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돼지우리 안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 마을에는... 나 말고도 저렇게 갇혀 있는 여자가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할수록 숨이 턱 막혔다.너무 끔찍했고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과자를 반쯤 먹었을 즈음, 서대수가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여자는 낡고 해진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앙상한 몸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마치 존재를 숨기듯 서 있었다. 서대수는 여자의 등을 거칠게 떠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 지원 씨가 요리 좀 가르쳐달라잖아.”“말 잘 들어. 안 그러면 집에 가서 굶는 수밖에 없을 줄 알아.”문지원은 떨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저릿하게 아팠다. 문지원은 의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감정에 숨을 한번 가다듬은 그녀는 조심스레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문지원은 입술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듯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 저... 얼마 전에 막 시집온 새댁이에요.”“아직 요리를 하나도 못 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좀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그 눈물방울이 땅바닥에 맺히는 걸 보는 순간, 문지원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잠시 후, 여자는 억지로 말을 짜내듯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응...”그 순간, 서대수는 또다시 쾌활한 얼굴로 돌변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잘 좀 가르쳐줘라! 쓸데없는 소리하거나 말 안 들으면... 알지?”멀어지는 발소리. 두 사람은 진씨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한참 떨어져 걸은 뒤 여자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문지원의 손을 확 낚아채듯 뿌리치며 날카롭게 거리를 벌렸다. 문지원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한통속이야. 낮에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밤이 되면 우리를 집 안에 가두고 도망칠 기회조차 없게 만들어.”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문지원의 눈빛은 여전히 결의에 찬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망칠 수 있다면 반드시 희망이 있어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참 순진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니... 예전에 한 여자도 너처럼 여기로 팔려왔었어.” “그 여자는 도망쳤지. 산을 넘어 읍내까지 갔는데... 결국 잡혀서 다시 끌려왔어.” 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꽉 쥐고는 결연히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미 정보를 얻었잖아요. 기회만 잘 잡으면 분명 빠져나갈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까지는... 언니도 최대한 조용히 지내세요. 반항하면 다시 맞을 거예요.”“차라리 그들을 방심하게 만든 뒤 도망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여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화제를 툭 바꾸며 말했다. “아까 요리 배우고 싶다고 했지?” “지금 가르쳐줄게. 도망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 말을 듣고 문지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급히 여자의 팔을 잡고 물었다. “그럼... 언니도 저랑 같이 도망치기로 한 거 맞죠?”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 말대로 지금은 일단 그 사람들 말에 따르자.” “네. 좋아요.” 문지원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서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 없던 문지원은 그녀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여자는 칼을 들어 고구마를 자르며 말했다. “이건 이렇게 손으로 잡고 썰어야 해. 그래야 손 안 베지.” 문지원은 조수현의 말을 따라 하나씩 배워갔다. 같이 칼질을 하던 문지원은 문득 물었다. “맞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여자는 잠시 생각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난 조수현이야.”
