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는 거기 멈춰 선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고모님, 혹시 다른 일 있어요?”여희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옷 사러 온 것 같은데, 그 옷 본인이 입을 거 아니죠?”노승아의 얼굴이 굳었다.“네, 선물하려고 산 거예요.”여희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톡 까놓고 얘기하기는 싫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공인으로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죠. 어떤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씨 집안 체면을 생각해서 눈감아주는 거지 내가 동의한 건 아니에요. 뭐든 다 까밝혀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여진숙이 아니니까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요.”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승아는 여희영의 말에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주먹을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고모님.”여희영은 그런 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코웃음을 쳤다.승아는 모욕받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지유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좀 마시자.”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죠. 옆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요.”둘은 카페로 향했다.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진 않았지만 늘 이현과 지유를 걱정했다.“현이랑 결혼한지도 3년이 되어가는데 아이 가질 생각 없어?”지유가 멈칫하더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여희영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나는 슬하에 아이가 없잖니. 현이가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너희들이 빨리 손주 안겨줬으면 싶은데. 내 친구 중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도 벌써 손주 있더라.”지유는 커피만 홀짝거렸다.이현은 여희영과 사이가 좋았고 친모인 여진숙보다 고모 여희영을 더 잘 따랐다.여씨 집안은 사실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이현도 어릴 때 여씨 집안에서 자란 게 아니었다.이현이 여씨 집안으로 오게 된 것도 여희영 덕분이었다.여진숙은 이현을 별로 상관하지 않았고 그에게 오히려 차가웠다.
그냥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여희영은 그녀와 이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이현이 지유와 있으면 행복한지가 중요했다.하지만 여희영은 지유의 의도를 오해했다.“나 고작 두 마디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야? 지유야, 너 현이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것도 현이 복이라면 복이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어디서 너처럼 좋은 색시를 얻겠어.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커서라도 복 좀 받아야지.”지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릴 때 잘 못 지냈나요?”우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일반인보다 행복해야 맞다.여희영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 일은 넘어가자. 현이도 그때 얘기하는 거 싫어할 거야. 난 그냥 너희들이 빨리 손주나 안겨줬으면 좋겠다.”여희영은 은퇴하면 집에서 손주를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손주가 생기면 데리고 나가 실컷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승아는 광고 촬영 중이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희영에게 한 소리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저혈당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이현은 마침 순찰하다가 승아가 한편에 앉아 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시간관념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무슨 문제가 생긴 걸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죠?”승아의 매니저가 이현을 발견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아 언니 몸이 안 좋아요.”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어제까지 괜찮았잖아요.”매니저가 승아를 힐끔 보더니 투덜거렸다.“오전에 언니 데리고 쇼핑하러 갔었거든요. 대표님께 고맙기도 하고 날씨도 추워져서 코트 한 벌 선물하려고 갔는데 온지유 씨를 만났어요...”승아가 매니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나 괜찮아.”이현은 승아의 창백한 얼굴과 빨개진 눈시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아까
이를 들은 이현이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에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승아는 어딘가 많이 다급해보이는 이현에게 물었다.“지유한테 사고가 났대요.”이현은 승아를 거들떠볼 새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승아는 그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지유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아까 만났을 땐 멀쩡하던 지유가 마침 사고가 났다고?선물한 쇼핑백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고 승아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옆에 선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는 무슨? 그냥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 이렇게 말했다.“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유 씨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진짜 무슨 사고가 났을 수도 있어.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요. 나는 온지유 씨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언니도 참고만 있지 마요. 대표님은 옆자리는 원래 언니였어요. 온지유 씨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고. 온지유 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대표님과 다시 이어졌을 텐데.”매니저는 지유를 깎아내리며 승아 편을 들고 있었다.소식을 듣고 온 곳은 한 호텔이었다. 허둥지둥 위로 올라가 스위트룸에 쳐들어간 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온지유!”들어가 보니 지유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주변을 빙 둘러봐도 위험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현은 방 구석구석 열심히 검사했다. 그러더니 침대맡으로 걸어가 이렇게 소리쳤다.“온지유!”잠에서 깬 지유가 이현을 보고는 일어나 앉았다.“이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아까 여희영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희영이 갑자기 앉아 있는 게 힘들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지유는 여
