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
남자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지유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나민우,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다 같은 반이었어.”지유는 머릿속에서 그 이름을 잠깐 떠올려봤다.그녀가 기억하는 민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그때 민우는 뚱뚱했고 매 학기마다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지유는 민우와 얘기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었다.그녀는 성적이 좋았던지라 늘 간부였고 숙제를 거둘 때만 그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다.지금의 민우는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잘생겨졌다.“나민우?”지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너 왜 이렇게 변했어? 몰라보겠다야.”“그래, 많이 변하긴 했지. 몰라봐도 이상해할 거 없어.”민우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다들 나 못 알아보더라. 근데 나는 너 기억해.”지유는 옛 친구를 만나니 기분이 좋아졌다.일을 하고 난 후로 매번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동창회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지유는 생활이 단조로운 편이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업무적으로 알고 있는 파트너 외에 친구라고는 지희 하나뿐이었다.생각해 보니 생활이 정말 너무 재미없어 보였다. 대부분 시간을 이현에게 가져다 바쳤기 때문이다.“중학교 졸업하고 어디 갔어? 그 뒤로 소식 못 들은 것 같은데.”지유가 민우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유학 하러 갔었어.”민우가 대답했다.“최근에 귀국한 거야.”“그랬구나.”지유는 한 웅큼이나 젖은 그의 슈트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벗어서 줘. 내가 씻어줄게.”“진짜 괜찮아.”지유가 말했다.“어렵게 만났는데 이런 큰 선물을 줬으니 마음이 내려가지 않네. 씻으면 바로 가져다줄게.”지유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민우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그래 그럼.”그는 슈트를 벗어 지유에게 건네주었다.다행히 안에 입은 셔츠는 젖지 않아 보기에 그렇게 참담해 보이지는 않았다.지유는 쇼핑백에 바로 슈트를 개어 담았다.“나 대표님.”갑자기 누군가 민우를 부르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지유는 바로 옆에 있는 민우가 들었다가 상황이 난처해질까 봐 지희에게 그만하라고 했다.지희는 하는 수 없이 지유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다른 사람과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누고는 다시 지유 곁으로 돌아왔다.지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민우가 대답했다.“지희 씨, 이번 전시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된 것 같네요. 영향력이 날로 올라가는 거 같아요.”“문인들의 일개 취미일 뿐 대표님과는 비길 수 없죠.”지희가 지유를 밀며 이렇게 말했다.“두 분이 옛 친구라고 들었는데 혹시 지희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오후에 회사로 들어간대요.”지희에게 밀쳐진 지유는 순간 당황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나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마침 저도 다른 일정이 없어서 데려다줄 수 있겠네요.”지희가 지유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며 공손하게 말했다.“그럼 대표님 부탁드릴게요.”지희는 지유를 민우 곁으로 가까이 데려갔다“옛 친구끼리 할 얘기도 많을 텐데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멀리 안 나갑니다.”지희는 두 사람에게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지유는 그런 지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우가 있어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지희는 바로 자리를 떴다.지유는 민우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동창이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었다.“지희 말 들을 필요 없어. 바쁘면 가서 일 봐.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지유는 이현과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민우가 이렇게 말했다.“데려다주는 게 뭐 어때서? 나도 너랑 수다 좀 떨고 싶어.”지유가 넋을 잃었다.“뭐?”민우가 웃으며 말했다.“오해는 하지 말고. 외국에 너무 오래 있어서 국내에서는 친구가 별로 없거든. 너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래.”지유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그와 보폭을 맞췄다.“아까 너를 쓴 기사를 봤는데 M국에서 완전 잘나가던데? 너 이렇게 출세했을 줄은 몰랐다.”“운
그러다 지유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게 되었다.둘의 행동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이현의 미간이 순간 구겨지더니 차갑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매서운 눈빛으로 안고 있는 두 사람을 쏘아봤다.이현의 기억 속에 지유는 남성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아무튼 이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에 이현은 가슴이 먹먹한 게 불편했다.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보폭이 빨라졌다.차에 부딪힐 뻔한 지유는 놀라서 잠깐 멍을 때리고 있다가 두 사람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얼른 그의 품에서 나왔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민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난 괜찮아. 고마워.”지유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민우가 말했다.“봐봐. 만나서 지금까지 넌 계속 미안해하지 않으면 고마워하고 있어. 그렇게 내외하지 않아도 돼.”민우는 그녀와 거리를 조금 좁히고 싶었다.지유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공손했다.하지만 민우도 자신이 그렇게 공손한 게 싫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지유는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게 싫었다.마침 지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본 이현이 이를 매우 거슬려했다.지유는 이현 앞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하게 웃어본 적이 없었다.이 남자가 지유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현도 순간 발견한 게 있었다. 지유에게 쏟은 관심이 너무 적었기에 그녀 옆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는 걸 모르고 있었고 지유가 다른 남자 앞에서 이렇게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게다가 이현의 옆을 오래 지키다가 그의 아내가 되긴 했지만 태도는 늘 공손했고 그와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했다.비교되는 상황에 이현은 불쾌했다.“온지유!”이현의 목소리에 여유롭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겼다.지유는 얼른 고개를 돌려 이현 쪽을 바라봤다. 얼굴에 걸린 미소도 순간 사라졌다.이를 본 이현은 점점 더 불쾌해졌다.그를 보고 웃음이 사라진다?두
