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야, 우선 얼음찜질 하고 있어. 내가 이따 의사 불러줄게.”공은채는 얼음주머니를 받아 쥐어 얼굴에 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살을 살짝 찌푸린 모습에서 불편해한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석지환은 마음이 아파 공은채 옆에 앉았다.“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다 봤잖아.”공은채는 한참 동안 찜질을 하다가 얼음 주머니를 내려 놓았다.“내가 교수님을 해쳤다고 미워하는 것 같아. 이런 일 당해도 싸지 뭐.”공은채가 오히려 모든 죄를 제가 떠안는 모습에 석지환은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아니야. 이건 다 공천하 짓이잖아. 너도 피해자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지환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공은채가 그의 어깨에 기댄 것이었다. 그 순간, 공은채한테서 나는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석지환을 그물처럼 감쌌다.“나 이해해줘서 고마워.”석지환에게 고마운 게 아니라 석지환이 저를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오해당한 게 억울하다는 걸 충분히 나타냈다.그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철렁 내려앉아 석지환은 손을 들어 공은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그동안 고생한 거 알아. 나도 이런 거 원치 않아. 너무 자책하지 마.”공은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석지환의 위로를 듣기만 했다.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난 네가 시윤이 만난 뒤로 나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없잖아.”석지환은 피식 웃었다.공은채는 그런 석지환의 어깨에서 일어나더니 애교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두 사람 나 없는 데서 내 뒷담화 하지 않았어?”말을 꺼내려는 순간 석지환은 엄지가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하윤과 약속한 증거였다.다시 눈을 내리 깐 석지환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시윤은 그저…… 네가 교수님 해쳤다고 오해하고 있어. 그게 뒷담화는 아니잖아.”석지환이 여전히 하윤의 편을 들자 공은채는 미간을 좁혔다.“그럼 주림 데려오는 건 물어봤어?”석지환은 잠시 머뭇거렸다.“주림의 정신이 아직 온전치 못하대.
하윤은 입을 삐죽거렸다.“나처럼 호강만 할 줄 아는 쌀벌레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도준은 나른하게 침대 머리에 기대 되물었다.“누가 자기더러 쌀벌레래?”“누구긴 누구겠어요? 도준 씨 전 약혼녀죠. 자기는 도준 씨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며 걱정도 나눠줬는데 나처럼 호강만 할 줄 아는 여자는 도준 씨랑 어울리지 않는대요.”그 말에 도준은 피식 웃었다.“걱정을 나눴다고? 그 정도 능력이 되면 집구석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겠어? 그런 말도 믿어?”하윤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투덜거렸다.“뭐 어쩌겠어요? 도준 씨를 늦게 알게 된 제 잘못이죠. 도준 씨 걱정도 나눠주지 못하고.”“하.”장난기 섞인 웃음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방 안에 울려 퍼졌고 핸드폰을 쥐고 있는 하윤의 손마저 찌릿찌릿하게 했다.“자기가 미리 나타났어도 난 응석받이를 데리고 싸우러 다닐 생각 없어. 껍질이라도 까지면 또 얼마나 달래 줘야 한다고.”하윤은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지금 제가 도준 씨 발목 잡는다는 거예요?”“당연하지.”하지만 하윤이 화를 내기 전에 도준이 느긋하게 말했다.“맨날 자기한테 홀려 침대에서 기운 다 쏟으면 어떻게 일을 제대로 하겠어?”“말은 똑바로 해야죠. 누가 누굴 홀린다는 거예요?”시끄러운 소리는 전화기를 통해 두 방안의 적막을 깨트렸다.……다음날 아침.경성의 추운 겨울 기온 때문인지 백제그룹 대문을 들어선 사람들은 저마다 찬공기를 몸에 휘감은 채 오돌오돌 떨었다.하지만 걸음을 재촉하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한 쌍의 모자는 유독 어울리지 않았다.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이번에 프로젝트 부장이 새로 부임됐다면서? 왜 나와서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송민우는 저들을 보는 시선에 어색한 지 자꾸만 몸을 숨겼다.“가서 물어보면 되죠.”그러다가 한참 뒤 프런트 직원에게 물어보고 돌아왔다.“지금 회의 중이래요.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회의 끝나는 대로 우
