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에는 남자를 위해 넥타이를 매주는 여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게다가 남자는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눈빛만은 아래로 향해 있었다.하윤은 사진이 마음에 들어 일부러 직원과 연락처까지 교환해 사진을 받았다.반나절 동안 쇼핑을 하고 나서 쇼핑몰을 나오자 어느새 파티 시간이 임박했다.석씨 저택은 해원에서 중상류 층에 속한다. 물론 지난 몇 년 간 주로 해외 사업을 발전했지만 전에 쌓은 인맥 덕에 파티는 매우 떠들썩했다.하윤과 도준이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도준의 사업은 주로 경성에 있다지만 그의 이름은 해원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게다가 조관성과 손을 잡았던 일이 알려져서인지 도착하자 마자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적잖게 모여들었다.“이곳에서 민 사장님을 다 보다니. 이번 주말 제 아들의 백일잔치가 있는데 혹시 자리를 빛내 주실 수 있나요?”“이번 주 제가 새로 차린 계열사에서 커팅식이 있는데 한번 구경 오세요.”“제 할머니께서 이번에 팔순 잔치를 여지는데 민 사장님을 그렇게 보고 싶다네요.”“…….”순식간 사람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행사와 잔치를 들먹이며 도준에게 초대장을 건넸다.행사의 진위여부는 당장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도준과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은 다분했다.하지만 도준은 몇 마디 채 들어주지도 않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내가 뭐 소원 비는 연못도 아니고.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저한테 하지 마시죠?”사람들은 도준과 교류해본 적 없지만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 둘 물러갔다. 그도 그럴 게, 도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게 뻔했으니까.하지만 모두 멀리 물러났으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미련 넘치는 얼굴로 도준을 힐끔거렸다.“너무 무섭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하윤이 보다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도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왜? 내가 다정한 태도를 보이길 원하는 거야? 뭐, 좋아. 심심하던 참에 잘 됐네. 마침 저들이 나를 위해 어
“그게 누군데요?”의아한 듯 묻는 하윤의 모습에 석지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알면 아마 놀랄 걸.”그 말에 하윤은 더 궁금해졌다.“누군데요? 혹시 선배 첫사랑?”“그렇다고 할 수 있지.”석지환은 도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민 사장님이 결혼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나도 그 사람 초대하지 못했을 거야.”의미심장한 말에 하윤의 미소는 인내 굳어버렸다.“그 사람 설마…….”“지환아.”때마침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석지환이 저를 부른 사람 쪽으로 반갑게 걸어갔다.“마중 가겠다니까 왜 혼자 올라왔어?”시선 속에 들어온 여자는 여전히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심지어 그런 분위기와 아름다운 외모가 어우러져 겨울에 활짝 핀 붉은 매화를 연상케 했다. 물론 그 붉은색이 꽃잎인지 핏빛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시윤아, 오랜만이네.”너무나 담담한 인사말에 지난 날 겪은 아픔도 상처도 모두 허상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윤은 아무런 흔들림 없는 공은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바라볼수록 오히려 저만 가슴이 답답하고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석지환은 온 정신이 공은채에게 팔려 있어 하윤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서로 아는 사이라 소개가 필요 없지만 그래도 소개할 게. 은채, 내 여자친구야.”“…….”‘여자친구?’뻐끔거리는 석지환의 입술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는 듯했고 목소리 역시 실감이 나지 않았다.“아직 아버지와 공씨 집안 어르신들은 몰라. 너랑 네 남편에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그런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한 석지환은 이내 도준을 바라보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만약 저를 때리고 싶다면 제게 옷 갈아 입을 시간 정도는 주세요.”그때, 공은채가 도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도준 씨한테는 이제 시윤이 있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안 그래요?”도준의 눈빛은 순간 싸늘해졌다. 심지어 그 속에는 경고가 숨어 있었다.주위를 맴도는 괴