이현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에 지유는 깜짝 놀랐다.이는 이현과 그녀 사이에 제일 은밀한 비밀이었다.그걸 이현이 지금 입 밖에 꺼낸 것이다.지유는 경각심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너무 의외라 한참 넋을 놓고 있더니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물었다.“여 대표님은 어떻게 아셨어요?”이현이 입을 열려는데 지유가 잽싸게 치고 들었다.“대표님 장난 한 거야.”이에 이현의 말문이 막혔다.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이현의 손에서 벗어났다.“졸업하고 계속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을 고민할 틈이 없었어. 오해하지 마.”지유가 민우에게 말했다.이를 들은 이현은 미간을 구긴 채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앙다문 입술이 그가 얼마나 언짢은지 알려주고 있었다.“그런 거였구나.”민우가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그럼 됐어.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해서 의아했는데.”지유가 결혼했다면 민우도 아마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지유는 바로 이 화제를 뛰어넘어 이현에게 미쳐 날뛸 기회를 주지 않았다.“민우야. 대표님이랑 같이 회사 들어가기로 했거든. 바래다줄 필요 없어. 얼른 가서 일 봐.”민우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는 길이 달라서 지유의 업무에 영향 주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기에 이를 수락했다.“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또 봐.”“응, 또 보자.”지유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민우의 차는 바로 옆에 있었기에 차에 올라탄 민우는 창문을 내리고 지유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민우가 가고 나서야 지유의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다른 사람이 우리 관계를 알게 될까 봐 무서워?”이현이 그녀 옆으로 걸어가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지유가 되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이현이 입을 앙다문 채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여전히 매우 불쾌했다.“기억하고 있어요.”지유는 절대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아니었다. 결혼식 날 이
예림은 얼른 주머니에서 옷을 꺼냈다.“온 비서님이 너무 바쁘기도 하고 마침 그쪽에 갈 일도 있고 해서 제가 가져왔습니다.”이현은 자신의 것이 아닌 슈트를 보더니 눈빛이 매서워졌다.남자의 슈트였다.이현은 문득 민우가 떠올랐다.그때 전시에서 지유가 민우를 만났을 때 이 쇼핑백을 들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하지만 그때 이현은 안에 뭐가 들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알고 보니 민우의 슈트였다.이현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예림은 그의 안색을 관찰했지만 별로 크게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현이 표정 관리에 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예림이었기에 속으로는 분명히 언짢아할 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다.“대표님, 여기 놓을까요?”이현이 입술을 앙다문 채 차갑게 말했다.“놓고 나가요.”예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일을 마치고 난 예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지유가 이렇게 이현의 믿음을 저버리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기분이 언짢았던 이현은 업무를 하면서도 그 슈트가 너무 거슬렸다.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지유는 사무실로 들어왔다.동창회에 참석하겠다고 했으니 야근을 할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이현이 아직 사무실에 남아 있었기에 지유는 먼저 퇴근하겠다고 말하러 들어왔다.지유는 이현이 업무를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지유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지유는 오늘 이현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시간도 되었으니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순간 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유는 살짝 의아하긴 했지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현이 성난 사자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오자 지유는 그제야 불길함을 느끼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지유가 그런 이현을 떠보았다
지석훈의 상처를 치료해줄 때 문지원은 아주 열심이었다.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빤히 보게 되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에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예뻤다. 연고가 상처에 닿은 순간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아, 미안해요. 혹시 방금 아프게 했어요?”문지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상처에 대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이러면 조금 나을 거예요. 최대한 살살 발라볼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요.”“문지원, 난 어린애가 아니야. 이런 통증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애 취급하지 마.”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문지원이 말했다.“석훈 씨가 아이가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고 있죠. 하지만 아이만 다치면 아픈 게 아니잖아요. 어른도 다치면 똑같이 아파요. 그리고 이런 통증은 줄일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최대한 살살 바르면요.”최대한 살살 약 발라주겠다고 하면서 대체 왜 자꾸만 그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팔을 치료한 뒤 문지원은 그의 다리를 치료해주었다. 전부 치료해주고 나니 어느새 반 시간이 훌쩍 지났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씻고 쉬어. 내일 공장으로 갈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지석훈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님방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저 방에 새 이불도 있으니까 그냥 덮으면 돼.”