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나민우,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같은 반이었어.”지유는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잠깐 떠올려봤다.그녀가 기억하는 민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그때 민우는 뚱뚱했고 매 학기마다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지유는 민우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그녀는 성적이 좋았던지라 늘 간부였고 숙제를 거둘 때만 그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지금의 민우는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잘생겨졌다.“나민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너 왜 이렇게 변했어? 몰라보겠다야.”“그래, 많이 변하긴 했지. 몰라봐도 이상해할 거 없어.”민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다들 나 못 알아보더라. 근데 나는 너 기억해.”지유는 옛 친구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일을 하고 난 후로 매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동창회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지유는 생활이 단조로운 편이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업무적으로 알고 있는 파트너 외에 친구라고는 지희 하나뿐이었다.생각해 보니 생활이 정말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 대부분 시간을 이현에게 가져다 바쳤기 때문이다.“중학교 졸업하고 어디 갔어? 그 뒤로 소식 못 들은 것 같은데.”지유가 민우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유학 하러 갔었어.”민우가 대답했다.“최근에 귀국한 거야.”“그랬구나.”지유는 한 웅큼이나 젖은 그의 슈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벗어서 줘. 내가 씻어줄게.”“진짜 괜찮아.”지유가 말했다.“어렵게 만났는데 이런 큰 선물을 줬으니 마음이 내려가지 않네. 씻으면 바로 가져다줄게.”지유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민우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그럼.”그는 슈트를 벗어 지유에게 건네주었다.다행히 안에 입은 셔츠는 젖지 않아 보기에 그렇게 참담해 보이지는 않았다.지유는 쇼핑백에 바로 슈트를 개어 담았다.“나 대표님.”갑자기 누군가 민우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유는 바로 옆에 있는 민우가 들었다가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지희에게 그만하라고 했다.지희는 하는 수 없이 지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다른 사람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누고는 다시 지유 곁으로 돌아왔다.지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민우가 대답했다.“지희 씨, 이번 전시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된 것 같네요. 영향력이 날로 올라가는 거 같아요.”“문인들의 일개 취미일 뿐 대표님과는 비길 수 없죠.”지희가 지유를 밀며 이렇게 말했다.“두 분이 옛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희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오후에 회사로 들어간대요.”지희에게 밀쳐진 지유는 순간 당황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나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마침 저도 다른 일정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지희가 지유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부탁드릴게요.”지희는 지유를 민우 곁으로 가까이 데려갔다“옛 친구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텐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멀리 안 나갑니다.”지희는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지유는 그런 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우가 있어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지희는 바로 자리를 떴다.지유는 민우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동창이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었다.“지희 말 들을 필요 없어. 바쁘면 가서 일 봐.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지유는 이현과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서? 나도 너랑 수다 좀 떨고 싶어.”지유가 넋을 잃었다.“뭐?”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고.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거든. 너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지유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아까 너를 쓴 기사를 봤는데 M국에서 완전 잘나가던데? 너 이렇게 출세했을 줄은 몰랐다.”“운
그러다 지유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게 되었다.둘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이현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더니 차갑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쏘아봤다.이현의 기억 속에 지유는 남성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아무튼 이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에 이현은 가슴이 먹먹한 게 불편했다.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보폭이 빨라졌다.차에 부딪힐 뻔한 지유는 놀라서 잠깐 멍을 때리고 있다가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얼른 그의 품에서 나왔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민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난 괜찮아. 고마워.”지유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민우가 말했다.“봐봐. 만나서 지금까지 넌 계속 미안해하지 않으면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민우는 그녀와 거리를 조금 좁히고 싶었다.지유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공손했다.하지만 민우도 자신이 그렇게 공손한 게 싫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지유는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었다.마침 지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본 이현이 이를 매우 거슬려했다.지유는 이현 앞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이 남자가 지유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현도 순간 발견한 게 있었다. 지유에게 쏟은 관심이 너무 적었기에 그녀 옆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지유가 다른 남자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게다가 이현의 옆을 오래 지키다가 그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태도는 늘 공손했고 그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비교되는 상황에 이현은 불쾌했다.“온지유!”이현의 목소리에 여유롭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겼다.지유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이현 쪽을 바라봤다. 얼굴에 걸린 미소도 순간 사라졌다.이를 본 이현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그를 보고 웃음이 사라진다?두
