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도준은 차가운 하윤의 손을 잡은 채 따뜻한 물을 건넸다.“자, 입 벌려.”부들부들 떨리던 몸은 뜨거운 물을 몇 모금 넘기자 그제야 사르르 녹았고, 호흡도 제 속도를 되찾았다.“아까는 지환 오빠 앞에서 왜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어요?”하윤은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도준의 팔을 꽉 잡았다.“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말한다고 석지환이 믿을까?”도준의 반문에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하긴,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내 말도 안 믿는데 도준 씨 말을 믿을 리가 없지.’“그런데 공은채는 도준 씨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지환 오빠랑 사귀는 거죠?”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자기 하나 케어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공은채가 죽든 살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착하지? 공은채 상대할 방법도 생각해 뒀잖아. 언젠가 죽을 사람 때문에 화낼 필요가 뭐 있어?”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아무리 차분한 사람이라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아빠가 투신한 것도,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두 공은채랑 관련이 있을 게 뻔했다.그 뿐만 아니라 공은채가 했던 몇 마디 말은 자꾸만 하윤의 마음을 후벼 파 의심이 솟구쳤다.‘나를 의심하면 도준 씨도 의심한다는 거야?’전에 봤던 사진을 떠올려 보면 아버지가 투신하기 전 도준을 만난 게 확실하다.도준을 보자 수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하윤은 이를 악물며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물어보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그 물음을 던지는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상할 게 뻔했다.도준은 하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손을 들어 하윤의 볼을 감쌌다.“날 믿지 못한다면 당장이라도 공은채를 죽여줄 수 있어. 그 심장도 필요 없어.”도준의 눈에는 장난기 하나 섞여 이지 않았다. 마치 하윤이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이라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와 오빠의 복수를 해줄 것처럼.하지만…….아버지의 피아노를 손에 넣고 나니 하윤은 가
도준의 시선은 하윤의 미간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그럼 그 증거는 어디서 찾으려고?”“증거는…….”하파터면 일기에 관한 말을 꺼내려던 하윤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공은채가 한 짓이라면 증거는 무조건 남을 거예요.”하윤이 말하는 사이,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파에 기대 하윤을 놀리는 듯 바라볼 뿐.그 눈빛에 하윤은 제 발이 저려 도준을 밀어냈다.“배고파요. 먹을 것 좀 가져다줘요.”“아래층에 있잖아. 직접 내려가서 먹으면 될 텐데, 왜 나를 부려먹어?”하윤은 발끝으로 도준을 툭툭 건드렸다.“꼴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내려가기 싫어요. 저는 마음 좀 추슬러야겠으니 얼른 다녀와요.”도준은 하윤의 이마를 쿡 찔렀다.“원하는 게 참 많네.”도준이 떠난 방안은 마치 새장처럼 하윤의 숨통을 조여왔다.이에 하윤은 창문을 열어 갑갑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해원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간 이유 때문인지 창문을 연 순간 싸늘한 냉기가 밀물처럼 방 안에 흘러 들었다.내려가는 계단에 막아선 여자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아래로 내려오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말없이 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 때문에 압박감이 더해졌을 법도 한데, 공은채는 물러나지도 않은 채 손에 쥔 가는 담배를 흔들었다.“불 좀 빌려줄 수 있어요?”“얼마든지.”“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피어오르는 불길은 여자의 담배 뿐만 아니라 손가락까지 함께 태웠다.불길이 살갗을 스치는 순간 타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씁!”공은채는 순식간에 볼록 튀어 오른 제 손의 물집을 보며 불만조로 투덜거렸다.“아무리 그래도 저 여자예요. 이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도준은 느긋하게 라이터를 거두었다.“제가 지른 불에 제가 타 죽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공은채는 계단 윗쪽을 흘겨봤다.“본인 와이프가 삐진 걸 지금 저한테 푸는 거예요?”이윽고 말을 꺼내며 도준의 반응을 살폈다.그 누구라도 원수가 뻔뻔하게 제 앞에 알짱거리면
공은채의 목소리는 오롯이 하윤의 귀에 전달되었다.난간 너머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남녀는 보고 있자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샘이 솟아났다.많은 일들은 직면하기 싫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공은채와 도준의 과거가 바로 그러하다.층계 아래에서 두 남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공은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혹시 기억 나요? 도준 씨가 18살 되던 때 해원에 와서 제가 연주한 ‘기억’을 들었잖아요. 이게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면 뭔데요?”10여 년 전, 민시영은 기어코 싫다는 도준을 끌고 해원에 연주회룰 들으러 간 적이 있다.원체 음악에 관심이 없던 도준은 시영을 콘서트 홀에 남겨 두고 저 혼자 주위를 맴돌았다.그러다 마침 콘서트 홀 뒤편에 있는 연습실에서 더듬거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거다.가뜩이나 형편없는 실력에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져 연주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하지만 흐느껴 울면서 연주는 멈추지 않는 여자애 때문에 도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하필이면 방음이 안 되는 연습실 벽 때문에 안에 있는 여자애가 도준의 웃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웃긴 뭘 웃어?”