문지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말투도 표정도 하나같이 순종적이였다. 그 모습을 본 진수호는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는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눈치는 좀 있네요.” “내가 이런 복이 있을 줄이야. 다리는 절어도...” 그는 절단된 다리를 툭툭 치며 껄껄 웃었다. “이렇게 고우면서 말도 잘 듣는 마누라가 생겼잖아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수호는 문득 물었다. “근데 우리 엄마랑 나래는 어디 갔어요?” 문지원은 조용히 창밖을 가리켰다. “밖에 의사 선생님이 왔대요. 마을 사람들한테 무료 진료해준다길래 다들 몰려갔어요.” “당신 어머니도 혹시 당신 다리를 고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가보셨고요.” 진수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내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요? 그게 진짜면... 나 인생 제대로 풀리는 건데?” 문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 번 가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야죠.”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진수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문앞까지 뛰어갔다. 떠나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잘 들어요. 집 안에 얌전히 있어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 나가면 안 돼요. 알죠?” “혹시라도 도망치면... 다리 못 쓰게 만들 거예요.” 문지원은 진씨 가족의 뻔뻔하고 역겨운 태도에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 어디 안 가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다르니까요.” 그 말에 진수호는 흐뭇하게 웃으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진수호는 금세 마을 어귀까지 달려갔다. 밖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고 곧 김숙희와 여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숙희는 아들을 보자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야! 얼른 와 봐라.” 진수호는 절뚝이며 다가갔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와... 줄이 이렇게까지 길다고? 이러다
“오늘 또 우리 아들 무료로 치료해 줄 의사가 왔네. 이거 하늘이 우리 진씨 집안을 도와주시네.”새로운 며느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석훈은 미묘하게 표정을 찌푸렸다.요즘도 가끔 뉴스에서 젊은 여자들이 이런 산골 마을에 속아 끌려왔다는 기사들을 보곤 했다.그는 태연한 척 슬쩍 떠봤다.“아주머니 운이 그렇게 좋으세요? 어디서 그렇게 예쁜 새댁을 얻으셨다고요?”옆에서 까불거리던 진나래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산에서 길 잃고 헤매던 언니를 제가 구해줬어요. 마침 저희 오빠가 다리를 저는 바람에 장가를 못 가고 있어서 언니한테 은혜 갚으라고 했더니 오빠한테 시집가겠다고 했어요. 그냥 흔쾌히 좋다고 하던데요?”지석훈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 앞에서 신나게 떠드는 이 가족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이건 그냥 그 여자를 도덕적으로 협박해서 붙잡아 둔 거나 마찬가지였다.김숙희는 신이 나서 덧붙였다.“그 여자애 피부는 곱긴 한데 일머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살림도 하고 밭일도 좀 해야 할 텐데. 우리만 고생하면 되겠어요? 그나저나 의사 선생님 우리 아들 다리 좀 먼저 봐줘요. 조금 있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 밥도 먹어야 하니까 빨리 봐줘요.”김숙희가 다급하게 말했다.지석훈은 진수호의 다리를 보기만 해도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 다리는 분명히 골절상이었고 제대로 된 수술을 해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이건 단순히 약으로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지석훈은 그들을 안심시키려 말했다.“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죠. 제가 고쳐드릴 수 있어요.”지석훈이 태연하게 말하자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김숙희는 흥분해서 손까지 덥석 잡으며 말했다.“정말요? 선생님 우리 아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다리가 불편했는데 정말 고칠 수 있단 말이에요?”지석훈은 몸을 움찔하며 손을 급히 빼고 가볍게 기침을 한 후 말했다.“그럼요. 저는 이 마을에서 자주 치료해 왔습니다. 제 실력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어요.”“다만 아직 치료해야 할 환자가 몇 명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
“오늘 또 우리 아들 무료로 치료해 줄 의사가 왔네. 이거 하늘이 우리 진씨 집안을 도와주시네.”새로운 며느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석훈은 미묘하게 표정을 찌푸렸다.요즘도 가끔 뉴스에서 젊은 여자들이 이런 산골 마을에 속아 끌려왔다는 기사들을 보곤 했다.그는 태연한 척 슬쩍 떠봤다.“아주머니 운이 그렇게 좋으세요? 어디서 그렇게 예쁜 새댁을 얻으셨다고요?”옆에서 까불거리던 진나래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산에서 길 잃고 헤매던 언니를 제가 구해줬어요. 마침 저희 오빠가 다리를 저는 바람에 장가를 못 가고 있어서 언니한테 은혜 갚으라고 했더니 오빠한테 시집가겠다고 했어요. 그냥 흔쾌히 좋다고 하던데요?”지석훈의 미간이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 앞에서 신나게 떠드는 이 가족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이건 그냥 그 여자를 도덕적으로 협박해서 붙잡아 둔 거나 마찬가지였다.김숙희는 신이 나서 덧붙였다.“그 여자애 피부는 곱긴 한데 일머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살림도 하고 밭일도 좀 해야 할 텐데. 우리만 고생하면 되겠어요? 그나저나 의사 선생님 우리 아들 다리 좀 먼저 봐줘요. 조금 있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 밥도 먹어야 하니까 빨리 봐줘요.”김숙희가 다급하게 말했다.