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들은 이현이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에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승아는 어딘가 많이 다급해보이는 이현에게 물었다.“지유한테 사고가 났대요.”이현은 승아를 거들떠볼 새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승아는 그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지유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아까 만났을 땐 멀쩡하던 지유가 마침 사고가 났다고?선물한 쇼핑백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고 승아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옆에 선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는 무슨? 그냥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 이렇게 말했다.“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유 씨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진짜 무슨 사고가 났을 수도 있어.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요. 나는 온지유 씨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언니도 참고만 있지 마요. 대표님은 옆자리는 원래 언니였어요. 온지유 씨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고. 온지유 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대표님과 다시 이어졌을 텐데.”매니저는 지유를 깎아내리며 승아 편을 들고 있었다.소식을 듣고 온 곳은 한 호텔이었다. 허둥지둥 위로 올라가 스위트룸에 쳐들어간 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온지유!”들어가 보니 지유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주변을 빙 둘러봐도 위험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현은 방 구석구석 열심히 검사했다. 그러더니 침대맡으로 걸어가 이렇게 소리쳤다.“온지유!”잠에서 깬 지유가 이현을 보고는 일어나 앉았다.“이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아까 여희영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희영이 갑자기 앉아 있는 게 힘들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지유는 여
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우석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튿날.지유가 잠에서 깨보니 이현은 어느새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그는 잠에서 깬 지유를 보고 이렇게 당부했다.“바나나 바나나 우유는 침대맡에 뒀어. 일어나면 마셔.”지유가 침대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디 가요?”잠에서 깨면 바로 집에 가자던 이현의 말이 떠올랐다.“일이 좀 있어.”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가 집에 바래다줄 거야.”지유는 침대 가에 앉은 채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이현은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침대맡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따듯할 때 마셔.”지유는 이를 건네받더니 입술을 오므렸다.“전에 바나나 우유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너만 좋아하면 돼.”지유는 이런 말이 이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몹시 의아했다.그때 이현은 바나나 우유를 보기만 해도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가 말해줘서야 지유는 이현이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지유는 한 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 적이 없었다. 한 모금 쪽 빨아보니 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전에 학교를 다닐 때 시험 전에 긴장을 달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바나나 우유를 한잔씩 마셨고 그러면 기분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현이 싫어한다는 말에 바나나 우유를 끊었다.“맛있어?”이현이 물었다.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이현은 지유가 웃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좋으면 도우미 아줌마한테 집에도 좀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진짜예요?”지유는 이런 이현이 너무 의외였다. 사실 그녀는 쉽게 만족하는 여자였다. 바나나 우유 하나면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현이 이런 변화를 불러왔다는게 신기했다.“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킨 적 있어?”이현은 손을 빼더니 지유가 산 코트로 손을 뻗었다.마침 오늘 기온이 많이 떨어졌고 그가 입은 슈트와도 잘 어울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그러니 진호는 지유에게 전보다 더 예의를 차려야 했다.지유는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안에 있나요?”“대표님은... 들어간 지 얼마 안 됩니다.”진호가 주춤거리며 말했다.지유는 문 앞에 선 기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승아를 위해서라면 늘 이렇게 맹목적이었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진호는 혹시나 지유가 생각이 많아질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사모님, 오해하지는 마세요. 병원에 온건 업무를 위해서예요.”지유가 웃으며 진호에게 말했다.“오해는 무슨,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진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다행이네요.”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해 지유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간 지유는 승아의 매니저 예진을 발견했고 승아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알아냈다.승아는 VIP 병실에 있었기에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병실과 가까워지자 승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왜 나를 살린 거예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살아서 뭐 해. 난 도대체 뭐냐고.”“승아야, 그만해.”이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유의 심장이 덜컹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왜 내가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내 일이라면 일 순위로 생각하고 옆에 있어 줬잖아요. 근데 왜 변해버린 거예요? 오빠가 변한 이상 내가 살아있을 이유는 없어요!”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룻밤 사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이를 본 이현이 얼굴을 굳히더니 승아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승아는 기회를 보고 얼른 이현의 품에 안겼다.사실 지유는 이런 광경을 정말 마주하기 싫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이현이 침대가에 서서 휴지로 승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보였다.승아는 이현의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손에는 링거 바늘도 꽂혀 있었다.겉보기에는 정말 가여워 보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유는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오빠, 나 떠나지 마요.