사무실 안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건너편, 가죽 광택을 띤 회전 의자는 마침 문을 등지고 있었다.양태린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부 섞인 웃음을 지으며 먼저 인사했다.“부장님, 저희가 방해한 건 아니죠?”그러면서 준비해온 선물을 슬쩍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오늘 새로 부임했다고 해서 작은 선불 좀 준비했습니다. 저희 마음이니 받아 주세요.”그 말소리가 떨어지는 찰나,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빙 돌아 앉았다. 분명 자리에 앉아 상대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었다.“양 여사님, 다 아닌 사이에 뭘 이런 선물까지 준비합니까?”민시영을 본 순간 양태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너…… 네가 여기 어떻게, 너는…….”한참을 더듬거렸지만 양태린은 온전한 문장조차 구사하지 못했다.그러자 시영의 웃음은 더 짙어졌다.“제가 뭐요? 회사에서 쫓겨났다고요? 오빠랑 말다툼 좀 해서 홧김에 한 말인데, 어떻게 그걸 믿어요?”양태린의 얼굴은 순간 당황함으로 물들었다.“그게…….”그 시각, 문 앞.민도준은 핸드폰을 든 채 영상 속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이 각도는 어때?”그러자 곧이어 여자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각도가 틀렸잖아요. 앵글을 양 여사님쪽으로 돌려야죠. 이러면 뒤통수밖에 안 보이잖아요.”“요구가 참 많네.”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양태린과 송민우가 고개를 홱 돌렸다. 가뜩이나 굳었던 입은 부르르 떨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민, 민 사장님…….”“아무 일도 아니니 계속 하시죠. 저는 없다고 생각하고.”도준은 온화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더니 핸드폰을 든 채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상황에 송민우와 양태린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도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기 바빴다.고요한 사무실 안에서, 유독 도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핸드폰을 바라보며 제 할말을 계속했다.“여기는 괜찮지?”하윤은 고개를 갸웃
상대가 권하윤이라는 소리에 양태린은 일순 김빠진 고무공처럼 변하더니 잔뜩 화가 나 있던 얼굴에도 아부하는 웃음꽃이 피었다.“민 사모님이셨군요. 저도 참, 어쩜 민 사모님 목소리도 못 알아챘는지.”양태린은 머쓱하게 말하면서 도준의 핸드폰 앵글을 향해 싱긋 웃었다.“민 사모님, 저희 민 어르신 장례식에 대화한 적도 있는데, 잊으신 건 아니죠?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어? 여기 신호가 나빠서 안 들려요. 먼저 끊을게요.”태도를 180도로 바꾼 양태린과 말을 섞기도 싫었던 하윤은 능청스럽게 말했다.그러고는 도준을 향해 윙크를 해대며 영상통화를 끊지 말라고, 계속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의도를 내보였다.도둑고양이 같은 하윤의 모습에 도준은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하윤의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핸드폰 각도가 변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통화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양태린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감히 뭐라 할 수도 없었다.오히려 말없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고 말머리를 돌렸다.“시영아, 이건 두 집안에서 손잡고 하는 사업인 만큼 작은 일은 아니잖니. 네가 나 때문에 화났던 건 이해하는데, 그거 다 오해야. 사적인 일을 일에 끌어들이는 걸 다른 사람이 알아봐, 네가 공사구분 못한다고 말이 많을 거 아니니. 네 기분대로 결정하지 말고 백제 그룹 명성도 생각 좀 하렴.”양태린도 그간 겪은 게 많은 사람이기에 몇 마디 말로 모든 책임을 민시영에게 넘겨주었다.마치 시영이 이번 합작 건을 거절하면 송민우한테 버림받은 것으로 꽁해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인양 말이다. 제 할 말을 끝내고 나서야 양태린은 제 주권을 되찾은 듯 송민우를 쿡쿡 찔러댔다.“민우야, 너도 시영이한테 사과해.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는 게 헤어졌다 만났다 하는 거 아니겠어?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잘 얘기하고 풀어.”워낙 시영에게 마음이 있었던 송민우는 어머니의 허락마저 받자 기쁜 듯 입을 열었다.“시영 씨, 엄마도 우리 만나는 거 동의한대요. 저 용서해주면 안 돼요?”
