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는 거기 멈춰 선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고모님, 혹시 다른 일 있어요?”여희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옷 사러 온 것 같은데, 그 옷 본인이 입을 거 아니죠?”노승아의 얼굴이 굳었다.“네, 선물하려고 산 거예요.”여희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톡 까놓고 얘기하기는 싫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공인으로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죠. 어떤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씨 집안 체면을 생각해서 눈감아주는 거지 내가 동의한 건 아니에요. 뭐든 다 까밝혀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여진숙이 아니니까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요.”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승아는 여희영의 말에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주먹을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고모님.”여희영은 그런 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코웃음을 쳤다.승아는 모욕받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지유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좀 마시자.”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죠. 옆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요.”둘은 카페로 향했다.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진 않았지만 늘 이현과 지유를 걱정했다.“현이랑 결혼한지도 3년이 되어가는데 아이 가질 생각 없어?”지유가 멈칫하더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여희영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나는 슬하에 아이가 없잖니. 현이가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너희들이 빨리 손주 안겨줬으면 싶은데. 내 친구 중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도 벌써 손주 있더라.”지유는 커피만 홀짝거렸다.이현은 여희영과 사이가 좋았고 친모인 여진숙보다 고모 여희영을 더 잘 따랐다.여씨 집안은 사실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이현도 어릴 때 여씨 집안에서 자란 게 아니었다.이현이 여씨 집안으로 오게 된 것도 여희영 덕분이었다.여진숙은 이현을 별로 상관하지 않았고 그에게 오히려 차가웠다.
그냥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여희영은 그녀와 이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이현이 지유와 있으면 행복한지가 중요했다.하지만 여희영은 지유의 의도를 오해했다.“나 고작 두 마디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야? 지유야, 너 현이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것도 현이 복이라면 복이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어디서 너처럼 좋은 색시를 얻겠어.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커서라도 복 좀 받아야지.”지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릴 때 잘 못 지냈나요?”우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일반인보다 행복해야 맞다.여희영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 일은 넘어가자. 현이도 그때 얘기하는 거 싫어할 거야. 난 그냥 너희들이 빨리 손주나 안겨줬으면 좋겠다.”여희영은 은퇴하면 집에서 손주를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손주가 생기면 데리고 나가 실컷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승아는 광고 촬영 중이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희영에게 한 소리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저혈당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이현은 마침 순찰하다가 승아가 한편에 앉아 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시간관념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무슨 문제가 생긴 걸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죠?”승아의 매니저가 이현을 발견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아 언니 몸이 안 좋아요.”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어제까지 괜찮았잖아요.”매니저가 승아를 힐끔 보더니 투덜거렸다.“오전에 언니 데리고 쇼핑하러 갔었거든요. 대표님께 고맙기도 하고 날씨도 추워져서 코트 한 벌 선물하려고 갔는데 온지유 씨를 만났어요...”승아가 매니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나 괜찮아.”이현은 승아의 창백한 얼굴과 빨개진 눈시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아까
이를 들은 이현이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에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승아는 어딘가 많이 다급해보이는 이현에게 물었다.“지유한테 사고가 났대요.”이현은 승아를 거들떠볼 새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승아는 그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지유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아까 만났을 땐 멀쩡하던 지유가 마침 사고가 났다고?선물한 쇼핑백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고 승아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옆에 선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는 무슨? 그냥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 이렇게 말했다.“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유 씨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진짜 무슨 사고가 났을 수도 있어.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요. 나는 온지유 씨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언니도 참고만 있지 마요. 대표님은 옆자리는 원래 언니였어요. 온지유 씨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고. 온지유 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대표님과 다시 이어졌을 텐데.”매니저는 지유를 깎아내리며 승아 편을 들고 있었다.소식을 듣고 온 곳은 한 호텔이었다. 허둥지둥 위로 올라가 스위트룸에 쳐들어간 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온지유!”들어가 보니 지유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주변을 빙 둘러봐도 위험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현은 방 구석구석 열심히 검사했다. 그러더니 침대맡으로 걸어가 이렇게 소리쳤다.“온지유!”잠에서 깬 지유가 이현을 보고는 일어나 앉았다.“이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아까 여희영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희영이 갑자기 앉아 있는 게 힘들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지유는 여
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
