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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

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

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

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

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

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

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

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

“뭐 하는 거예요?”

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

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이현이 원해서 그녀와 결혼한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이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현이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온지유, 내가 너랑 결혼한 건 임종 전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야. 3년 뒤면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겠지. 그전까지 내 몸에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무서운 게 뭔지 알려줄 테니까.”

지유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의 첫사랑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현이 얼마나 승아를 사랑하는데, 지유가 잘못 건드려서 그의 노력이 무너지는 날엔 무조건 그녀를 죽이려 들것이다.

지유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이렇게 대답했다.

“네...”

순간 이현은 손을 지유의 가느다란 목에 갖다 대더니 점점 아래로 향했다. 이현이 손에 힘을 주자 살이 벚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세 번째 단추에 멈췄다.

“단추를 잘못 끼웠어.”

지유는 그의 손목을 따라가 보니 단추가 정말 잘못 끼워져 있었다.

놀란 서유가 이현의 손을 쳐내더니 얼른 단추를 풀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 착장 유의할게요.”

이 말에 이현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올라 지유를 밀쳐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현은 등을 돌린 채 옷깃을 잘 정리하며 말했다.

“이런 저급 실수는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

지유는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은 아픔에 그저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녀에겐 한 치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본인은?

이현이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여기 서서 뭐 해? 회의 준비하러 안 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여이현 씨, 노승아 씨 돌아왔어요.”

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3년간 지유가 이현의 이름 석 자를 다 부른 건 처음이었다.

눈물을 힘겹게 도로 삼킨 지유는 이현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물었다.

“우리도 이혼할 때 됐죠.”

이를 들은 이현의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고 얼굴도 한층 어두워졌다.

“온지유, 지금은 업무 시간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이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지유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숨이 막혀왔다.

침묵으로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손등에 따듯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내려다보니 눈물이었다.

결국 또 이렇게 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현의 말이 맞다. 지유는 아직 이현의 비서였기에 일은 해야 한다.

회의에 쓸 서류를 집에 두고 왔기에 지유는 집에 들렀다 가야 했다.

간 김에 3년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이혼 서류도 챙길 생각이었다.

...

여진그룹 대표이사실.

이현은 가죽 소파에 기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이현의 비서 배진호가 들어왔다.

“대표님, 조사 끝났습니다. 어제 온 비서님은 사무실에서 주무신 게 맞습니다.”

이를 들은 이현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그 외 노승아 씨도 대표님이 묵은 호텔로 찾아가 카운터에 방 번호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한편.

여씨 가문 본가로 돌아온 지유가 대문을 들어서는데 여진숙의 각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히 일하지 않고 왜 들어온 거야? 우리 여씨 가문은 쓸모없는 사람 필요 없다. 특히 너처럼 아이도 못 낳는 애는 더더욱.”

지유는 시어머니의 비아냥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건 지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앞으로 더는 이현의 아이를 낳지 못한 것으로 시어머니께 욕먹을 걱정은 없게 되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의사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며 내어준 거무튀튀한 약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지유는 그래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회의에서 쓸 자료 좀 가지러 왔어요.”

“중요한 서류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했어야지. 흘리고 다니다가 이제야 가지러 와? 그것도 업무 태만이야 얘. 우리 집안에 갚아야 할 빚이 20억이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한평생 이현이를 위해 일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게으름을 피워?”

지유는 너무 마음이 아파 시선으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깜빡하고 있었다. 이현의 할아버지가 그녀의 아버지를 대신해 20억의 빚을 갚아주면서 이현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아까 이현에게 이혼 소리를 꺼낼 때 왜 그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게 맡은 바 임무를 잘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아마 이혼하더라도 여씨 가문에 빚진 돈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꼭 갚을 거예요. 대표님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서 일단은 서류만 가지고 나가볼게요.”

이 말을 뒤로 지유는 이현의 서재로 향했다.

“가라는 말도 안 했는데 먼저 자리를 비워? 그게 무슨 버릇이니? 됐다. 마침 물어볼 게 있어.”

“무슨 일이세요?”

“이번 달 병원에는 가봤니? 아직 소식 없어?”

“저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일이 바쁘다 보니 아직 애 생각 없어요. 이따 시간 좀 비면 노력해 볼게요.”

여진숙는 표정이 삭 변하더니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안 되면 되는 애로 바꿔야지. 얼른 이현이랑 이혼해!”

지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혼 첫날부터 언젠간 이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유는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한대요?”

“아니면?”

여진숙이 되물었다.

지유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삼계탕 끓였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정적을 깼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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