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나민우,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같은 반이었어.”지유는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잠깐 떠올려봤다.그녀가 기억하는 민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그때 민우는 뚱뚱했고 매 학기마다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지유는 민우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그녀는 성적이 좋았던지라 늘 간부였고 숙제를 거둘 때만 그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지금의 민우는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잘생겨졌다.“나민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너 왜 이렇게 변했어? 몰라보겠다야.”“그래, 많이 변하긴 했지. 몰라봐도 이상해할 거 없어.”민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다들 나 못 알아보더라. 근데 나는 너 기억해.”지유는 옛 친구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일을 하고 난 후로 매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동창회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지유는 생활이 단조로운 편이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업무적으로 알고 있는 파트너 외에 친구라고는 지희 하나뿐이었다.생각해 보니 생활이 정말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 대부분 시간을 이현에게 가져다 바쳤기 때문이다.“중학교 졸업하고 어디 갔어? 그 뒤로 소식 못 들은 것 같은데.”지유가 민우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유학 하러 갔었어.”민우가 대답했다.“최근에 귀국한 거야.”“그랬구나.”지유는 한 웅큼이나 젖은 그의 슈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벗어서 줘. 내가 씻어줄게.”“진짜 괜찮아.”지유가 말했다.“어렵게 만났는데 이런 큰 선물을 줬으니 마음이 내려가지 않네. 씻으면 바로 가져다줄게.”지유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민우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그럼.”그는 슈트를 벗어 지유에게 건네주었다.다행히 안에 입은 셔츠는 젖지 않아 보기에 그렇게 참담해 보이지는 않았다.지유는 쇼핑백에 바로 슈트를 개어 담았다.“나 대표님.”갑자기 누군가 민우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유는 바로 옆에 있는 민우가 들었다가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지희에게 그만하라고 했다.지희는 하는 수 없이 지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다른 사람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누고는 다시 지유 곁으로 돌아왔다.지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민우가 대답했다.“지희 씨, 이번 전시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된 것 같네요. 영향력이 날로 올라가는 거 같아요.”“문인들의 일개 취미일 뿐 대표님과는 비길 수 없죠.”지희가 지유를 밀며 이렇게 말했다.“두 분이 옛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희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오후에 회사로 들어간대요.”지희에게 밀쳐진 지유는 순간 당황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나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마침 저도 다른 일정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지희가 지유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부탁드릴게요.”지희는 지유를 민우 곁으로 가까이 데려갔다“옛 친구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텐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멀리 안 나갑니다.”지희는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지유는 그런 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우가 있어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지희는 바로 자리를 떴다.지유는 민우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동창이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었다.“지희 말 들을 필요 없어. 바쁘면 가서 일 봐.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지유는 이현과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서? 나도 너랑 수다 좀 떨고 싶어.”지유가 넋을 잃었다.“뭐?”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고.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거든. 너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지유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아까 너를 쓴 기사를 봤는데 M국에서 완전 잘나가던데? 너 이렇게 출세했을 줄은 몰랐다.”“운
양채은의 반응은 너무도 격했고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으려 했다.“저랑 태경 씨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예요. 태경 씨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뛰어난 변호사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당장 다시 조사해보세요. 분명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걸 거예요!”국장은 그녀가 말 마치기를 기다린 후 물었다.“양채은 씨, 방금 태경 씨라고 호칭하던데 맞습니까?”“네, 맞아요. 제 약혼자 이름은 강태경이에요.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 호칭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눈앞에 있는 경찰이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할 사이인 예비부부의 호칭까지 신경 쓰다니 말이다.국장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두 사람이 곧 결혼할 사이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양채은 씨가 말해준 약혼자의 신분 정보랑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시 알고 있습니까?”“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한테 그런 농담은 통하지 않아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국장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았다.‘그럴 리가 없잖아! 태경 씨 이름은 강태경이라고.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태경 씨가 날 속일 리가 없다고!'“신분 정보를 알고 있지만 상대의 이름이 뭔지를 모르는 걸 보니 양채은 씨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이 되는군요.”국장은 그녀를 데리고 취조실로 들어갔다. 양채은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그 사람이 강태경이 아니면 대체 뭔데요?”“나도현.”이 이름은 양채은에게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순간이 아주 많았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다.“신분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신분증을 보았다는 소리인데 본인이 알고 있는 이름과 신분증에 있는 이름이 다르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양채은 씨,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국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양채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혼식이 있던