휴게실.도준은 차가운 하윤의 손을 잡은 채 따뜻한 물을 건넸다.“자, 입 벌려.”부들부들 떨리던 몸은 뜨거운 물을 몇 모금 넘기자 그제야 사르르 녹았고, 호흡도 제 속도를 되찾았다.“아까는 지환 오빠 앞에서 왜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어요?”하윤은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도준의 팔을 꽉 잡았다.“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말한다고 석지환이 믿을까?”도준의 반문에 하윤은 말문이 막혔다.‘하긴,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낸 내 말도 안 믿는데 도준 씨 말을 믿을 리가 없지.’“그런데 공은채는 도준 씨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지환 오빠랑 사귀는 거죠?”도준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자기 하나 케어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공은채가 죽든 살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착하지? 공은채 상대할 방법도 생각해 뒀잖아. 언젠가 죽을 사람 때문에 화낼 필요가 뭐 있어?”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하윤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제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아무리 차분한 사람이라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아빠가 투신한 것도, 오빠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두 공은채랑 관련이 있을 게 뻔했다.그 뿐만 아니라 공은채가 했던 몇 마디 말은 자꾸만 하윤의 마음을 후벼 파 의심이 솟구쳤다.‘나를 의심하면 도준 씨도 의심한다는 거야?’전에 봤던 사진을 떠올려 보면 아버지가 투신하기 전 도준을 만난 게 확실하다.도준을 보자 수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하윤은 이를 악물며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물어보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그 물음을 던지는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이 상할 게 뻔했다.도준은 하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손을 들어 하윤의 볼을 감쌌다.“날 믿지 못한다면 당장이라도 공은채를 죽여줄 수 있어. 그 심장도 필요 없어.”도준의 눈에는 장난기 하나 섞여 이지 않았다. 마치 하윤이 고개만 끄덕이면 당장이라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아버지와 오빠의 복수를 해줄 것처럼.하지만…….아버지의 피아노를 손에 넣고 나니 하윤은 가
도준의 시선은 하윤의 미간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그럼 그 증거는 어디서 찾으려고?”“증거는…….”하파터면 일기에 관한 말을 꺼내려던 하윤은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공은채가 한 짓이라면 증거는 무조건 남을 거예요.”하윤이 말하는 사이,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소파에 기대 하윤을 놀리는 듯 바라볼 뿐.그 눈빛에 하윤은 제 발이 저려 도준을 밀어냈다.“배고파요. 먹을 것 좀 가져다줘요.”“아래층에 있잖아. 직접 내려가서 먹으면 될 텐데, 왜 나를 부려먹어?”하윤은 발끝으로 도준을 툭툭 건드렸다.“꼴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내려가기 싫어요. 저는 마음 좀 추슬러야겠으니 얼른 다녀와요.”도준은 하윤의 이마를 쿡 찔렀다.“원하는 게 참 많네.”도준이 떠난 방안은 마치 새장처럼 하윤의 숨통을 조여왔다.이에 하윤은 창문을 열어 갑갑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해원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간 이유 때문인지 창문을 연 순간 싸늘한 냉기가 밀물처럼 방 안에 흘러 들었다.내려가는 계단에 막아선 여자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아래로 내려오는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말없이 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 때문에 압박감이 더해졌을 법도 한데, 공은채는 물러나지도 않은 채 손에 쥔 가는 담배를 흔들었다.“불 좀 빌려줄 수 있어요?”“얼마든지.”“도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피어오르는 불길은 여자의 담배 뿐만 아니라 손가락까지 함께 태웠다.불길이 살갗을 스치는 순간 타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씁!”공은채는 순식간에 볼록 튀어 오른 제 손의 물집을 보며 불만조로 투덜거렸다.“아무리 그래도 저 여자예요. 이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도준은 느긋하게 라이터를 거두었다.“제가 지른 불에 제가 타 죽는다는 말 못 들어봤어?”공은채는 계단 윗쪽을 흘겨봤다.“본인 와이프가 삐진 걸 지금 저한테 푸는 거예요?”이윽고 말을 꺼내며 도준의 반응을 살폈다.그 누구라도 원수가 뻔뻔하게 제 앞에 알짱거리면