양시은은 고통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에 나도현을 위해 칼을 대신 막아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고 그 상처 위에 임다혜가 보낸 약까지 보내져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 양시은의 체온은 39도를 넘어서 거의 40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식은 흐릿하고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가사도우미가 양시은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벌려 놀랐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히 나도현에게 전했다. “도련님, 양시은 씨가 죽은 것 같아요...” “뭐라고?” 나도현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찰나에 이른 속도로 깊어진 흑단처럼 좁아지며 가사도우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봤다.도우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도우닌 나도현이 이렇게 급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현의 얼굴은 흰 종이처럼 창백하고 그의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있었고 그는 바로 서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몇 걸음에 방에 도달하고, 그는 문을 급하게 열었다.침대에 누운 양시은을 확인한 그는 잠깐 멈칫했다. 양시은은 살고 있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얼굴과 급한 숨소리가 그에게 명확히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그는 양시은의 붉어진 뺨을 보며 이마를 만지자 그녀의 열기가 손끝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도현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지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석훈, 지금 내 별장에 바로 와. 열 나는 사람이 있어.”지석훈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희 개인 의사야 뭐야. 열 정도로 괜찮은 거면 약 있잖아.”온지유가 아프면 여이현이 그를 찾았고 권다솔이 아프면 배진호가 그를 찾았다. “나도현의 여자가 아프다니... 아니. 잠깐만. 여자?”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현, 거기 아픈 사람이 여자라고? 어디서 생긴 여자야? 설마 그 전 여친이냐?”“그냥 빨리 와. 약도
여자는 일부러 말을 모호하게 꺼냈다. 그녀를 보낸 사람은 임다혜였고 여기에 더해 박은희가 몰래 도와주면서 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별장에 하녀 한 명을 배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시은에게는 그 의도가 확실히 잘못 전달됐다. 여기가 바로 나도현의 집이므로 이 여자는 분명히 나도현이 불러낸 사람일 것이다. 이 보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현이 분명히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약은 여기 두세요. 목마를 때 마실게여.”“양시은 씨, 저는 꼭 당신이 이 약을 마시는 걸 봐야만 갈수 있습니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양시은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시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녀 앞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없었겠지만 이 상대는 양시은이었다. 그리고 박은희는 반드시 양시은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따라서 양시은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약을 언제 마시면 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같이 기다려 보시든지.”양시은은 지금 아이를 찾는 일이 급해서 이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셨으니 이제 가세요.” 그러자 양시은은 그 말과 함께 보약을 한 모금 두 모금, 금방 다 마셨고 그릇을 여자의 쪽으로 돌려보냈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물론이죠. 양시은 씨, 푹 쉬세요.”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고는 그릇을 들고 떠났다. 여자가 별장을 나서며 길가에 서 있던 차로 올라타 이내 임다혜와 만날 예정이었다.양시은은 보약을 다 마신 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나도현이 아무리 말을 까칠하게 해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
“부탁하지 마. 부탁이 효과가 있었다면 나는 이미 나도현 씨에게 그만 두라고 애원했을 거야. 언니, 제발 부탁한다고 해서 그게 진짜 유용할까?” 양채은은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오늘 내가 전화를 한 이유는 한 가지 말할 게 있어서야. 네가 나한테 빚진 것 나는 하나하나씩 네 아들 하민에게서 얻어 올 거야. 부모의 빚은 자식이 갚는 게 맞잖아.”이 무시무시한 말을 하고 양채은은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마음속이 점점 아려왔다.마스크남이 그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채은 씨, 지금 이걸 하는 게 무슨 의미에요? 양시은을 미워하면서도 왜 그 여자의 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난 가끔은 당신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마스크남은 자기가 양채은이라면 이 기회를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채은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하민은 날 이모라 불렀고 어른들의 잘못을 왜 아이를 탓하겠어요.”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무정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는 선이 있었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어요. 안에 있는 아이는 정말로 아무 죄가 없죠. 그나저나 당신 배 속의 아이는요?” 마스크남이 점점 더 압박을 걸면서 말을 이었다. “다른 아이를 생각하려면 먼저 네 애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만해요.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양채은은 등을 돌리며 걸어갔다.마스크남은 유유한 눈빛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알겠습니다! 이름을 변경하여 번역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양시은은 마음속으로 하민에 대한 걱정이 극에 달해 당장이라도 아이를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그 순간 방 문이 열리며 낯선 여자가 트레이를 들고 그녀 앞에 섰다.“양시은 씨, 이건 제가 끓인 보약이에요. 기력 보충에 좋으니 따끈할 때 빨리 드세요.”“저 안 마셔요. 그냥 가져가세요.” 양시은은 보약에 전혀
