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지유는 병실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픔을 안은 채 병원을 나섰다.“지유야!”지희는 창백한 지유의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를 보며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시간이면 출근 중이었을 텐데 이거 산재 아니야?”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은?”“몰라.”지희는 어딘가 이상한 지유의 표정에 그녀가 머리만 다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다치기까지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말이 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편이네.”“곧 남편도 아니야.”“뭐? 이혼하재?”지희의 표정이 삭 변했다.“내가 이혼하고 싶은 거야.”이에 지희의 태도가 또 한 번 변했다.“그래, 지금 당장 해!”지희가 경고했다.“재산 절반 나눠 가지는 거 잊지 말고. 총명한 여자라면 사람을 가질 수 없으면 돈이라도 가져야지. 돈이 있는데 좋은 남자를 못 찾겠어? 위자료 받으면 찾을 수 있는 만큼 찾는 거야. 착한 놈, 잘 챙겨주는 놈 찾아서 맨날 대접받고 사는 거지.”사실 처음부터 계약뿐인 결혼이라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차례지는 게 없었다.“지유야.”지희가 갑자기 지유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왜 갑자기 이혼을 결정한 거야?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여이현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지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기사 못 봤어? 노승아 씨 귀국했잖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붙어먹은 거야?”지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현을 계속 헐뜯었다.“혼내 외도라, 그럼 죄가 더 무거워지는 거지. 위자료 더 받을 수 있겠다. 지유야, 진짜 경고하는데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 결혼이 유효한 이상 여이현의 재산 중 절반은 네 거야. 그래 뭐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 정도는 있겠지. 게다가 외도라니, 못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판
이현은 일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했기에 실수는 용납하지 못했다.하지만 지유를 탓해서는 안 된다. 이현은 어제 병원에서 승아를 지켰다.“대표님이 먼저 바쁘다고 전화를 끊었잖아요.”이현이 멈칫하더니 입을 앙다물었다.“어떻게 처리한 거죠?”그때 지유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처리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온지유 비서.”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전에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었던 거 같은데요.”이현은 일부러 온지유 비서라는 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신분은 비서이지 아내가 아니라고 각인시켰다.지유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시공은 영향받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대처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문제가 생기면 핑계를 찾기보다 해결해야죠. 전에 제가 한번 귀띔해 줬을 텐데.”이현의 말투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지금 당장 회사로 오세요.”이 말을 뒤로 이현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지유는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공사장의 상황을 신경 쓰지 못 했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지유는 얼른 정리하고 회사 갈 준비했다.그제야 잠에서 깬 지희는 지유가 분주하게 돌아치자 하품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 어디 가려고?”“일이 좀 생겨서 회사에 가봐야 해.”“지금 이 상황에 왜 아직도 그 사람 신경 쓰는 거야?”지희가 노발대발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하긴, 이혼 서류 이미 여진그룹에 보냈어.”지유는 신발을 갈아신으며 대꾸했다.“이미 보냈어?”“응, 퀵으로 아침 일찍 보냈어. 아마 여이현도 봤을걸?”지희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지유가 이혼한다고 하자 속전속결로 바로 진행했다.언젠가는 이혼할 텐데 빨리하든 늦게 하든 사실 달라질 게 없었다.“그래, 어차피 할 이혼인데.”지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지유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앞으로 네 덕 좀 봐서 잘사는 여자 좀 해보자. 지유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온 비서님.”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대표님.”지유가 그를 불렀다.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건 뭐야?”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온지유!”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네?”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확인해.”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한참 후.“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이현은 지유를 데
양채은은 심호흡을 하고 최후의 협박을 했다.“그럼 미안하지만 하민이는 내가 데려갈게요. 아마 당신이랑 시은이는 평생 하민이를 못 볼 거예요.”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의 차에 타려고 했다.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하게 옆에 있던 사람은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제압해 버렸다.나도현의 눈빛은 차갑고 위험했다.“이번엔 도망 못 가. 하민이를 내놔. 미성년자 유괴가 무슨 죄인지 너도 잘 알잖아.”양채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날 감옥에 보내겠다는 거예요?”“그건 내 전문 분야지. 하지만 하민이를 데려오면 네 변호를 맡아줄 수도 있어.”나도현의 태도는 확고했다.양채은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모든 법 조항을 줄줄 외우고 다녔고 그의 마음은 법전으로 꽁꽁 싸매져 따뜻한 구석이라곤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매정하군요. 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바로 그때 저 멀리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니 검은색의 수수한 차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그들 사이에 멈춰 섰다.