“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문지원은 농담을 반쯤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집안에 들이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던지라 지석훈에게 보답할 여력은 없었기에 정말로 보답할 수 있을지 몰랐다.지석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우린 친구잖아. 친구 사이에 그런 부담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넌 피곤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내가 피곤해.”“그럼 쉬는 데 방해하지 않게 전 이만 먼저 방으로 들어가 볼게요.”문지원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님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먼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후 지석훈은 이미 문지원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진 빚도 갚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만약 그가 그녀를 구해주다가 다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랐다.눈 앞에 펼쳐진 위험한 상황을 지석훈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문지원 혼자서 그 위험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는 그녀를 두고 절대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어 싸웠다.문지원이 초조해하고 있던 때 마침 그녀가 신고했던 경찰들이 도착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총을 겨눴다.“움직이지 마! 두 손 들어!”두 남자는 빠르게 도망치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차로 문지원의 차를 쳤던지라 더는 시동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도망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내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문지원과 지석훈도 경찰서로 따라가 진술서를 작성했다.진술서를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고 피로 물든 그의 셔츠를 보던 문지원은 눈가가 붉어졌다.“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어요.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석훈 씨가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괜찮아.”지석훈은 애초에 자기 상처에 신경 쓰지 않았다.“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지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그러나 문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누구 집이 더 안전한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병원부터 가야 한다.“다쳤잖아요. 그러면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아야죠. 온몸에 이상 없나 확인해야 저도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지석훈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문지원,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잊은 거야? 내가 의사야.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니까 병원까지 갈 필요 없어.”“아무리 별거 아닌 상처라고 해도 치료는 해야죠.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거잖아요.”문지원은 여전히 그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지석훈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 짙
그 순간 두 남자는 문지원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문지원은 급하게 차에 올라탄 뒤 사람이 많은 시내로 향했다. 시내엔 사람이 많았던지라 아무리 두 사람이 그녀에게 범죄를 저지르려고 해도 수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앞에서는 대놓고 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다행히 차가 옆에 있어 그녀는 바로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었고 멈춰선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았다.“도망치고 있어요!”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얼른 차 시동 걸어! 쫓아가야지!”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애초에 돈을 받고 무엇이든 해주는 흥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대로 문지원을 놓친다면 의뢰인이 난리를 피우며 돈을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두 사람의 차도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던지라 남자는 빠르게 차를 몰고 다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태웠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이내 지휘했다.“속도 올려서 일부러 부딪쳐.”“네!”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속도를 꾹 울린 후 문지원의 차를 쫓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차는 서로 부딪치게 되었다. 문지원의 몸이 그 충격에 앞으로 확 나갔고 다행히 제때 펴진 에어백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그녀는 두 남자가 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남자는 차에서 내린 후 그녀가 있는 운전석으로 달려와 끊임없이 창문을 두드렸다. 문지원은 당연히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두 남자도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던지라 한 사람은 계속 밖에서 그녀를 협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차로 돌아가 망치를 들고 왔다.“문지원 씨, 우린 문지원 씨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일단 내려서 평화롭게 잘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도 조용히 물러갈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진 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문지원은 당연히 남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흉흉한 두 남자의 얼굴만 봐도 신뢰도가 떨어졌다. 만약 남자의 말을 믿고 문을 열었다면 그들에게 어