블라인드가 쳐진 연습 실 안에서 곧장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너무 울어서 짙은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도준은 그 상황이 웃겨 피식 웃었다.“누가 들으면 연주가 아니라 초상 치른다고 해도 믿겠어.”“…….”흐느끼는 소리는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더 높은 소리로 울려 퍼졌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더 힘이 실렸다.하지만 창가에 앉아 한참을 듣다 보니 지 모르게 듣기 좋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그제야 안에 있던 여자애도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아직 거기 있어?”도준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그랬더니 여자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멧돼지는 사료를 먹지 못한다더니.”도준은 겁도 없는 여자애 때문에 화가 나 피식 실소하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깔며 겁주었다.“지금 나 말하는
도준은 동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공은채가 집안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진작 알았으면서도 어머니의 심장만 손에 넣으면 공은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무관심했다.하지만 그날, 공은채에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도준은 점차 공은채의 생일에 참석하면서 공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공은채는 도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도준 씨가 저를 얼마나 아껴줬는지 저 다 기억해요.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답을 주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도준 씨가 상처받았다는 것도 알고요. 저한테 보상할 기회 줄 수 있어요?”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윤의 가슴은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두 사람의 인연이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된 거였다니.’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준이 공은채를 거절하지 맗아야 한다. 도준을 온전히 차지했다고 경계를 풀어야만 공은채가 수술받을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으니까.하지만 그걸 눈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가 모든 걸 망칠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비틀거리며 돌아섰다.“철컥.”문을 닫자마자 힘 빠진 듯 소파에 엎드린 하윤은 도준이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도준은 밖에서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하윤의 허리를 툭툭 쳤다.“배가죽이 등에 붙겠어. 얼른 와서 이것부터 먹어.”하윤은 도준에게 제 뒤통수만 보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안 먹어요.”도준은 피식 웃었다.“오냐오냐 하니까 점점 기어오르네? 먹고 싶다고 굳이 가져다 달라고 했으면서 가져오니 먹기 싫다고?”하윤은 속이 답답하고 서러워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먹기 싫다고요. 차라리 때려요.”“짝!”제 엉덩이를 내리치는 때리는 남자의 모습에 하유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도준은 미첨 힘을 줄이지 않은 탓에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하윤은
하윤은 도준의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뭐가 10년 만에 본다는 거예요? 제가 공은채도 아니고, 도준 씨랑 10년 전에 만났을 리 없잖아요.”도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하윤을 보자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연주하면서 울던 게 누군데?”“피아노 배우면서 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에요?”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하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어? 이상하다? 제가 연주현서 울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도준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아 하윤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자기가 연주할 때 우는 울보라는 것만 아는 줄 알아? 겁쟁이인 것도 아는데? 잠깐 놀렸다고 뒤꽁무치 치는.”하윤은 점점 멍해졌다.“무슨 말이에요? 겁쟁이라니요? 지금 일부러 화제를 전환하는 거 맞죠? 미리 말해두는 데, 이번 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얼른 말해요. 공은채와 10년 전에 어디에서 만났는지!”“해원의 강남 콘서트홀. 홀 안이 너무 시끄러워 밖에서 산책하다가 마침 웬 꼬맹이가 초상 난 사람처럼 울며 연주하는 걸 들었거든.”‘남 콘서드홀? 초상?’‘왜 이렇게 익숙하지?’하윤은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그때 도준이 깊은 생각에 빠진 하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초상 난 것 같다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면서 반나절 연습하더라고.”그제야 하윤의 기억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해, 주 숙제에 불합격이라는 성적을 받은 하윤은 아버지에게 끌려 연습실로 갔었다.분명 오빠와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한 날 연습 때문에 갈수 없게 되자 하윤은 연습할수록 더 심하게 울어 댔다.그렇게 한창 슬피 울고 있는데 창밖에서 행인의 비아냥소리가 들려왔다.상대의 말투는 해원 본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제 갓 소년미를 벗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누가 들으면 연주가 아니라 초상 치른다고 해도 믿겠어.”심지어 비웃음도 가득 묻어 있었다.가뜩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더니 왜 또 못되다는 거야?”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내보이던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어? 잠깐만요. 그대 저를 만났다면서 공은채는 왜 그때 도준 씨가 자기를 만났다고 하는 거예요? 설마 저한테 겁주고 그 길로 공은채 만나러 간 거예요?”하윤의 상상력에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고?’