공은채의 목소리는 오롯이 하윤의 귀에 전달되었다.난간 너머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남녀는 보고 있자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샘이 솟아났다.많은 일들은 직면하기 싫다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공은채와 도준의 과거가 바로 그러하다.층계 아래에서 두 남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공은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혹시 기억 나요? 도준 씨가 18살 되던 때 해원에 와서 제가 연주한 ‘기억’을 들었잖아요. 이게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면 뭔데요?”10여 년 전, 민시영은 기어코 싫다는 도준을 끌고 해원에 연주회룰 들으러 간 적이 있다.원체 음악에 관심이 없던 도준은 시영을 콘서트 홀에 남겨 두고 저 혼자 주위를 맴돌았다.그러다 마침 콘서트 홀 뒤편에 있는 연습실에서 더듬거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거다.가뜩이나 형편없는 실력에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져 연주는 그야말로 엉망이었다.하지만 흐느껴 울면서 연주는 멈추지 않는 여자애 때문에 도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하필이면 방음이 안 되는 연습실 벽 때문에 안에 있는 여자애가 도준의 웃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웃긴 뭘 웃어?”블라인드가 쳐진 연습 실 안에서 곧장 앙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너무 울어서 짙은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도준은 그 상황이 웃겨 피식 웃었다.“누가 들으면 연주가 아니라 초상 치른다고 해도 믿겠어.”“…….”흐느끼는 소리는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곧이어 더 높은 소리로 울려 퍼졌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더 힘이 실렸다.하지만 창가에 앉아 한참을 듣다 보니 지 모르게 듣기 좋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그제야 안에 있던 여자애도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다시 말을 걸어왔다.“아직 거기 있어?”도준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그랬더니 여자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멧돼지는 사료를 먹지 못한다더니.”도준은 겁도 없는 여자애 때문에 화가 나 피식 실소하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깔며 겁주었다.“지금 나 말하는
도준은 동정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공은채가 집안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진작 알았으면서도 어머니의 심장만 손에 넣으면 공은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무관심했다.하지만 그날, 공은채에게서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도준은 점차 공은채의 생일에 참석하면서 공씨 집안 식구들 앞에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공은채는 도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도준 씨가 저를 얼마나 아껴줬는지 저 다 기억해요. 하지만 그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답을 주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도준 씨가 상처받았다는 것도 알고요. 저한테 보상할 기회 줄 수 있어요?”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하윤의 가슴은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두 사람의 인연이 부모님 때문이 아니라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된 거였다니.’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준이 공은채를 거절하지 맗아야 한다. 도준을 온전히 차지했다고 경계를 풀어야만 공은채가 수술받을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으니까.하지만 그걸 눈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가 모든 걸 망칠 것 같다는 생각에 하윤은 비틀거리며 돌아섰다.“철컥.”문을 닫자마자 힘 빠진 듯 소파에 엎드린 하윤은 도준이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도준은 밖에서 가져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하윤의 허리를 툭툭 쳤다.“배가죽이 등에 붙겠어. 얼른 와서 이것부터 먹어.”하윤은 도준에게 제 뒤통수만 보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안 먹어요.”도준은 피식 웃었다.“오냐오냐 하니까 점점 기어오르네? 먹고 싶다고 굳이 가져다 달라고 했으면서 가져오니 먹기 싫다고?”하윤은 속이 답답하고 서러워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먹기 싫다고요. 차라리 때려요.”“짝!”제 엉덩이를 내리치는 때리는 남자의 모습에 하유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도준은 미첨 힘을 줄이지 않은 탓에 엉덩이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하윤은
