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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류한나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

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

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

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

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

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

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

여진숙이 답했다.

“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

“그런 뜻 아니에요.”

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

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

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

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

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소파에 앉았다. 여진숙은 승아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겨주며 자상하게 웃었다. 지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지유는 불편한 마음을 꾹꾹 참으며 승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승아는 손으로 찻잔을 살짝 건드렸다.

지유는 차가 뜨거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승아가 다치는 게 싫어 얼른 막으려 했지만 승아가 찻잔을 그대로 엎었고 그렇게 승아의 손에 차가 쏟아졌다.

스읍.

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승아의 비명이 들렸다.

“아악!”

소리를 들은 여진숙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승아는 눈물이 글썽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빨갛게 부어오른 승아의 손을 보며 여진숙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손에 지유는 맞고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진숙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승아 피아노 연주하는 거 몰라? 화상이라도 입으면, 그 가정 형편에 병원비는 낼 수 있겠어?”

여진숙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유는 볼이 얼얼했지만 마음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혼자 쏟은 건데,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진숙이 그런 지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따박따박 말대꾸는! 거기 누구 없어? 당장 저년 가둬!”

여진숙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우미 둘이 지유를 잡아당겼다.

순간 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하지만 그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렇게 지유는 컴컴한 방으로 끌려갔다.

안에 던져진 지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미 잠겨버린 문을 두드리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유는 순간 모든 힘이 풀렸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근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서움을 이겨내려 했다.

거실에 둔 지유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승아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여진숙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화면에 뜬 이현의 이름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응, 이현아.”

수화기 너머로 이현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진숙이 답했다.

“그래, 나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유는요?”

“집에 있지.”

이현은 별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지유한테 서류 좀 가져다 달라고 해요. 서재 서랍에 있어요.”

진작부터 그 전화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던 승아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이현 오빠예요?”

“그래.”

여진숙이 말을 이어갔다.

“지유더러 서류 좀 챙겨오라는구나. 지유도 현이 비서라는 이유로 현이 와이프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

여진숙은 승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미소를 지었다.

“승아야, 그때 네가 외국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이가 너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혼도 당연히 너랑 하지 않았겠어?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진작에 아이가 들어섰을 텐데. 밥만 축내는 애가 우리 집에 발을 붙일 일도 없었을 테고.”

“네가 현이한테 서류 가져다주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승아가 약간 주저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현이도 좋아할 거야.”

여진숙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네가 손주 안겨줬으면 하는데?”

승아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일단 자료부터 가져다주고 올게요.”

여진숙의 말에 승아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지유와 이현의 결혼은 이현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일이었다. 3년간 아이가 없다는 건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잊지 못하고 귀국하기만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밴을 타고 여씨 본가에서 나왔다.

이현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면서 회사 사람들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현은 사무실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유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의자에 앉은 이현은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현이 그제야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승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오빠.”

승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사실은 설렘이 더 많았다. 밤낮을 그리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승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현은 살짝 멈칫하더니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쩌다 네가 온 거야?”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본가에 아주머니 뵈러 갔었어요.”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허락했지?”

이 말에 승아는 표정이 굳었고 심장이 살짝 저렸다. 그 말은 마치 승아가 못 갈 데라도 갔다는 뜻 같았다.

승아는 애써 진정하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귀국했으니 먼저 아주머니 뵈러 가는 건 당연한 거죠. 서류 전해주러 왔어요.”

승아는 이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서류를 꺼냈다.

이현은 원래 지유의 손에 들려있어야 할 서류가 승아의 손에 들려있는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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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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뛣쀆꿾
나가라 걍....쌍으로 ㅈㄹ하는 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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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윤
승아도 뭐같고 시엄마 미친ㄹ인가
goodnovel comment avatar
시원
승아 완젼 여우네요 빌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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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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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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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13화