여이현에게도 딸이 있었고 매일 만날 수 있지만 온지유와 법로는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지 않았는가.게다가 법로는 지금 시한부였고 살 수 있는 시간이 5년뿐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서로에게 좋은 추억만 남겨야 했다.권다솔도 이해하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배진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함께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사실 요즘 시간의 여유가 생겼잖아. 그래서 너랑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여행하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그 계획을 뒤로 미뤄야겠네.”배진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니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권다솔은 웃으며 말했다.“요 며칠은 시간이 없겠지만 다음 주에 가면 되잖아. 다다음 주도 괜찮고. 어쨌든 우리에겐 이젠 시간은 많아.”두 사람은 아직 젊었으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한편 양채은 쪽 상황.양시은이 일하러 나가니 집 안에는 그녀 혼자 남게 되었다.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려고 했지만 별장이 너무 컸던지라 힘도 많이 들어가 쉬었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청소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양채은은 시간을 보곤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현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집으로 돌아올 수 없대도 그저 간단한 대화 몇 마디면 충분했다.신호 연결음이 한참이나 들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얌전히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그녀가 알고 있는 강태경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서 그녀의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전화를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전화든 문자든 한 통도 오지 않았고 잠수를 탄 사람처럼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한참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소 전화번호도 나도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다.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머니, 도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저희한테 자세하게 말씀해주셔야 저희 나름대로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그래. 도현이에게 너희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난 정말 더는 방법이 없단다.”박은희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부 말해주었다. 물론 자신이 이 일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은 쏙 빼놓고 말이다.거실에 앉은 나도현의 친구들은 침묵했고 저마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도현이는 내가 직접 곁에 두고 키운 아이야.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알아. 분명 누군가 모함하고 있는 걸 거야.”박은희는 말하면 말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지금 아들이 경찰서에 있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착했던 아들의 모습이었다.나도현은 결혼과 사업 문제에서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 다른 부분에서는 아주 얌전한 아들이었다.“아주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저희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 볼게요.”권다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은희를 부축한 채 서재로 갔다.“일단 먼저 쉬고 계세요. 몸 상하면 안 되잖아요.”배진호의 시선이 바로 권다솔에게 향했다. 권다솔이 박은희를 부축하고 다시 돌아와 옆에 앉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모습을 본 최주하는 연신 감탄을 해댔다.“두 사람 사이가 아주 좋네요. 전에 엄청 크게 싸웠다던데 그것도 전부 헛소문이죠?”지금 두 사람의 모습만 봐도 여전히 서로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어딜 봐서 싸웠단 말인가.설령 싸웠다고 해도 무슨 일로 싸웠든 배진호가 먼저 권다솔에게 사과할 것이다.권다솔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예전에 한 번 크게 싸웠으니까 이젠 서로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진호 씨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아이한테도 그래요. 벌써 아기들 옷을 자꾸만 사 온다니까요.”분명 아직 출산까지 몇 개월 남았는데도 말이다.“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건 없잖아.”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고 서로