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도준의 다리를 탁 내리쳤다.“알았어요! 도준 씨가 만났던 사람이 자기라도 공은채가 그랬다면서요!”귀찮은 듯한 도준의 콧소리에 하윤은 눈 앞이 캄캄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러니까 공은채는 도준 씨가 만났던 게 본인인 척 속여 제 발판으로 삼았다는 거네? 젠장!’“그러니까 도준 씨는 그 때문에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공은채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한 거예요?”입에 담배를 물고 있던 도준은 하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담배를 손에 쥐었다.“대체 나를 뭘로 본 거야? 연주곡 하나에 평생을 기약하다고? 그냥 연주 몇 번 들은 게 다야.”USB 영상에서 도준이 듣던 게 바로 공은채가 연주한 ‘기억’이었다.‘그러니까 도준 씨는 원래 내 연주를 들으려고 한 거였네?’그제야 모든 걸 알아차린 하윤은 가슴이 헛헛해 나며 구멍 났던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 덕에 시큰거리며 아프던 마음도 괜찮아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천하의 민도준이 사람을 잘못 보다니요?”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자기가 그때 도망만 안 쳤어도 내가 잘못 볼 리 있겠어?”하윤은 제 화를 풀 곳이 없어 속으로 화를 삭이며 팔짱을 꼈다.“그럼 언제 저라는 걸 알았는데요?”“그 정도로 엉망인 실력이 자기 말고 더 있을까?”“…….”솔직히 도준은 하윤에게 장난 친 거다. 지금 하윤의 연주 실력은 엉망이 아닐
“응, 시영이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 주주들이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지금 난리도 아니래.”도준은 가볍게 말했지만 듣는 하윤은 조급함이 휘몰아쳤다.“그럴 수가. 시영 언니 쪽은 지금껏 아무 문제도 없지 않았어요?”“하, 이게 다 그 개새X 때문이야.”하윤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민시영과 케빈의 사이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혔다. 시영은 분명 케빈을 미워하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소란을 피운 게 회사의 임원진들인 데다 그 수가 적지 않다는 말에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그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혹시 진작 계략을 세워 둔 건 아니에요? 도준 씨가 경성을 오래 떠나 있어서 기회를 틈탔을 수도 있잖아요.”제 생각을 말하던 하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이게 다 저 때문이에요.”어깨를 들썩이며 외투를 걸치던 도준은 잔뜩 풀이 죽어 죄책감을 느끼는 하윤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그게 왜 자기 탓이야? 쓸데없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얼른 와서 옷 입고 출발하자.”눈깜짝할 사이에 준비를 마친 도준은 여전히 꾸물대는 하윤을 도와 옷을 입혔다.하지만 이제 막 팔을 들어 옷을 입으려던 하윤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어? 잠깐만, 도준 씨가 떠나면 그 일기를 지환 오빠한테 보여줄 수 있잖아.’만약 도준이 있다면 절대 도준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텐데, 도준이 없다면 달랐다.갑자기 든 생각에 하윤은 팔을 내렸다.“도준 씨 혼자 돌아가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뭐라고?”남자의 목소리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다.등불을 등진 채 하윤을 집어 삼킬 것처럼 바싹 붙어 있어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하윤은 버둥대며 일어나더니 자세를 바꾸어 침대에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뻗어 도준의 목을 감쌌다.“제가 따라가면 도준 씨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그래요. 저는 여기에서 기다릴게요. 도준 씨가 다녀올 때까지 절대 아무 사고도 치지 않을게요. 맹세!”도준은 피식 웃었다.“내가 집중하지 못할까 봐 그러는
도준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고 하윤을 빙글 돌렸다.“시간 없으니 말 들어.”이불 속에 얼굴이 파묻힌 채 하윤은 당황한 듯 손을 마구 허둥대며 뒤에 있는 남자를 밀었다.“급하다면서요. 이러지 마요.”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한 채 하윤의 허리를 잡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출장 가기 전에 기르던 식물에게 물은 줘야하잖아?”“그게 무슨…… 읍…….”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남자의 큰 손에 막혀 버렸다.“착하지? 자기 신경 쓸 시간 없으니 좀만 참아.”“…….”이윽고 도준은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며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옆에 우뚝 섰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도준은 가죽 벨트를 다시 차며 큰 손으로 하윤의 머리를 꾹 눌렀다.“정신 차리고 나서 혼자 씻어. 나 올 때까지 착하게 기다리고. 알았지?”이별의 아쉬움은 어느새 모두 흩어져 하윤은 귀찮은 듯 손등을 보이며 휘휘 저었다. 그건 빨리 가라는 손짓이었다.저를 내쫓는 하윤의 행동에도 도준은 트집을 잡기는커녕 오히려 하윤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갈게.”……늦은 밤, 차 안에서 한참동안 기다린 한민혁은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다.‘아까는 급하다면서 당장 튀어 오라더니,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볼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설마 바람 맞힌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조수석의 문이 열렸다.민혁은 제 옆을 힐끗 거리더니 이내 눈을 둥그렇게 떴다.“형, 목은 왜 그래?”손으로 쓱 문지른 순간, 따끔한 느낌이 들자 도준은 이내 거울을 내려 제 목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목덜미에 손톱자국이 나 있는 게 아니겠는가?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윤이 버둥대며 긁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조금도 밑지려 하지 않는다니까.’“아무것도 아니야. 우선 출발해.”“오케이.”민혁은 도준을 계류장에 내려 주고 뒤따라 전용기에 오르려 했지만 도준이 그를 막아섰다.“너는 여기 남아 있어.”“아하, 알겠어. 걱정하지 마. 형 뒤뜰은 내가 잘 지키고 있을 게, 절대 다른 놈이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