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일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했기에 실수는 용납하지 못했다.하지만 지유를 탓해서는 안 된다. 이현은 어제 병원에서 승아를 지켰다.“대표님이 먼저 바쁘다고 전화를 끊었잖아요.”이현이 멈칫하더니 입을 앙다물었다.“어떻게 처리한 거죠?”그때 지유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처리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온지유 비서.”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전에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었던 거 같은데요.”이현은 일부러 온지유 비서라는 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신분은 비서이지 아내가 아니라고 각인시켰다.지유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시공은 영향받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대처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문제가 생기면 핑계를 찾기보다 해결해야죠. 전에 제가 한번 귀띔해 줬을 텐데.”이현의 말투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지금 당장 회사로 오세요.”이 말을 뒤로 이현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지유는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공사장의 상황을 신경 쓰지 못 했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지유는 얼른 정리하고 회사 갈 준비했다.그제야 잠에서 깬 지희는 지유가 분주하게 돌아치자 하품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어디 가려고?”“일이 좀 생겨서 회사에 가봐야 해.”“지금 이 상황에 왜 아직도 그 사람 신경 쓰는 거야?”지희가 노발대발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하긴, 이혼 서류 이미 여진그룹에 보냈어.”지유는 신발을 갈아신으며 대꾸했다.“이미 보냈어?”“응, 퀵으로 아침 일찍 보냈어. 아마 여이현도 봤을걸?”지희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지유가 이혼한다고 하자 속전속결로 바로 진행했다.언젠가는 이혼할 텐데 빨리하든 늦게 하든 사실 달라질 게 없었다.“그래, 어차피 할 이혼인데.”지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지유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앞으로 네 덕 좀 봐서 잘사는 여자 좀 해보자. 지유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온 비서님.”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대표님.”지유가 그를 불렀다.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건 뭐야?”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온지유!”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네?”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확인해.”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혜연은 신무열을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렵게 얻은 결과를 지키려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하지만 김혜연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태도였다.여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만약 내가 무열 씨의 마음을 얻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김혜연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죠? 만약 당신이 신무열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건 당신의 능력이에요. 오히려 축복해야겠죠.”김혜연이 신무열을 붙잡으려 애썼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무열의 곁에 다른 여자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그녀도 그 관계를 축복했을 것이다.여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말로 날 속이려는 거죠? 사실은 내가 당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당신도 곧 제 실력을 알게 될 거니까요!”김혜연은 이해했다.“선전포고라는 뜻이군요.”김혜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그 여자는 곧장 신무열을 찾아갔다.신무열은 그녀를 보고 곧바로 시선을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선생님, 저를 잊으셨나요? 저 아린이에요. 5년 전...”아린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급한 마음을 드러냈다.그 말을 들은 신무열이 그녀를 기억해 냈다. 아린은 5년 전 북부에서 온지유와 갈등을 빚었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 케빈도 떠올랐다.“아린? 무슨 일로 온 거야?”신무열은 그녀를 기억해 냈지만 여전히 말투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의 태도에서는 큰 반가움이 보이지 않았다.아린은 신무열이 Y국을 책임지고 있으며 많은 일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발길을 멈출 수 없었다. 이 결혼식은 Y국 전체가 주목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린은 그가 김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신무열이 김혜연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김혜연이
김혜연은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제가 했어도 탓하지 않는다고요?”자신의 노력이 드디어 그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은 걸까? 자신이 그의 삶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허락한 걸까?“그래.”신무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김혜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왜죠? 그건 저랑 결혼할 생각이 있다는 말인가요?”신무열은 김혜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그동안 네가 나의 곁에서 어떻게 해왔는지 난 다 보고 있었어. 넌 정말 훌륭한 내조자였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데 너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너무 불공평하잖아.”특히 김혜연이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김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무열 씨가 저랑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결혼하기 싫으시다면 저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이 모든 건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김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메말라 갔다.설령 마지막에 자신이 상처받고 죽더라도 그것 역시 그녀가 원한 결과였다.신무열은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그리고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는 것도 알아.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신무열은 그녀를 꼭 안아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넌 우리 결혼식이 어땠으면 좋겠어?”“저는... 잊지 못할 결혼식을 원해요.”결혼식을 떠올리는 김혜연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사실 결혼식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신무열이 그녀 곁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드디어 결혼에 대해 마음을 열었다는 점이었다.