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약한 룸으로 가보니 2층은 확실히 조금 더 아늑하고 사람도 적었다.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불렀다.“나 대표님 왔다, 나 대표님!”“민우야, 너 진짜 많이 달라졌다. 인물도 훤해지고 대표님까지, 너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겠어.”민우가 그 농담을 받아쳤다.“그건 나도 모르지, 고개 좀 돌려볼까, 있나 없나?”“그럼 아직 솔로라는 거네. 자,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여성분들, 이런 빛이 나는 솔로가 옆에 있는데 기회 잘 잡아야겠죠.”민우와 얘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뒤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뭔가 알아챈 듯 웃으며 말했다.“오늘 귀한 손님이 한 명 더 왔네. 온지유.”지유가 이렇게 말했다.“미안, 내가 많이 늦었지.”“지유야, 너무한 거 아니야? 전에 동창회 했을 때는 거의 참석을 안 하더니. 오늘 민우 아니었으면 또 못 보는 거 아니야? 얼굴 보기 참 힘들어.”“근데 지유 너는 참 한결같이 예쁘다.”“예쁘면 좋지. 예쁜 것도 재산이라잖아. 지금 여진그룹 여 대표님 비서잖아. 그러니 나 대표랑도 같이 올 수 있는 거고.”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다들 수군거렸다.어떤 말에는 듣기 거북한 단어들도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년간 쌓아온 사회 경험으로 이미 마음가짐도 웬만큼 단단해졌다.지유의 업무는 겉보기는 좋아 보여도 사실 다 같은 월급쟁이라는 걸 본인만 알고 있었다.민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지유가 너무 난처할까 봐 얼른 말을 돌렸다.“다들 도착했지. 오늘 내가 사는 거니까 다들 마음껏 먹어. 나 돈 아껴주려고 하지 말고.”“민우야, 너 이제 대표까지 달았는데 당연히 그런 생각은 안 하지.”지유는 자리에 앉은 친구들을 바라봤다. 날씬해진 사람, 뚱뚱해진 사람, 가정주부가 된 사람, 생활에 치여 성격이 많이 차분해진 사람, 어떤 사람은 많이 변했지만 어떤 사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지유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가서 앉고 싶었지만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친구들도 그의 대답을 무척 궁금해했다.민우가 멈칫하더니 친구들의 주목하게 입술을 열었다.“여기 없어. 너희들은 모르는 사람이야.”순간 친구들의 흥미가 떨어졌다.“아, 난 또 지유인 줄 알았네. 우리가 너무 헛다리 짚었다.”지유는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두 사람 사이는 예전보다 지금이 조금 더 가까웠다.그냥 친구들이 너무 떠들어대기를 좋아했을 뿐이다.그 뒤로 더는 그녀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았다. 더는 그들의 화제에 끼지 않아도 되어서 지유도 홀가분했다.동창회라고는 하지만 남자들이 모이면 결국 술과 일 얘기였다.지유도 술을 조금 마셨다. 너무 오래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지 이내 머리가 어지러웠고 술기운이 올라왔다.그때 누군가 수다를 떨면서 그녀의 이름을 꺼내는 게 들렸다.“중학교 동창 중에 그래도 지유가 잘나가긴 하지. 두 대표님 사이를 전전하면서 많이 벌었겠지?”“그런 방법으로 잘 나가는 건 나도 싫어. 명예를 얻긴 했지만 정당한 방법은 아니잖아. 지유 있는 집 자식 같지는 않은데 무려 에르메스를 들고 있어. 대표님 세컨드 노릇 하고 있는 거 아니야?”몇몇 여자 동창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실 그들은 지유가 올 때부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입은 옷도 그렇고 손에 든 가방도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에르메스를 들고 있었다.만약 그냥 비서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지유는 학교 다닐 때부터 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그녀는 가십거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 사는 것에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부하기 싫어해 진작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시야도 그렇고 경지도 그렇고 지유와는 아예 달랐다.“지유, 여진그룹 여 대표님 비서로 있잖아. 둘이 썸씽 있는 거 아니야?”“지유가 여진그룹 다닌 지도 6, 7년 됐지. 그런데도 직장 안 바꾸는 거 보면 진짜 여 대표님이 좋은 거 많이 해주나 봐.”“그걸로 재벌 집 며느리라도 되려고 그러나봐.”“지유가? 무슨 자격으로?