지석훈은 진수호의 다리를 보기만 해도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 다리는 분명히 골절상이었고 제대로 된 수술을 해야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이건 단순히 약으로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지석훈은 그들을 안심시키려 말했다.“이 정도면 아무것도 아니죠. 제가 고쳐드릴 수 있어요.”지석훈이 태연하게 말하자 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김숙희는 흥분해서 손까지 덥석 잡으며 말했다.“정말요? 선생님 우리 아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다리가 불편했는데 정말 고칠 수 있단 말이에요?”지석훈은 몸을 움찔하며 손을 급히 빼고 가볍게 기침을 한 후 말했다.“그럼요. 저는 이 마을에서 자주 치료해 왔습니다. 제 실력은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어요.”“다만 아직 치료해야 할 환자가 몇 명
문지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말투도 표정도 하나같이 순종적이였다. 그 모습을 본 진수호는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리며 웃었다. 그는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눈치는 좀 있네요.” “내가 이런 복이 있을 줄이야. 다리는 절어도...” 그는 절단된 다리를 툭툭 치며 껄껄 웃었다. “이렇게 고우면서 말도 잘 듣는 마누라가 생겼잖아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수호는 문득 물었다. “근데 우리 엄마랑 나래는 어디 갔어요?” 문지원은 조용히 창밖을 가리켰다. “밖에 의사 선생님이 왔대요. 마을 사람들한테 무료 진료해준다길래 다들 몰려갔어요.” “당신 어머니도 혹시 당신 다리를 고쳐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가보셨고요.” 진수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내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요? 그게 진짜면... 나 인생 제대로 풀리는 건데?” 문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 번 가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야죠.”다리를 고칠 수 있다는 말에 진수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문앞까지 뛰어갔다. 떠나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잘 들어요. 집 안에 얌전히 있어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 나가면 안 돼요. 알죠?” “혹시라도 도망치면... 다리 못 쓰게 만들 거예요.” 문지원은 진씨 가족의 뻔뻔하고 역겨운 태도에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 어디 안 가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다르니까요.” 그 말에 진수호는 흐뭇하게 웃으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진수호는 금세 마을 어귀까지 달려갔다. 밖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고 곧 김숙희와 여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숙희는 아들을 보자 손을 흔들며 외쳤다. “여기야! 얼른 와 봐라.” 진수호는 절뚝이며 다가갔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와... 줄이 이렇게까지 길다고? 이러다
“여기 사람들은 전부 한통속이야. 낮에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밤이 되면 우리를 집 안에 가두고 도망칠 기회조차 없게 만들어.”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문지원의 눈빛은 여전히 결의에 찬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도망칠 수 있다면 반드시 희망이 있어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참 순진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니... 예전에 한 여자도 너처럼 여기로 팔려왔었어.” “그 여자는 도망쳤지. 산을 넘어 읍내까지 갔는데... 결국 잡혀서 다시 끌려왔어.” 문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꽉 쥐고는 결연히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면 안 돼요. 우리는 이미 정보를 얻었잖아요. 기회만 잘 잡으면 분명 빠져나갈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까지는... 언니도 최대한 조용히 지내세요. 반항하면 다시 맞을 거예요.”“차라리 그들을 방심하게 만든 뒤 도망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여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화제를 툭 바꾸며 말했다. “아까 요리 배우고 싶다고 했지?” “지금 가르쳐줄게. 도망 얘기는 나중에 하자.” 그 말을 듣고 문지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급히 여자의 팔을 잡고 물었다. “그럼... 언니도 저랑 같이 도망치기로 한 거 맞죠?”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 말대로 지금은 일단 그 사람들 말에 따르자.” “네. 좋아요.” 문지원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태어나서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 없던 문지원은 그녀와 함께 부엌으로 향했다. 여자는 칼을 들어 고구마를 자르며 말했다. “이건 이렇게 손으로 잡고 썰어야 해. 그래야 손 안 베지.” 문지원은 조수현의 말을 따라 하나씩 배워갔다. 같이 칼질을 하던 문지원은 문득 물었다. “맞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여자는 잠시 생각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난 조수현이야.”
