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남자는 잠결에 첫사랑의 이름을 불렀다. 이튿날 잠에서 깬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그 여자 당장 찾아내!” “...” 온지유는 이제 더는 실망할 힘도 없었다. 그러면서 내민 이혼서류에 적힌 이혼 사유는 이랬다. [아내 측은 아이를 원하나 남편 측이 생육 능력이 없어 감정이 깨짐.] 아무것도 모르는 여이현은 소식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내 그는 지유를 잡아다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어느 날, 지유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그녀를 계단 구석을 몰아넣었다. “내 동의 없이 이혼은 꿈도 꾸지 마.” 지유가 말했다. “당신이 능력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쳐, 근데 내가 능력 있는 사람 찾는 것까지 방해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현은 정말 그길로 지유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유가 가방에서 임신이라고 적힌 검사 결과를 꺼냈다. 이를 본 이현이 불같이 화를 냈다. “누구 아이야?” 이현은 아이의 아빠를 찾아다니며 찾아내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 찾아낸 사람은 본인이었다...
View More진나래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고기 몇 점 더 먹는다고 살이 찌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전 명절에 매일 돼지고기만 먹었는데도 살이 안 쪘거든요.”문지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가정에서 평소에 매일 고기를 먹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명절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간식은 물론이고 인스턴트 음식도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이 찔 수가 있단 말인가.그녀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살이 찔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진나래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녀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너무도 미웠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그녀는 밥그릇에 있는 고기를 먹어버렸다.김숙희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그렇게 몸매에 집착할 것 없어. 많이 먹어야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야. 아들 낳고 나서 살을 빼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너와 수호가 이 방에서 자. 어차피 이젠 내 아들과 살림을 차려야 할 텐데 일찌감치 한방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나한테는 며느리니까 말도 놓을게. 얼른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주면 좋겠구나.”그 순간 문지원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비록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외진 마을에 갇혀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는 건 싫었다. 그녀의 아이가 이런 곳에 태어나 비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오늘부터 같이 밤을 보내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문지원은 일부러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저희 집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외간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저희 부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거든요.”“그럼 지금도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진수호는 눈에 띄게 흥분했다. 이렇게나 예쁜 여자가 자신의 여자로 되었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났든 신경 쓰이지 않
문지원은 순식간에 눈빛이 변해버린 아이의 가족들을 보았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왜 이곳에 남아요? 전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요.”“언니, 언니도 남편감을 만나지 못한 게 아니에요? 그럼 우리 오빠를 빌려줄게요. 앞으로 둘이 서로 지켜주면서 행복하게 지내면 언니에게도 좋잖아요. 설마 우리 오빠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예요?”진나래는 다급해져 얼른 입을 열었다.“우리 오빠는 비록 발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라 힘든 일도 못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밭일은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언니랑 제가 밭을 관리하면 되잖아요.”들으면 들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찌감치 자신을 구해준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됐어. 너희 둘 다 그만 말해.”진성국은 집안의 가장이었던지라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 한눈에 봐도 귀하게 자란 문지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문지원이 이곳에 남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 마을로 시집오려는 여자는 아주 흔했고 진수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사람만 이곳에 있으면 되니까. 그는 직설적으로 문지원에게 말했다.“우리 마을은 아주 외진 곳에 있지요. 마을을 벗어나려면 저 산부터 넘어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 중 아무도 아가씨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외지인이라면 그 산을 빠져나가기엔 아주 힘들죠. 게다가 마을 사람들끼리도 서로 아는 사이고 친척인 경우도 많아 도망치려고 한다면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 아가씨를 다시 잡아 올 거예요.”문지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가족들에게 미움을 산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테니 말이다. 그녀는 이런 산속 마을에 영원히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우리 집안 사람들은 그래도 인정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아들이랑 서로 알