송민우는 전에 제 어머니가 민시영을 찾아가 헤어지라고 한 것 때문에 시영이 이런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변명했다.“시영 씨, 제 얘기 들어 봐요. 저는 시영 씨와 헤어지려고 한 적 없어요. 그저 어머니를 설득하고 나서 다시 시영 씨 찾아 갈 생각이었어요. 저 시영 씨 정말 좋아해요.”하지만 시영은 매니큐어조차 바르지 않은 깨끗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위의 시계를 톡톡 두드렸다.“송 대표님, 지금 출근 시간이네요. 만약 사적인 일이라면 퇴근 후에 하시죠. 그만 나가 줄래요? 멀리는 못 나갑니다.”“…….”양태린 모자가 회색 빛이 도는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자 앵글로 모든 걸 구경하고 있던 권하윤은 만족했는지 손벽까지 쳐댔다.“너무 멋져요.”하윤의 말에 우울해 있던 시영은 이내 피식 웃었다.“칭찬 고마워요.”그때 도준이 영상 건너편 하윤을 향해 턱을 까딱 움직였다.“재밌는 구경거리도 이젠 없으니까 혼자 알아서 놀아.”그러자 만족한 하윤도 말없이 손키스를 날리고는 얼른 영상을 끊었다.옆에서 도준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시영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오빠 진짜 번했어. 어떻게 윤이 씨랑 똑같이 굴 수 있어?”“그러는 넌 어떻고? 집 지키는 개 때문에 제 밥그릇까지 빼앗길 뻔했잖아.”그 말에 시영은 약 2초간 멍하니 있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하긴, 나도 생각지 못했어.”시영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먼 곳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난 케빈이 내 오점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려고 했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려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오래 묻히고 있어서 그런지 어느새 스며들었나 봐. 도려내자니 아파……, 오빠 나 이제 어떡해?”도준은 반쯤 넋이 나간 시영을 바라보더니 이내 인내심을 잃은 듯 대답했다.“네가 언제부터 이랬다고. 고작 집 지키는 개 하나 때문에 뭐 하는 거야?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싫증 나면 버리면 그만이지 뭔 고민이 그렇게 많아? 해원에서 소식이
다른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의논할 뿐이었지만 민병철은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민시영을 향해 소리쳤다.“누가 너더러 들어오래?”“저 회사 기획부장이에요. 다른 사람 허락 따위 구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민병철 사장이 지금부로 해고되었음을 선포합니다.”시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회사 사장은 주임보다 급이 높은 임원을 해고할 수 없다는 거 아시죠? 저 해고하겠으면 오빠한테 동의 구해요.”그 말에 민병철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내가 백제 그룹에서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몇 십 년 전 형님과 이 회사를 일궈낼 때 민도준은 태어나지도 않았어! 게다가 우리 회사는 배신자 따위 필요 없어! 당장 나가! 나가지 않으면 경비 부를 테니까!”분노 섞인 고함소리가 회의실 안을 메웠다가 이내 농담 섞인 웃음 소리 때문에 끊겼다.“잘 아시네, 그렇다면 얼른 준비해서 나가세요.”“…….”도준이 들오자 시끄러웠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심지어 민병철은 도준을 보는 순간 맞았던 갈비뼈가 찌끈거렸다. 하지만 이내 도준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채고는 낯빛이 어두워졌다.“내가 백제 그룹을 위해 몇 십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백제 그룹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네 말 들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도준은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그래서 그동안 연봉 탔잖아요, 배당금도 받았잖아요. 집안 식구란 식구는 모두 회사에 끌어들였으면서 어디서 억울한 척해요?”늘 가식적인 가면으로 저를 꽁꽁 싸매고 있던 회사 사람들은 도준의 말에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회사에서 지위와 권력으로 남을 누르기만 하던 민병철은 더할 나위 없었다. 심지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게 진 것도 모자라 옆에 있던 무역팀 부장이 부축하지 않으면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그, 그건 회사에 인재를 들여온 것뿐이야!”“인재라고요?”도준은 옆을 힐끗 쳐다봤다.“들어와요.”곧이어 두 경비원에게 꽁꽁 묶인 젊은 남자