    문지원은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직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순간 너무 창피해서 땅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어젯밤 지석훈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하게 두지 말아야 했다. 덕분에 아침부터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으니 말이다.그나마 다행인 건 직원이 아직 어리고 남자 친구도 없어서 그 자국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이나 목에 난 흔적을 감추려고 화장을 수정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대표님, 30분 뒤에 정기 회의 있으십니다.”비서가 하품하며 서류를 건넸고 문지원은 서둘러 자료를 검토했다.“참, 화진 그룹 프로젝트는 누구한테 넘겼죠?”비서가 프로젝트 책임자의 이름을 말했다.문지원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놓았다.회사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문지원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30분쯤 지나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회의실에는 이미 몇몇 주주들이 앉아 있었고 비서는 문지원 뒤에서 회의 내용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한 나이 지긋한 주주가 갑자기 불편한 표정으로 문지원에게 날카롭게 말했다.“회의하자고 해놓고 대표님께서 이렇게 늦게 오셔서야 쓰겠습니까? 우리 같은 노인네들이 언제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려야 합니까. 정말 대단한 권위네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참 시간관념이라고는 하나도 없네요. 어디 옛날 대표님 같습니까.”문지원은 그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자신이 아버지인 이전 대표만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이전 대표는 자기 아버지였으니 부녀 사이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유 이사님,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솔직하게 하세요.”문지원이 차분히 말했다.“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씀하시니 듣는 저도 힘들고 여기 계신 분들도 저희 아버지와 함께 고생해 온 분들로 나이가 있으시니 그런 말을 잘 못 알아듣습니다.”“너!”상대는 그녀의 똑 부러지는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고 문지원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12화

    지석훈은 품 안에 문지원을 안고 부드럽게 말했다.“필요한 것도 받았으니 우리도 가자. 밥은 먹었어? 같이 가서 먹자.”문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얼마 전에 그 친구한테 약을 좀 부탁했어. 네가 생리통이 심하다고 했잖아.”지석훈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그 친구의 교수님이 업계에서 유명한 분인데 최근에 생리통 치료 약을 개발하고 계시거든. 아직 연구 단계라 완벽한 건 아니지만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서 미리 좀 얻어 본 거야.”문지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럼 이렇게 늦은 밤에 나온 이유가... 단지 그 약을 받기 위해서였어요?”지석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그럼 너는 뭐라고 생각한 거야?”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난기 어린 눈빛이라 문지원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질투심 가득한 표정으로 현장을 덮치듯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헛다리였다.“미안해. 괜히 걱정하게 만들어서.”지석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천천히 꼭 잡았다.“내가 너한테 믿음을 제대로 못 줘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젠 확실한 관계로 만들어 줄래?”문지원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오늘 밤 너무 많은 감정의 기복을 겪어서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멍하게 있는 그녀를 보며 지석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내 여자가 되어 달라는 거야.”문지원의 얼굴이 더 붉어졌지만 사실 이건 그녀가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결국 그녀는 지석훈의 다정한 눈빛에 이끌려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집에 돌아온 이후로 둘 다 문지원이 처음 왜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는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문지원은 너무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고 지석훈 역시 그녀가 난처할까 봐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이렇게 마무리된 것이 문지원에겐 충분히 좋은 결과였다.그런데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조금의 서운함이 남았다.결국 지석훈과 강윤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11화

    문지원은 더 이상 이런 문제로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어디로 찾아갈지도 모르는 마당에 지금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래서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지금 날 보러 온 이유가 그거야?”여울은 이쑤시개에 꽂은 사과 조각을 입에 물며 투덜거렸다.“언니 진짜 답답하다니까.”문지원은 사과를 깎던 손을 멈췄다.“지금이라도 최주하 다시 불러줄까?”“아니야, 미안. 내가 답답하지. 내가.”여울은 급히 말을 바꿨다.평소였다면 문지원이 이 상황을 놓치지 않고 여울을 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서로 입장 차이가 없으니 누가 누구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그럼 언니 계속 모르는 척만 할 거야?”여울이 다시 묻자 문지원은 침묵했다.모르는 척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지석훈에게 직접 따지기도 애매했다.“당연히 직접 물어봐야지!”여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문지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물어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내가 볼 때 지석훈 씨는 양다리 걸칠 사람 같진 않아.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문지원이 조금 흔들리는 듯하자 여울이 급히 덧붙였다.“게다가 언니가 전에 말했잖아. 석훈 씨가 언니랑 강윤슬 문제에 직접 개입한 적 있다고. 그럼 이미 강윤슬과 언니 사이에서 언니를 택한 거 아냐? 그러니 뭐가 겁날 게 있어?”여울의 말이 문지원의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주었다.문지원은 들고 있던 사과칼을 내려놓고 바로 옆에 둔 가방을 집어 들더니 벌떡 일어나 병실 문을 향했다.“어디 가? 날 줄 사과 아직 채 못 깎았잖아!”여울이 외쳤지만 문지원은 이미 병실을 나섰고 그녀는 들뜬 기분으로 병원을 나와 지석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어느새 거리는 어두워졌고 도로 위엔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가운데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었다.지석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10화