그 여자가 돼지우리 안에 갇혀 채찍질을 당하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문지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 마을에는... 나 말고도 저렇게 갇혀 있는 여자가 얼마나 더 있을까?’ 생각할수록 숨이 턱 막혔다.너무 끔찍했고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과자를 반쯤 먹었을 즈음, 서대수가 고개를 푹 숙인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여자는 낡고 해진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앙상한 몸에 헝클어진 머리까지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마치 존재를 숨기듯 서 있었다. 서대수는 여자의 등을 거칠게 떠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 지원 씨가 요리 좀 가르쳐달라잖아.”“말 잘 들어. 안 그러면 집에 가서 굶는 수밖에 없을 줄 알아.”문지원은 떨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저릿하게 아팠다. 문지원은 의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심장이 조여오는 듯한 감정에 숨을 한번 가다듬은 그녀는 조심스레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문지원은 입술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듯 여자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 저... 얼마 전에 막 시집온 새댁이에요.”“아직 요리를 하나도 못 해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좀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툭 떨어뜨렸다.그 눈물방울이 땅바닥에 맺히는 걸 보는 순간, 문지원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잠시 후, 여자는 억지로 말을 짜내듯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응...”그 순간, 서대수는 또다시 쾌활한 얼굴로 돌변해 떠나기 전 그녀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잘 좀 가르쳐줘라! 쓸데없는 소리하거나 말 안 들으면... 알지?”멀어지는 발소리. 두 사람은 진씨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한참 떨어져 걸은 뒤 여자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문지원의 손을 확 낚아채듯 뿌리치며 날카롭게 거리를 벌렸다. 문지원은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서대수는 문지원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고 그 눈빛 속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문지원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근하죠. 숙희 아주머니가 대수 씨 정말 능력 있고 남자답다고 항상 칭찬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왜 아내분은 대수 씨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좋은 남자를 두고도 몰라보다니...”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칭찬해주자 서대수는 무릎을 탁 치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맞는 말만 하시네요. 저 여편네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요.” “나처럼 이렇게 좋은 남자가 또 어디 있겠어요...”서대수는 점점 분노를 느끼며 말을 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게 아니라 눈이 멀 정도로 어두운 거죠.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라는 걸 모르다니...” “모두가 당신처럼 눈을 뜨고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문지원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안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내분은 어디 계세요?” “그 여자요?”서대수는 콧방귀를 끼며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여자, 말을 안 들어서 지금 돼지우리 안에 갇혀 있어요.” 문지원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얼굴 색이 급격히 바뀌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여편네 얘긴 왜 꺼내시는 거예요? 괜히 기분만 상하게...” 말을 끝나자 서대수는 금세 웃으며 기분을 풀었다. “시간 내서 와주셨으니 우리 집에서 뭘 좀 먹고 가세요.” “며칠 전에 어머니가 읍내에서 간식을 사왔는데 한번 드셔보세요.” 문지원은 진씨 집에 온 뒤로 고기 한 점 제대로 못 먹은 지 오래라 속이 허전했다. “그럼 대수 씨, 잘 먹을게요.”서대수는 문지원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꽤 좁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대수는 서랍에서 과자 한 상자와 작은 간식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문지원에게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주며 친절하게 말했다. “자, 따뜻한 물 한 잔 드세요.”그는 문지원
“틀린 말은 아니네.” 김숙희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으며 떠나기 직전 문지원의 얼굴을 가리키고는 낮게 경고했다. “너, 이 마을 사람들이 다 한통속이라는 거... 이제 슬슬 눈치 챘겠지?”“이웃끼리 워낙 끈끈해서 말이야. 네가 발만 슬쩍 빼도 금세 내 귀에 들어온다?”“우리가 이렇게까지 챙겨줬는데도 네가 끝까지 도망치겠다고 나선다면... 그땐 돼지우리에서 콕 처박혀야 할 거다.”“그때 가서 우리가 너무하다느니, 냉정하다느니 해봤자 소용없어. 그건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이런 식의 협박은 문지원이 TV에서나 보던 장면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에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이 판국에 괜히 발끈했다가는 맞아죽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그냥 얌전한 며느리 코스프레나 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도망 안 가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문지원은 어린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등 뒤로 감춘 손을 악착같이 움켜쥐었다. “나래가 저를 구해줬잖아요.”