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나민우,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같은 반이었어.”지유는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잠깐 떠올려봤다.그녀가 기억하는 민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그때 민우는 뚱뚱했고 매 학기마다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지유는 민우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그녀는 성적이 좋았던지라 늘 간부였고 숙제를 거둘 때만 그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지금의 민우는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잘생겨졌다.“나민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너 왜 이렇게 변했어? 몰라보겠다야.”“그래, 많이 변하긴 했지. 몰라봐도 이상해할 거 없어.”민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다들 나 못 알아보더라. 근데 나는 너 기억해.”지유는 옛 친구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일을 하고 난 후로 매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동창회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지유는 생활이 단조로운 편이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업무적으로 알고 있는 파트너 외에 친구라고는 지희 하나뿐이었다.생각해 보니 생활이 정말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 대부분 시간을 이현에게 가져다 바쳤기 때문이다.“중학교 졸업하고 어디 갔어? 그 뒤로 소식 못 들은 것 같은데.”지유가 민우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유학 하러 갔었어.”민우가 대답했다.“최근에 귀국한 거야.”“그랬구나.”지유는 한 웅큼이나 젖은 그의 슈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벗어서 줘. 내가 씻어줄게.”“진짜 괜찮아.”지유가 말했다.“어렵게 만났는데 이런 큰 선물을 줬으니 마음이 내려가지 않네. 씻으면 바로 가져다줄게.”지유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민우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그럼.”그는 슈트를 벗어 지유에게 건네주었다.다행히 안에 입은 셔츠는 젖지 않아 보기에 그렇게 참담해 보이지는 않았다.지유는 쇼핑백에 바로 슈트를 개어 담았다.“나 대표님.”갑자기 누군가 민우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유는 바로 옆에 있는 민우가 들었다가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지희에게 그만하라고 했다.지희는 하는 수 없이 지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다른 사람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누고는 다시 지유 곁으로 돌아왔다.지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민우가 대답했다.“지희 씨, 이번 전시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된 것 같네요. 영향력이 날로 올라가는 거 같아요.”“문인들의 일개 취미일 뿐 대표님과는 비길 수 없죠.”지희가 지유를 밀며 이렇게 말했다.“두 분이 옛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희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오후에 회사로 들어간대요.”지희에게 밀쳐진 지유는 순간 당황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나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마침 저도 다른 일정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지희가 지유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부탁드릴게요.”지희는 지유를 민우 곁으로 가까이 데려갔다“옛 친구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텐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멀리 안 나갑니다.”지희는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지유는 그런 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우가 있어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지희는 바로 자리를 떴다.지유는 민우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동창이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었다.“지희 말 들을 필요 없어. 바쁘면 가서 일 봐.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지유는 이현과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서? 나도 너랑 수다 좀 떨고 싶어.”지유가 넋을 잃었다.“뭐?”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고.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거든. 너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지유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아까 너를 쓴 기사를 봤는데 M국에서 완전 잘나가던데? 너 이렇게 출세했을 줄은 몰랐다.”“운
그러다 지유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게 되었다.둘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이현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더니 차갑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쏘아봤다.이현의 기억 속에 지유는 남성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아무튼 이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에 이현은 가슴이 먹먹한 게 불편했다.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보폭이 빨라졌다.차에 부딪힐 뻔한 지유는 놀라서 잠깐 멍을 때리고 있다가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얼른 그의 품에서 나왔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민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난 괜찮아. 고마워.”지유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민우가 말했다.“봐봐. 만나서 지금까지 넌 계속 미안해하지 않으면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민우는 그녀와 거리를 조금 좁히고 싶었다.지유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공손했다.하지만 민우도 자신이 그렇게 공손한 게 싫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지유는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었다.마침 지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본 이현이 이를 매우 거슬려했다.지유는 이현 앞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이 남자가 지유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현도 순간 발견한 게 있었다. 지유에게 쏟은 관심이 너무 적었기에 그녀 옆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지유가 다른 남자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게다가 이현의 옆을 오래 지키다가 그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태도는 늘 공손했고 그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비교되는 상황에 이현은 불쾌했다.“온지유!”이현의 목소리에 여유롭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겼다.지유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이현 쪽을 바라봤다. 얼굴에 걸린 미소도 순간 사라졌다.이를 본 이현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그를 보고 웃음이 사라진다?두