여자아이는 조금 난감해졌다.그들의 마을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 돈이 조금 있다는 집에서 며느리를 들였고 그들처럼 가난한 집안에서는 아들을 장가보낼 돈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아이의 오빠는 절름발이였던지라 오빠를 보는 여자마다 비웃기 바빴고 걷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빨리 걸을 수는 없었기에 밭일도 할 수 없었다.오빠의 나이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커지고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생각하니 아이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겨우 산에 올라갔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다를 바 없는 문지원을 발견했던 아이는 어떻게든 문지원을 자신의 새언니로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대로 자리를 비운다면 문지원이 도망치거나 다른 마을 사람에게 잡혀갈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의 오빠는 정말로 평생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지금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아무리 마을 사람들과 친하다고 해도 네가 혼자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 차라리 내일 불러오시는 게 어때.”문지원이 호의로 아이를 설득했다. 그녀는 아이가 오밤중에 나갔다가 사고당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언니 말씀이 맞아요. 내일 가서 모셔와야겠어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쿵쿵쿵.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오빠는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 문밖에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저녁 준비 끝났으니까 나와서 먹어.”“언니, 가요. 제가 우리 가족들을 소개해 줄게요.”아이는 문지원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안방은 제일 큰 방이었고 아이의 부모가 지내는 곳이었으며 동시에 거실과 밥 먹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문지원이 들어오자 아이의 부모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열정적인 모습으로 문지원을 맞이했다.“얼른 앉아서 입맛에 맞는지 봐요. 그런데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우리 마을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아가씨보다 예쁜 사람은 없을 거예요.”문지원은 대충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도 열정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니 왜 그
문지원의 눈앞에는 마을이 보였다.“언니, 오늘은 늦었으니까 우리 집으로 가요. 우리 엄마랑 아빠, 오빠도 언니를 잘 대해줄 거예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체력이 회복되면 내일 언니를 시내로 데려다줄게요.”아이는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우리 엄마 음식 아주 잘해요. 언니가 가면 분명 한 상 가득 차려주실 거예요.”확실히 하늘도 어두운 늦은 시간이었고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던 그녀였다. 게다가 아이가 아직 어리니 다른 속셈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웠기에 오늘 밤에 당장 시내로 데려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문지원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현금이 떠올랐다. 차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을 전부 아이의 가족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지금도 산속에서 헤맸을 테니 말이다.“우리 집은 바로 저기 앞이에요. 조금 낡긴 했는데 그래도 지낼 수는 있어요. 그러니 너무 싫어하지는 말아주세요. 내년에 아빠가 일하러 나가서 돌아오면 집을 다시 고칠 수 있을 거예요.”아이는 그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대문을 열던 아이는 집안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엄마, 아빠. 저 왔어요. 제가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 보세요!”“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지금 저녁 만들고 있으니까.”부엌 쪽에서 아이의 부모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고 이내 아이가 오는 길 내내 말한 오빠가 방에서 나왔다.“우리 동생, 오늘 산에 올라가서 버섯 따온 거야?”“아니거든. 얼른 나와보면 알 거야.”아이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오빠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곧이어 아이의 오빠가 나오더니 달빛의 힘을 빌려 여동생 옆에 서 있는 문지원을 보았다. 그 순간 남자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두 눈엔 오로지 문지원만 담겨 있었고 살아생전 문지원처럼 예쁜 여자는 처음 보았다.학교도 제대로 다닌 적 없었기에 그의 가방끈도 짧아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형언해야 할지도 몰랐고 기껏 생각해낸 말이 고작 이것이었