나진 그룹은 여느 때처럼 평온해 보였고 아무리 둘러봐도 큰 논란이 일어난 회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양시은은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나도현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나도현이라는 이름을 듣고는 살짝 웃었다.“그분은 지금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분이세요. 왜 로펌에 안 가시고 여길 찾아오셨나요?”“안 계시나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아세요?”양시은은 잠시 멍해져서 생각에 잠겼다.‘방금까지도 통화를 했는데 여기 없다고?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디로 갔을까?’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도 나 변호사님의 개인 스케줄까지 알고 있진 않아서요. 궁금하시다면 직접 전화로 연락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양시은은 더 이상 직원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잠시만요. 양시은님 맞으세요?”직원이 조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은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직원은 자신이 양시은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세요?”“나도현 변호사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당부하셨거든요. 만약 양시은님께서 오신다면 사무실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하셨어요.”“그럼 금방 돌아오시는 거죠?”양시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고 혹시나 자기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사무실에서 그를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다.나도현이 미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소파에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약간 엉켜 있었는데 표정에서는 피곤이 가득 묻어났다.그 모습을 본 나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양시은은 꿈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가벼운 터치여서 그저 간지럽기만 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한 번 툭 치고는 이렇게 중얼거렸
“어떤 일자리를 찾으려고?”“모르겠어. 아직 찾고 있는 중이라...”“그럴 거면 그냥 우리 회사로 오는 건 어때?”나도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양시은은 잠깐 당황한 듯싶더니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나도현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예측한 듯 말했다.“결정을 서두르지는 말고. 어느 회사로 가든 월급은 그냥 그 정도일 거야. 우리 회사보다 좋은 대우는 없을 거라는 얘기지.”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나도현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고민하더니 말했다.“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나도현은 양시은을 급하게 재촉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3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세 날 후면 하민이도 유치원에 가게 될 것이니 말이다.그때면 하민을 돌보지 않아도 됐기에 양시은도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그녀는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어떤 곳은 급여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고 어떤 곳은 싱글맘인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다들 그녀가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그러한 차별에 화가 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도현이 제시한 조건이 제일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고민에 빠진 그녀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제 친구 얘기인데 말이죠.”여기까지 들은 온지유는 바로 양시은의 고민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뭘 물어보고 싶으신데요?”“제 얘기가 아니에요.”“알겠어요. 본론부터 말해보세요.”양시은은 한숨을 깊이 내쉬고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전했다.그러자 온지유는 예상보다 더 단호하게 말했다.“뭘 더 고민할 게 있나요? 조건이 좋은 쪽을 골라야죠. 당연한 거 아닌가요?”“정말 제 얘기가 아니라요...”“알았어요, 알았어요. 아무튼 제 뜻은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그저 일자리를 구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냥 상사로 생각하면 돼요.”온지유의 생각을 들은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그래도 양시은은 바로 확답을
양시은의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급히 뛰어가 하민의 상태를 확인했다.“괜찮아? 아프지 않아? 엄마가 호 불어줄게.”“안 아파요. 제 부주의로 이모한테 부딪혔어요...”하민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옷자락을 움켜잡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들고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떠나버렸다.그 여자는 왠지 무섭게 생긴 것 같았다.“마스크를 쓴 데다가 사람이 정상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 찾지 않아도 돼.”나도현이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그의 말을 듣고 양시은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다행히 하민이도 세게 다치지 않았으니 말이다.“너무 과보호하지 마. 이 정도로 넘어지고 부딪히는 건 괜찮아.”“알아. 그냥 쉽게 걱정하던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양시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는 습관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이 작은 사건은 그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민이랑 즐겁게 학용품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그들은 금방 하민이와 부딪혔던 여자가 마스크를 벗고 구석에서 몰래 이 행복한 장면을 찍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에게 필통, 책가방, 연필 등을 사주며 학용품 쇼핑을 마쳤고 그 후 하민이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놀고 나니 지친 하민은 차 안에서 곧바로 잠들었다.계속 하민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양시은은 손이 조금 아팠다. 그녀가 손목을 풀고 있을 때, 나도현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내가 안을게. 집까지 가려면 아직 시간이 좀 걸려. 너도 피곤하잖아.”양시은은 조심스럽게 하민을 그의 품으로 옮겼고 하민이는 나도현의 품에 안겨 편안한 자세를 찾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그 모습을 보고 있는 양시은의 표정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점점 피곤해하던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결국 자신이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잠에 들었고 나도현은 그녀가 편