“저도 진씨 가문에 꼭 보답하고 싶어요.”문지원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말에 김숙희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별다른 수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싸늘하게 비웃었다. “쓸데없는 꿍꿍이 부릴 생각 마.”“경고하는데 우리 집 사람들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쏘아붙이듯 말을 마친 김숙희는 진나래의 손을 잡았다. “가자. 아가.”“듣자 하니 그 의사가 꽤 유명하다더라. 진짜로 네 오빠 다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그러면 우리 집안엔 또 한 번 경사가 나는 거지.”진나래는 오빠의 불편한 다리를 떠올리자 어느새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맞아요... 오빠는 그 다리 때문에 정말 많은 걸 견뎌야 했어요.”“이제 다리만 나으면 남들 눈치 보며 살 필요도 없고...”그녀는 문지원을 돌아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 예쁜 언니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다들 부러워서 입이 딱 벌어질 거예요.”그때, 김숙희는
“뭘 번거롭게 식을 올리려고 하는 거니? 내가 네 아빠한테 시집왔을 때는 그냥 머리에 면사포 하나만 두르고 왔어. 그 면사포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김숙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둘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겉치레에 신경 써?”웨딩드레스니 뭐니 들어만 봐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았다. 그들의 집안 형편은 좋지 못했다. 그동안 모은 돈도 400만 원 되지 않았고 결혼식에 전부 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문지원이 핸드폰에 배터리가 남아 있는 틈을 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사진을 검색해 진나래에게 보여주었다.“네 오빠가 이런 턱시도를 입으면 분명 엄청 멋있을 거야.”“와! 옷이 너무 예뻐요. 언니는 원래도 이쁘니까 이런 옷을 입으면 완전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 될 거예요.”진나래는 바로 감탄했다.“이 옷을 사면 나중에 저도 빌려 입을 수 있어요?”“당연하지.”어차피 문지원이 원해서 하는 결혼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사진을 보여준 뒤 진나래의 마음을 움직여 가족들을 설득해주길 바랐다.그녀의 예상대로 진나래는 웨딩드레스를 사달라고 졸랐고 진수호도 턱시도를 입고 싶다며 말했다. 자식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김숙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문지원이 조금 전 꺼낸 돈도 있지 않은가.김숙희는 그간 모은 돈을 전부 진수호에게 주었다.“내일 혼자 시내로 가서 사와. 이 돈을 다 쓰지는 말고. 조금이라도 남겨. 우리 집에서 키우는 닭도 몇 마리 안 되는데 남은 돈으로 돼지고기라도 사와야 하니까.”“알았어요.”진수호는 원래부터 문지원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을 보니까 핸드폰으로 물건도 사고 그러던데, 지원 씨 핸드폰에도 돈이 있어요? 있는 거면 내일 내가 은행 가서 찾아올게요. 나랑 결혼하는데 나만 돈을 쓰는 건 불공평하잖아요.”문지원은 이미 진수호의 행동에서 뿌리 깊게 내린 악을 발견했다. 진수호는 부녀자를 유괴했을 뿐 아니라 스스럼없이 돈도 요구하고 있어
진나래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고기 몇 점 더 먹는다고 살이 찌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전 명절에 매일 돼지고기만 먹었는데도 살이 안 쪘거든요.”문지원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런 가정에서 평소에 매일 고기를 먹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명절이 되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는 간식은 물론이고 인스턴트 음식도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이 찔 수가 있단 말인가.그녀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살이 찔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진나래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녀가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너무도 미웠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그녀는 밥그릇에 있는 고기를 먹어버렸다.김숙희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그렇게 몸매에 집착할 것 없어. 많이 먹어야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야. 아들 낳고 나서 살을 빼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너와 수호가 이 방에서 자. 어차피 이젠 내 아들과 살림을 차려야 할 텐데 일찌감치 한방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나한테는 며느리니까 말도 놓을게. 얼른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주면 좋겠구나.”그 순간 문지원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비록 순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외진 마을에 갇혀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는 건 싫었다. 그녀의 아이가 이런 곳에 태어나 비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오늘부터 같이 밤을 보내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문지원은 일부러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저희 집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외간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저희 부모님께서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거든요.”“그럼 지금도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진수호는 눈에 띄게 흥분했다. 이렇게나 예쁜 여자가 자신의 여자로 되었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났든 신경 쓰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