문지원은 다시 한번 긴장하게 되었다. 황폐한 산속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이니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만약 또 뱀이 나타나거나 다른 야생 동물이라면 발목을 접질린 상황에서 빠르게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던지라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반드시 아주 조용하게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지만, 주위에 덜어진 나뭇잎이 많아도 너무 많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빠각.뒷걸음질을 치던 문지원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뭇가지를 밟아버렸고 이내 큰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앞에서 들리던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귓가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는 누구예요? 왜 여기 혼자 있는 거예요? 가족이랑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야생 동물도 아니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온몸을 휘감던 공포는 어느새 사라지고 안도감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난 혼자 여기로 왔어. 혹시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알아?”문지원은 허리를 숙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어림잡아 열셋 정도 되어 보였고 아마도 근처 마을에서 사는 아이 같았다.아이는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랐던지라 당연히 이 산도 익숙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문지원의 손을 잡았다.“네. 알고 있어요. 언니는 저만 따라오면 돼요. 근데 마을에서 언니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언니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죠?”“응. 아니야. 언니는 다른 도시에서 왔어. 오빠 찾으려고 온 거야.”문지원은 어린아이를 경계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는 순수해 보였던지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주었다.“그럼 언니 오빠는 찾았어요?”아이는 그녀보다 더 그녀의 오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고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로 찾았더라면 이렇듯 몰골이 처참해지지 않았을
최주하는 또 젓가락을 들어 여울이 직접 만든 만두와 교자를 먹어보았다. 확실히 맛은 있었지만 유명한 맛집에서 먹은 것보단 못했다. 그래도 집밥 느낌이 물씬 났고 물론 그 죽도 맛있었다. 그렇게 그의 숟가락은 멈춘 적이 없었고 한 그릇 싹싹 비워버렸다....한편 문지원은 오빠를 찾지 못해 실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순간 발신자표시제한으로 한 통의 문자를 받게 되었다. 문자를 눌러 확인하자 손목시계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그 손목시계는 바로 그녀의 오빠가 늘 하고 다니던 것이었다.그녀는 바로 사진을 확대해 시계에 난 스크래치까지 전부 확인해 보았다. 시계에 새겨진 이니셜마저 똑같은 것이 오빠의 시계가 분명했다. 사진 아래는 위치까지 찍혀 있었고 바로 근처였다. 조금 전까지 실망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이 변해버렸다.만약 오빠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이대로 떠나버렸을 테지만 이미 이 문자를 받고 위치까지 알게 되었다. 설령 이 문자가 누군가 파놓은 함정임을 알아도 그녀는 아마 그곳으로 갈 가능성이 아주 컸다.‘함정이면 뭐 어때?'그녀는 시간 낭비를 해도 오빠에 관한 단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찾을 가능성이 만분의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만약에 정말로 있으면?'만약 이번에 정말로 오빠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도박에 기꺼이 뛰어들 생각이다.문지원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사진 속에 찍힌 위치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가는 길 내내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제대로 된 길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잡초로 무성했다.무성한 풀숲 사이로 벌레가 자꾸만 튀어나왔고 심지어 앞에서는 뱀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깜짝 놀란 문지원은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 뱀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계속 앞으로만 스르륵 소리를 내며 기어갔다.뱀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문지원은 움직일 엄두가 났다. 그녀의 두 눈엔 피로로 가득했지만, 오빠를 찾을 수 있다면 이런 길도 언제든지 갈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울은 시야에 들어온 클럽이 아닌 주위 환경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대던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실내화를 신고 문을 열고 나갔다.“여긴 어디지?”“여긴 내 집이야. 곤히 자고 있길래 클럽에 두고 나올 수 없어서 데리고 왔어.”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때 마침 거실에서 최주하가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그는 간단히 설명해주며 다가갔다.“시간도 늦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내일 데려다줄게.”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이 늦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냉장고에 먹을 게 있으니까 배고프면 알아서 꺼내먹어. 그 옆에 서랍에는 간식도 있어. 먹고 싶으면 꺼내 그냥 꺼내 먹어.”“네.”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의 그녀는 배가 고팠던지라 서랍을 열어 초코파이 몇 개를 꺼내 먹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렇게 아침까지 쭉 자게 되었다.어제 최주하가 그녀에게 약을 발라주고 잠든 그녀를 집으로 데려간 후 간식까지 내어줬기에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마침 아침 일찍 눈을 떴던지라 주방으로 가서 아침을 만들어 줄 생각을 했다. 최주하의 방은 조용한 것이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았다.바쁘게 음식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눈을 뜬 최주하는 거실로 내려가자마자 고소한 음식 냄새를 맡게 되었고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간 후 문을 열었다.“깼어요? 마침 아침 준비가 끝났는데 얼른 씻고 와요.”여울은 죽 그릇을 든 채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아침으로 뭘 드시는지 몰라서 여러 가지를 조금씩 만들어 봤어요. 얼른 와서 먹어 봐요. 제가 요리엔 꽤 자신이 있거든요.”“그래.”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씻으러 들어갔다. 어차피 그는 여울의 솜씨에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비록 입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대부분 음식은 전부 맛보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음식은 그에게 그저 그런 음식이었다.주방으로 내려온 그는 숟가락을 들어 죽을
