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지유는 병실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픔을 안은 채 병원을 나섰다.“지유야!”지희는 창백한 지유의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를 보며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시간이면 출근 중이었을 텐데 이거 산재 아니야?”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은?”“몰라.”지희는 어딘가 이상한 지유의 표정에 그녀가 머리만 다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다치기까지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말이 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편이네.”“곧 남편도 아니야.”“뭐? 이혼하재?”지희의 표정이 삭 변했다.“내가 이혼하고 싶은 거야.”이에 지희의 태도가 또 한 번 변했다.“그래, 지금 당장 해!”지희가 경고했다.“재산 절반 나눠 가지는 거 잊지 말고. 총명한 여자라면 사람을 가질 수 없으면 돈이라도 가져야지. 돈이 있는데 좋은 남자를 못 찾겠어? 위자료 받으면 찾을 수 있는 만큼 찾는 거야. 착한 놈, 잘 챙겨주는 놈 찾아서 맨날 대접받고 사는 거지.”사실 처음부터 계약뿐인 결혼이라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차례지는 게 없었다.“지유야.”지희가 갑자기 지유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왜 갑자기 이혼을 결정한 거야?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여이현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지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기사 못 봤어? 노승아 씨 귀국했잖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붙어먹은 거야?”지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현을 계속 헐뜯었다.“혼내 외도라, 그럼 죄가 더 무거워지는 거지. 위자료 더 받을 수 있겠다. 지유야, 진짜 경고하는데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 결혼이 유효한 이상 여이현의 재산 중 절반은 네 거야. 그래 뭐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 정도는 있겠지. 게다가 외도라니, 못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판
이현은 일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했기에 실수는 용납하지 못했다.하지만 지유를 탓해서는 안 된다. 이현은 어제 병원에서 승아를 지켰다.“대표님이 먼저 바쁘다고 전화를 끊었잖아요.”이현이 멈칫하더니 입을 앙다물었다.“어떻게 처리한 거죠?”그때 지유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처리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온지유 비서.”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전에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었던 거 같은데요.”이현은 일부러 온지유 비서라는 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신분은 비서이지 아내가 아니라고 각인시켰다.지유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시공은 영향받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대처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문제가 생기면 핑계를 찾기보다 해결해야죠. 전에 제가 한번 귀띔해 줬을 텐데.”이현의 말투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지금 당장 회사로 오세요.”이 말을 뒤로 이현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지유는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공사장의 상황을 신경 쓰지 못 했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지유는 얼른 정리하고 회사 갈 준비했다.그제야 잠에서 깬 지희는 지유가 분주하게 돌아치자 하품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어디 가려고?”“일이 좀 생겨서 회사에 가봐야 해.”“지금 이 상황에 왜 아직도 그 사람 신경 쓰는 거야?”지희가 노발대발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하긴, 이혼 서류 이미 여진그룹에 보냈어.”지유는 신발을 갈아신으며 대꾸했다.“이미 보냈어?”“응, 퀵으로 아침 일찍 보냈어. 아마 여이현도 봤을걸?”지희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지유가 이혼한다고 하자 속전속결로 바로 진행했다.언젠가는 이혼할 텐데 빨리하든 늦게 하든 사실 달라질 게 없었다.“그래, 어차피 할 이혼인데.”지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지유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앞으로 네 덕 좀 봐서 잘사는 여자 좀 해보자. 지유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온 비서님.”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대표님.”지유가 그를 불렀다.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건 뭐야?”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온지유!”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네?”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확인해.”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채은아, 정말 고마워.”양시은은 억지웃음을 지었다.