지유를 때리려던 그 여동창도 얼굴을 가린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봤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누구한테 사과해야 할지 몰라?”그들은 그제야 알아채고 얼른 지유 앞으로 다가와 자세를 숙이며 말했다.“미안해. 지유야. 우리가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잘못했어. 다음엔 안 그럴게.”그들은 이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아무리 큰 재주가 있어도 여진그룹을 상대할 사람은 없었다.잘못 건드리는 날엔 지금 다니는 회사도 잘리고 말 것이다.그들은 가정도 있고 아이도 있고 부모님도 모셔야 했기에 직장까지 걸 수는 없었다.지유는 당연히 그들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현을 멍하니 바라봤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이현은 고개를 돌려 지유를 바라봤다. 눈동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지유의 팔을 붙잡더니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집에 가자.”지유가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내가 왜 당신이랑 집에 가요. 아무 사이도 아닌데.”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지유가 이현의 비서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에 가자는 화제랑은 연관 짓기 어려웠다.이현은 지유의 몸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 적지 않게 들이부은 것 같았다. 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또 뭐 하려고?”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지유는 점점 담이 커졌다.“지금 이거 안 보여요? 동창회 아직 안 끝났어요.”이현은 인내심이 바닥나 넥타이를 당기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동창회? 이렇게 당하고도 모자라? 얼른 나랑 가자.”이현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지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이때 민우가 따라 나오더니 지유의 다른 쪽 팔을 잡으며 말했다.“대표님, 지유 이미 퇴근했어요. 지금 와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이현이 민우를 보며 코웃음 쳤다.“그럼 그쪽은 뭘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의논하는 거 계속 듣고 있으라고요?”이에 민우도
지유는 자신이 겪었던 억울한 일들이 떠올라 점점 더 세게 울었다.그녀가 그렇게 서럽게 울자 구경꾼들이 몰려왔다.“아이고, 여자 친구 화나게 했어? 서럽게 우는 거 봐서는 많이 억울했나 보네.”행인들이 지유가 통곡하자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씩 했다.이현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수모를 겪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냥 조금 삐진 것뿐이에요. 조금 있으면 좋아져요.”이현은 지유를 안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지유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이현에게 업힌 채 점점 더 크게 통곡했다.“여자 친구를 잘 달래주려면 인내심이 있어야지.”행인이 말했다.“잘못할 짓을 해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거야. 어떤 여자애가 아무 이유 없이 화내겠어.”이현도 도대체 왜 그녀가 화났는지 몰랐다.그가 화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지유가 화내고 있다.하지만 지유가 너무 서럽게 울자 이현도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이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렇게 여자를 달래본 적이 없으니 생소하면서도 방법이 없었다. 정말 비즈니스 담판보다도 어려운 것 같았다.“지유야, 어떡해야 화가 좀 풀릴까?”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몸을 숙이고 있자 지유가 두 팔을 벌렸다.“업어줘요. 그럼 알려줄게요.”“내가 말했지. 여자 친구 화난 게 맞다고.”행인이 웃으며 말했다.이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무릎을 꿇고 지유를 등에 업었다.지유는 머리를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지유의 눈물이 이현의 목을 타고 떨어졌다.“울지 마. 다 큰 성인이 아직도 울고 그래.”“이현 씨가 나 안 건드렸으면 내가 왜 울겠어요.”지유가 이현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이렇게 말했다.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유는 반쯤 취한 상태로 이현의 목을 감싸더니 이렇게 말했다.“이현 씨, 나 처음 업는 거 알죠.”“응.”“노승아 씨 만나러 간 거 아니에요? 나는 왜 찾으러 왔대?”“네가 당하고 있을까 봐.”지유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다행이네. 나를 업고 이렇게 먼길을 오게 했으니 밑지
이현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지유가 긁은 자리는 이미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그는 얼른 더 긁으려는 지유의 팔목을 잡았다.“긁지 마.”지유는 불편한지 계속 툴툴거렸다.“간지러워.”이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코올 알레르기 있으면서 왜 그렇게 술을 마셔?”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뜬 지유가 이현을 발견하고는 물었다.“여기 어디예요?”“집이야.”이현은 지유의 신발과 다소 걸리적거리는 옷을 벗겨주고는 이불을 덮어줬다.지유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동창회에서 술을 조금 마신 뒤로 트러블이 좀 있었던 것 같았다.관건적인 순간에 이현이 나타났다.“이현 씨가 나 데리고 온 거예요?”지유가 물었다.이현은 욕실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아오더니 수건을 적셔 지유의 팔을 꼼꼼하게 닦아줬다.빨개진 팔은 두드러기가 돋아나 있었고 마구 긁은 흔적이 보였다.“내가 아니면 누군데. 다음부터 술 마시기만 해봐 아주.”이현은 지유가 술을 먹는 게 싫었다.알코올 알러지가 있는 사람이 술을 먹으면 위험해지기 십상이다.지유는 직접 자신의 얼굴과 몸을 부드럽게 닦아주는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렇게 뼛속까지 부드러운 이현은 처음이었다.표정이 살짝 변한 지유가 물었다.“왜 갑자기 이렇게 챙겨주는 거예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아니면 어떻게 자? 나는 주정뱅이랑 자기 싫어.”말이 끝나기 바쁘게 몸도 다 닦았다.하지만 지유는 아직도 몸이 간지러웠다.약간 불편했다.누워 있으니 머리도 아프고 몸도 허약해진 것 같았다.지유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이현은 물을 한 잔 가져오더니 손에 든 알약 두 개를 지유의 입가로 가져갔다.“약 먹자.”지유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이거 무슨 약이에요?”“알레르기 낫게 하는 약. 먹으면 좀 편해질 거야.”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착하지. 얼른 먹어.”이현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현이었다. 전과 달리