“좋아.”신무열은 김혜연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결혼식 준비는 요한에게 맡겼고 김혜연이 직접 준비를 도울 수 있도록 했다.김혜연은 모든 준비에 만족하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간 날, 한 여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다니?“아버지가 틀리지 않았다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한 번도 우리 두 형제에게 있지 않았잖아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고 믿어주셨다면,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아버지는 언제나 고집대로예요. 여이현이 대통령 자리에 뜻이 없다고 해서, 우리를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찾아내서 아버지 말을 따르는 꼭두각시로 세뇌하려 하신 거 아니에요?”두 아들이 한마디씩 비난을 쏟아내자, 브람은 얼굴을 굳히며 각각 한 발씩 걷어차 둘을 바닥에 내리 눕혔다.“너희 머릿속에는 두부라도 들어 있냐? 내가 너희 편이 아니라면, 지금까지 너희가 저지른 짓거리만으로 진작에 끝장났을 거야, 그것도 모르겠냐?”브람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브람의 자식 교육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내란은 이제 다 정리됐고 당신 일도 다 마무리됐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여인들 사이의 갈등도 복잡하지만 남자들 사이의 싸움은 종종 더욱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법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 일이 없었더라도 이틀 후엔 돌아갈 생각이었어. 괜찮아?”온지유가 불편하다고 하면 그는 더 빨리 떠날 계획이었다.“괜찮아.”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브람은 여이현이 있는 동안의 두 아들의 암살 시도를 공개하고 대통령을 선거를 통해 뽑겠다고 발표했다.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했으나 결국 브람이 재선에 성공했다. 브람은 화국의 방식을 따라 5년 임기를 추가했다.그의 두 아들은 개조 프로그램에 보내져 일반인의 신분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여이현은 S국이 평온을 되찾은 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와 함께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신무열과 김혜연은 Y국으로 함께 돌아갔다.Y국도 현재 평화를 되찾았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김씨 가문의 옛
지금 온지유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바로 가족들의 인정과 축복이었다.브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라. 이제 더는 너와 이현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겠어.”그는 여이현이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아 S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길 바랐다.하지만 여이현은 그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는 평범한 삶을 원했다. 여이현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동안의 부재가 가슴에 남아 있는 브람은 아이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길 원치 않았다.“감사합니다.”온지유의 뜻밖의 감사 인사에 브람은 묘한 감정이 일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부부였고 이미 5년 전부터 함께해온 사이였다. 그녀는 긴 시간여이현의 곁에 머물렀다.서로에게 운명이라 믿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온지유는 여전히 둘을 갈라놓으려 했던 브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특히 자신과 여이현 사이의 거리감에 더욱 가슴 아팠다.순간, 브람은 깊은 후회를 느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한동안 S국에 머물렀고 그 사이 여이현은 브람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간 뜻밖에도 형과 이복형이 여이현을 암살하려 했다.다행히도 여이현은 이미 준비를 해 두었고 신무열이 미리 사람을 배치해 둔 덕분에 형제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형제들은 붙잡힌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끌어내려 함께 죽으려 했다.그들은 여이현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들의 눈빛에서 비교당하는 삶의 불행함을 느꼈다.여이현은 형제들에게 말했다.“아버지가 구해주셨을 때 저는 중상을 입어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셨지만 전 처음부터 대통령 자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건 소소한 가정일 뿐입니다.”“이곳에 온 건 단지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일 뿐이에요.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떠나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이현은 형제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브람은 그들을 심하게 혼냈다. 그
“그래.”브람이 대답한 후 여이현은 바로 돌아섰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브람은 이번이 여이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여이현이 받지 않으려 해도 억지로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모두 화국 돈으로 바꿔뒀다. 너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내 손자에게 주는 거다. 내가 그 아이를 너무 엄하게 대했다.”그래서인지 별이는 이렇게 오랜 시간 떠나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별이에게도 필요 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모두 별이를 위해 모아둔 거니까!”브람이 엄숙하게 말했다.그러고는 문득 온지유를 떠올렸다.“지유와 잠시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 걱정 마. 상황이 이렇고 사람도 많은데 내가 해코지 할리 있겠느냐.”여이현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온지유를 브람 앞에 불러 세웠다.온지유는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아버님.”브람은 여이현의 친아버지이자 별이의 친할아버지였다. 온지유는 브람을 아버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브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널 죽이려 했던 나를 그리 불러주는 게냐?”브람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온지유는 브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요구할 수는 없죠. 아버님이 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아버님과 이현 씨의 혈연은 끊을 수 없는걸요.”그녀는 여이현의 아내로서 당연히 브람을 아버님이라 불러야 했다.브람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지유야, 솔직히 내가 이현이를 처음 찾았을 때 너희가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이현이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여자라면 어떤 약속이나 의식도 없이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그때 나는 이현이가 너와 이혼하고 S국에 와서 새로운 결혼을 하길 바랐어. 하지만 이현이는 원하지 않았어. 나중에 그 애가 너에게 한 모든 것을 보며 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지. 지유야, 난 이현이에게 참 못된 짓을 했다. 이제 너희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