그녀는 몸을 곧추세우고 양채은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막 발을 떼는 순간 허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아까 나도현이 그녀를 너무 거칠게 다뤘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푸는 데만 급급해서 그녀가 어떻게 느낄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양채은은 바로 눈치채고 먼저 그녀 팔을 부축했다.“언니, 또 허리 디스크가 도진 거야?”“응... 맞아.”양시은은 애매하게 넘겼다. 그러자 양채은은 더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언니 몇 년간 죽어라 일하고 알바 뛰느라 허리디스크가 심해진 거잖아. 예전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이제는 나랑 강태 씨가 있어.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양시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양채은은 강태경이 나타나면 그녀가 한결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존재는 그녀에게 더 큰 짐이 될 뿐이었다.방에 들어선 뒤 양채은은 옷장을 열어 실크 이불 세트를 꺼냈다.“이것도 태경 씨가 언니 주려고 준비한 거야. 말주변이 없어도 세심한 사람이거든.”‘나도현이 말주변이 없다고?’이건 양시은이 살아오면서 들어 본 말 중 제일 우스운 이야기였다.법정에서는 누구도 그의 기세를 이기기 어렵고,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땐 몇 마디로 그녀를 뒤흔들어 놓았다. 오늘 약혼식 때도 그는 단 몇 마디로 그녀를 간담 서늘하게 만들었다.이런 남자를 어떻게“말주변이 없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아마도 그는 그저 양채은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다면 둘 사이에 대화가 아예 없을 텐데 애정은 대체 어디서 생겼을까?양채은이 그에게 완전히 속은 게 분명했다.양채은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불을 펴면서 연애담을 들려주듯 말했다.“산부인과랑 담당 의사 정하는 것까지 전부 태경 씨가 알아봐 줬어. 가끔 나도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이런 남자를 만났지 싶다니까.”“양채은.”더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양시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정말 그
나도현은 다이아몬드만 보면 양시은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사랑, 그리고 어리석기 짝이 없던 과거의 자신까지.“고마워!”양채은은 기쁨에 겨워 외쳤다. 하지만 나도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의 귀에 바짝 다가가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후벼 파듯 말했다.“네 동생이랑 결혼 예물 사러 갔을 때, 금반지는 금값을 따지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중고로 고르더라. 그땐 왜 이렇게 가성비를 따지나 했는데, 결국 그 돈을 너한테 주려고 그랬던 거지?”‘중고라니...’양시은의 눈물은 더욱 거세게 흐르기 시작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채은아... 넌 왜 이렇게 착하고, 또 멍청할 정도로 헌신적이야...’나도현은 그녀가 몸을 떨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말은 더욱 양채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근데 말이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평소에 넌 어떻게 네 동생을 세뇌하는 거야? 같은 집안인데 성격이 완전 정반대잖아. 때로는 채은이가 너무 순진해서 나도 함부로 못 대하겠어.”실제로 그는 양채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친밀한 스킨십도 전혀 없었다.그런데 양시은은 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 머릿속에는 나도현이 말한 것보다 훨씬 끔찍한 장면만 그려지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나도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옷매무새를 고치던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채은이가 네 방을 우리 바로 옆방에 잡아 놨어. 오늘 밤에 깨끗이 씻고 기다려. 내가 갈 거니까.”양시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아무리 방음 좋은 저택이라 해도 벽 하나 떨어진 곳이 얼마나 막아줄까.양채은은 잠귀가 밝아서 밖에 고양이가 울어도 깰 정도다.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나도현, 넌 진짜 미쳤어.”그녀는 처참한 몰골로 이를 악물고 그를 저주하듯 내뱉었다.나도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특별한 말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역시 미친 게 맞았다.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벌써 양시은을 잊고 새출발을
