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온 비서님.”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대표님.”지유가 그를 불렀다.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건 뭐야?”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온지유!”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네?”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확인해.”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