    “뭘 보고 있었어?”문지원은 살짝 긴장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그냥 회사 문서들을 봤어요.”“늦었는데 일 그만해.”지석훈은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문지원은 안도하고 더 이상 몰래 훔쳐보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워낙 예민한 성격의 지석훈이기에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너무 난감했을 것이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한다.깊은 밤, 문지원은 지석훈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손을 올려 살금살금 이동했는데 끝내 그녀가 눈독을 들였던 휴대폰에 손이 닿았다.그런데 마침 그 찰나에 지석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잠이 안 와? 설마 하고 싶어?”순간 문지원은 몸이 경직되었다.만약 지석훈이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분명 그녀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챘을 것인데 다행히 그건 아니어서 문지원은 간신히 안도하며 뻗었던 손을 거두고 가만히 있지 않는 지석훈의 손을 밀어내면서 거절 의사를 전했다.“안 돼요. 내일 회사에 나가봐야 해요.”지석훈은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뽀뽀하고 말했다.“그럼 빨리 자. 안 그러면 나 더 참을 수 없어.”문지원은 서둘러 눈을 감았는데 마음속에 일이 있으니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역시나 그녀는 결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긴 채로 집을 나가게 되었다.다행히 나가기 전에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서 아무도 그녀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대표님께서 확인하셔야 하는 서류들입니다.”“알았어요. 거기 두세요.”문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비서가 나가려고 할 때 문지원이 그녀를 부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화진 그룹에서는 오늘도 아무 소식 없어요?”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본 문지원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가보라고 했다.문지원은 본인이 너무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다.강윤슬이 직접 지석훈과 끝났다고 했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09화

    의사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문지원이 잽싸게 다가가서 물었다.“제 친구의 상태는 지금 어떤가요?”의사가 마스크를 벗고 말했다.“환자는 간이 칼에 찔려서 내출혈이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서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이제 잘 휴식을 취하면서 회복하시면 됩니다.”문지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옆에 있던 최주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미간은 조금 전보다 펴진 것 같았다.여울은 마취가 덜 풀려 계속 혼수 상태였고 문지원은 병실에 들어가서 보다가 다시 나왔다.그때 최주하가 부하에게 지시하고 있었다.“합의는 없다고 하고 변호사를 찾아서 살인 미수로 신고해.”부하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살인 미수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그 정도가 뭐가 무거워?”최주하가 코웃음을 지었다.여울이를 다치게 했는데 살려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라는 눈치였다.문지원이 병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얘기하던 최주하가 고개를 돌렸는데 그의 얼굴에는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다만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최주하는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최 대표님.”문지원이 앞으로 다가가며 최주하를 불렀다.부하를 보내고 최주하가 말했다.“무슨 일이죠?”“최 대표님 때문에 다친 건데 들어가서 보지 않을 거예요?”최주하의 태도에 문지원은 화를 억지로 참고 물었다.여울이와 최주하의 일은 우연히 조금 들었는데 문지원은 최주하가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지금의 최주하를 봤을 때 더욱더 못마땅했다.여울이가 최주하 때문에 다쳐서 꼼짝 못 하고 누워있는데 병실에 들어가려 하질 않으니 말이다.최주하가 이마를 찌푸린 채 병실 쪽을 보는 모습을 보며 문지원이 또 말했다.“최 대표님, 잘 생각하고 선택하세요. 오늘 들어가지 않을 거면 앞으로도 절대 들어가지 마시고 다시는 여울이를 만나지도 말아요.”최주하는 문지원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해명하지 않는 성격이라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문지원의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08화

    문지원과 여울은 쇼핑몰에 가서 구경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못 만났고, 또 모처럼 나왔으니 그렇게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다만 누구도 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저 사람 강도에요. 잡아줘요.”갑자기 한 남자가 달려오자, 문지원은 잽싸게 피했는데 여울은 피하지 못하고 칼을 든 남자에게 인질로 잡혔다.강도는 과일칼을 여울의 목에 들이대고 외쳤다.“아무도 다가오지 마!”문지원이 경찰에 신고하려는 것을 보고 강도가 또 외쳤다.“경찰에 신고하면 이 여자를 죽여버릴 거야.”“알았어요. 신고하지 않을게요.”문지원은 강도가 정말로 여울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흥분하지 말아요. 사람을 죽이면 당신은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문지원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강도는 더 이상 흥분하지 않았는데, 인질은 결코 풀어주지 않았다.쇼핑몰의 보안 인원들이 순식간에 강도 주변을 둘러쌌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봉변을 당할까 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쇼핑몰 1층은 순식간에 그들 외 텅 비었다.강도는 여울을 인질로 잡고 모두를 후퇴시켰다.같은 시각 쇼핑몰 2층에서.“왜 이렇게 시끄러워?”최주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1층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순간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여울이다!최주하가 어찌나 빨리 1층으로 움직였는지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천천히 가세요.”여울이도 가까이에 있는 과일칼을 보더니 두려움에 떨었다.강도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모두 뒤로 물러서!”여울은 눈을 감고 지금 죽고 싶지 않으니 누구든 자기를 구해달라고 빌었다.어쩌면 그녀의 기도가 정말로 효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때 강도 손에 있던 칼이 걷어차였고 여울이는 누군가에 의해 구원이 되었다.이 변화는 주변에 있던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여울은 순간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으면서 눈을 깜빡였는데 아주 익숙한 품에 안기게 되었다.“최 대표님?”여울은 도저히 믿을 수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07화