여울은 빠르게 옷을 잡아당겨 상처를 가려버렸다.“별거 아니에요. 이건 주문하신 칵테일이니 맛있게 드세요.”“여울.”최주하는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버리더니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올려버렸다. 그녀의 팔에 잔뜩 난 흉흉한 상처를 본 그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이거 누가 그런 거야?”너무도 처참해 정상적인 사람이 낸 상처가 아니었다. 여울에게 이 정도로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최지후를 제외하고 없었다. 다만 여울은 최주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최지후의 곁에 있는 것이었던지라 딱히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곧 그에게 답으로 들려왔다.“최지후가 이렇게 만든 거지? 그렇지?”최주하가 직설적으로 묻자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괜찮아요. 상처도 아물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을 거예요. 지금은 조금 보기에 흉하긴 하지만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거든요.”“여기서 잠깐 기다려.”최주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여울은 그가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갔는지 당연히 몰랐다. 그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얌전히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최주하의 손에는 커다란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약을 테이블로 내려놓더니 여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주었다.“여자 몸에 이런 흉터가 남으면 안 좋잖아. 난 네게 이런 흉터가 남길 바라지 않아.”“전 괜찮아요. 이런 흉터에 신경 쓰지도 않는걸요.”여울은 고개를 저었다. 흉터가 생기든 말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이런 일에 신경 쓸 여우도 없었다.갑자기 고개를 들어버린 최주하 덕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최주하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여자도 지금의 여울처럼 최지후에게 고통스럽게 폭행당했었다.머릿속에 떠오른 여자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여자의 눈은 빛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공허했다. 비록 살아는 있었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빠르게 여울의 상처는 치료가 되었다.“고마워요.”여울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상황도 당연한 것 같았다. 사이코패스와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서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둘 다 사이코패스인 것이다.연이은 며칠 동안 여울은 집에만 박혀 쉬고 있었다. 그간 최지후가 몇 번 다녀오면서 꽃과 먹을 것을 사다주기도 했고 그녀를 애지중지하듯 자꾸만 음식을 그녀의 앞까지 대령해 주었다.“여울아, 이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꿀 꽈배기야. 이제 막 나온 걸 사 왔으니까 따듯할 때 얼른 먹어 봐.”“배고프지 않아요.”여울은 그가 사 온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얼굴만 봐도 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약속한 일은 해야 했던지라 역겨운 마음을 꾹 참고 최지후의 곁에 있었다.“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내가 사 온 것들을 먹기 싫은 거야.”최지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와 같은 사이코패스에게 있어 이미 한번 손찌검을 했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게 손찌검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꽈배기를 테이블 위에 쾅 내려놓았다.“그래. 지난번에 확실히 너한테 손찌검을 했어. 하지만 그건 네가 날 오해하게 만들어서 그런 거잖아. 그 후에 바로 사과도 하고 직접 약도 발라주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설마 고작 그 한 번으로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라도 한 거야?”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떤 사이든 간에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손찌검을 하는 일은 없었고 최지후처럼 심하게 폭행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었다. 분명 그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그녀를 폭행한 것이면서 그는 전부 그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난 화난 게 아니에요. 정말로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여울은 먼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아직도 소화가 안 됐어요. 지금 꽈배기를 먹기엔 너무 느끼해요.”“하지만 내가 널 위해 사 왔다고. 조금이라도 먹어 봐. 맛만이라도 보라고. 착하지. 얼른 먹어.”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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