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온 비서님.”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대표님.”지유가 그를 불렀다.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건 뭐야?”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온지유!”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네?”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확인해.”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석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형 어디 아픈가?전에 건강 검진했을 때는 정상이었는데.이현과 같은 침대를 쓰는 지유가 그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면 아마도...석훈은 이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에게 인사하며 그가 입은 슬랙스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어딘가 이상한 석훈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 좀 봐달라고 했더니 나는 왜 그렇게 보는 거야?”석훈은 시선을 거두고 어색하게 웃었다.“별거 아니야.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형수님 만났는데 어디 나가던데?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이현이 대답했다.“그러다 돌아올 거야.”“형 설마 형수님이랑 싸웠어?”“여자가 심술부리는 건 정상이지.”석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워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이현은 석훈이 앉는 걸 보고 이렇게 말했다.“지유도 나갔으니 너도 가봐. 나는 너 필요 없어.”“형, 나 지금 왔어. 벌써 쫓는 건 아니지 않아? 형제간의 우애를 얘기해 보는 것도 좋잖아.”석훈은 고민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코를 만지며 웃었다.“형수님이 화났다면 화난 이유가 있겠지.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돼요. 그럼 사이도 자연스럽게 좋아지겠죠. 일단 자존심 내려놓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요? 사이가 돈독해지면 형수님도 더는 형 얕잡아보지는 않겠죠.”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뭔가 이상한 석훈의 말에 이현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석훈은 이현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돌려서 말했다.“근데 그 원인만 있는 건 아니야. 부부 사이에 서로 배려도 해주고 그래야지. 근데 그쪽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좀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지유가 그래?”이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석훈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용기 내어 말했다.“형수님이 형 몸 좀 잘 검사해 주라고 하던데?”석훈이 약상자를 들고 다가오려 하자 이현이 바로 호통쳤다.“꺼져!”여씨 본가로 돌아온 지유는 짐을 챙겨 나가려 했다.여진숙은
지유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짐 정리해요.”“어디 가는데?”지유가 대답했다.“집에요.”“여기가 집이잖아.”이현의 말투가 확 차가워졌다.지유는 마음이 살짝 쓰렸지만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이 집이 내 집이었던 적 있어요? 이제 그만 자리 내줄게요.”이현이 갑자기 지유의 손을 잡으며 더는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머리 위에서 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까지 심술부릴래?”지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뭔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억울함이 북받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유는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심술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대표님, 비켜주세요. 정리 마저 해야 해서요.”지유가 고집을 부리며 이현과 이혼하려 하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기척을 듣고 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다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네가 이토록 이 집에서 나가려는 원인이 뭔데?”지유는 말이 없었다.이현은 지유와 거리를 좁히며 캐물었다.“정말 내가 그쪽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되는지 안 되는지 보여줄까?”이현의 말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혼신고서에 적힌 글을 보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현이 어느샌가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유는 그렇게 휘청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이는 이현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현은 지유를 자기 몸 아래 가둔 채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눈동자에 욕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지유는 그런 이현의 눈빛이 큰 부담으로 다가와 얼른 시선을 돌리며 설명했다.“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 모든 게 다 오해예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혼신고서는 제가 다시 작성해서 보내드릴게요. 만족하실 거예요...”하지만 지유의 말은 이현의 화를 더 타오르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커다란 몸을 이끌고 지유를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그
이현은 몸이 뜨거웠고 술 냄새가 세게 풍겼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이 바로 지유의 귓가로 전해졌다.술을 마신 건가?지유가 그런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이현이 지유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머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 조금만 안고 있자.”이에 지유는 움직이지 않았다.그가 왜 이렇게 술을 퍼부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지유는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지만 이현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지유를 또 승아라고 생각했나 보다.지유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이현 씨...”“이렇게 조금만 더 누워있자, 지유야.”이에 지유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적어도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거다.이현이 이런 적은 별로 없었기에 지유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지유는 그가 이렇게 자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다.지유는 이현을 살짝 밀며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자지 마요. 샤워하든지 아니면 이불을 덮든지...”이현이 방향을 고쳐 눕더니 지유를 번쩍 들어 자신의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의 코끝엔 이현의 향기로 가득했다. 술 냄새와 몸에서 나는 시원한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지유는 지금 매우 당혹스러웠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현을 바라봤다.이현도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그가 왜 기분이 별로인지 헤아리기가 귀찮았다고 눈도 오래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이현이 손으로 지유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뜨거운 손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져 지유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아파?”지유는 코끝이 찡했다. 억울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이닥친 이현의 관심을 당해내기 힘들었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의 말에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온지유 씨, 또 뵙네요.”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진솔 에디터님.”“두 분 아는 사이에요?”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아니에요?”“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오랫동안