이를 들은 이현의 얼굴이 구겨졌다.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유가 울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창가에 선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공기 속에서 점차 차가워졌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나서야 이현은 방에서 나갔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이튿날.지유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침대에서 일어나 지유는 머리가 천근만근이라 꼭 감싸 안았다.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며 술을 깨려 했다.씻으러 욕실에 들어가 보니 눈이 많이 부어있었다. 어제 분명 얌전하게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어젯밤 이현이 자신을 데리고 온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침대 옆자리는 건드린 흔적이 없었다. 이현이 옆에서 자지는 않았다는 의미였다.하지만 이현이 꽤 오래 자신을 보살폈던 건 기억이 났다.그렇게 따듯하게 챙겨준 건 처음이었다.지유는 무슨 상황인지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어제 이현이 왜 마침 그곳에 나타난 건지, 그리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건지 말이다.성질을 부렸던 것 같은데 이현은 화내지 않았을뿐더러 다독여주기까지 했다.다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도우미가 아침 준비를 마친 뒤였다.이현도 내려와서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이현 씨 어디 갔어요?”도우미가 대답했다.“대표님,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오늘은 주말이었다.지유가 핸드폰을 꺼내 이현과의 카톡을 열었다.[어제는 고마웠어요...]지유는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어제 또 밤새 신세를 졌네요...]지유는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끝내 보내지 못했다.너무 오글거리는 문자라 차마 보낼 수 없었다.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이현이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이다.어젯밤 보여줬던 부드러운 모습도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밥을 먹은 지유는 집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제일 큰 쇼핑몰로 향했다.날씨가 쌀쌀해졌으니 두꺼운 옷을 좀 사야 했다.이현에게 코트를 하나 선물
“이현 씨가 입은 오트 쿠튀르 옷이 좀 많아요?”지유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제가 산 옷을 입으면 그만이죠. 근데 승아 씨는 누구 옷을 고르러 온 거예요?”승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곧 불꽃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았다.승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제 남자 친구한테 전 세계에 딱 10벌 있는 오트 쿠튀르 사주러 왔죠. 한번 보여줄까요?”승아의 말투는 어딘가 묘하게 자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에게 명품 코트를 사주려고 하는데 지유는 매장에서 흔히 보는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남자한테 옷을 골라주는 일로만 봐도 둘은 차원이 달랐다.매장 직원은 한정판 코트가 담긴 박스를 들고나왔다. 포장만 봐도 돈이 많이 깨졌을 것 같았다.시유가 이를 힐끔 보더니 비아냥거렸다.“드레스 하나도 다른 사람 돈으로 사면서 이번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승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남자 친구가 날 위해 지갑을 여는 게 부러웠나 보죠?”“부러운 건 아니고.”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그 돈이 그렇게 떳떳한 돈은 아닌 것 같아서, 소문이라도 나면 승아 씨 명예가 실추될까 봐 그러는 거죠.”승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유가 무슨 말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아직 지유는 이현과 부부 사이였기에 이현이 승아에게 쓴 돈에 지유의 지분도 있었다.지유가 다시 회수하고 싶다면 방법은 많았다.그러면 승아의 명예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유명한 가수가 유부남을 꼬셨다는 소식이라도 나면 그대로 연예 생활은 끝이 난다.이런 스캔들을 터트리지 않고 참은 것도 다 지유가 마음이 착해서였다.“그걸로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승아도 더는 지유를 상대하기 싫어 차갑게 말했다.“지유 씨는 오빠랑 이혼하면 한 푼도 못 받을 거예요. 애초에 오빠랑 결혼한 것도 여씨 집안 돈 보고 결혼한 거잖아요. 지유 씨는 그저 비서일 뿐이에요. 손에 든 그 옷을 사려고 해도 몇 개월 치 월급은 써버려야 되는 거 알죠
이현이 지유에게 200억이 담긴 카드를 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승아는 다 조사해 봤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현이 지유를 별로 챙기지 않는다고 말이다.이현의 비서로 7년이나 있었는데 이현은 여전히 지유를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만약 이현이 정말 지유를 좋아하는 거라면 결혼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했겠지.승아는 지유가 이현 몰래 스폰서를 찾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믿더라도 이현이 돈을 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내 조카가 조카며느리한테 돈 좀 쓰는 게 어때서?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승아 씨가 갖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순간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비녀로 머리를 얹은 여희영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의 오십이 되는 나이었지만 몸매는 여전히 잘 관리되어 있었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작은 고모님.”여희영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던 지유가 웃으며 불렀다.