“아니야.”양시은의 두 손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나도현은 그녀가 돈을 받아서 막 써버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실 100억 중 양시은 손에 떨어진 건 단 한 푼도 없었다.아픈 아이 병원비 역시 전부 그녀가 직접 벌어서 조금씩 마련한 거였다.물론 나도현은 이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됐고, 내 앞에서 억지 부리지 마. 난 다른 남자랑 달라. 네가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다고 넘어가지 않는다고. 내 직업 잊지 마.”변호사로 일해 온 그는 온갖 사건을 다뤘다. 어떤 의뢰인은 변호사를 앞에 두고도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기도 한다.그래서 그는 거짓말을 가려내는 능력을 오래전에 익혔다.하지만 정작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의뢰인을 상대할 때는 이성적으로 대응하면서도, 양시은을 대할 때만큼은 감정이 먼저 튀어나온다는 사실 말이다.감정이 치고 올라오면 이성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 내가 뭘 어떻게 말해도 너한테는 전부 거짓말로밖에 안 들릴 텐데, 말해 봐야 소용 있겠어?”양시은은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그녀는 몇 년 동안 줄곧 힘든 삶을 살아왔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가장 괴로운 법이다. 거기에 경제적 압박까지 겹쳤다.이제는 양채은까지 챙겨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나도현은 그녀를 몰아붙이기만 했다. 순간 양시은은 베란다 난간에서 그냥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러나 곧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내가 죽으면 누가 그 아이를 진심으로 보살펴 줄까?’그 생각에 바로 마음을 접었다.“양시은, 지금 나한테 말대답하는 거야?”나도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는 양시은을 난간 쪽으로 밀치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려고 했다.“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마. 어차피 네가 떠드는 건 하나도 들을 가치가 없으니까.”“안 돼... 이러지 마!”양시은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다음 순간, 짝 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나
“언니,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내가 가서 문 열고 올게.”양채은은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온 사람은 역시 나도현이었는데 손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있었다.“태경 씨, 뭘 이렇게 많이 챙겨왔어요? 그냥 몸만 오면 되는데... 얼른 들어와 앉아요. 제가 차 한 잔 따라줄게요.”양채은은 서둘러 그의 손에서 쇼핑백을 받았다.나도현은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양시은 바로 옆에 앉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더니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양채은을 바라보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채은아, 임신했으면 쉬어야지. 그런 건 네가 안 해도 돼. 내가 하면 되니까.”“제 몸 상태는 제가 알아요. 지금 입덧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태경 씨가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저까지 챙기게 할 수는 없죠.”양채은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나쁜 나도현을 챙겨주고 싶은 것도 있고, 언니인 양시은을 돕고 싶은 것도 있었다.일반 남자라면 양시은과 같은 언니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겁먹고 도망갔을 것이다. 경제적인 지원은 상상도 못 한다.나도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점점 대담해져서 양시은의 치마를 걷어 올리려 했다.양시은은 겁에 질려 두 다리를 바짝 모았고 눈가가 또다시 촉촉해졌다.“하지 마...”“뭘 하지 말라는 건데? 크게 말해 봐. 나처럼.”나도현은 한 손으로 양시은의 손을 붙잡고, 다른 손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그가 검지와 엄지를 살짝 움직이자 속박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 같았다.“그만...”“날 두고 다른 남자랑 있을 때도 이렇게 부끄러워했어?”나도현은 이를 악물었다.반면 양시은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에게 남자는 나도현 한 명뿐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손조차 잡아본 적 없었고 이런 친밀한 행동은 더더욱 없었다.지금은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게서 벗어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옆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하민이 수술비가 필요하다면 양채은도 똑같이 산전 검사할 돈이 필요했다. 그녀가 돈을 가져가면 양채은은 어떡하란 말인가?“안 될 게 뭐가 있어! 하민이 살리는 게 중요하지. 남도 아니고 왜 나랑 이런 걸 따지고 그래.”양채은은 추호도 물러서지 않고 은행카드를 억지로 건넸다. 양시은은 계속해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양채은이 기분 상한 티를 냈다.“언니,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우리 바로 쓸 수 있는 돈이 적은 건 사실이야. 근데 여기 별장도 있듯이 병원에 못 갈 정도로 가난해질 일은 없어.”양시은은 걱정되는 것이 있어도 어떻게 말하지 못했다. 나도현에게 별장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정도 돈도 쉽게 꺼낼 수 있었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이렇듯 컸다. 한 사람은 하늘에, 한 사람은 땅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컸다.만약 나도현이 원한다면 하민의 치료비는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봤을 때 도와줄 것 같지 않았다.하민이 일을 말해 봤자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비아냥대기만 할 것 같았다.