“선생님, 제 팔자가 왜 이럴까요? 이렇게 기구할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도 않았을 텐데. 저 이제 어쩌면 좋아요? 만약 홀몸이라면 죽었을 텐데 딸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에요. 너무 어리잖아요.”은서우도 난감했다.“네. 따님을 생각하셔야죠...”그녀는 갑자기 인명진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변호사 인맥이 없지만 인명진은 있을지도 모른다.다만 현재로서는 인명진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여자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기도 어려워 우선 환자와 보호자의 감정을 달랬다.그 여자아이는 아주 철이 들었다.올해 여덟 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남녀 간의 일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빠는 저와 놀이를 했을 뿐이에요. 내가 소리치지 않으면 상을 주겠다고 했어요.”하지만 아이는 어머니가 슬퍼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엄마, 울지 말아요. 나연이는 하나도 안 아파요.”아이는 여자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여자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은서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렇게 철든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그녀는 사무실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녀를 보며 조용히 문을 닫고 재빨리 인명진에게로 갔다.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로 인해 걸을 때마다 바람을 휘날렸다.똑똑, 그녀는 사무실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었다.다시 노크할까 고민하던 중 인명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나 찾으러 왔어요?”은서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가운을 정리하며 말했다.“방금 급한 수술이 잡혀서 이제 끝났어요.”그제야 남자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피곤함을 보아냈다.수술할 때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건 인명진도 예외일 수 없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요.”“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인명진은 손을 내밀어 뼈마디가 분명한 손으로 문을 열었지만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은서우가 들어가고 나서야 그도 따라갔다.은서우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은서우는 밖으로 나간 후 얼른 얼굴을 두드리며 자신을 진정시켰다.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은 선생님?”은서우가 돌아보니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의 가족이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갑자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변했다.물어보니 지병이 재발한 것이었다.그녀는 환자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가 세심하게 검사를 시켰다. 5분 후, 그녀는 결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위장에는 문제가 없는데 어디가 불편한 거죠?”그녀는 환자의 가족이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 어머니는 우물쭈물했다.은서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괜찮으니까 말해봐요.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에요. 애가 어디가 아픈지 제게 말씀해주세요.”그러자 그 어머니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은서우는 멍해 있다가 다급히 위로했다.“울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말씀하세요.”중년 여자는 한참을 울다가 멈추고 자기 딸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은서우가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그녀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학력이 높지 않고 농촌 출신인 그녀의 고향에는 여자가 나이가 들면 중매쟁이가 찾아오고 집안의 부모님도 하루빨리 자식의 혼사를 결정했다.그녀는 마을에서 자기보다 여덟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고 결혼 후 딸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중시하는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계속 가혹하게 대했다.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는데 얼마 전 그 짐승이 내 딸에게 손을 댄 걸 알았어요. 이제 겨우 몇 살이라고. 어떻게 아버지가 딸에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은서우는 깜짝 놀랐다.이 사실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녀는 즉시 또 한 번의 검사를 준비했다.그 여자아이가 전에 위장염이 있어서 아까는 내과 검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부인과 검사였다.검사 결과 은밀한 부위가 이미 찢어져 있었다. 은서우는 검사 결과를 보며 손이 부들부들
하지만 그는 해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차라리 오해하는 것이 나았다.여자 간호사는 은서우를 보고 또 인명진을 보더니 굴욕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다.은서우는 그녀와 부딪히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섰다.“난 방금... 실례한 줄 알았어요.”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방금 인명진의 말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듯한 질식감도 사라지고 호흡도 원활해졌다. 다만 가슴에 약간의 질투가 남아 있어 방금 간호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계속 추측했다.인명진은 그녀를 쳐다보며 설명했다. “방금 그 사람, 난 몰라요. 노크하고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우 씨가 들어왔어요.”은서우의 안색이 훨씬 좋아졌다. “아마 최근 병원에서 도는 소문 때문일 거예요.”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헛소리하는 사람들을 잘 단속해야겠다고 다짐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은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충격으로 인해 10할 기쁘던 심정이 2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나 시험에 통과했고 이제 논문 발표만 남았어요.”인명진은 미간을 펴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논문은 어떻게 쓰는지 알아요?”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인명진은 컴퓨터를 켜고 자신의 논문을 그녀에게 참고로 보여주었다.도중에 실수로 소매가 부딪쳤다. 방금 인명진이 여자 간호사에게 냉담하게 대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 그에게는 결벽증이 있었고 그녀는 방금 많은 것을 만졌지만 미처 손을 소독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그녀는 바로 손을 거두었다.“깜빡하고 소독하지 못했어요. 지금 당장...”“필요 없어요. 와서 이 부분을 어떻게 쓰는지 보세요.”인명진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은서우는 멍하니 있다가 그의 의자로 끌려갔다. 자세를 보면 인명진이 거의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었다.쿵쿵쿵, 가슴이 너무 뛰어 목구멍을 통해 튀어 나올 것 같았다.너무 가까웠다.가까이서 그녀는 남자의 차가운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끝