박은희는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후회했다.“남자가 얼굴도 시원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다니는 주제에 남자라고 할 수나 있어요?”“사모님, 설마 절 자극하는 방법으로 가면을 벗게 만들려는 건 아니죠? 제가 정말로 개처럼 사모님의 말만 고분고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마음 급해진 박은희와 달리 가면남은 더 평온해졌다.심지어 비꼬는 어투로 말하고 있어 박은희는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얼마를 원하는 거죠? 얼마면 내 아들을 경찰서에서 나오게 할 거냐고요.”나도현이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온다면 그녀는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하지 않았다.그러나 가면남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으면 사모님도 이렇게 절 찾아오진 않았겠죠.”그 말인즉슨 박은희가 더는 생각해낼 방법이 없어 그를 찾아온 것이라는 의미였지만 그도 방법이 없었다.가면남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법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잖아요. 제 인맥은 사모님보다 적고 사모님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니 저는 더 방법이 없지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마시고 그냥 그 안에서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라고 하세요.”“내가 어떻게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박은희는 정말이지 가면남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경찰서로 잡혀간 사람은 그녀의 아들이었기에 당연히 가면남은 태연할 수밖에 없고 이런 심드렁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조급하면 왜 굳이 그런 짓을 꾸며가며 아들을 해치려 한 거죠? 전 일은 확실하게 했고 돈은 사모님이 주신 거잖아요. 사모님이 돈 주면서 시키지 않았다면 전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못했겠죠. 아들을 구치소로 보낸 사람은 사모님이 아닌가요?!”그의 말은 무거운 돌이 되어 박은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손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그녀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현이 그 안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쯤이면 임다혜와 결혼해 나진 그룹
‘허효준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지?'“그리고 나도현 씨가 최근 맡은 그 사건, 피고인이 다국적 기업의 돈세탁에 연루되어 있었죠. 나도현 씨가 제출한 증거로...”경찰 국장은 미간을 확 구기더니 서류 봉투를 열어 안에서 서류를 꺼내 나도현 앞에 툭 던졌다.“직접 보세요. 대체 본인이 뭘 증거로 제출했는지.”서류에 적힌 내용은 전부 변명에 불관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장의 수표였다. 이렇게 많은 증거가 한꺼번에 쏟아지니 아무리 그가 변호사라고 해도 자신의 결백을 밝힐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말지 못했다.이 증거들은 그가 직접 정리해서 법원에 제출한 것이었지만 그가 제출한 서류와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마치 누군가 중간에서 바꿔치기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을 직접 했다. 서류 복사를 비서에게 시킨 것 빼고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나도현 변호사님, 증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결백을 밝힐지부터 생각하시죠.”경찰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젊고 능력 좋은 변호사에다가 나씨 가문 사람이면 앞길이 창창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본인의 앞길을 망치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판사에게 뇌물을 바치고 나라를 팔았다는 증거가 가득했기에 나도현의 변호사 앞길은 이미 막힌 것과 다름이 없었다....박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현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바로 나도현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자마자 표정이 변해버렸다.“그렇게 심각하다고요?”“사모님, 그 마음은 이해가 되나 이 사건은 지금 제가 직접 맡고 있어서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경찰 국장은 직접 그녀를 만나 설명했다.“사모님도 이치를 아는 사람이니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박은희는 자신이 어떻게 경찰서에서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탄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그중 한 명이 나도현의 곁으로 다가가 서늘한 은빛을 내는 쇠고랑을 채워주었다.나도현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한 적 없는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말이다. 게다가 그에게 수갑까지 채우지 않았는가.그는 본능적으로 수갑을 피하며 말했다.“착각하신 거 아닙니까?”“나도현 씨 아닙니까? 저희는 이미 사진까지 확인하고 왔고 알맞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내뺄 생각하지 마시고 얌전히 저희랑 함께 가주시죠!”공무원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들이 직접 찾아와 체포한다는 건 명확한 증거가 있다는 의미였으니 당연히 착각할 리가 없었다.“일단 저를 왜 데리고 가려는지 이유부터 들어야겠습니다.”나도현은 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 공무원들은 그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빠져나가려 한다고 생각했다.“본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저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겠죠. 변호사라면서 매일 법 관련 문서만 보았을 텐데 어떻게 자신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를 수 있습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겁니다.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던가, 아니면 계속 명령에 불복종하면 공무집행방해죄를 더 추가할 겁니다!”나도현은 일단 얌전히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경찰서로 온 뒤 그는 취조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사건은 경찰 국장이 직접 맡게 되었다.경찰 국장은 반백 살이 넘은 중년 아저씨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지만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허효준 씨랑은 어떤 사이죠?”“저희는 대학 동기였지만 졸업 후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나도현은 비록 경찰 국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취조실까지 들어왔으니 묻는 대로 전부 대답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히 끈끈한가 보군요. 그래서 허효준 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겁니까? 나중에 둘이 서로 짜고 치려고?”“전 그런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습니다.”나도현의