    문이 쿵 하고 닫히고 문지원과 지석훈은 현관에서부터 거실 소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소파에 쓰러질 때 문지원이 머리를 부딪힐까 봐 지석훈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는데 키스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서로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잠깐만요.”문지원이 말했다.지석훈이 멈추려 하지 않자, 그녀는 아예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내려가서 사와요.”지석훈은 붉게 달아오른 문지원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 떠올리더니 고의로 안 간다고 했다.“안 써도 돼.”그는 문지원의 귓불을 깨물었고 숨소리도 점점 더 거칠어졌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안다고 한번 건드리면 멈출 수가 없었다.하지만 문지원은 확고했다.“안 돼요. 사 와요.”지석훈은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문지원의 입술에 입 맞추고 옷을 입었다.“알았어. 기다려.”아파트 입구에 바로 편의점이 있기에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지석훈은 얼마나 급했는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에 핑크색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그동안 그의 욕망은 추호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지석훈은 뒤에서 문지원을 껴안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뜯어줘.”문지원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직접 해요.”“해줘.”문지원은 하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비닐 포장을 뜯었다.지석훈은 그녀를 들어 올렸고 문지원은 그가 리드하는 대로 움직였다.일이 끝난 다음에도 지석훈은 부족했던지 문지원의 쇄골에 키스하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왜 갑자기 이렇게 열정적이야?”“싫어요? 그럼, 다음부터 조심할게요.”“아니, 너무 좋아. 다음에도 계속해.”지석훈은 그녀의 얼굴을 돌려 키스하며 말했다.두 사람은 그 뒤로도 이러한 관계를 서로 묵인했다.문지원은 가끔은 자기 집에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지석훈의 집에서 지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석훈의 집에는 그녀의 물건들이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일상용품, 그리고 여성용품들까지 추가되었다.그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금방 두 사람의 관계를 알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06화

    지석훈이 말했다.“그 사람을 괴롭히지 마.”지석훈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강윤슬도 잘 알고 있다.강윤슬의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떨릴 정도의 차가움에 소름이 끼쳤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숨기며 말했다.“석훈아, 오랜만에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선배, 너무 심했어. 나는 혁수가 아니라서 선배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혁수한테 신경 써.”“혁수는 이제 아이까지 있어. 그리고 나한테 이제 관심이 없어.”지석훈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나도 선배에게 관심이 없어.”강윤슬은 한 사람의 말에 이토록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강윤슬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지석훈은 또 말했다.“선배가 나를 받아준 적이 없으니 우리 사이에 끝나고 말고 할 건 없잖아. 그리고 우리 사이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강윤슬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석훈아, 너한테 문지원 씨가 다른 사람이야?”지석훈은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강윤슬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액자를 바라보았는데 사진에는 지석훈이 젊은 시절의 최고의 미소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를 향했던 지석훈의 최고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져서 안타까울 뿐이었다.그리고 지금 강윤슬은 똑같은 눈빛으로 문지원을 바라보고 있다.문지원은 강윤슬의 눈빛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편했다.“윤슬 씨,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죠?”두 사람은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강윤슬은 길거리에 오고 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문지원을 향해 물었다.“석훈이한테서 저에 대해 들은 적 있어요?”“조금요.”강윤슬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렇겠죠. 석훈이랑 나 워낙 아무런 관계가 아니니까요. 다만 예전에는 내가 석훈이를 쳐다보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후회했죠. 시작한 적도 없는 관계이니... 그냥 방금 한 얘기는 잊어버려요.”문지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강윤슬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 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제2005화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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