마침 월말이었던지라 입원비를 낼 때가 되었고 약값도 내기 위해 특별히 통장 잔액에 얼마가 남아 있나 확인했다. 여이현이 준 2억으로 대부분 재료를 샀고 남은 돈은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정산해 주었음에도 여전히 6000만 원 넘게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돈까지 합하니 7000만 원 정도 되었다.잔액을 본 문지원은 다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여이현이 그녀가 무엇을 할지 미리 예상을 하고 2억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진 그룹을 이끌어가고 있는 여이현이 대단하게 느껴졌다.대부분 사람들이 여이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세심한 사람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꽤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원무과에서 입원비와 약값을 계산한 후에야 그녀는 문용석을 보러 갔다. 병실에 누워있는 문용석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운 그의 모습은 꼭 바깥세상과 거리를 둔 듯한 모습이다.“아빠, 저 여진 그룹과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 공장도 다시 가동되고 있고 전처럼 활력도 생겼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입을 연 순간 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결국 밀려오는 감정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적셔왔다. 문용석의 몸을 닦아주며 그녀는 계속 굳게 눈을 감은 문용석에게 말을 걸었다. 설령 문용석이 병으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그녀는 문용석의 곁에 오래 있어 주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결국 병실에서 한 시간만 머물다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려는 지석훈과 마주치게 되었다. 지석훈은 하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가슴팍 주머니엔 펜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마스크를 낀 채 눈만 내놓고 있었다.그의 뒤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들
문지원은 시간을 내서 주현철을 만나 따져 물을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연락하기도 전에 주현철은 무슨 생각인지 먼저 그녀에게 연락했다.전화를 받은 문지원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주현철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는 훌쩍이며 그녀에게 사과했다.“지원아, 아저씨는 현 대표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단다. 다 내 탓이다. 내가, 내가 정말 네 아빠 볼 면목도 없구나!”전화기 너머로 철썩철썩 소리가 났다. 아마도 자기 뺨을 때리는 것 같았다. 문지원은 느껴지는 수상함에 일단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그를 떠보기로 했다.‘그날 일을 아저씨가 정말로 몰랐다고?'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애초에 그 자리는 주현철이 주선한 것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아저씨, 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런 말로 절 속이실 필요 없으세요. 소용없으니까요.”문지원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주현철은 역시나 조용해졌다. 한참 지나서 그가 입을 떼려고 하자 그녀는 빠르게 말을 자르며 논리적으로 말했다.“아저씨는 아저씨 체면을 지키기 위해 저한테 사업 파트너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신 거겠죠. 저도 사실은 아저씨가 저희 아빠랑 친한 사이여서 아저씨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는 거예요? 정말로 아저씨가 몰랐다고 쳐도 마침 그 타이밍에 자리를 비운 건 너무도 이상하지 않아요? 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짐승보다 못한 놈이 제 몸에 자꾸 손을 올릴 땐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한 마디 정도는 하실 수 있으셨잖아요. 그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와서 저한테 전화로 몰랐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억울한 척하시는 거예요?”가해자가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문지원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문지원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주현철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주현철 씨, 우리 아빠에게서 받은
간단히 말해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은 집안일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문제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지 못한 문제였고 확실히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 숙식 문제는 직원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숙식 제공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더러운 돼지우리를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일단은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청소 문제는 제가 해결해 볼게요.”문지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위생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청소부 직원을 고용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청소부 직원까지 고용하기엔 너무 수지에 맞지 않았다.청소부 직원은 하루에 몇만 원씩 번다. 그런 직원을 여럿을 고용한다면 하루에 몇십만 원 나갈 것이고 이 돈이면 차라리 그녀가 직접 하는 것이 더 나았다. 그녀가 직접 한다면 돈을 아낄 수 있을뿐더러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으니까.“참, 그게 있었지!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문지원은 뭔가 떠오른 듯 눈빛을 반짝이더니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도우미 아주머니 도은숙은 이미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와 집안의 청소도구를 뒤지는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원 씨, 지금 뭘 찾는 거예요? 집 안의 청소는 제 담당이지 않아요?”도은숙은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문지원은 집안일이라곤 전혀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용석은 항상 딸은 귀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집안일도 못 하게 했고 주방에 들어가 손에 물 묻히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물론 문지원이 요리나 집안일에 흥미가 있다면 하게 해줄 것이었지만 문지원은 요리에 재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안일에도 재능이 없었다.그랬기에 지금까지 그녀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이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문지원은 빗자루를 찾아내면서 말했다.“공장의 숙소에 청소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청소부 직원 고용해도 되긴 한데 비싸서 제가 직접 해보려고요. 그러면 돈을 아낄 수 있잖아요
