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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Author: 류한나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

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

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

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

이현이 대답했다.

“그러다 돌아올 거야.”

“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

“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

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

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

“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

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

“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

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

“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유가 그래?”

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

“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

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

“꺼져!”

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

여진숙은 친구들과 화투를 치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면 빠질 수 없는게 아들과 며느리에 관한 화제였다.

하지만 여진숙은 지유를 꺼낼 때마다 싫은 티를 팍팍 냈고 다른 집 며느리와 비기기 일쑤였다. 다른 집 며느리는 집안도 좋고 인물도 훤하고 다 좋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유는 집안부터 내세울 게 없었다.

이런 말을 이미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은 지유라 이제 더는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지유는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의 화제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여진숙은 그런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화투를 내려두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얘, 너 거기 서.”

지유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세요?”

여진숙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잔소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너 점점 돈을 흥청망청 쓰더구나. 한 번에 현이 카드를 1억이나 긁어? 너 같은 애랑 결혼하면서 우리 집안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데 생각 좀 하면서 살아. 어떤 집 며느리가 너처럼 돈을 써!”

상황을 모르는 지유는 이런 상황이 어이없었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많은 돈을 썼다고 그러세요?”

여씨 가문으로 시집오고 이현이 선물해 준 귀중품은 모두 상자에 넣어둔 채 꺼낸 적이 없었다.

지유는 한 번도 마음 편히 여씨 집안의 돈을 써보지 못했다.

다 그녀가 한푼 한푼 번 돈이었다

“모르는 척하기는, 봐봐.”

여진숙이 바락바락 성질을 내며 지유를 나무랐다.

“무슨 옷을 사는데 1억이나 썼어? 네가 그렇게 잘났어? 허구한 날 흥청망청할 줄만 알았지, 이 속도면 언젠간 우리 집 거덜 난다.”

은행에서 온 1억을 긁었다는 문자였다. 그것도 여성복이었다. 이에 지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유는 최근에 쇼핑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여성복을 사러 갈 일도 없었다.

게다가 지유는 사치스럽게 옷을 사는데 1억이나 쓸 사람이 아니었다.

지유는 여진숙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쓴 거 아니에요.”

여진숙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네가 긁은 게 아니면 또 누가 있어? 1억이나 되는 돈을 귀신이 긁었다는 거야 뭐야?”

“저는 신용카드를 긁은 적이 없어요.”

“아직도 변명이야? 우리 집 신용카드를 긁을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것도 여성복인데. 내가 몰래 신용카드를 핸드폰에 연결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나 몰래 얼마나 돈을 흥청망청 썼는지 몰랐을 거야. 솔직히 말해. 더 있지? 도대체 우리 집 돈을 얼마나 쓴 거야? 쓴 만큼 전부 뱉어내!”

여진숙은 우연히 카드 내역을 찾아보다가 이렇게 많은 돈이 나간 걸 보고 바로 지유를 의심했다.

지유는 자신이 아무리 여씨 집안으로 시집왔다 해도 여진숙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집도 결국 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유는 트러블을 일으키기 싫었기에 당연히 선을 넘는 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의심하니 지유도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다.

“가서 한번 조사해 보세요. 무슨 일만 터지면 일단 저부터 찾지 말고.”

“너 이게 무슨 태도야? 네가 쓴 돈이 아니면 누가 있어. 너처럼 돈 좋아하는 애가 애초에 이현이 돈 보고...”

“그 돈 제가 쓴 거예요.”

순간 밖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집에 도착한 이현은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에 무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지유와 여진숙의 시선이 일제히 이현에게로 향했다. 여진숙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많이 쏘아붙였는데 지유가 쓴 돈이 아니라니, 여진숙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현아, 네가 썼을 리가 없지. 다 여성복이던데? 설마 지유 감싸려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이현이 이렇게 말했다

“승아한테 쓴 돈이에요.”

이에 여진숙은 다시 할 말을 잃었고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지유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의심의 눈초리로 이현을 바라봤다.

옷 한 벌에 1억이라니, 정말 승아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 이현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승아였다.

지유는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향했다.

여진숙은 이현이 승아에게 이렇게 많은 돈을 썼다는 건 관계가 한 단계 더 발전했으니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지유와도 곧 이혼할 것이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여진숙은 이렇게 말했다.

“이현아, 승아한테 쓴 돈이라니 하나도 아깝지 않네.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빌려준 거예요.”

여진숙이 넋을 잃었다.

“빌려준 거라고?”

이현이 그런 여진숙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경고했다.

“그러니 엄마도 중간에서 헛다리 짚지 마요.”