은서우가 그렇게 말해도 병원에서의 루머를 막을 수는 없었다.어디서 흘러나온 소문인지 그녀가 인명진과 관련이 있고 낙하산 인사라는 소문이 자자했다.이혜성은 화가 났다. “그 사람들 정말 웃기네? 질투 나면 당사자 앞에서 말하면 되지 꼭 뒤에서 잔꾀를 부려야겠어?”오히려 은서우가 그녀를 위로했다.“일단 화내지 말고 차 한 잔 마시며 목부터 축여.”그녀가 인터넷에서 구매한 차였다.정통 대홍포라고 하는데 정품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마셔보지 않았다.이혜성은 한 모금 마시더니 입맛을 다시고 나서야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소문의 주인공은 너잖아! 근데 화가 전혀 안 나?”은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난 이미 겪었던 일들이라 별로 화날 것도 없어.”소문을 들었을 때 약간 그 느낌이 그립기까지 했다.경성의 그 병원에 있을 때, 그녀가 인명진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아주 듣기 싫은 말도 많았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미 습관 되어 화가 나지 않았다.이혜성은 듣고 나니 그녀가 더욱 불쌍하여 머리를 쓰다듬었다.“우쭈쭈 우리 서우, 많이 힘들었어요?”“닥쳐.”은서우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친해졌고 말도 전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참, 너 오늘 성적 나오는 날이지?”그렇다.그녀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은서우는 정말 까먹을 뻔했다. 그녀는 얼른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역시 메일 한 통이 들어왔다.긴장과 설렘을 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누른 후 환호성을 질렀다.“나 통과했어!”은서우는 너무 기뻐 소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졌다.시험에 통과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이혜성도 진심으로 기뻐했고 밖에서 아직도 소문을 퍼 나르고 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너 실력 없다고 떠드는 사람들, 눈 크게 뜨고 똑바로 보라 그래. 흥! 실력 없는 사람이 어떻게 대학원에 가겠어?”은서우가 그녀를 위로했다.“됐어, 그만해. 그런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참,
은서우와 아주머니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인명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쏠렸고 그가 의미심장하게 묻는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혹시 열이 나요?”그가 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로 향했고 그녀는 급히 그의 손길을 피했다.열이 나는 게 아니었고 그가 이마를 만진다면 아마 얼굴이 더 빨개질 것이다.“괜찮아요. 그냥 좀 더워서 그런 것 같아요.”말하면서 아주 더운 듯 손으로 부채질했다. 그녀의 작은 속임수를 다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웃음을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 순간, 먼저 다가가라는 김민재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그날 저녁, 은서우는 요리 실력을 한껏 뽐냈고 맛있는 대게 요리를 만들었다. 인명진도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여러 마리의 대게를 먹었다.한편, 병원에서의 업무는 이전에도 했던 일이라 그는 부임한 이후 바로 능숙하게 병원 업무를 처리했다.병원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은서우의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명진한테서 부원장을 뽑을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었다.“설마 나한테 부원장 자리를 맡으라는 건 아니죠?”“맞아요. 당신한테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날 너무 높게 평가한 것 같아요.”그동안 열심히 한 건 사실이다. 그녀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 또한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노력만 있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경력이 필요했다. 의사한테 가장 중요한 건 경력이다. 능력 있는 원장과 부원장은 거의 다 4, 50대의 의사들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그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정리 좀 하고 나서요.”그녀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곳은 지난번에 그가 임시로 살던 집이었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여긴 친구네 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잠깐 빌려 쓴 거라고 하더니 왜 아직도 여기 살아요?”“친구한테서 샀어요.”그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나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인명진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녀 또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지난번 그 가사 도우미의 모습이 보였다. 두 번째 만남이라 가사 도우미는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다만 중간에 가스가 끊겼고 냉장고 안의 야채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 가사 도우미는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아이고, 이를 어째요? 장 보는 것을 깜빡했어요.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가서 사 올게요.”“아닙니다. 저희가 갔다 올게요.”이때, 인명진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에 가사 도우미는 물론 은서우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장을 보는 것뿐이었고 예전에도 많이 했던 일이다. 다만 인명진과는 단둘이 장을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장을 보고 식사를 하는 건 그녀의 기준에서 매우 사적인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심장이 저도 모르게 쿵쾅거렸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한눈에 알아본 가사 도우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얼른 갔다 오세요.”인명진은 외투와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차를 몰고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가서 야채와 고기 그리고 과일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시간이 늦은 편이 아니라 아직은 세일을 하지 않아 가격이 좀 비쌌다.은서우는 혼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조금 더 늦게 올걸.”인명진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옆에서 할인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대게를 판매하고 있었다