현관으로 온 지석훈은 그제야 문지원이 떠올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문지원은 일부러 핸드폰을 꺼내 보면서 괜찮은 척했지만 속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씁쓸함이 밀려왔다.“전 괜찮으니까 얼른 가보세요. 그 사람들도 더 어떻게 찾아오진 못할 거예요. 여기서 더 찾아온다면 범죄가 될 테니 말이에요.”“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안색이 조금 풀린 지석훈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집 안에는 문지원 혼자 남게 되었다. 예전에도 집 안에 혼자 남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이상하리만큼 외롭고 쓸쓸했다. 창문이 굳게 닫혀 있음에도 자꾸만 어딘가 바람이 새어 나와 그녀의 손발을 차갑게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최대한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따듯한 물에 샤워한 후 일찍 쉬려고 했다. 다행히 이날 밤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문지원은 청소 직원을 불러 문과 바닥을 도배한 붉은 페인트를 지워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바로 공장으로 달려가 구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지원자가 14명이나 모였고 그녀는 보자마자 기뻐했다. 손기영과 같은 마을에 사는 마을 주민이라는 것을 들은 그녀는 바로 손기영에게 물었다.“공장장님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어요?”“당연하지. 마다할 리가 있겠어? 내가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일하고 싶다고 찾아온 사람들이야.”손기영은 원래 바쁘게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걱정이 담긴 잔소리를 해댔다.“문 사장, 앞으로 공장으로는 가끔 찾아오는 것이 좋겠어. 여긴 평소에 작업하느라 공기가 좋지 않아. 우리 직원들도 모자며, 마스크며 꽁꽁 쓰고 일한다고.”문지원은 황급히 손을 올려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만졌다.“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가서 마스크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그녀는 얼른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내 손기영은 그녀를 데리고 막 공장으로 출근한 직원들을 소개해주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문지원은 지석훈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유한과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주현철, 그리고 현유한에게 당한 폭행과 욕설만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현유한이 절대 자신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다.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눈치챘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문지원이 먼저 고개를 들어 말했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저 좀 데려다주세요.”“그래.”지석훈은 구겼던 미간을 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그는 며칠 동안 그녀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더는 다른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집에 도착한 지석훈은 문 앞 바닥과 현관문에 빨간 페인트로 ‘X 녀'와 ‘쌍 X'라는 욕으로 가득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욕설들이었다.그는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어 옆에 있던 문지원을 보았다.“요즘에 이상한 사람한테 걸리기라도 한 거야?”그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계속 물었다.“혹시 오늘 다친 것과 연관이 있는 거지?”비록 의문문이었지만 그의 어투엔 확신으로 가득했다. 더는 숨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유한이 이렇듯 빨리 자신의 거처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다. 문지원은 자신이 절대 다른 사람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더는 믿을 수가 없다.문지원이 현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석훈 한 명뿐이었다. 괴로운 눈빛으로 빨간 글씨를 보던 문지원은 이내 시선을 돌려 키를 꺼냈다.“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오늘은 주말이고 은숙 아주머니도 쉬는 날이에요.”지석훈은 묵묵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문지원은 먼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앉아 오늘에 있었던 일을 전부 지석훈에게 알려주었다.“전 현철 아저씨가 예전에 우리 아빠와 계속 협력을 이어
지석훈은 문지원이 말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상처부터 치료해줄게.”이내 그는 소독약을 들고 돌아왔다. 문지원은 움찔하며 다소 민망해진 어투로 말했다.“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제가 할게요.”그러나 지석훈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랐다. 지석훈이 들고 있는 면봉이 그녀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극을 받은 것처럼 움찔거렸고 차가운 소독약에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훈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이 약을 아프게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자신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오해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 약이 상처에 닿으니까 따가워서 저도 모르게 움찔거린 거예요.”문지원은 원래부터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이었다. 문용석은 입원하기 전까지 행여나 자기 딸이 조금이라도 다치게 될까 봐 애지중지하며 길렀던지라 상처에 소독약을 발라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그럼 살살 발라줄게.”이렇게 말한 지석훈은 천천히 움직였지만 문지원은 오히려 더 고역이었다. 소독약이 묻은 면봉이 상처에 닿을 때 원래는 그저 따갑기만 했지만 지석훈이 살살 바르고 있으니 깃털로 간질이는 것처럼 간지럽기도 했다.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잘 참을 수 있어도 간지러움은 참지 못했다. 문지원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손을 뻗어 지석훈의 손을 잡아버렸다. 지석훈도 멈추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문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그냥 아까처럼 발라주세요. 이건 너무 간지러워요.”그 말을 들은 지석훈은 굽혔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헛기침 두어 번하며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하지만 네 몸에 있는 상처들은 약 발라야 나을 수 있는 상처들이야. 어떤 부위엔 네 손도 닿지 않을 거고. 아니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