양시은은 왠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내 착각인가?’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하민은 눈물을 닦던 동작을 멈추고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양시은을 살짝 엿보더니 입을 열었다.“아저씨, 나 방금 잘했죠?”나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잘했어.”하민과 나도현은 동시에 웃었다.점심 식사를 끝낸 후 하민은 또다시 나도현에게 달라붙어 같이 놀자고 했다.양시은은 그를 막고 싶었지만 나도현은 휴대폰을 한 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회의가 취소됐대. 시간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하민은 나도현에게 계속 매달렸고 나도현도 거절하지 않고 저녁이 될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양시은은 어느새 나도현과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나도현을 배웅하며 문을 열어주었다.그는 빨간 벨벳으로 덮인 작은 상자를 양시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너한테 주려고 했던 선물이야.”“이게 뭔데?”“열어보면 알게 될 거야.”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반지를 보는 순간, 그 평범해 보이던 상자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고 양시은은 오늘 하루가 모두 나도현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이런 건 받을 수 없어...”“프러포즈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선물일 뿐이야. 경매품이었던 반지도 좋아했잖아? 그래서 비슷한 걸 골랐어.”나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상자 속 반지는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양시은은 그것이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이 반지는 그녀가 경매에서 샀던 반지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양시은이 경매에서 구입한 반지는 4천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 반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는 반지 중 하나였다.“너무 비싸잖아. 받을 수 없어. 나는 신세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야. 뭐든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양시은은 반지를 도로 나도현에게 돌려
나도현은 그 오렌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그러자 양시은이 본능적으로 접시를 치우려 했다.“아저씨는 오렌지를 안 드신...”“고마워, 하민아. 마침 딱 오렌지가 먹고 싶었거든.”나도현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그러자 양시은은 잠시 멈칫했다.‘음식도 겉보기로 판단하던 사람이 웬일이래? 못생긴 음식이라고는 손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나도현은 외식조차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깜짝 놀란 양시은과는 달리 나도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렌지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하민이에게 예쁘게 잘랐다고 칭찬까지 했다.엄마인 양시은이 봐도 엉망으로 잘린 오렌지였는데 말이다. 그녀조차도 그릇에 있는 오렌지를 보고 아무 칭찬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그녀는 하민을 달래서 방으로 보냈다.그리고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온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어.”“그럼 내가 어떤 태도로 너를 대야 할까?”양시은의 날카로운 반문에 나도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미안... 그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리고 또... 하민이도 이젠 퇴원했으니까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해. 어제 명진 씨가 집에 찾아와서 전해주시더라고.”나도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돌렸다.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깜짝 놀라더니 미소를 지었다.“하민이가 학교에 갈 수 있다고?”선천적인 심장병을 가진 아이가 학교에 가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많은 걱정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었다.학교는 집과 달라서 다치거나 넘어지기도 쉬운 곳이었다.전부터 양시은은 늘 하민의 상태를 걱정해 왔다. 수술 이후에도 여전히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많았고 예전부터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습관은 바꾸기 어려웠다.그녀는 하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다.나도현은 몇 장의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내가 프린트한 서류야. 어느 학교가 마음에 드는지 보고 연락해.”그 서류를 받아 들고 진지하게 살펴보던 양시은은 금방 깨달