약혼 연회 당일 나도현의 휴대폰이 양시은 옆에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지만 그녀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양채은은 친절히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더 잘 챙겼고 심지어 나도현이 양시은을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결국은? 챙겨준 끝에 그들은 결국 한 침대에서 자고 있었고 이제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아이는? 양채은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하민을 보았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녀의 아이가 양시은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면 그녀는 양시은의 아이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갚는 복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민은 계속해서 이모라고 부렀고 그들 사이에는 감정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무정할 수 없었다. “난 나도현의 별장에 있어. 그 사람이 나를 안 보내줘.” 양시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라면 반드시 인정한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끝나는 거야? 미안하다는 말이 효과가 있으면 세상에 경찰과 법이 왜 필요해.” 양채은의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 “너희는 계속해서 하민이만 찾았고 나에겐 관심을 둔 사람이 있었어?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결과를 맞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남의 감정을 고의로 끼어들어 이 상황에 빠졌다면 지금 배신을 당한 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도현은 자유 연애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결국 약혼에 이르게 됐다.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 이 두 사람은 함께 힘을 합쳐 그녀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렇게 큰 차이를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견뎠는지 자신도 몰랐다. 게다가 요즘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그녀 곁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말하고 그로 인해 그녀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채은아, 우리 한 번 만나자. 하민이만 병원에 데려다주면 네가 나에게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나도현은 양시은의 턱을 꽉 움켜잡으며 목소리를 낮게 내뱉었다. 그 당시 양시은이 그의 삶에서 사라졌을 때 나도현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가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양시은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일지도 모른다. 이 한 평생 그는 양시은과 사랑하고 또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당연히 그 상황에 흘러가는 대로 행동해야 했다. “내 곁에서 도망칠 방법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어떻게 내게 사과할지 너의 사과를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해봐. 그러면 너의 날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질지도 몰라.” 양시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현은 원하는 건 그녀의 사과와 태도라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지금 그를 달래서 그를 기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박은희의 편견은 산처럼 높아서 그녀는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함께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이미 그녀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나도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용서할 거라고 기대하지 마. 양시은, 이제 너는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 하민이가 걱정 되면 내 마음에 들게 나한테 잘해. 그럼 하민이를 찾아줄게. 안 그러면 소식을 알아도 너한테는 절대 말 안 해.” 양채은이 지금 통화를 거부하고 있어 양시은은 도대체 하민이를 어디로 데려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녀는 여기 갇혀 있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조사할 돈도 없다. 그런데 나도현은 그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는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협박하며 그녀가 굴복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현, 나한테 아무렇게나 대해도 아이는 건드리지 말아줘.” 양시은의 마음은 정말로 아팠다. 그녀의 마음이 아플수록 나도현은 그 점을 더욱 이용해서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너는 전혀 신경
아쉽게도 나도현은 이런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임다혜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 사람한테 아무 짓도 안 했잖아요. 그냥 평소에 말 좀 섞고 싶은 건데. 설마 이걸로 저를 쫓아 내겠어요? 저는 안 믿어요.” 박은희는 입술을 열어 말하려 했지만 임다혜가 자신감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나도현이 그녀를 거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조용히 손까지 써본다면...’ 박은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임다혜는 그 생각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하신 방법 너무 좋아요. 도현 씨가 더 이상 이상한 짓 안 하게 우리 빨리 실행해요.” “좋아.” 박은희의 계획은 좋았지만 그들은 계획을 삼일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한편 나도현은 법률 사무소에 가진 않았지만 사무소의 사건들을 계속 관리했고 양채은과도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다. 전화를 통했지만 영채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양시은은 그와 대화할 때마다 불편해졌지만 양시은은 밥은 잘 먹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은 밥심이고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나도현이 정신 없이 있을 때 그녀는 탈출할 수 있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걸 참지 못했다. 그는 양시은 앞에 나타나 비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네 아들 결국 네가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거냐? 양시은, 네 입에는 한 마디 진심이라도 있어?” 양시은은 나도현이 이렇게 작은 일로도 이렇게 화를 낼 줄 몰랐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싫어하니까 당연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였다. 그의 눈에 양시은의 단점은 끝없이 확대되어 보였다.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나도현, 만약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으면 하민이는 돌아와도 못 보잖아.” “그건 네 변명이야. 지금 네 얼굴에는 아무런 슬픔도 없어.”나도현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양시은은 잠시 말이 막혔다. 그런데