한껏 조롱하고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은서우는 그제야 원장이 자리를 옮긴 뒤 병원에 자리가 하나 비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말인 즉 누군가 이 병원으로 온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펜을 깨물며 중얼거렸다.“누구일까?”그러나 이혜성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이혜성은 병원의 소식통이었다. 병원의 소식이라면 그녀가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슴을 치며 내기를 걸었다. “내가 장담하는 데 분명 배경이 있는 사람일 거야. 그것도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알아내지 못할 리가 없다. 은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가십거리에 대해 그녀는 대충 흘려듣고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오든 그게 그녀랑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윗사람들이니 누가 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 오는 것도 아니고.그런데 뜻밖에도 정말로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사람.원장 취임식 날, 은서우는 원장 사무실에 물건을 건네주러 갔다. 마침 새로 온 원장의 얼굴이라도 좀 볼까 하고 문을 열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인명진 씨, 당신이 여긴 어떻게?”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던 건지 그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활짝 웃었고 얼굴의 차가움도 싹 사라져 버렸다. “놀랐어요? 서프라이즈해 주고 싶었는데. 당신 표정을 보니까 왜 경악하는 것 같지?”은서우는 손을 뻗어 가슴을 누를 뻔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그녀는 그의 말에 속으로 중얼거렸다.‘당연히 놀라지 어떻게 안 놀랄 수가 있겠어요?’정말 놀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왜 여기로 온 거예요? 경성에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왜 갑자기...”병원 사람들은 새로 온 원장이 분명 배경도 있고 실력도 있다고 추측했지만 그녀는 그 사람이 인명진일 줄 전혀 몰랐다.알았다면 분명히 그를 막
인명진의 말에 은서우는 잠시 멍해 있다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이번에는 인명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건 방법이 아닌 것 같아요. 그 당시 경성을 떠나온 건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사람들이 날 뭐 어찌하겠어요?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그저 내가 귀찮아서 도망쳐 온 거예요.”가정은 한 사람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소씨 가문에 자란 그녀는 늘 일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귀찮아했다. 그러나 많은 일을 겪고 나니 이젠 두렵지가 않다. 귀찮은 게 뭐가 어때서?결국은 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인데.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흘렸다.잠시 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당신의 마음을 저버린 건가요?”“아니요.”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웃음소리가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하고 연인의 목소리처럼 다정했다.“그렇게 생각하다니 나도 기뻐서요.”이 일은 그렇게 지나갔고 인명진은 더 이상 전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는 시험을 마쳤다. 시험 당일 인명진은 추천서를 메일로 보냈다.성적이 나오기 전에 뭐 하러 이리 급히 보냈냐고 했더니 그가 그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르긴요. 언젠가는 쓰게 될 텐데.”그녀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왠지 모르게 인명진이 그녀보다 더 자신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다시 말길을 돌렸다.“요즘 많이 바빠요?”“왜 갑자기 그걸 물어요?”“그냥... 오랜만에 통화하는 거 같아서요.”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통화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고 익숙하다 못해 그가 옆에 없어도 항상 곁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게 점점 더 익숙해졌다. 그래서 연락을 안 하게 되면 왠지 모르게 적응이 잘 안됐다. 오늘 이 전화도 그녀가 먼저 한
그의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인명진이 있다고 생각하니 전혀 외롭지가 않았다. 돌아온 후, 이혜성은 협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은서우는 일부분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혜성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세상에. 그래서 정말 거절했단 말이야? 너 진짜 대단하다. 존경심이 막 생겨.”그녀는 이혜성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그만해. 그만 놀려. 나 정말 긴장돼 죽는 줄 알았어.”은서우는 한숨을 내쉬며 겉옷을 벗더니 의자에 힘없이 기대어 앉았다. “왜 그래? 조금 전까지 내가 그렇게 칭찬했는데. 왜 갑자기 김이 빠진 거야? 들어올 때 그 패기는 다 어디 갔냐?”“패기는 무슨.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어.”은서우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비웃었다. 옛날 사람들이 툭 하면 무릎을 꿇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긴장이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 보니 아까 겉으로는 괜찮은 척 보였지만 사실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날 저녁, 인명진은 이미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도 별일 없었죠?”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우는 전화를 받으며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했다.“뭐 늘 똑같죠. 당신도 병원에서 근무하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매일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이 병원에는 외과의사가 몇 명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교대로 당직을 설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툭하면 그녀를 외과로 불렀다. 그녀는 혼자 내과와 외과 사이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전화기 너머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누가 웃었어요?”웃은 사람이 인명진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있는 누군가 웃었다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