“명진 씨?”온지유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띠었다.인명진은 옆에 있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네.”“하민이 보러 온 거예요? 손에 약상자를 들고 있으시길래...”“아니, 시은 씨한테 약을 좀 전해주려고 왔어.”인명진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단히 설명하면서 온지유에게 양시은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시은의 상태를 보러 가고 싶어 했다.하지만 인명진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지금은 많이 안정됐어. 그렇게 심각한 정도도 아니거든. 다만 여동생의 죽음이 시은 씨한테 너무 큰 충격을 안겨줬을 뿐이야. 게다가 그 외의 여러 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그럼 다행이네요.”잠시 양시은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인명진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요즘은 어떻게 지내?”“잘 지내죠. 명진 씨는요?”온지유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병원 일이 바쁘긴 한데 예전보단 나아.”“그래 보이긴 해요. 명진 씨처럼 바쁜 사람은 드물죠. 저는 매일 사소한 일들에 신경 쓰느라 바빠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문제부터 큰 문제까지 다 신경 써야 하니까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온지유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인명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더 많은 건 안도감과 만족스러운 감정이었다. 그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고 그 미소는 인명진이라는 사람 자체를 온화하게 만들어 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고 그는 떠나는 온지유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에야 그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예전처럼 차가운 인명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약을 전해주러 간 인명진 역시 양시은을 보지 못했지
양시은은 의심하는 듯한 나도현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도현아, 너 지금 내 동생을 의심하는 거야?”“그런 뜻은 아니었어.”나도현은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의 표현이 잘못됐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양시은은 듣지 않았다.“나도현... 아니, 강태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채은이가 널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어떻게 채은이를 의심할 수 있어?”“시은아, 그런 뜻은 아니었어...”양시은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나도현에게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언젠가는 양채은을 데려올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나도현의 반응은 그녀를 실망하게 만들었다.양시은은 요즘 와서야 그에게 조금 부드러워진 태도를 보였지만 또다시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내가 잘못했네. 너라면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줄 알았거든? 아니었어. 역시 남자는 믿으면 안 돼.”나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양시은을 붙잡았다.“내가 널 이해하지 못한다고? 시은아, 내가 널 어떻게 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건 양채은이 아니라 너야. 게다가 채은이는 원래부터 좀 의심스러웠어.”“채은이가 왜 지금까지 죽은 척하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봤어?”“네 말 듣고 싶지 않아!”양시은은 또다시 그의 말을 끊었다. 순식간에 치밀어오른 화로 인해 그녀의 호흡이 빨라지며 평소보다 훨씬 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그러자 나도현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미안해...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했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해. 약 안 먹었어? 내가 도우미를 불러서 가져오라고 할게.”말을 마친 나도현은 도우미를 불러 약을 가져오라고 했다.그러자 두 번 크게 숨을 쉰 양시은은 조금 진정됐는지 차갑게 말했다.“괜찮아. 만약 네가 채은이가 돌아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 찾아볼게. 그동안 내가 많이 신세 졌어.”양시은은 계단을 올라가며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아까 본 사람 말이야. 채은이가 맞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을 꽉 붙잡으면서 물었다.“안돼.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불이 그렇게 큰데 혹시나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쩌지?”양시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녀의 여동생도 화재로 죽은 것이었으니 말이다.‘채은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있는데 또 내 부주의로 화재 속에서 죽게 된다면?’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양시은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시은아, 가지 마. 이미 경찰들이 다 막아놔서 들어갈 수도 없어.”나도현은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정말 채은이라면...”“너도 채은이라고 확신 못 하잖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왜 그런 불확실한 걸 위해서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해? 네가 다치면 하민이는 어떡하려고?”나도현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네가 다치면 난 어떡해?’양시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내가 비서를 보내서 찾으라고 할게. 우리는 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는 말에서 양시은은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의 양시은은 몰랐다. 근처에 한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펌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피어난 장미와 같은 미모를 가졌다.만약 양시은이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여인이 바로 양시은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양채은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일부러 풀어준 거죠?”운전석에 앉은 남자한테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은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마요. 다 봤거든요! 한 번 죽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네 언니를 생각해 주는 건가요? 참 눈물겨운 혈연이네요.”“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그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쪽이 뭐라고 변명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