“아무튼 이 돈을 일단 받아. 내가 내일 보석 좀 팔든지 할 테니까. 있어봐, 보여줄게.”양채은은 침실에 달려가서 주얼리를 담은 박스를 가져왔다. 그 안에는 금도 있고 다이아몬드도 있었다. 디자인은 전부 흔히 보이는 것들이었다.양채은의 취향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녀가 황궁에서 쓸법한 화려한 주얼리를 좋아한다는 건 양시은도 알았다.“전에 일부러 금값이 좋을 때 사러 갔었어. 이름값으로 돈 낭비하지 않게 유명한 브랜드도 아니고. 어차피 순금이니까 브랜드든 아니든 파는 값은 같을 거 아니야.”양채은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 아낄 줄 아는 자신이 내심 뿌듯한 모양이었다.반대로 양시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눈물을 펑펑 흘려댔다.“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난 아무것도 못 해주는데...’자신은 양채은과 같은 동생이 있을
“채은아, 너 정말 진심으로 저 사람을 좋아해?”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는 동생에 양시은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어쩌면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길게 아파하는 것보다 짧게 아파하고 끝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그녀의 말에 양채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언니, 설마 지금 나란 태경 씨 헤어지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고 있어. 난 정말로, 진심으로 태경 씨를 사랑해. 태경 씨는 나한테 흠잡을 데 없이 아주 잘해주거든. 언니가 남자도 믿지 않고 사랑도 믿지 않는다는 거 알지만 곧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한테는 다르지. 난 내 아이가 아빠 없이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아.”양채은은 그녀의 손을 잡아 아기가 있는 배 위에 올렸다.“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나고 있어. 그래서 난 아기를 위해서라도 태경 씨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미 약혼식도 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태경 씨와 함께 살 거야.”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양시은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그녀도 사랑해본 적 있었기에 사랑에 빠진 그 기분을 당연히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도현은...“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남은 건 집에 가서 해. 늦었는데 이젠 집으로 가야지.”나도현이 저벅저벅 걸어온 뒤 양채은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나란히 섰다.양시은 두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프런트를 지나칠 때 양채은은 다가가 계산하려고 했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당연하게도 나도현의 카드였다.양시은은 자리에 멈춰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도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두 사람은 넓은 로비에 서 있었던지라 양채은이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양시은은 놀란 고양이처럼 황급히 그의 손을 쳐냈다.“이러지 마.”“그럼 밤에 얌전히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자꾸 거슬리게 하지 말라고.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나도현은 그녀를 난처하게 하
나용민과 박은희는 쉽게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현의 결혼 문제에 있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의 집안이었는데 지금 나도현이 결혼하려는 여자는 특별한 배경도 없었고 그렇다고 잘사는 집 딸도 아니었다.그런 그들이 어떻게 양채은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는가.“아니. 잊지 마, 네가 해외에서 사고 쳤을 때 누가 수습해줬는지. 설마 날 배신해서 우리 부모님께 알릴 건 아니겠지?”나성원은 바로 고개를 저으며 충성심을 보여주었다.“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요. 설령 우리 아버지를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형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오늘 이 일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긴 할 거지만... 아무리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평생 숨길 수는 없을 거예요. 형 부모님이 언젠가 아시게 될 거예요.”이미 나용민과 박은희는 아들에게 맞선 상대를 알아봐 주고 있었고 어떻게든 잘사는 집안의 딸과 엮어주려고 할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화를 낼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좋은 나날을 보내지 못할 것이다.“네가 입단속만 잘하면 돼. 난 너 빼고 가족 중 아무도 안 불렀으니까. 그러니까 날 실망시키지 마.”나도현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툭 치자 나성원은 등골이 서늘해졌다.“하하, 알겠어요. 형.”그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주위를 두리번대며 구경하고 나니 더 머리가 지끈거렸다.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하필이면 이때 박은희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성원아, 내가 지금 도현이 맞선 상대를 골라주고 있는데 네가 좀 봐주렴. 너희 같은 젊은이들이 어떤 아가씨를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겠구나.]곧이어 여러 타입의 여자 사진들이 도착했고 그중에는 귀염, 섹시, 성숙한 유형도 있었다.사진 속 여자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하나였고 전부 잘사는 집안의 딸이라는 것이다.그는 대충 사진을 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드레스를 입은 양채은을 본 후 에둘러 답장했다.[사실 저는 형이 좋아하는