기분이 좋아진 여진숙은 이현의 말에 표정이 삭 바뀌었다. 원래는 몇 마디 반박하려 했지만 이현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그냥 입을 닫았다. 여진숙도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유는 위층에서 짐을 정리했다. 이현의 말을 들은 지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지유는 본인이 알아서 빠져주는 게 앞으로 쫓겨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다. 제 발로 나가면 꼴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도 분수는 있었다. 그렇게 여씨 집안의 돈을 쓸까 봐 걱정하는데 이현이 준 값비싼 액세서리와 다른 선물은 하나도 챙기지 않고 옷가지들만 챙겼다.

그렇게 대충 캐리어 하나를 정리해 냈다.

마침 이현이 걸어들어오더니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는 지유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Comment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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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윤
그래 나가라 지유야 저런 집구석에 있을 필요가 하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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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hye Kim
재미있어요!!!짱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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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유는 바로 옆에 있는 민우가 들었다가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지희에게 그만하라고 했다.지희는 하는 수 없이 지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다른 사람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누고는 다시 지유 곁으로 돌아왔다.지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민우가 대답했다.“지희 씨, 이번 전시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된 것 같네요. 영향력이 날로 올라가는 거 같아요.”“문인들의 일개 취미일 뿐 대표님과는 비길 수 없죠.”지희가 지유를 밀며 이렇게 말했다.“두 분이 옛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희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오후에 회사로 들어간대요.”지희에게 밀쳐진 지유는 순간 당황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나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마침 저도 다른 일정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지희가 지유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부탁드릴게요.”지희는 지유를 민우 곁으로 가까이 데려갔다“옛 친구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텐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멀리 안 나갑니다.”지희는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지유는 그런 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우가 있어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지희는 바로 자리를 떴다.지유는 민우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동창이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었다.“지희 말 들을 필요 없어. 바쁘면 가서 일 봐.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지유는 이현과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서? 나도 너랑 수다 좀 떨고 싶어.”지유가 넋을 잃었다.“뭐?”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고.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거든. 너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지유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아까 너를 쓴 기사를 봤는데 M국에서 완전 잘나가던데? 너 이렇게 출세했을 줄은 몰랐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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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지유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게 되었다.둘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이현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더니 차갑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쏘아봤다.이현의 기억 속에 지유는 남성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아무튼 이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에 이현은 가슴이 먹먹한 게 불편했다.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보폭이 빨라졌다.차에 부딪힐 뻔한 지유는 놀라서 잠깐 멍을 때리고 있다가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얼른 그의 품에서 나왔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민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난 괜찮아. 고마워.”지유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민우가 말했다.“봐봐. 만나서 지금까지 넌 계속 미안해하지 않으면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민우는 그녀와 거리를 조금 좁히고 싶었다.지유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공손했다.하지만 민우도 자신이 그렇게 공손한 게 싫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지유는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었다.마침 지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본 이현이 이를 매우 거슬려했다.지유는 이현 앞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이 남자가 지유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현도 순간 발견한 게 있었다. 지유에게 쏟은 관심이 너무 적었기에 그녀 옆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지유가 다른 남자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게다가 이현의 옆을 오래 지키다가 그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태도는 늘 공손했고 그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비교되는 상황에 이현은 불쾌했다.“온지유!”이현의 목소리에 여유롭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겼다.지유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이현 쪽을 바라봤다. 얼굴에 걸린 미소도 순간 사라졌다.이를 본 이현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그를 보고 웃음이 사라진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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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44화

    하민의 설명을 듣고서야 양시은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널 데려간 이모 어떻게 생겼어?”“제 이모랑 닮았어요.”양시은은 손을 멈췄다.‘양채은?’그 이름이 떠오르자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 겨우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요동치는 기분이었다.그때 나도현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됐어, 하민아 이리 와.”양시은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하민은 잠깐 주춤했지만 결국 나도현 쪽으로 갔다.그는 하민을 달랜 뒤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침착해. 하민이도 보고 있잖아.”마치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공기를 마신 듯, 양시은은 큰 숨을 몇 번 들이쉬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나 먼저 방에 들어가서 좀 쉴게. 저녁은 이따가 먹어.”“엄마...”하민이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붙잡았다.양시은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녀는 문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찬 기운이 옷을 뚫고 피부에 스며들어 저릿저릿했지만, 오히려 그런 감각이 지금은 감정적 혼란을 조금씩 잠재웠다.사실 그녀도 양채은이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 수소문도 해 봤다.하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하민을 보러 와 놓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대체 왜 이럴까?’양시은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렴풋이 이유도 알고 있었다.나도현 때문이었다. 양채은은 아직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세상을 등진 것처럼 그녀를 피하는 것이었다.양시은은 방 안에서 한동안 진정하고 저녁 무렵 식사하러 나왔다.표정은 다시 전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하민은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나도현이 조금 내버려두라고 한 말이 떠올라 잠자코 있었다.나도현 또한 별말 없었다. 그는 하민을 재우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채은은 이제 완전히 풀려난 건가?”전에는 어딘가에 붙잡혀 있어서 나타나지 못한다고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43화