양시은이 말을 뱉을 때 나도현은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은 만큼 화가 났다. “네가 날 교육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인간성? 그는 인간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사건을 처리했고 그 가운데 양시은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 양시은과 함께할 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양시은은 그에게 깊은 배신을 했다. 나도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뭐라고 하는가?’ 그가 복수를 결심하고 양시은을 죽이려고 해도 마음이 약해져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양시은, 여기서 깊이 반성해.” 만약 양시은이 그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는 분명 마음이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양시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애만 신경 썼다. 그는 그 아이가 얼마나 더 버티며 살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 박은희는 나도현을 설득할 수 없었고 임다혜에게도 어떻게 말할지 몰랐다. 임다혜는 박은희가 직접 고른 며느릿감이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했고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임다혜는 나도현에게 진심이었고 종종 박은희에게 안부를 묻고 늘 영양제와 화장품을 선물하며 찾아왔다. 지금은 그녀를 볼 면목이 별로 없었다. 임다혜가 다시 물어왔다. “도현 씨는 요즘 많이 바쁜가요? 로펌에도 없고...” 임다혜는 나도현이 양시은에게 갔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양시은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의 마음속에 깊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다. 나도현은 그녀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다혜는 포기하기 싫었다. 부모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결혼은 행복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박은희는 그녀 편이었다. 그녀는 박은희를 통해 나도현의 마음을 얻은 후 나 부인이 되려 했다. 박은희는 이것도 방법이 아닌지라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혜야, 넌 정말 좋은 아이야. 하지만 이건 말해 줘야 할 거 같아. 난 네가 정말 좋은데 도현이는... 양시은이라는
하지만 나도현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박은희도 하민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천지개벽하고 피와 살이 뒤섞이는 상황에까지 끌고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녀가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도현이 화가 가라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물어봐서 뭐 해? 나도현, 우리는 말할 건 다 했잖아. 더 이상 서로 힘들게 하지 말자.” “네 엄마가 그렇게 많은 돈을 주는데 내가 바보냐? 그걸 왜 거절해야 해? 예전에 20억에 너를 포기했던 것처럼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어. 넌 내가 울며 매달려서 싫다고 말할 걸 기대했어?” 양시은은 담담하게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무섭기도 했지만 점점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죽으라고 할 리는 없으니까. 죽지 않으면 언젠가는 나도현에 의해 풀려날 날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도현의 마음속엔 그저 그때 분노로 가득 찼을 뿐이다. “그게 가능할 리가 있냐?” 나도현은 비꼬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질 순 없어. 지금 나를 여기에 가두고 있을 바엔 차라리 양채은을 찾아가. 양채은은 진짜로 널 사랑해. 뱃속의 아이도...”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나한테 어떻게 했지?” 양시은이 말을 계속하려는 순간 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진 채 양시은의 몸에 머물렀다.나도현의 깊은 사랑을 양시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현이 예전에 사랑했던 만큼 지금은 증오도 그만큼 깊어졌다. 나도현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했다. “너 같은 사람한테 사랑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까지 아이 아빠는 보지도 못한 걸 보니 네가 죽인 거 아니냐?” 양시은의 마음이 처참하게 찔렸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눈앞에
바로 핸드폰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도현은 그 번호를 비서에게 보내며 지시했다. “철저히 조사해.”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갑작스러운 결심이 떠올랐다. ‘더 이상 양시은이 밖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놔둘 순 없어.’ 그리고 나흘 뒤 박은희가 찾아왔다. “네가 가업을 물려받는 걸 싫다고 한 건 이해한다. 근데 지금 또 나랑 대항해서 그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거야?”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희는 더욱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도현, 양시은이 어떤 사람인지 네가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여자에게서 헤어 나오질 못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소개해 준 약혼녀는 네가 고른 여자보다 어디가 못 해?” 임씨 가문도 경성의 명문가다. 나씨 가문과 임씨 가문은 비록 여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성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가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나민우 집안과 친척 관계다. ‘나민우 역시 처음에는 결혼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부모의 뜻을 따랐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결혼하게 되지 않았나?’이런 생각이 들자 박은희는 더욱 불쾌한 마음에 불만을 터뜨렸다. “나도현, 네가 내 말을 듣기 싫으면 나민우를 좀 본받으면 안 되겠니? 나민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 넌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진짜로 나민우를 내 아들로 삼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자녀들이 흔히 하는 말처럼 ‘남이 그렇게 좋으면 그 쪽한테 가서 아들이나 돼달라고 하세요.’와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박은희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도현에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인우를 따라 배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문의 발전과 명성을 위해 양시은과는 반드시 거리를 두어여 한다.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해요? 나민우는 나민우의 선택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양시은에 대한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요.” 나도현은 등을 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