승아의 얼굴이 순간 부어올랐다. 승아는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승아는 역시 무대가 어울렸다. 불쌍한 척하는 것도 아주 예술이었다.아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지유도 승아가 가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말 좀 가려서 해요!”지유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승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지유 언니, 저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저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저는 언니 남자를 뺏은 적이 없어요. 오해하지 마요...”“온지유!”이현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지유가 깜짝 놀랐다. 그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난 거지?그러다 이내 자신이 승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지유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죽을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이다.이현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연약한 승아를 자기 품으로 당겨왔다.그 힘이 어찌나 센지 지유도 관성에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오빠.”승아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지유를 쏘아보며 딱딱하게 말했다.“사과해.”지유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과하라는 이현의 말이 비수가 되어 지유의 심장을 후벼팠다.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지유는 억지로 추스르며 말했다.“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네가 승아한테 손댄 거 내가 못 봤을 거라 생각해?”이현이 싸늘하게 말했다.승아가 이현을 말리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지유 언니 너무 탓하지 마요. 지유 언니 기분을 잡치게 했으니 다 내 탓이에요.”“그래도 이렇게 제멋대로 나오면 안 되지.”여기는 사람이 적고 기자도 없었기에 사진이 찍힐 일도 없었다.그들이 대담하게 애정 행각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지유는 숨이 점점 조여오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넘치면 해가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오늘 자신감이 너무 넘쳤던 것 같다.지유는 이현에게 도대
승아는 바로 입을 닫았다.아직 행사 참석 중이던 지유는 이현이 걸어온 전화가 퍽 의외였다. 승아와 로맨틱한 데이트라도 즐기느라 자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지유는 기분을 잘 추스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아직 전시장에 있어요.”“끝나면 나랑 회사로 돌아가자.”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는 이 말이 휴가는 더 이상 없고 일하러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그래도 그녀는 이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이현은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봤다. 승아가 아직 옆에 서 있자 이렇게 물었다.“아까 뭐라고?”이현가 단둘이 있고 싶었던 승아는 통화 내용을 듣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말을 바꿨다.“난 그러면 들어가서 쉴게요. 내일 봐요.”“응.”이현이 이렇게 대답했다.하지만 승아는 내키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요?”“상황 봐야 해.”“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밥 한번 사고 싶어서요.”“내일 다시 보자.”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했다.이현이 수락했다고 생각한 승아는 기분이 좋아져 매니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지유는 지희와 함께 있었다.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이 걸어온 전화야?”“응.”“세컨드랑 같이 있을 텐데 너한테 왜 전화했대?”“이따가 같이 회사로 들어가재.”지희가 말했다.“정말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네. 기회만 되면 너를 뼈까지 발라 먹으려고 난리다 아주. 너는 왜 된다고 했어?”“오후에는 딱히 볼일이 없거든. 일하면 잡생각이 좀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지희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유도 대단한 워커홀릭이었다. 있는 집 사모님 중에 일하러 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지만 지유의 생각은 달랐다.지희는 지유가 맨날 이현의 주위을 맴도는 게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빨리 결정해. 어차피 여이현과 이혼할 거라면 이혼 전에 잘 봐봐.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아? 그럼 환승도 가능하잖아. 그래야 여이현도 깨닫지, 너를 잃은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지유가 물었다.“왜 꼭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잠깐 사이에 신무열과 김혜연은 온지유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김혜연은 다시 그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때 신무열이 말했다.“이제 어른이잖아. 핸드폰에 내비게이션도 있으니까 길 잃을 일 없어. 저쪽으로 가서 구경하자.”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열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얼마 가지 않아 그들 앞에 꽃을 파는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야윈 몸에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언니!”소녀는 김혜연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꽃을 내밀며 말했다.“언니처럼 예쁜 사람은 꽃 한 다발 가져가야죠. 안 그래요?”김혜연이 대답하려는 찰나, 소녀가 말을 덧붙였다.“이 꽃들은 제가 아침에 직접 꺾은 거예요. 싸게 팔고 있어요. 하나 사시면 하나 더 드릴게요.”소녀는 정말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꽃 한 다발도 팔지 못한 데다, 집에는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김혜연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여기 있는 꽃 전부 얼마야? 내가 다 살게.”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꽃을 사는 돈이 김혜연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소녀에게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언니, 정말 다 사 주실 거예요?”소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격 계산해 줘.”소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제 돈이 생겼으니 음식을 살 수도 있고, 엄마 약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언니를 만났으니 말이다.소녀는 서둘러 계산을 시작했고, 김혜연이 많이 사는 만큼 가격도 할인해 주었다.“이 돈 받아. 잘 챙겨서 남들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두렴.”김혜연은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소녀에게 건넸다.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언니, 너무 많이 주셨어요. 제 꽃들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것도