    하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나도현은 회의를 하다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 그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뜨려 하자 주주들은 잔뜩 긴장해 일제히 그를 만류했다.“대표님,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이 프로젝트 아직 결론도 안 났고 방향성도 잡히지 않았는데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주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 내자 나도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는 날 선 시선으로 그들을 훑으며 말했다.“더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는 돌아와서 얘기하죠.”주주들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나도현은 이미 나가 버렸고 그들은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도현이 충동적으로 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말이다.한편, 적잖은 시간을 들여 양시은은 간신히 유치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공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왔고 양시은도 급히 물었다.“선생님, 하민이 아직 못 찾았나요?”공 선생님은 반가우면서도 초조한 기색이었다.“네,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하민이 어디로 간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이 말을 듣고 양시은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유치원 하교 시간은 원래도 유괴 위험이 큰 때다.‘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을 타 인신매매범이라도 끼어 있다면...’그녀는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았다.“CCTV 볼 수 있죠?”“참, CCTV를 안 봤네요! 지금 바로 가요.”공 선생님도 머리를 탁 치며 서둘러 모니터실로 향하려 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말이다.마침 CCTV를 확인하러 가려던 찰나, 양시은이 갑자기 하민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하민아, 어디 갔었어? 엄마가 놀랐잖아.”양시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만약 하민을 못 찾았다면 어쩔 뻔했는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하민도 깜짝 놀랐다. 그도 이제는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양시은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줬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엄마. 걱정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42화

    “엄마는 왜 아직 안 오지...”바로 그때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하민이니?”하민은 낯선 여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이모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이모 낯이 익어요.”양채은은 자신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양시은이랑 그 사람 아이겠지.’“나는 네 엄마... 친구 정도 되는 사람이야.”“그럼 엄마가 왜 안 오는지 아세요?”“아마 오는 길일 거야. 나랑 잠깐 저쪽에 가서 놀면서 기다릴래?”하민은 잠시 망설였다.양시은이 늘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상대는 아예 낯설다고만 하기에는 좀 묘했다.한참 고민하다가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근데 엄마가 오면 바로 갈 거예요.”하민이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를 쓰자 양채은은 은근히 웃음을 지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그녀가 하민을 데려간 곳은 그리 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유치원 근처의 한 카페에 잠시 앉았다.하민은 커피라는 음료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양채은은 단호히 말렸다.“안 돼. 애들은 커피 마시면 뇌에 안 좋아. 대신 달콤한 걸로 먹어.”뇌에 안 좋다는 말에 하민은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곧장 커피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난 바보 안 될 거야.’양채은은 자신에게는 라떼를, 하민에게는 따뜻한 우유와 티라미수를 주문해 줬다.하민은 디저트를 먹으며 퍽 즐거워 보였다.양채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가에 묘한 쓸쓸함이 깃들었다.사실 그녀도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충동적으로 조카를 한 번 보고 싶어져서 들른 것이었다.“이모.”“응, 왜?”하민이 그녀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양채은은 고개를 떨군 채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솔직히 말해 하민은 나도현을 닮았다. 특히 저 맑은 눈동자가 똑같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걸 보자 그녀는 잠시 넋이 나간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41화

    양시은은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나도현이 말한 것처럼, 설령 두 사람의 마음이 멀어졌다고 해도 하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민을 아버지 없이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마음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면...“일단 하민이 의견부터 물어볼래.”양시은은 나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드디어 도망치지 않기로 한 듯했다.“이건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고 하민이랑도 직결된 문제니까. 하민은 네가 누군지 모르잖아. 먼저 알려 주고 생각도 들어볼래.”나도현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살짝 풀었다. 비록 그가 기대했던 최상의 답변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진전이었다. 최소한 양시은이 마음을 열 기색을 보였으니 말이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래, 하민이한테 잘 얘기해 줘. 기다릴게.”지금 당장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나도현 덕분에 양시은도 안도했다.나도현은 조용히 비서를 불러서 웨딩드레스 준비를 지시했다. 전에 양시은이 입어 봤던 드레스를 우선 사 두고 다른 것들도 마련하라고 했다.뜻밖의 업무를 받은 비서는 잠시 멍해졌다.‘우리 대표님 정말 결혼하시는 건가? 누가 우리 대표님 마음을 사로잡은 거지?’비서는 그런 상상을 하며 알 수 없는 경외심을 품었다.물론 양시은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도현이 뒤에서 이런 식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자신의 말이 화근이 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나도현은 양시은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녀가 조용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양시은은 하루 종일 집 침대에만 파묻혀 지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그러다 문득 하민을 유치원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큰일 났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그녀는 급히 차 키를 챙겨 나섰다. 하지만 도로가 꽉 막힌 탓에 차는 거북이 속도로 이동했다.속이 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공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다행히 공 선생님은 그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40화