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옷 좀 사러 나왔다가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여희영은 이현의 하나뿐인 고모였다.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막내딸이었다.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지 않고 여행 다니기 좋아했다.만나려면 정말 인연이 닿아야만 했다.저번에 본 건 작년이었다.그것도 스치며 한번 만났다.“언제 들어오셨어요? 소식 못 들었는데.”지유는 여진숙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모인 여희영과는 잘 맞았다.여희영의 사상이 오픈 마인드라 젊은이들과 비슷했다.하여 지유는 그를 선배가 아니라 친구로 대했다.“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이게 인연 아니겠어?”여희영도 열정적으로 지유에게 인사를 건넸다.승아는 이런 곳에서 여희영을 만날 줄은 몰랐다.여희영은 이현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승아도 여진숙보다 여희영과 더 잘 지내고 싶었다. 여씨 집안 사람들과 잘 지내야 여씨 집안에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양채은이 나도현과의 유일한 아이였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현의 전화에 그녀는 당연히 바로 받았다. 다만 그녀는 하민이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전화기 너머로 여전히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 내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네게 접근한 걸 인정해. 하지만 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한 적 없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나도현의 말에 양채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가 나도현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날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분명 나도현이었다.그러나 나도현은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고 그 영상 속엔 악취미로 가득한 재벌들이 있었다. 양채은은 바로 진실을 알게 되었다.나도현이 지금 이런 때에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그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하민이도 그녀가 예전에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고 했던 아이였으니까.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는 직접 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에 나타난 나도현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양시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것도 전부 그의 연기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역겨웠다.양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마주 보면서 하고 싶거든요.”나도현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던지라 양채은과 만나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래.”양채은은 먼저 시간을 알려주었다.“그럼 사흘 뒤에 봐요.”말을 마친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현은 양채은과 했던 대화를 양시은에게 알려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양시은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이미 양채은과 좋게 얘기가 끝났고 하민이와도 사이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맞아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양시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나도현, 제발 하민이를 구해줘...”...양시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양채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양채은, 죽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죽을 테니까 하민이는 살려줘. 하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리고 넌 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잖아.]양채은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간 쌓은 정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양채은에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양시은이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나도현을 본 순간 나도현의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시은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나도현에게 푹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도 없고 나도현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양시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시은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이모, 우리 여기에 며칠 동안 있는 거예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모, 혹시 하민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왜 하민이랑 놀아주지 않는 건데요?”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했다. 양채은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순간 양채은은 마음이 누그러지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하민아, 만약 이모랑 엄마가 싸우면 하민이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이모 말 믿어 줄 거야?”양채은은 양시은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하민이 앞에서는 완전히 냉랭해질 수 없었다. 하민이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기 때문이다.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하민이를 데리고 나와 간식도 사주면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돈만 생기면 하민이의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