양시은은 어떻게 덥석 받을 수 있겠는가.고작 며칠 사이에 양채은은 그녀에게 아주 많은 돈을 빌려주었기에 마냥 계속 받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언니, 내가 만약 혼자 살았으면 언니가 언제까지 머물어도 상관없는데 지금은 내겐 태경 씨가 있잖아. 그리고 난 임신한 몸이니까 아기도 언젠가 태어날 테고 영원히 언니랑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받아. 이 정도면 반년 정도의 월세를 낼 수 있을 거야.”양채은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돈을 주려고 했다.양시은은 그녀가 자신을 내쫓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가족 간의 정 때문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곰곰이 생각해보면 양채은의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미 약혼까지 하고 가정이 생겼는데 어느 누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길 바라겠는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함께 산다면 당연히 불편할 것이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최근에 보인 행동으로도 양채은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알아냈을 것이다.그녀는 정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 집을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가는 순간 나도현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면 두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겐 양채은과 하민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약점이었고 그녀를 옭아매고 있는 밧줄이기도 했다.양채은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언니, 난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니까 함께 사는 건 당연하잖아. 지금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은 언니인걸.”만약 누군가 그녀에게 그녀가 유일한 가족을 집에서 내보내게 될 거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어젯밤부터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사이엔 거리감이 있어야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따로 살았다면 강태경이 자신의 언니를 매일 마주치게 될 일도 없을 테고 어젯밤과 같은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다.“채은아, 이 돈은 정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나도현은 눈을 떴다. 몸을 덮은 담요를 본 그는 어젯밤 자신을 챙겨준 사람이 양시은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이불 깔고 자는 양채은을 발견했다.“일어났어요? 어제는 왜 그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오는 택시에서 잠들어 버렸더라고요. 제가 태경 씨를 얼마나 힘들게 끌고 왔는지 알아요? 원래는 깨워서 꿀물이라도 마시고 자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서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양채은은 인기척에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실을 대충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다시 따듯한 꿀물을 만들어 왔다.“지금은 술이 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셔요. 꿀물은 사람 몸에도 좋으니까요.”“이런 거 할 필요 없어.”나도현은 꿀물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실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생각한 대로 양시은의 행방을 물어보았다.“태경 씨,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왜 우리 언니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예요?”양채은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래도 설명을 들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나도현이 아무리 그녀의 가족이라 양시은을 관심한다고 하지만 보는 사람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양채은은 어딘가 심기 불편해졌다.“태경 씨는 제 약혼자고 언니는 곧 태경 씨의 처형이 되고요. 전 태경 씨가 우리 언니를 가족처럼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언니는 지금 우리 집에 얹혀사는 처지이고 언니가 무엇을 하든 그건 언니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태경 씨가 일일이 걱정하고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말에 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 일에 간섭하는 거야?'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지금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으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우리대로 살고 언니는
‘설마 우리 언니를 좋아하게 된 건가?'충격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양채은은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채은이가 아녜요.”양시은은 얼른 나도현을 양채은에게 밀어내며 말했지만 나도현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안고 싶은 사람은 양시은인데, 여기서 양채은이 왜 나오는 거지?'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날 밀어내는 거지?”“태경 씨, 사람 착각하셨어요. 제가 태경 씨 약혼자라고요.”양채은은 더는 지켜볼 수 없어 성큼성큼 걸어오며 나도현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다 댔다.“저랑 언니는 비록 닮긴 했지만 태경 씨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라고요!”이 말을 끝으로 양채은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금 그의 행동은 확실히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또다시 양채은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마침 도착한 택시에 양시은은 다가가 조수석에 올라탔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비틀대며 택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고 양채은도 황급히 따라간 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탄 나도현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고 양채은은 차마 그를 깨울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자길 바랐던 그녀는 택시가 집 앞까지 도착한 후에도 혼자서 나도현을 부축한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록 힘들긴 했지만 양시은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양시은은 원래부터 그녀에게 켕기는 것이 있었던지라 당연히 먼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언니.”양채은은 겨우 나도현을 소파까지 부축한 뒤 눕혔다.“태경 씨는 내가 남아서 챙겨주면 되니까 언니는 방으로 가서 쉬어. 야밤에 나 도와준다고 술집까지 갔잖아.”자매였던지라 양시은은 양채은이 자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래, 알았어. 너도 일찍 쉬어.”양시은은 별다른 말 없이 방으로 돌아온 뒤 방 문을 꼭 걸어 잠갔다.거실엔 양채은과 나도현만 남게 되었다. 양채은은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나도현 몸에서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