권다솔은 컵을 받았다. 역시나 너무 뜨겁지 않고 적당한 온도였다. 아마도 배진호가 일부러 온도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녀는 배진호를 한 번 쳐다봤고 그가 자신을 위해 군밤을 까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더위도 추위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예민하다 했으며 가끔은 부모님조차도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는 자발적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다. 주방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팬을 뒤집는 소리와 함께 요리 냄새가 퍼져 나왔다. 거실에서는 권다솔과 배진호가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권다솔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면 사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배진호가 권다솔을 웃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본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정말 우리 아들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네.”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을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권다솔에게는 보이지 않게 했다. “진짜 진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만해. 당신이 사람을 불러온 거잖아. 근데 또 뭐가 문제야?” “내가 쟤를 불러온 이유 아직도 모르겠어? 인터넷에 떠도는 그 험한 말들 때문이지! 당신도 봤잖아! 얼마나 듣기 싫은 말들이 있었는지.”배진호의 어머니는 불만이 가득했다. 배진호 아버지는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부부 생활을 해온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여자와는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배진호 어머니는 결국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권다솔을 못마땅해했다. “안 돼. 쟤가 진호를 계속 속이게 둘 수 없어. 결혼했더라도 떼어놓아야 해.” “이런 품위 없는 여자가 어떻게 우리 아들한테 어울릴 수 있겠어?”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드디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진호는 권다솔의 오른쪽에
배진호는 부모님이 갑자기 권다솔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좀 이상하게 느꼈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거겠으니 여겼다. 그는 권다솔을 위로하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아직 부모님을 뵙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처음 인사하는 걸로 생각하면 돼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다솔 씨 난처하게 할 분들 아니에요.” 배진호의 반복적인 위로에 권다솔은 조금 진정되었고 결혼한 후엔 부모님을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건 사실 너무 늦은 거다. 배진호의 집안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2환 구역에 오래된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그들의 회사는 시내 중심에 있었고 2환 구역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중간에 차가 많이 막혀 시간이 꽤 걸렸다. 차 안에서 권다솔은 지나가며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왜 부모님께 더 좋은 집을 마련해 드리지 않았어요?” “당신 수입이면 훨씬 전에 도시 중심에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권다솔의 부모님은 배진호를 그저 돈이 없는 비서일 뿐이라고 얕보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는 여이현은 배진호에게 매우 후한 대우를 했으며 매달 지급하는 월급은 적어도 여덟 자릿수에 달했다. 도시 중심에 집을 사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배진호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 사정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우리 집 그 오래된 집은 아버지가 퇴직할 때 회사에서 준 거예요.” 배진호는 차를 운전하며 설명했다. “부모님은 옛날 걸 좋아하셔서 이사 가기 싫어하세요.” 권다솔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차는 곧 멈췄다. 드디어 배진호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권다솔은 차 트렁크로 가서 위에 놓인 선물 가방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
“이런 일 없었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믿었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잖아요.” “진호 씨!” 권다솔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처참하게 울었지만 마음속은 마치 꿀에 잠긴 듯 달콤했다. 그냥 배진호가 그녀를 믿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배진호는 홍보팀에 지시해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를 처리하도록 했다. 최대한 확산하지 않게 막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루머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홍보팀은 수십만 원을 쏟아부으며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 법적 경고장도 보냈다. 회사의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며 이 일에 대처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논란은 결국 권다솔의 부모님에게도 알려졌다. 권다솔은 곧바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머니가 걸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대신 물어본 것이었다. “너랑 남씨 가문 그 아들 대체 뭐야? 너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김영은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난 그 사람이랑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권다솔은 손끝을 움켜쥐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저도 정말 이 일을 누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퍼뜨리고 있는지 궁금해요.” 김영은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고위층의 아내로 살아온 만큼 그녀도 결국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영은은 권다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다솔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긴장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남씨 가문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네?” 권다솔은 잠시 망설였지만 두 집안의 오랜 관계를 고려해 유람선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진 않았다. 그저 일부만을 살짝 흘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부만으로도 김영은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정말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너를 불러낸 거면 그건 순전히 자기 아들하고 엮으려는 의도였을 거야.” 권다솔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아끼는 아주머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
“부사장님,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대표님께 연락해 볼게요.”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꼭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까지 수군대던 직원들이 갑자기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권다솔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권다솔에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오히려 차갑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획팀 직원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기획팀은 배진호의 사무실 바로 옆이라 그가 어디 있는지 알 가능성이 높았다. 직원은 배진호가 지금 자신의 사무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권다솔은 다른 건 신경 쓸 틈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비서조차 문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부사장님, 오셨어요. 그런데 지금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대표님께서 아까 핸드폰을 한 번 보시더니 우리 모두를 내보내셨어요.” “핸드폰을 봤다고요?” 권다솔은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네. 평소엔 이런 적 없으셨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곧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이렇게 나오지 않으시면 회의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 건지.” 