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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여자는 모 잡지사의 총괄 에디터였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너무 궁금해요.”

승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돌려서 말했다.

“저는 남자 친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싫어요. 그래서 행사 참석할 때도 절대 동행하지 않아요. 결혼하게 되면 초대장 꼭 보내드릴게요.”

“신비롭게 굴 수록 점점 더 기대되는데요?”

총괄 에디터는 옆에 서 있는 지유를 보고 인사치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온지유 씨, 또 뵙네요.”

지유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저번에 이현과 인터뷰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지유가 있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

지유가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

“진솔 에디터님.”

“두 분 아는 사이에요?”

진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네, 친분은 있는데 두텁지는 않아요.”

승아가 일부러 지유와 선을 그었다.

지유가 두 사람의 화제를 이어갔다.

“승아 씨 귀국하자마자 약혼자 타이틀을 크게 내걸었으니 에디터님이 궁금해하실 만 하죠. 저도 궁금한데요? 외국에서 금방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진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 그건 추측성 기사일 뿐이에요.”

승아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 기사는 승아가 일부러 내게 해 이현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승아는 자신에게 약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이현이 신경 쓰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이현이 술이 떡이 됐다는 소식에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게 맞다고 확신했다.

“제 남자 친구는 쭉 국내에 있었어요. 몇 년간 저를 기다려주면서도 우리 사이는 변함없이 한결같았죠. 그런 사람을 두고 제가 외국인을 찾을 일은 없어요.”

승아는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지유를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또한 이현이 결혼했어도 자신과 이현은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걸 지유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지유는 이런 승아가 거슬렸다. 명의상 이현의 와이프는 아직 지유인데 지금 단계에서 승아가 도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이어온 사랑인데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예요? 아직 준비가 덜 됐나 보죠?”

지유가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요즘 기자들 엄청 대단하더라고요. 승아 씨도 인기가 많아서 뭐라도 찍혀야 정상인데, 잘 감춰서 그런 건가? 요즘 저도 연예 기사 많이 보는데 앞서 똑같은 승아 씨랑 똑같은 상황인 여자 연예인은 글쎄 유부남을 좋아한 거였더라고요.”

지유의 말에 옆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승아를 한 번씩 힐끔 쳐다봤다. 대부분 그녀를 알아봤기에 승아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이상한 눈빛을 그대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진솔도 대답을 기다리다가 승아가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물었다.

“승아 씨, 아니죠?”

승아가 얼마나 도도하고 청순한 사람인지 다들 알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공인으로서 약혼자가 있다는 것 외에 한 번도 따로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긴 했다.

‘유부남’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 승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이렇게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지유 씨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승아는 이런 행사에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싫었다.

지유는 승아의 치마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1억짜리 치마라, 확실히 통이 크긴 하네요. 근데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지유의 말에 진솔의 귀가 쫑긋했다.

“기막힌 우연이라면?”

지유가 승아를 힐끔 보더니 가식적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승아의 마음을 후벼파기에 족했다.

“어제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사장님 한 분이 바람을 피웠는데 세컨드한테 신용카드로 1억을 긁었다가 와이프한테 걸려서 난리였다고.”

이 말을 들은 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유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승아와 이현의 감정이 두텁다고 해도 지유가 있는 한 둘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걸 말이다.

승아는 공인으로서 이런 도박을 할 리가 없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부남이라는 걸 절대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유가 아무리 이현과 몰래 결혼했다 해도 승아와 이현의 관계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날이면 정말 상황이 복잡해지게 된다.

승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자 지유가 말을 바꿨다.

“승아 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너무 기막힌 우연이라서 신기해서요. 나는 승아 씨가 다른 사람 남편을 탐내는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믿어요.”

진솔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사태가 너무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하는 건 싫어 맞장구를 쳤다.

“저도 승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죠. 유부남은 성에 안 차지.”

승아는 주먹이 으스러지도록 꽉 움켜쥐었다. 눈시울이 살짝 빨개졌지만 그래도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두 분 참 농담을 잘하시네요.”

지유는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으러 안으로 향했다. 전시를 보는 사람은 다 밖에 있었기에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승아는 지유에게 한방 먹힌 게 내키지 않아 얼른 그녀의 뒤를 따랐다.

“온지유 씨!”

목소리가 꽤 컸지만 지유는 모른 척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승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제가 처참히 무너졌으면 싶어서 그래요?”

지유가 음료수를 가져와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노승아 씨가 이렇게 멀쩡하게 제 앞에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승아가 분이 풀리지 않아 이렇게 쏘아붙였다.

“세컨드는 당신이에요. 저랑 오빠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끼어든 건 당신이라고요. 당신만 없었으면 오빠랑 결혼한 사람은 나예요. 오빠가 사랑한 사람은 쭉 나였다고요. 지금

까지 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그만 이혼해요.”

이 말에 승아는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결혼 계약이 3년이었던 것도 승아가 귀국하는 날짜를 맞추려 했던 걸까?

지유는 승아를 힐끔 돌아보더니 말투도 싸늘해졌다.

“승아 씨, 그 말 참 우습네요. 이현 씨랑 결혼한 것도 나고 이현 씨 와이프도 나예요. 승아 씨는 무슨 자격으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유부남 꼬시고 있다는 거 소문이라도 나고 싶은 거예요?”

눈물이 승아의 눈가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승아는 덤덤하게 눈물을 닦아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지유 씨가 이현 오빠 와이프라는 거 아는 사람 있어요? 당신이 20억 때문에 오빠랑 결혼한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 돈 보고 결혼한 거잖아요. 이현 오빠가 결혼한 사실을 밖으로 얘기하지 않은 건 제 명예가 실추될까 봐,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당신의 결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뺏어온 거라고요!”

지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승아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지유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결혼 사실을 숨긴 건 승아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모르고 지유는 모든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지유의 안색이 변하자 승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갔다

“지유 씨 같은 출신에 결혼도 돈 보고 했는데 여씨 집안에서 지유 씨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러니 한 번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보지 못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저한테 얘기해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그냥 얌전히 오빠를 떠나주기만 하면 돼요.”

지유가 물었다.

“지금 입은 옷도 이현 씨 지갑에서 나간 돈인데, 도대체 얼마를 줄 수 있다는 거죠?”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오빠가 제게 준 선물이에요. 이렇게 예쁜 드레스 받아본 적 없죠?”

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러다 결국 자신의 꼴이 우스워질까 봐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때 승아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가긴 어딜 가요? 제 말에 찔리기라도 했나 보죠? 오빠가 정말 드레스를 골라준 적 없나 보죠?”

승아가 한 매니큐어는 거의 지유의 살을 파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거 놔요.”

하지만 승아가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왔다.

“지유 씨, 현실 자각 좀 해요. 지유 씨는 사랑받은 적이 없어요. 그냥 오빠 와이프라는 텅 빈 타이틀만 가진 거죠. 왜 그렇게 비굴하게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거예요...”

철썩.

지유가 승아의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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