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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

“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

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앉아.”

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

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

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

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손 다쳤잖아, 몰랐어?”

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

“난... 괜찮아요.”

“수포까지 났어.”

이현이 물었다.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

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

“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

지유가 대답했다.

“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

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

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

하염없이 흐르던 지유의 눈물이 마침 이현의 손등에 떨어졌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촉촉해진 지유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녀가 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왜 그래? 내가 아프게 했어?”

지유는 이런 모습이 자신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냥 눈이 좀 불편해서요.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이현은 수도 없이 들은 인사치레에 싫증이 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회사도 아니고 집이야. 내 앞에서 그렇게 맨날 경직되어 있을 필요 없어. 집에선 이름 불러도 돼.”

하지만 7년간 지유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비서, 집에서는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비서가 해야 할 일들만 했다.

지유는 몇 년간 짝사랑했던 그 얼굴을 바라봤다. 호응이 없는 사랑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지유가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현 씨, 우리 언제 이혼...”

이현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에 지유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다시 얘기하자.”

지유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운 지유는 이현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지유와 꼭 붙어 누운 이현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감쌌다. 약간은 시원한 세달향에 지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살살 만졌다. 이에 지유가 몸을 움츠리자 이현이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러움 많이 타?”

지유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습관이 없어요.”

이에 이현이 더 적극적으로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럼 천천히 적응해. 언젠간 습관 하겠지.”

지유는 그의 품에 기댔다. 귓가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얼굴이 그녀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다른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유는 신분을 바꿀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현 씨, 혹시 나...”

그때 이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쏠렸다.

지유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의 신분으로...

그럴 수만 있다만 더는 비서의 신분으로 이현의 곁에 남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단 1초, 지유는 이현의 핸드폰 화면에 뜬 글자를 보게 되었다.

[노승아]

이에 잠깐 품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현은 다시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를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마무리 짓지 못한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여보세요.”

이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가 보는 앞에서 승아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지유는 마음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허황한 꿈을 품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온지유, 어쩌다 그런 환상을 한 거야. 그의 마음은 온통 승아에게 가 있으니 너에게 감정 따윈 있을 수 없다는 걸 이미 3년 전 결혼식 날 들었잖아.’

지유는 고개를 들었다. 씁쓸한 마음에 눈동자에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지유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이현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현은 모르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는 걸 안 그날부터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울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지유는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보잘것없는 비서일 뿐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이현은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지유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아. 일찍 쉬어.”

지유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가봐요. 내일 제때 출근할게요.”

“응.”

이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들고 나갔다.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듣고 있노라니 지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밤새 지유는 별로 자지 못했다.

이튿날, 출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지유는 출근을 일찍 하는 편이라 회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비서라는 직책에 맞게 이현이 봐야 할 업무를 조리있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현은 오늘 회사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가 전화를 여러통 걸어봐도 핸도폰은 꺼져 있었다.

윤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온 비서님, 대표님이 안 계시니 공사장 순찰은 혼자 진행하셔야겠어요.”

지유는 이현의 비서로서 회사의 대부분 업무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그 프로젝트도 익숙히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한통의 전화를 끝으로 지유는 이현을 찾는 걸 포기했다.

문득 어젯밤 승아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게 생각났다.

회사도 나오지 않고 밤새 귀가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 그녀를 만나러 간게 아닐까 싶었다.

지유는 애써 씁쓸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일단 대표님 없이 먼저 가요.”

밖은 햇빛이 쨍쨍했고 온도가 높았지만 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 현장으로 나왔다.

현재 시공하고 있는 건물은 틀만 잡았을뿐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아 겉보기에 조잡해 보였다.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는 먼지와 철근이 가득했고 기계에서는 굉음이 들려왔다.

몇번이나 와본 지유는 이곳이 꽤 익숙했기에 빠른 속도로 순찰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요!”

지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유리 한장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김정임
번역이 많이 아쉽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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