차에서 후드티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근육이 탄탄한 팔로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아이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져 있었다.남자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을 풀어줘. 안 그러면 얘를 죽일 거야.”하민이었다.양채은은 마스크를 쓴 남자를 보고 놀랐다.“네가 여긴 왜 왔어?”“네가 일을 망칠 줄 알았지.”마스크를 쓴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있어서 원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당신 도대체 누구야?”나도현은 차갑게 묻는 동시에 주변을 빠르게 살피며 하민이를 구할 기회를 찾았다.마스크를 쓴 남자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 칼을 하민이의 목에 더 바짝 댔다. 하민이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지만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그는 마치 도움을 구하듯 무력한 눈빛으로 나도현을 바라보았다.“나 변호사님, 양채은을 붙잡는 게 중요한지 아니면 이 아이의 목숨이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시지.”마스크를 쓴 남
“뭐라고?”나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언제나 냉철했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양시은이 그토록 아끼는 아이인데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양채은은 그의 변화된 표정을 보며 가슴 속에 얼음이 맺히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절규하듯 소리쳤다.“도현 씨의 약혼녀는 나예요. 당신이랑 이 아이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얘를 걱정하는 건데요?”나도현의 목소리는 차갑고 위협적이었는데 마치 이를 갈며 한 자 한 자 내뱉는 듯했다.“하민은 겨우 어린애일 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양채은은 그의 눈빛에 겁먹고 한발 물러섰지만 곧 허리를 펴고 단호하게 따졌다.“무고하다고요? 그럼 나는요? 나야말로 제일 무고한 사람이 아닐까요! 난 아이도 잃고 당신도 잃고 엄마가 될 자격까지 잃었어요. 이 모든 게 다 당신이랑 시은이 때문이라고요!”“채은아, 정신 차려!”나도현은 앞으로 한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양채은은 이제 무너지고 미쳐버린 상태였다.“지금보다 더 정신이 말짱할 때가 없어요. 도현 씨,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그녀의 눈빛에는 한 가닥의 애처로움과 간청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나도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하민의 일은 네가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럼 가만 안 둘 테니까.”양채은은 냉소했다. 자신이 한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스쳤다.“설명? 좋아요. 말해드리죠. 하민이는 당신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보냈어요. 나랑 다시 시작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영원히 걔를 볼 생각하지 말아요.”“미쳤군!”나도현은 분노에 차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채은아. 이런 식으로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웃기지 마! 나 누구의 협박도 받지 않아!”양채은은 입술을 깨물었다.“당신이 날
나도현은 양시은의 행동을 느끼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아픈데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냐?” 양시은은 급하게 기침을 하며 얼굴이 빨개졌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난이야.”나도현은 차분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침대 옆에 앉았다. 기침을 마친 양시은은 적당히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심해진 거 같지? 나 왜 이래?” “검사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 나도현은 여전히 평온하게 대답했다. 양시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때 목이 갑자기 마르기 시작했다. 자리를 뜰 수는 없지만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던 차에 나도현은 따뜻한 물 한 컵을 그녀 앞에 가져다 주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양시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잠시 온기가 퍼지는 듯했지만 그것은 금세 사라졌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무서운 존재야? 꿈속에 악몽으로 나올 만큼?” 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아니. 그냥...” 양시은은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나도현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웃으며 일어났다. “일찍 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몇 개의 사건 기록을 살펴보았고 최근에 사건이 많았다. 다 보고나니 한시간이 지났고 양시은이 걱정되어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잠든 상태였다. 이번에는 악몽을 꾸지 않은 듯 꽤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자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그때 양시은이 갑자기 그의 손을 잡았다. “가지 마.”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나도현의 마음 속에도 잠시 따뜻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그가 그렇게 잠든 그녀를 바라보며 몇 년 전 그들 간의 사랑이 떠오르며 그때의 모든 것이 스치는 듯 했다. 그는 밤새 그녀 곁에 있었고 아침에야 자리를 떠났다. 햇살 한 줄기가 얼굴에 비춰지자 양시은은 눈을 떴다. 손에는 누군가의 잔여 온기가