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아까 본 사람 말이야. 채은이가 맞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을 꽉 붙잡으면서 물었다.“안돼.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불이 그렇게 큰데 혹시나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쩌지?”양시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녀의 여동생도 화재로 죽은 것이었으니 말이다.‘채은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있는데 또 내 부주의로 화재 속에서 죽게 된다면?’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양시은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시은아, 가지 마. 이미 경찰들이 다 막아놔서 들어갈 수도 없어.”나도현은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정말 채은이라면...”“너도 채은이라고 확신 못 하잖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왜 그런 불확실한 걸 위해서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해? 네가 다치면 하민이는 어떡하려고?”나도현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네가 다치면 난 어떡해?’양시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내가 비서를 보내서 찾으라고 할게. 우리는 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는 말에서 양시은은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의 양시은은 몰랐다. 근처에 한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펌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피어난 장미와 같은 미모를 가졌다.만약 양시은이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여인이 바로 양시은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양채은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일부러 풀어준 거죠?”운전석에 앉은 남자한테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은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마요. 다 봤거든요! 한 번 죽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네 언니를 생각해 주는 건가요? 참 눈물겨운 혈연이네요.”“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그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쪽이 뭐라고 변명하든
반지의 경매 최저 가격은 2천만 원이었다. 양시은이 부른 가격은 그 두 배였다.양시은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그녀를 향한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다.그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나도현의 파트너가 아닌 양시은이었다.그녀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지만 양시은이라면 할 만한 선택이었기에 나도현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결국 그 반지는 양시은이 제시한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이 금액은 그녀가 예상했던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럼에도 양시은은 그 가격으로 낙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에서 낙찰된 반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나도현이 그녀 대신 그것을 보관해 주었다.“그 반지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어차피 경매에서 발생한 모든 수익은 자선 단체에 기부된다며?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양시은은 이렇게 되물으며 나도현이 했던 질문을 넘겨 버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빨간 벨벳으로 덮인 반지 상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런 양시은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펴주었다.갑작스러운 손길에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나도현은 이마의 주름이 완전히 펴질 때까지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미간을 찡그린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그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진지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그의 손길에 양시은은 몇 초 동안 얼어 있었다.그러다가 무언가에 이끌려 옆쪽을 힐끗 쳐다본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양채은!”그러자 나도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양시은이 앞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그가 본 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였다.그 여자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매우 마른 체형을 가져서 멀리서 보면 확실히 양채은으로 보였다.나도현은 예전에 조사했던 CCTV 자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양시은의 드레스는 나도현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오프숄더 드레스였는데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양시은은 오랫동안 이런 드레스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계속 거울 앞을 서성이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곤 했다.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잘 어울려요.”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을 뿐이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청나게 잘 어울려.”뒤쪽에서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이 뒤를 돌아보자 나도현이 수트를 입고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입은 건 세트로 나온 커플 의상인 듯했다.양시은은 갑자기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눈치가 빠른 도우미들은 그녀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자리를 떴다.나도현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어울리는 액세서리가 있어야지. 내가 고른 건데 어때?”양시은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액세서리 같은 건 안 해도 돼...”나도현의 태도는 온화한 듯했지만 또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으니 말이다.양시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걸이는 이미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의 눈빛 반짝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역시 예뻐. 내가 생각한 대로야.”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양시은은 그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나도현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가자.”나도현이 양시은을 끌어당겼다.나란히 차에 탑승한 그들은 행사장으로 향했다.시간은 그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사장으로 가는 차들이 모두 질서를 잘 지켰기에 그들은 차가 막히지 않은 상태로 순조롭게 도착했다.전과 다른 점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시은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대부분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나도현 옆에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그때, 누