권다솔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사무실 문을 힘껏 두드렸다. “진호 씨, 나와요! 무슨 일이든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은 이미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비서가 옆에서 말렸다. “부사장님, 제발 그만하세요. 손 다칠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시면 걱정하세요.” 하지만 권다솔은 멈추지 않았다. 비서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 안에서 나온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잡으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내가 문을 열지 않는다고 이렇게 계속 두드리면 안 되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부탁인데 남태건 씨에게 전해주세요. 더는 그 사람과 어떤 얽힘도 원하지 않는다고요.” 최선정의 목소리는 아직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 있었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통화 이후 권다솔은 며칠 동안 회사 프런트를 신경 써서 살폈다. 심지어 따로 물어보기도 했다.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은 아무 이상의 소포도 오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신경 좀 써주세요. 이상한 소포 오면 그냥 버리세요.” 권다솔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배달되던 소포도 멈추고 남씨 가문 쪽에서도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권다솔은 한동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더는 남씨 가문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며 안심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던 권다솔은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무리 지어져 있는 걸 보았다. “야! 그거 진짜라던데?” “우리 부사장님이 남원 그룹 남태건 사장님이랑...” “내 생각엔 진짜인 것 같아. 그런 사진까지 유출됐잖아. 인터넷 여기저기 난리더라. 우리 대표님이 정말 불쌍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권다솔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직원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권다솔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직원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사장님,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평소엔 9시쯤에 오시던데...” 권다솔은 요즘 임신 중이라 배진호는 그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아침에 조금 늦게 출근하라고 배려해 줬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는 9시가 좀 넘어서야 회사에 오곤 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거였다. 더구나 배진호도 이미 출근했고 혼자 집에서 할 것도 없어서 회사에 좀 더 일찍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오자마자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들을 줄은 몰랐다.
권다솔은 배진호 덕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운 느낌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한 배진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진호 씨가 여긴 어떻게... 아, 머리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머리가 두 개로 갈라질 것 같았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직원과 부딪치게 되었던 것만 기억났다.그 뒤의 기억은 흐릿했다. 배진호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도 몰랐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녀를 보는 배진호의 눈빛은 심란했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으나 다시 꾹 삼켜버렸다.“머리가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요. 날이 밝는 대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대충 짐 정리해서 떠나요.”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 배진호를 보며 권다솔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가 너무 아픈 탓에 이마저도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그랬기에 일단 이 일은 넘어가기로 했다.유람선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배진호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진행했다.배진호의 태도는 강압적이었던지라 권다솔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검사 결과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코로 마취 성분의 액체가 흘러 들어간 겁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이 약물의 성분은 임산부에게 아주 나빠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대체 아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마취약이라고요...”권다솔은 자신이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의사에게 얼른 설명했다.“선생님,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부주의로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 거예요.”의사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는 길에서 결국 권다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진호 씨,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어젯밤 분명 진호 씨를 놀리고 도망쳤던 것 같은데 깨어나고 보니 방에 있더라
남태건은 권다솔이 있는 방으로 왔다.문을 열려고 하자 싸늘한 얼굴로 달려온 배진호와 마주쳤다.“다솔 씨를 납치한 사람, 그쪽이죠?”배진호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남태건은 멈칫하더니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죠. 내 고양이가 그쪽이랑 함께 있지 않았나요?”“고양이요?”“네, 우린 서로 어릴 때 별명을 지어줬거든요.”남태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배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남태건을 빤히 보았다. 남태건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첫 만남에서부터 배진호는 남태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하간에 이 바닥에서 일하며 그는 뒤도 깨끗한 사람을 본 적 없기도 했다.그러나 남태건은 달랐다.그의 손에 있는 더러운 것조차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그런 사람이 권다솔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배진호가 마음이 놓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계속 남태건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자선 파티에 그 틈을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배진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정말로 다솔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요. 우리 일은 우리끼리 남자답게 해결하자고요. 무슨 일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말고 나한테 하라고요.” 남태건은 달려들려던 경호원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막았다.“그쪽한테 하라고요.”그는 배진호가 한 말을 반복하며 곱씹었다. 그의 주위로 위험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그쪽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쪽한테 하죠? 난 다솔이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다솔이랑 먼저 알게 된 건 나라고요. 그쪽은 후에 나타난 주제에 무슨 자격이 있는 거죠? 나한테 그저 다솔이를 훔쳐 간 도둑일 뿐인데요.”남태건의 두 눈 가득한 살기는 곧 흘러넘쳐 유람선을 채울 것 같았다.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두 남자는 서로를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아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