지석훈도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손으로 온도를 체크한 뒤 급하게 손을 빼었다. “상처가 감염된 것 같은데 그럴 리는 없는데. 약도 먹었고 상태는 나아져야 하는데.” 그는 급히 상황을 간단히 점검했다. 양시은의 눈꺼풀을 손으로 열고 손전등으로 비추어 봤다. 반응은 미약했다. 지석훈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며 급히 약을 하나 그녀의 입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안 되겠다. 여기서 해결할 수 없다. 빨리 큰 병원에 가서 자세히 검사 받아야 해.” 나도현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양시은을 그냥 안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지석훈은 불러봤지만 그는 반응이 없었고 급하게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는 잠시 옷차림을 보았다. 흰색 잠옷에 대충 외투만 입고 발에는 체크 무늬 슬리퍼를 신고서도 이렇게 급히 온 것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자 그녀가 그를 이렇게 무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나도현, 너 같은 놈은 절대 용서 안 해. 영원히!” 바람이 불어 지나가면서 그의 분노를 다 날려버렸다. 병원 안은 분주했고 나도현은 양시은을 안고 진료실로 직행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열 나서 혼수 상태예요.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습니다.” 응급실 의사들이 급히 달려와 구급 처치를 시작했다. 20분쯤 지나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상처가 감염된 건 아닌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건 면역력이 약해져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입니다. 이런 열 증상은 드물고 상태는 이제 통제가 되었어요. 혈액 검사로 원인을 밝혀볼 예정입니다.” 양시은은 이제 많이 나아 보였다. 나도현은 두어 날 동안 그녀에게 별 문제가 없었고 별장이었지만 온도가 적당히 유지되었고 상처 감염도 아니었고 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 입원해야 할까요?” 나도현은 불편한 마음에도 그녀의 상태를 생각하며 물었다
세상 일이란 예기치 않게 변하기 마련이다. 모든 전환은 인생의 작은 순간 속에서 일어나며 운명은 이미 그녀에게 선택된 답을 주었고 그 답을 따라 그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했다. “양시은!” 그녀는 갑자기 눈을 뜨며 흐릿한 눈앞에 나도현의 모습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웃으며 조롱처럼 말했다. “나도현 변호사님, 점점 더 멋있어 지네.” 하지만 나도현의 얼굴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눈을 좁히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왜 친한 척 해. 내게 빚진 것은 어떻게 갚을 건데?” 양시은은 머리를 세게 쳤다. ‘뭐지?’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 같지?’ 그렇다. 그들 사이는 이미 서로를 모르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나도현은 이미 그녀의 목을 잡고 있었고 하얀 피부 아래에서 굵은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뭘로 갚을 거야?” 그는 점점 더 다가갔고 그 표정은 악몽처럼 흉악했다. 양시은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들이 맺혔다. “나도현, 가까이 오지 마. 제발...” 끝없이 계속되는 악몽 그 안에서 현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결국 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도현은 침대 옆에 서서 입술을 꽉 닫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무서워하냐?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그때 날 떠났냐?” 침대 위의 양시은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움켜잡은 채 얼굴이 창백하고 땀은 비오듯 흘러내렸다. 나도현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듯 급히 몸을 구부려서 그녀를 깨우려 애썼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그 목소리 속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 “양시은, 깨어나. 꿈이야.” 하지만 피부를 만지는 순간 그는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더 세게 만져보니 그녀가 열이 세게 나고 있었다. ‘아까 주사 맞고 약을 먹었는데 왜 갑자기 다시 열이 나지?’ 아무리 불러도 양시은은
양시은은 잠시 말문이 막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 시절 자기가 나도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를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도현은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가며 깊고 검은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혹시 너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면 안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양시은은 입술을 살짝 비틀며 못마땅하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현 변호사님, 이 세상에서 나만큼 마음도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도 없을 거야. 만약 내가 마음이 약해 졌다면 처음부터 돈 때문에 떠나지 않았겠지.” 그의 동공이 갑자기 수축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늘 마음속에 떠안고 있던 사실을 잠시 잊어버리고 자신을 속여온 것이 얼마나 웃기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그녀는 죄책감 없이 그저 이런 일을 벌이고 있었다. “용서해 달라는 거냐?”나도현은 침대 옆에 손을 대며 그 반짝이는 눈빛을 그녀에게 맞추었다. 그 눈빛 속에는 잔인함이 섞인 웃음이 묻어 있었다. “꿈도 꾸지 마. 양시은,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비로소 뭘 해야 할지 알게 되는 거야.” 양시은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바라보며 손이 살짝 떨려 뜨거운 물이 흘러나올 뻔했다.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그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당신 원래의 평온했던 삶을 망치는 게 그 정도로 가치가 있어?” “너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마. 양시은.” 그가 마치 모든 것을 지해하는 신처럼 천천히 덧붙였다. 양시은은 무엇을 하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듯 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고 그저 컵을 들어 물을 천천히 마셨다. 달콤하고 따뜻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 불타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도현은 아무 말 없이 약을 그녀에게 던졌다. “먹어, 여기서 죽지 마.” 양시은 약을 받아 삼켰고 약의 쓴맛이 입안에 서서히 퍼졌지만 그녀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날 받아주지