법로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린 다 먹었어. 별아, 엄마 아빠도 밥 먹었는지 물어봐 줄래?”“네.”별이는 천천히 말했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별이는 법로가 한 말을 온지유에게 그대로 전했다.온지유는 무척 기뻤다. 최근 별이가 이렇게 완전한 문장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랑 아빠도 밥 먹었어. 그리고 여기서 네 외삼촌도 만났어. 별아, 너도 여기 와서 같이 놀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별이의 대답을 기다리며 옆에 있는 여이현을 슬쩍 당겼다. 별이가 오고 싶다고만 하면 바로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여이현도 부드럽게 웃으며 별이에게 물었다.“별아, 여기 오고 싶어?”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법로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을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별이 병 고쳐 주신대요…”“그래, 그럼 외할아버지랑 잘 지내고, 말씀도 잘 들어. 엄마랑 아빠가 돌아갈 때 선물도 사 올게. 네가 나아지면 같이 놀러 가자.”사실 여이현도 별이를 데려올까 했지만, 온지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온지유에게 미안했던 부분도 많았고, 이번에는 별이 곁에 법로가 있으니 온지유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네.”별이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한마디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별이가 법로와 함께 지내면서 많이 좋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법로가 경성에 계속 머문다면, 별이의 건강도 회복되고 온지유와의 유대도 깊어질 것이다.온경준과 정미리는 온지유를 친딸처럼 여겼고, 친구들, 오빠와 새언니까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었으니 온지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온지유는 별이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법로에게 몇 가지 당부를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여이현이 온지유를 안으며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별이 건강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그래서 지금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잖아.”온지유는 별이가 점점 나아질 모습을 그리며 미소를 지
온지유가 방을 잡을 때 신무열이 온지유한테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온지유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이인 줄로 착각했다.신무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낮게 말했다.“네가 침대 써. 난 바닥에서 잘게.”Y국 북부에서 그 험난한 환경도 다 버텼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신무열을 깊이 사랑하는 김혜연이 그를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있을까?김혜연이 조용히 말했다.“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무열 씨는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니면 저...”“지금 관광 성수기라 방 잡기도 어려워. 게다가 너 혼자 나가면 뭐가 되겠어?”김혜연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김혜연은 고개를 숙였다. 신무열 앞에서는 언제나 말 한마디 크게 못 하는 그녀였다.자신의 가장 부드럽고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신무열은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그녀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고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네.”김혜연은 신무열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그런데 민박에서 갑자기 물이 끊길 줄이야.김혜연은 거품투성이인 채로 욕실 안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무열 씨, 프런트에 전화해서 물이 왜 안 나오는지 물어봐 줄래요?”온몸에 거품이 잔뜩 묻은 채로 나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신무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프런트 직원이 계속 사과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예비 물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해결해 드릴게요.”“최대한 빨리 부탁해요.”신무열은 물이 나온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욕실 쪽으로 말한다.“곧 물 나온대. 조금만 기다려.”“네, 알겠어요.”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몇 분 후 김혜연은 머리가 흥건한 채로 나왔다.“머리 안 말려?”“이제 말릴 거예요.”김혜연은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좋았
온지유의 말을 들으니 김혜연은 더 부끄러워졌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왕 만난 김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마침 식사 시간대인데.”“저희 민박을 예약했어요. 거기로 가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길을 안내했다.빠르게 그들은 한 민박집으로 왔다.여이현은 민박집 직원을 불렀다. 그러자 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이미 이곳에 먼저 와서 지내고 있었던지라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에게 맛있었던 음식을 추천했다.두 사람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열 가지가 넘는 음식을 주문했으나 다행히 양은 많지 않았다. 김혜연이 새우를 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신무열이 매너 있게 대신 가져와 껍질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아내를 위해 새우를 까주었다.온지유는 김혜연의 잔에 음료수를 따라주었다.“여기엔 구경할 곳이 아주 많아요. 이왕 마주친 김에 같이 둘러볼래요?”“네, 좋아요!”김혜연은 바로 대답했다.그녀와 신무열의 사이는 원래부터 어색했다. 신무열이 무뚝뚝했기에 그녀가 자꾸만 말을 건다면 짜증이 솟을 게 분명했다.행여나 신무열이 언짢아하면서 이 관계를 얼른 끝내버리려고 할까 봐 걱정되었다.한 달이라는 체험 기간은 그녀가 겨우 얻은 기회였으니 말이다.“그럼 전 사장님한테 가서 두 사람 방 예약하고 올게요. 여긴 민박집이긴 하지만 엄청 커서 매일 신선한 채소도 많고 주변 환경도 아주 좋거든요.”온지유는 주동적으로 도와주었다.신무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혜연은 당연히 미소를 지었다.“정말 고마워요.”온지유는 두 사람에게 방을 잡아 주었다.방 키를 두 사람에게 건넸을 때야 온지유가 방 두 개가 아닌 하나만 잡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너비가 1.5m밖에 되지 않는 사이즈의 침대만 하나 있었다. 다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눈빛에서 계획을 눈치챘다.김혜연과 신무열이 방으로 올라가 짐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여이현은 온지유를 구석으로 끌어당겼다.“지유, 일부러 그런 거지?”그녀가