“태경 씨, 방금 우리 언니랑 무슨 말을 했어요?”손님맞이를 끝낸 양 채는 이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오늘은 언니에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날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만약 언니가 강태경을 탐탁지 않아 하면 어쩌나 생각하면서 말이다.나도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간단히 인사를 나눴어.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언니는 너한테 어떤 사람이야?”“언니는 나한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착한 사람이에요. 저한테 엄청 잘해주기도 하고 언니는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아요. 근데 조금 아쉬운 게 있죠.”뭔가가 떠오른 양채은이 한숨을 내쉬자 나도현은 얼른 캐물었다.“왜? 나한테 말해주면 안 돼?”“어차피 이제 한 가족이니까 못 말할 것도 없죠. 언니한테는 아주 사랑하던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헤어졌죠. 그 일로 언니는 한동안 슬픔에 빠져나오지 못했어요.”그 남자만 언급하면 양채은은 안색이 좋지 못했다.두 사람이 왜 헤어졌는지는 양시은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그녀도 몰랐다.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언니는 너무 착하고 그 사람을 너무 사랑했으며 헤어진 후 몇 년 동안 힘들어하며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다.그런 것을 보면 분명 그 남자가 언니에게 상처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하고도 남았고 둘째까지 낳고 살았을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의 말에 흥미를 느껴 조금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양채은은 아는 게 없었고 흥미가 사라지고 말았다.“참, 태경 씨. 우리 언니가 사는 집의 집주인이 갑자기 방을 빼라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방을 빼면 갈 곳도 없고 다시 새로 집을 구하기도 힘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언니를 우리가 사는 집에 들어와 살게 해도 될까요? 마침 저도 임신해서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양채은은 설령 그가 거절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바로 허락해 주었다.“네 언니면 내 누나기도 하지. 그냥 들어와서
나도현은 일부러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더 가까이 다가간 뒤 물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 양채은에게 달려가서 헤어지자고 할까? 방금 우리 둘이 했던 그 짓도 말해주고 양채은을 병원으로 끌고 가서 아기를 지우라고 하면. 그럼 만족할 거야?”“아니야!”양시은은 다급하게 반박했지만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채은이 배 속에 있는 아기는 네 자식이라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양채은은 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으로 여겼다. 그걸 알고 있었던 그녀는 절대 양채은의 꿈이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그럼.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나도현은 다시 굽혔던 몸을 피곤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아까 그 용기로 네 생각을 말해 봐. 양시은.”“내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갚을 거야. 원하는 금액을 말해줘.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않는 거야. 앞으로 채은이한테도 잘해줘. 나는 그냥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면 돼. 아니면 내가 여기를 떠날게. 외국이든 어디든 떠나서 절대 네 앞에 나타나 거슬리게 하지 않을게.”양시은은 간절하게 말했다.그녀와 나도현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 그와 양채은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의 미간이 점점 더 구겨지고 두 눈엔 분노가 짙어졌다.한참 지나자 그는 분노에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정말 꿈도 크다. 덕분에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만약 노벨상에 엉뚱상이 있다면 넌 반드시 받을 거야.”양시은은 묵묵히 고개를 푹 숙였다.그녀는 방금 자신이 한 말들이 분명 나도현에게 하찮게 보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경성 최고의 엘리트 변호사로서 그가 받는 월급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났고 집안에도 돈이 많았다...그러나 문제는 적디적은 돈 말고는 지금 그녀가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난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