“하긴,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직접 가르쳐 보세요. 제가 만족한다면 이번 일은 그대로 묻어드리죠.”도준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을 하자 민병철은 도준이 대충 편의를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는 민현준을 꾸짖는 척 목소리를 높였다.“것 봐, 그러게 왜 그런 같잖은 여자들과 어울려서는 이 할아비까지 너 걱정하게 해? 앞으로 눈 크게 뜨고 사람 제대로 봐, 알았어?”“알았어요.”“하.”도준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 뚜껑을 닫았다.“설마 이거로 끝낼 생각 아니죠?”회의실 안을 꽉 메운 임원진들 앞에서 저보다 한참 어린 도준에게 사정할 수 없었던 민병철은 얼굴을 굳혔다. 그도 그럴 게 이 상황에 사장을 하면 앞으로 아랫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면 뭘 원하는 거지?”“제가 뭘 원하냐고요?”도준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경비원의 허리 춤에 있는 막대기를 가리키며 머리를 까딱거렸다.“민병철 사장님께 그거 갖다 드려요.”“제가 바라는 거 별거 없어요. 민현준의 다리를 부러뜨리면 이번 일은 넘어가 드리죠.”“쾅!”도준의 말에 민병철은 분에 겨워 막대기를 쳐냈다.“민도준! 너 사람 그렇게 무시하지 마!”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막대기는 마침 도준의 발 앞에 굴러왔다.그 막대기를 밟으며 자리에서 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의 시선도 따라서 위로 올라갔다.검은 막대기를 손에 든 도준의 모습은 소름 돋을 정도로 섬뜩해 민병철의 기세마저 꺾어 버렸다.“지…… 지금 뭐하는 거지?”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저요? 이러려고요.”말과 동시에 도준은 손에 든 막대기를 힘껏 휘둘렀다.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러 퍼졌다.사람들은 저마다 숨을 몰아 쉬었고 곧이어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아! 내 다리…… 아!”도준은 몽둥이를 손바닥에 툭툭 내리치며 민병철을 향해 웃었다.“손자라고 손 못 댈 것 같아 제가
민도준은 허리 굽힌 민병철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러게 나이도 드신 분이 왜 권력 다툼에 끼어들었습니까? 진작 집에 돌아가 쉬셨으면 좀 좋아요? 이제 그만두겠다고 하시니 소원대로 해드리죠.”도준은 이내 두 손을 꽉 움켜쥔 민시영을 돌아봤다.“네가 사장직 맡을 수 있겠어?”갑작스러운 제안에 시영은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최선을 다 할게.”그 말에 도준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의견 있는 분 있습니까?”역시나 그 누구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방금 민병철 식구의 참상을 목격한 자라면 이 상황에 도준의 말을 거역할 리 없었다.“의견 없으시죠? 그러면 뭣들 하고 있습니까? 박수로 축하하지 않고?”“짝짝짝!”열렬한 박수 속에서 시영은 백제 그룹 사장으로 부임되었다.하지만 이들 중 물론 도준이 무서워 억지로 박수 치는 사람도 있지만 절반은 시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이었다.이건 그간 회사에 입사해서 오너 일가라는 특권이 주어졌음에도 갑질 한번 하지 않고 심지어 직원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해온 시영에 대한 인정이었다.게다가 시영이 이끄는 부서는 매 분기마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기에 시영이 사장으로 부임하는 것에 사람들은 당연히 의견이 없었다.그렇게 이번 해프닝은 우여곡절 끝에 겨우 막을 내렸다.……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한 것 때문에 시영이 인계 받을 업무는 적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퇴근하니 평소보다 1시간은 훌쩍 넘겼다.그러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타자 구매팀 차장이 먼저 시영에게 인사를 건넸다.“사장으로 부임되신 거 축하합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전에 제가 구매 건으로 문의드렸을 때 급하게 사인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두고 봤더니 역시나 그쪽에서 문제가 터졌더라고요.”“저는 단지 의견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직접 결정한 건 임 차장님이잖아요. 차장님이 문제를 발견하고 제대로 된 결정 내려 주신 덕에 회사 손실을 막은 거죠.”싱긋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