    [최주하: 왜 너라고는 안 하냐? 이 녀석이 맞을 짓을 하네.][지석훈: 나? 농담하지 마, 나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안 보여? 여유가 있어야 여자도 만나고 하지.][배진호: 그만 싸워요. 둘이 동시에 연애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여이현: 나도 그렇게 생각해.]지석훈과 최주하는 말이 없어졌지만 여이현은 휴대폰을 쥐고 미소를 지었다.마침 온지유가 방에 들어오자, 여이현은 아이를 침대에 눕혀 두고 혼자 휴대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온지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재밌어?”여이현은 온지유의 목소리를 듣자 무심코 휴대폰을 접으며 대답했다.“단톡방에서 석훈이랑 주하가 옥신각신하길래, 진호가 그 둘이 동시에 연애할 거라고 했어.”“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도현 씨는 아직도 결혼 발표 안 했어요?”온지유는 무심결에 물었다.그들은 원래 홍혜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홍혜주와 용경호는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건너뛰었다.지금은 누구의 결혼식이라도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결혼 소식은 못 들었어. 근데 요즘 둘 다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오르는 거 보면 결혼 발표도 머지않은 것 같아.”온지유는 아이 돌보기에 전념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사실 그녀도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법로가 아직 항암 치료 중이라 몸이 성치 않아서 아이를 봐 줄 수 없었다.게다가 별이의 어린 시절을 놓친 것도 아쉬운데, 둘째 딸이 너무 어려서 조금 더 챙겨주고 싶었다.“그렇구나.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그래.”여이현은 온지유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물었다.“조만간 어디 놀러 가고 싶진 않아? 내가 데려가 줄게.”“됐어!”딸도 어리고 별이도 어렸다. 여행을 가겠다고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불편했다.온지유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여이현은 그녀의 걱정을 읽고는 웃으며 말했다.“그거 뭐가 무서워. 사람을 좀 더 데려가면 되지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39화

    이렇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도현을 대단하게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애인을 보호하다니 남자다워.”“진짜 좋은 남자네.”“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 아니야?”“거기 아가씨, 억지로 버텨 봐야 소용없어요. 안 될 사람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요. 계속 우기면 결국 본인만 다쳐요.”...이런 말 하나하나가 임다혜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하, 우습네.’나도현은 양시은을 대변한 뒤 또 한 번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시은이한테 잘못이 있든 없든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가자.”나도현은 짧게 말하며 양시은을 데리고 인파에서 빠져나왔다.그렇다고 이곳에 양시은을 데려온 이유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 주고 직접 사 주고 싶었다.그러나 양시은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무수히 생길 것이다. 나도현이 워낙 주목받는 위치에 있고 사실관계도 복잡하니 말이다.그녀는 얼른 드레스를 벗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부드럽게 밀크티를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마셔. 그리고 다른 드레스도 더 입어 봐. 여러 벌 입어 보는 게 좋잖아.”“하지만...”“시은아, 너도 나랑 함께하는 미래가 기대되면서 망설이는 거잖아. 내가 너라도 그럴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인생은 정말 짧아.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나중에 병원에 누워서 차라리 같이 살 걸 하면서 후회하고 싶어? 하민이를 생각해 봐. 어머니도 이제 우리를 반대하지 않아. 내가 너한테 진 빚을 갚게 해 줘. 그리고... 나중에 아이 하나만 더 낳아 주면 안 돼?”여이현이 온지유와 헤어졌다가 다시 합쳤을 때, 이미 꽤 큰 아이가 있는데도 결국 딸을 하나 더 낳았다.여이현은 완전히 딸바보가 돼서 SNS마다 딸 사진을 잔뜩 올리며 사는 중이다. 그걸 볼 때마다 나도현은 부럽다고 느꼈다.사실 양시은이라고 해서 나도현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오늘은 그와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38화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었다.임다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양시은의 성격을 몰랐다면 정말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내가 모든 걸 남자한테 걸었다고 하는데, 정작 양시은 씨는 어떤데요?”임다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양시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여러분, 이 여자가 말이에요, 여동생 약혼자랑 몰래 사귀더니, 이젠 제 약혼자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이런 여자는 다들 조심해야 해요!”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이끌려 사방에서 몰려들었다.나도현은 키가 크고 한눈에 띄는 외모라 이내 누군가가 그를 알아봤다.“어? 저 사람 예전에 유명하던 변호사 아니야?”한마디가 떨어지자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번졌다.“지금은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사업한다잖아요.”“분명히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새 갈아탄 모양이네.”“남자 하나를 두고 두 여자가 난리법석이라니,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까지 매달릴 일인가?”“나 변호사님, 둘 다 데리고 살면 어떤 범죄에 해당하나요?”“근데 이제는 변호사도 아니니 그냥 둘 다 데리고 살지 그래요?”...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말을 뱉었다.그러나 나도현으로서 직업이 어떻게 변하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건 오직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시은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임다혜를 포함한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다들 똑똑히 기억하세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고 눈길도 안 가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양시은 하나뿐입니다.”그 말에 양시은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옛 기억이 떠올라 쓰린 기분도 들었다.예전에 나도현이 그녀와 만나려고 할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언했었다. 그때는 감동으로 순순히 넘어갔지만 이후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복잡했다. 나도현이 복수심을 품은 적도 있으나, 결국 잘해 준 적도 많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 역시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그를 잊지 못하지 않았을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37화