지석훈은 약을 처방하고 링거를 넣으며 약도 나눠줬다. “이건 먹는 약이야. 하루 세 번이고 식후에 복용해.”지석훈은 나도현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도현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연인의 눈에선 사소한 문제도 크게 보이기 마련이다.“그냥 감기와 열뿐이야. 해열 주사도 맞고 링거도 맞고 약도 처방해줬어. 뭘 그렇게 걱정해? 약 바꿀 거면 내가 순서를 적어줄게. 이건 주사바늘인데 내가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그럼 난 갈게.” 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나도현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지석훈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링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나도현이 전화 폭탄을 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여자는 아직 깨지 않았지만 지석훈은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애정 어린 모습을 못 봐줄 거 같았다. 신석훈이 간지 얼마 안 되서 양시은이 눈을 떴다. 양시은은 침대 옆에 있던 나도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게 아닌지 잠시 의심이 들었다.“나도현?”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놀랍게도 나도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끝의 온기와 감촉을 느끼면서 양시은은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양시은은 어쩔 줄을 몰랐다. 나도현은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미워하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다.“나...”양시은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목도 엄청 아팠다.“말하지 마. 너 지금 40도 넘게 열이 나고 있어. 물 마실래? 내가 물 가져올게.”나도현은 예전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그의 따뜻한 눈빛은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 그와 함께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 나도현은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애틋하게 대했다. 나도현은 지금도 말 뿐인 게 아니였다. 나도현은 일어나서 그녀를 도와주려고 했고 그녀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러나 나도현은 그녀를 가만히 들어서 편하게 기대게 해주었고 그
양시은은 고통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전에 나도현을 위해 칼을 대신 막아준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고 그 상처 위에 임다혜가 보낸 약까지 보내져 그녀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 양시은의 체온은 39도를 넘어서 거의 40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의식은 흐릿하고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져 내린다.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가사도우미가 양시은이 침대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입을 벌려 놀랐다. 마치 그녀가 이미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히 나도현에게 전했다. “도련님, 양시은 씨가 죽은 것 같아요...” “뭐라고?” 나도현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찰나에 이른 속도로 깊어진 흑단처럼 좁아지며 가사도우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봤다.도우미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도우닌 나도현이 이렇게 급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도현의 얼굴은 흰 종이처럼 창백하고 그의 눈에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있었고 그는 바로 서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몇 걸음에 방에 도달하고, 그는 문을 급하게 열었다.침대에 누운 양시은을 확인한 그는 잠깐 멈칫했다. 양시은은 살고 있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자고 있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얼굴과 급한 숨소리가 그에게 명확히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주었다.그는 양시은의 붉어진 뺨을 보며 이마를 만지자 그녀의 열기가 손끝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도현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지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석훈, 지금 내 별장에 바로 와. 열 나는 사람이 있어.”지석훈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너희 개인 의사야 뭐야. 열 정도로 괜찮은 거면 약 있잖아.”온지유가 아프면 여이현이 그를 찾았고 권다솔이 아프면 배진호가 그를 찾았다. “나도현의 여자가 아프다니... 아니. 잠깐만. 여자?”지석훈의 눈이 반짝였다. “나도현, 거기 아픈 사람이 여자라고? 어디서 생긴 여자야? 설마 그 전 여친이냐?”“그냥 빨리 와. 약도
여자는 일부러 말을 모호하게 꺼냈다. 그녀를 보낸 사람은 임다혜였고 여기에 더해 박은희가 몰래 도와주면서 이 두 사람이 협력하여 별장에 하녀 한 명을 배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양시은에게는 그 의도가 확실히 잘못 전달됐다. 여기가 바로 나도현의 집이므로 이 여자는 분명히 나도현이 불러낸 사람일 것이다. 이 보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현이 분명히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약은 여기 두세요. 목마를 때 마실게여.”“양시은 씨, 저는 꼭 당신이 이 약을 마시는 걸 봐야만 갈수 있습니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여자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놓고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양시은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양시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마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 그녀 앞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수 없었겠지만 이 상대는 양시은이었다. 그리고 박은희는 반드시 양시은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따라서 양시은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약을 언제 마시면 난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같이 기다려 보시든지.”양시은은 지금 아이를 찾는 일이 급해서 이 여자와 시간을 보내며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마셨으니 이제 가세요.” 그러자 양시은은 그 말과 함께 보약을 한 모금 두 모금, 금방 다 마셨고 그릇을 여자의 쪽으로 돌려보냈다. “다 마셨어요. 이제 가셔도 됩니다.”“물론이죠. 양시은 씨, 푹 쉬세요.”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고는 그릇을 들고 떠났다. 여자가 별장을 나서며 길가에 서 있던 차로 올라타 이내 임다혜와 만날 예정이었다.양시은은 보약을 다 마신 뒤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리 신경을 쓰진 않았다. 나도현이 아무리 말을 까칠하게 해도 그녀를 정신적으로 괴롭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