.민도준은 핸드폰을 든 채 영상 속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이 각도는 어때?”그러자 곧이어 여자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각도가 틀렸잖아요. 앵글을 양 여사님쪽으로 돌려야죠. 이러면 뒤통수밖에 안 보이잖아요.”“요구가 참 많네.”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양태린과 송민우가 고개를 홱 돌렸다. 가뜩이나 굳었던 입은 부르르 떨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민, 민 사장님…….”“아무 일도 아니니 계속 하시죠. 저는 없다고 생각하고.”도준은 온화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핸드폰을 든 채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상황에 송민우와 양태린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도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기 바빴다.고요한 사무실 안에서, 유독 도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핸드폰을 바라보며 제 할말을 계속했다.“여기는 괜찮지?”하윤은 고개를 갸웃
상대가 권하윤이라는 소리에 양태린은 일순 김빠진 고무공처럼 변하더니 잔뜩 화가 나 있던 얼굴에도 아부하는 웃음꽃이 피었다.“민 사모님이셨군요. 저도 참, 어쩜 민 사모님 목소리도 못 알아챘는지.”양태린은 머쓱하게 말하면서 도준의 핸드폰 앵글을 향해 싱긋 웃었다.“민 사모님, 저희 민 어르신 장례식에 대화한 적도 있는데, 잊으신 건 아니죠?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어? 여기 신호가 나빠서 안 들려요. 먼저 끊을게요.”태도를 180도로 바꾼 양태린과 말을 섞기도 싫었던 하윤은 능청스럽게 말했다.그러고는 도준을 향해 윙크를 해대며 영상통화를 끊지 말라고, 계속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의도를 내보였다.도둑고양이 같은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하윤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핸드폰 각도가 변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통화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양태린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감히 뭐라 할 수도 없었다.오히려 말없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고 말머리를 돌렸다.“시영아, 이건 두 집안에서 손잡고 하는 사업인 만큼 작은 일은 아니잖니. 네가 나 때문에 화났던 건 이해하는데, 그거 다 오해야. 사적인 일을 일에 끌어들이는 걸 다른 사람이 알아봐, 네가 공사구분 못한다고 말이 많을 거 아니니. 네 기분대로 결정하지 말고 백제 그룹 명성도 생각 좀 하렴.”양태린도 그간 겪은 게 많은 사람이기에 몇 마디 말로 모든 책임을 민시영에게 넘겨주었다.마치 시영이 이번 합작 건을 거절하면 송민우한테 버림받은 것으로 꽁해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인양 말이다. 제 할 말을 끝내고 나서야 양태린은 제 주권을 되찾은 듯 송민우를 쿡쿡 찔러댔다.“민우야, 너도 시영이한테 사과해.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는 게 헤어졌다 만났다 하는 거 아니겠어?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얘기하고 풀어.”워낙 시영에게 마음이 있었던 송민우는 어머니의 허락마저 받자 기쁜 듯 입을 열었다.“시영 씨, 엄마도 우리 만나는 거 동의한대요. 저 용서해주면 안 돼요?”
송민우는 전에 제 어머니가 민시영을 찾아가 헤어지라고 한 것 때문에 시영이 이런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변명했다.“시영 씨, 제 얘기 들어 봐요. 저는 시영 씨와 헤어지려고 한 적 없어요. 그저 어머니를 설득하고 나서 다시 시영 씨 찾아 갈 생각이었어요. 저 시영 씨 정말 좋아해요.”하지만 시영은 매니큐어조차 바르지 않은 깨끗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위의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송 대표님, 지금 출근 시간이네요. 만약 사적인 일이라면 퇴근 후에 하시죠. 그만 나가 줄래요? 멀리는 못 나갑니다.”“…….”양태린 모자가 회색 빛이 도는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자 앵글로 모든 걸 구경하고 있던 권하윤은 만족했는지 손벽까지 쳐댔다.“너무 멋져요.”하윤의 말에 우울해 있던 시영은 이내 피식 웃었다.“칭찬 고마워요.”그때 도준이 영상 건너편 하윤을 향해 턱을 까딱 움직였다.“재밌는 구경거리도 이젠 없으니까 혼자 알아서 놀아.”그러자 만족한 하윤도 말없이 손키스를 날리고는 얼른 영상을 끊었다.옆에서 도준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시영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오빠 진짜 번했어. 어떻게 윤이 씨랑 똑같이 굴 수 있어?”“그러는 넌 어떻고? 집 지키는 개 때문에 제 밥그릇까지 빼앗길 뻔했잖아.”그 말에 시영은 약 2초간 멍하니 있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하긴, 나도 생각지 못했어.”시영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먼 곳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난 케빈이 내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려고 했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오래 묻히고 있어서 그런지 어느새 스며들었나 봐. 도려내자니 아파……, 오빠 나 이제 어떡해?”도준은 반쯤 넋이 나간 시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인내심을 잃은 듯 대답했다.“네가 언제부터 이랬다고. 고작 집 지키는 개 하나 때문에 뭐 하는 거야?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싫증 나면 버리면 그만이지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 해원에서 소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