    임다혜는 매서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바로 손을 뻗어 양시은의 웨딩드레스를 벗기려 했다.하지만 양시은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임다혜의 손목을 잡아 힘껏 밀쳐 내자, 임다혜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며 자칫 넘어질 뻔했다.“양시은 씨, 지금 나한테 손을 댔어요?”임다혜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평소 나도현의 앞에서 조심스러워 보이던 양시은이, 이제는 나도현이 보호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오만하게 군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양시은은 나도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최정숙의 마음마저 돌려놓아 그녀가 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임다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바로 다시 달려들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시은이 몸을 살짝 비키자 그녀는 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임다혜는 서경 그룹의 금지옥엽 같은 존재다.집안 배경도 양시은보다 훨씬 우위였고, 한때는 최정숙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모든 걸 빼앗긴 느낌이었다. 게다가 양시은에게는 아들까지 있으니 그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꼴이었다.지금처럼 추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까지 들키자, 임다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양시은 씨,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죽여 버릴 거라고요!”대낮부터 이런 소리를 내뱉는 데도 양시은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임다혜와 치고받을 생각까지 했는데, 그 전에 나도현이 밀크티를 들고 나타났다.나도현은 성큼성큼 달려와 양시은의 앞을 막아서며 임다혜의 손목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임다혜는 뿌리치듯 내던져져 버렸다.나도현은 급히 돌아서서 양시은을 확인했다.“괜찮아? 다친 데 없어?”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이 광경을 지켜본 임다혜는 슬픔이 극에 달했다.“도현 씨, 저 기억 안 나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겉으로 나도현은 아버지의 계략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양시은 때문이었다.더구나 그는 원래부터 임다혜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지금은 더더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1636화

    이런 분위기에서 양시은은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직원의 도움으로 그녀는 금세 머메이드라인의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직원이 커튼을 열어 주는 순간 나도현의 눈이 반짝였다.원래도 양시은이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너 진짜 예쁘다.”“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 같아요. 드레스가 맞춤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리시네요.”직원 역시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양시은 자신도 드레스가 괜찮아 보였다.‘정말로 도현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그렇게 생각하다가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손님, 다른 디자인 드레스도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여러 벌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거든요.”직원은 다른 스타일들을 권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벌 입으나 여러 벌 입으나 마찬가지일 테고, 여러 스타일을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다음에는 무거운 장식이 많은 긴 트레인 드레스를 골랐는데, 갈아입기가 까다로워서 직원이 도와줘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그 틈에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주려고 밀크티를 사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예상보다 훨씬 더 길게 줄을 서야 했다.양시은이 어렵게 드레스를 다 입고 나왔을 때, 나도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마침 그때, 임다혜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다. 그리고 정말로 양시은이라는 걸 확인했다.“이 드레스에는 세트 베일이 있어요. 스톤이 많이 박혀 있는데, 전부 손바느질로 하나하나 고정해 둔 거라 아주 튼튼해요. 그것도 한 번 착용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직원은 그들이 실제 구매력이 있다고 봐서 더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나도현이 아까부터 양시은을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도 한몫했다.임다혜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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