"시체도 찾았고 얼마 전 장례식마저 치렀는데 양채은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그 두 구의 시체는 누구 것일까?"너무 많은 문제가 풀리지 않자 나도현은 양시은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사람을 찾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일단 차에 타. 돌아가서 얘기하자.”양시은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쯤 잠에서 깬 하민이는 하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나서 낮잠을 잤다.거실 안.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서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그 여자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떠올렸다. 확실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나도현은 돌아오자마자 차준기가 찾아온 놀이공원의 감시카메라를 확인한 후 양시은에게 알려줬다.“내가 확인해 봤는데 양채은의 모습을 보진 못했어. 아마도 네가 잘못 본 것 같아.”“그래?”양시은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과연 그녀의 착각이었을까?“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다시 찾아보라고 할게.”“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양시은은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양채은을 만난 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은 그 순간의 기쁨과 사람을 잘못 봤다는 실망이 번갈아 가며 양시은을 괴롭혔다.나도현이 잔뜩 주눅이 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나는 이만 나가 볼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문이 살며시 닫혔다.양시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에 쥔 휴대전화로 그날 양채은으로부터 걸어온 전화를 찾아보았다. 몇 초밖에 되지 않는 통화 기록이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양채은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양시은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나도현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사를 계속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찾아본 끝에 끝내 단서를 발견했다.그 단서는 어떤 기자가 찍은 사진이었다.처음엔 그 사람을 변장한 연예인으로 착각해서 몰래 사진을 찍었는데 잘못
하민이는 혼자서 회전목마를 신나게 타고 있었고 양시은은 머지않은 곳에 잇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한 거 마셔.”양시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산 거야?”나도현이 가까운 곳에서 열심히 장사하는 직원들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놀이공원에 고객이 세 명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장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양시은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밀크티를 받았다.“고마워.”나도현이 놀랍게도 그녀와 같은 의자에 앉으려 하자 양시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를 옆으로 비켜줬다. 나도현은 우아하고 깔끔한 사람이라 아무리 지쳐도 아무 곳이나 앉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직원들한테 의자 하나 달라고 해도 돼.”“괜찮아, 이렇게 앉는 게 좋아.”나도현이 담담하게 거절했다. 깔끔하고 짧은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자 평소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따뜻해 보였다. 양시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마음을 뺏겼다.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양시은은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그 소리에 양시은의 귓방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이 나서 요리조리 쏘다니던 하민이는 체력이 부족해 점심을 먹기도 전에 지쳐버렸다.나도현은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점심 먹으러 가자. 레스토랑 예약했어. 하민이가 자고 있으니 내가 안고 갈게.”말을 마친 그는 양시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민이를 조심스럽게 그에게 건넸다.나도현은 조심스럽게 양시은으로부터 하민이를 건네 안고 외투로 아이를 덮어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쌀쌀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지만 양시은의 마음속에는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나도현은 기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리고 있었
하민이 말을 들은 양시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네, 도현 아저씨는 하민이에게 아주 많은 선물을 줬어요. 그리고 전 그 할머니도 좋아요.”“그렇구나.”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바로 꿈에서도 보고 싶다던 친아빠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신나 하는 하민이를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때 나도현과 나씨 가문에게 하민이를 숨긴 결정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민이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면 하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하민이가 말하다 말고 누구를 봤는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양시은의 손을 놓고 뛰어갔다.“도현 아저씨!”하민이가 나도현의 품에 와락 안기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 들었다. 평소에 다른 이들에게 얼음처럼 차갑게 굴던 나도현이 하민이를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저씨가 바빠서 이틀 동안이나 하민이를 못 만났는데 엄마 말은 잘 들었어?”“네. 제가 말을 잘 들어서 엄마가 절 데리고 놀러 간대요. 도현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나요?”두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양시은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는 하민이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요 나쁜 아들, 도현 아저씨를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요. 하민이는 엄마도 같이 있어야 되요.”양시은은 부드러운 눈길로 히죽 웃으며 그녀 손을 잡으러 다가오는 하민이를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얼른 타.”양시은은 하민이를 안고 차에 올랐다. 하민이가 엄마와 앉겠다고 해서 조수석에는 사람이 앉지 않았다. 나도현이 운전기사를 불러와서 그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가운데 하민이가 끼어 있으니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았기에 양시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양채은이 세상을 떠난 후로 양시은은 나도현을 더 꺼리게 되었다.예전에는 혼자 있는 것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