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경성은 아주 좋은 곳이잖아요. 게다가 아가씨도 여기에 있으니까 저도 여기 남고 싶네요. 하지만 저랑 도련님은 다시 돌아가서 나라를 살펴보아야 해서 이곳에 정착하긴 어려워요.”“그렇군요. 그럼 편히 놀다가 가요. 별이를 혜연 씨한테 맡긴다면 자유 시간이 없잖아요. 오빠한테 이곳저곳 구경하러 가자고 해요. 화국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서 구경할 곳이 많거든요.”김혜연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온지유는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이 시간은 김혜연이 힘들게 노력해 얻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깝게 낭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별이는 아버지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게다가 배 비서님도 있으니까 혜연 씨는 오빠랑 시간을 보내세요.”곧이어 온지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차에 올라탔다. 순간 여이현은 뭔가 중요한 일을 깜빡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뭘 잊고 있었는데?”여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걸 왜 깜빡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결혼 준비를 했는데 웨딩사진 찍는 걸 깜빡해버렸어.”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난 또 뭐라고. 그 중요한 일이 웨딩사진 찍는 것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우린 이미 부부가 되었잖아. 안 그래?”그녀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앞으로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 천천히 찍으면 되지.”온지유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참, 우리 신혼여행 가서 찍으면 되겠다!”“그래, 그거 좋네. 배 비서, 들었죠?”여이현은 바로 운전 중인 배진호에게 지시했다. 배진호에게 이런 일은 그저 전화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에 빠르게 촬영을 예약했다.한편 김혜연은... 온지유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에게 다가갔다.신무열은 업무를 처리하
김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저랑 보내는 시간 동안 즐겁지 않으셨어요?”그녀는 이내 신무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신무열보다 키가 크지 않았기에 신무열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다.신무열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이목구비였고 그녀가 푹 빠진 얼굴이었다.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머릿속에 김혜연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확실히 즐거웠다.김혜연은 고집을 부린 적 없었고 오히려 그를 배려해 주었다.다만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Y 국 국민을 위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Y 국에 써야 했다.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김혜연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 한 달이라고 했으니까 약속 꼭 지켜.”신무열은 느긋하게 입을 열며 김혜연에게 약속을 지키라면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다.김혜연은 순간 목구멍이 막힌 기분이었고 가슴이 미어졌다.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으나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차갑고 확고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저도 알아요. 도련님이 Y 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요. Y 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건 알겠지만 도련님도 도련님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해서 Y 국을 위한답시고 평생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맞는 말이었다.하지만 법로가 그의 어머니에게 진 빚을 전부 똑똑히 보고 자랐기에 신무열은 법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Y 국은 이미 그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희생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김혜연, 한 달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네 요구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싫어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도련님 마음을 얻을 거예요! 도련님이 하신 말씀들은 전 신경 안 써요. 전 도련님을 이해하거든요. 미
게다가 별이가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별이가 친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도 온지유는 별이를 데려다가 키우려고 했었다.심지어!인명진이 그녀의 심성이 착함에 제일 좋은 증인이었다.“이왕 경성에 온 김에 경성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가세요.”온경준은 법로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위한다는 것을 보아내고 있었다.그들은 전부 온지유가 잘 살기를 바랐으니 당연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법로는 온지유의 친부가 아니던가.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별이의 곁에 남아서, 딸의 곁에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오늘 결혼식엔 필요한 과정은 전부 순차적으로 진행했다.결혼식 피로연에서의 게임도 말이다...지석훈과 최주하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여이현은 원래 이런 이벤트를 취소하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없다면 완벽한 결혼식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들은 게임으로 여이현과 온지유에게 장난을 쳤다.하지만 대부분 여이현을 툭 밀면서 온지유와 붙어있게 해주었고 게임 벌칙도 두 사람이 이마 맞대기, 서로의 볼에 뽀뽀하기 등 시키면서 놀려대기 바빴다.피로연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술이었던지라 두 사람은 러브샷도 했다.게임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그 후엔 다들 알아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최주하는 여이현을 향해 눈썹을 튕겼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주 귀하니까 있을 때 잘해.”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도 돌아왔다. 방 안에 두 사람뿐이었던지라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온지유의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원래는...”“그래도 날 사랑하는 건 여전하잖아. 안 그래?”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강서현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잊지 못할 것이고 온지유의 얼굴과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그거랑은 달라. 나는 원래 우리가 알콩달콩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