하윤은 도준의 말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뭐가 10년 만에 본다는 거예요? 제가 공은채도 아니고, 도준 씨랑 10년 전에 만났을 리 없잖아요.”도준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하윤을 보자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연주하면서 울던 게 누군데?”“피아노 배우면서 우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에요?”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하윤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어? 이상하다? 제가 연주현서 울었던 건 어떻게 알았어요?”도준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아 하윤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자기가 연주할 때 우는 울보라는 것만 아는 줄 알아? 겁쟁이인 것도 아는데? 잠깐 놀렸다고 뒤꽁무치 치는.”하윤은 점점 멍해졌다.“무슨 말이에요? 겁쟁이라니요? 지금 일부러 화제를 전환하는 거 맞죠? 미리 말해두는 데, 이번 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얼른 말해요. 공은채와 10년 전에 어디에서 만났는지!”“해원의 강남 콘서트홀. 홀 안이 너무 시끄러워 밖에서 산책하다가 마침 웬 꼬맹이가 초상 난 사람처럼 울며 연주하는 걸 들었거든.”‘남 콘서드홀? 초상?’‘왜 이렇게 익숙하지?’하윤은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그때 도준이 깊은 생각에 빠진 하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초상 난 것 같다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면서 반나절 연습하더라고.”그제야 하윤의 기억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해, 주 숙제에 불합격이라는 성적을 받은 하윤은 아버지에게 끌려 연습실로 갔었다.분명 오빠와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한 날 연습 때문에 갈수 없게 되자 하윤은 연습할수록 더 심하게 울어 댔다.그렇게 한창 슬피 울고 있는데 창밖에서 행인의 비아냥소리가 들려왔다.상대의 말투는 해원 본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제 갓 소년미를 벗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약간 오만함이 섞여 있었다.“누가 들으면 연주가 아니라 초상 치른다고 해도 믿겠어.”심지어 비웃음도 가득 묻어 있었다.가뜩
도준은 하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더니 왜 또 못되다는 거야?”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내보이던 하윤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어? 잠깐만요. 그대 저를 만났다면서 공은채는 왜 그때 도준 씨가 자기를 만났다고 하는 거예요? 설마 저한테 겁주고 그 길로 공은채 만나러 간 거예요?”하윤의 상상력에 도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그렇게 한가하지 않았다고?’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도준의 다리를 탁 내리쳤다.“알았어요! 도준 씨가 만났던 사람이 자기라도 공은채가 그랬다면서요!”귀찮은 듯한 도준의 콧소리에 하윤은 눈 앞이 캄캄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러니까 공은채는 도준 씨가 만났던 게 본인인 척 속여 제 발판으로 삼았다는 거네? 젠장!’“그러니까 도준 씨는 그 때문에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공은채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한 거예요?”입에 담배를 물고 있던 도준은 하윤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담배를 손에 쥐었다.“대체 나를 뭘로 본 거야? 연주곡 하나에 평생을 기약하다고? 그냥 연주 몇 번 들은 게 다야.”USB 영상에서 도준이 듣던 게 바로 공은채가 연주한 ‘기억’이었다.‘그러니까 도준 씨는 원래 내 연주를 들으려고 한 거였네?’그제야 모든 걸 알아차린 하윤은 가슴이 헛헛해 나며 구멍 났던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그 덕에 시큰거리며 아프던 마음도 괜찮아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천하의 민도준이 사람을 잘못 보다니요?”도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자기가 그때 도망만 안 쳤어도 내가 잘못 볼 리 있겠어?”하윤은 제 화를 풀 곳이 없어 속으로 화를 삭이며 팔짱을 꼈다.“그럼 언제 저라는 걸 알았는데요?”“그 정도로 엉망인 실력이 자기 말고 더 있을까?”“…….”솔직히 도준은 하윤에게 장난 친 거다. 지금 하윤의 연주 실력은 엉망이 아닐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