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우석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튿날.지유가 잠에서 깨보니 이현은 어느새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그는 잠에서 깬 지유를 보고 이렇게 당부했다.“바나나 바나나 우유는 침대맡에 뒀어. 일어나면 마셔.”지유가 침대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디 가요?”잠에서 깨면 바로 집에 가자던 이현의 말이 떠올랐다.“일이 좀 있어.”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가 집에 바래다줄 거야.”지유는 침대 가에 앉은 채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이현은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침대맡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따듯할 때 마셔.”지유는 이를 건네받더니 입술을 오므렸다.“전에 바나나 우유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너만 좋아하면 돼.”지유는 이런 말이 이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몹시 의아했다.그때 이현은 바나나 우유를 보기만 해도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가 말해줘서야 지유는 이현이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지유는 한 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 적이 없었다. 한 모금 쪽 빨아보니 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전에 학교를 다닐 때 시험 전에 긴장을 달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바나나 우유를 한잔씩 마셨고 그러면 기분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현이 싫어한다는 말에 바나나 우유를 끊었다.“맛있어?”이현이 물었다.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이현은 지유가 웃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좋으면 도우미 아줌마한테 집에도 좀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진짜예요?”지유는 이런 이현이 너무 의외였다. 사실 그녀는 쉽게 만족하는 여자였다. 바나나 우유 하나면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현이 이런 변화를 불러왔다는게 신기했다.“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킨 적 있어?”이현은 손을 빼더니 지유가 산 코트로 손을 뻗었다.마침 오늘 기온이 많이 떨어졌고 그가 입은 슈트와도 잘 어울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그러니 진호는 지유에게 전보다 더 예의를 차려야 했다.지유는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안에 있나요?”“대표님은... 들어간 지 얼마 안 됩니다.”진호가 주춤거리며 말했다.지유는 문 앞에 선 기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승아를 위해서라면 늘 이렇게 맹목적이었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진호는 혹시나 지유가 생각이 많아질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사모님, 오해하지는 마세요. 병원에 온건 업무를 위해서예요.”지유가 웃으며 진호에게 말했다.“오해는 무슨,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진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다행이네요.”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해 지유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간 지유는 승아의 매니저 예진을 발견했고 승아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알아냈다.승아는 VIP 병실에 있었기에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병실과 가까워지자 승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왜 나를 살린 거예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살아서 뭐 해. 난 도대체 뭐냐고.”“승아야, 그만해.”이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유의 심장이 덜컹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왜 내가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내 일이라면 일 순위로 생각하고 옆에 있어 줬잖아요. 근데 왜 변해버린 거예요? 오빠가 변한 이상 내가 살아있을 이유는 없어요!”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룻밤 사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이를 본 이현이 얼굴을 굳히더니 승아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승아는 기회를 보고 얼른 이현의 품에 안겼다.사실 지유는 이런 광경을 정말 마주하기 싫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이현이 침대가에 서서 휴지로 승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보였다.승아는 이현의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손에는 링거 바늘도 꽂혀 있었다.겉보기에는 정말 가여워 보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유는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오빠, 나 떠나지 마요.
매니저의 말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놀랐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현은 지유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얼른 승아를 놓아주었다.훔쳐 듣다가 들킨 지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이현은 그런 지유를 보며 얼른 따라나섰다.“온지유!”지유는 이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얼른 걸음을 더 재촉했다. 하지만 이내 이현이 지유를 따라잡았다.이현을 마주한 지유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졌고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봤다.이현이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가서 승아 씨 챙겨줘요. 나는 상관하지 말고.”“네가 왜 병원에 있어?”이현은 지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혹시 어디 아파? 알레르기가 더 심해진 거야?”이현은 지유의 소매를 걷으며 지유의 팔을 확인하려 했지만 마음이 더 씁쓸해진 지유는 이를 거부하듯 팔을 거두며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나 괜찮아요.”지유가 병실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제 말했던 중요한 일이 노승아 씨죠?”이현에게 승아는 늘 일 순위였다. 승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이현은 늘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왔다.“승아 지금 성대도 다치고 왼쪽 귀는 청력을 잃었어. 계속 나아지지 않는다면 커리어는 여기서 끝이야.”이현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승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몰랐다. 커리어가 망가진다면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다. 극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유는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기분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알겠어요.”승아가 이현의 뒤를 쫓아와 문 앞에 서 있었다. 매니저가 뒤에서 링거병을 들어줬다. 승아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오빠.”이현은 그런 승아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지유에게 말했다.“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집에 갈게.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이 말을 뒤로 이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지유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
은서우도 뒤따라가려는데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은 선생님, 아직은 따라가면 안 되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정말 제가 밀친 게 아니에요. 혼자 병이 발작한 거라고요. 믿어주세요.”은서우의 말에도 간호사는 고개만 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이때 보안팀 요원들도 현장에 도착했고 은서우를 사무실로 데려가 추가 처리를 기다렸다.은서우는 두 손으로 팔을 꽉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임원진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은 선생님, 의사이신 분이 어떻게 병원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이건 명백히 병원 규정과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이에요.”“이유가 뭐였든 간에 은 선생님의 이런 행동은 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은서우는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비난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은서우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소상태와 연희진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두 사람은 급하게 병실로 뛰어 들어갔고, 의식을 잃은 소태훈을 본 연희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소상태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다행히 보안 요원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죽기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소상태는 은서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이 쓸모없는 년아,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어떡할래!”뒤따라온 연희진은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며 은서우를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은서우는 울며 말했다.“제가 밀친 게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병이 발작해서 쓰러진 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하지만 은서우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던 소상태는 연희진보다 다소 진정된
“소연아, 너 그 말 들었어? 저쪽 병동에 있던 까다로운 환자 한 명이 오늘 의료진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닌가 했다니까?”김소민의 신기하다는 듯한 말에 박소연이 웃으며 답했다.“우리가 정성스럽게 돌봐줘서 감동하였나 봐. 그건 그렇고, 은 선생님이 회진하러 간 지 한참 지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오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는 돌아왔을 텐데.”김소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있으면 좀 걸릴 수도 있지. 은 선생님이 워낙 책임감도 강하고 뭐든 열심히 하시잖아. 너도 잘 알면서.”“그건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지?”박소연은 불안한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아이고, 쓸모없는 걱정하고 있어. 곧 돌아오시겠지. 병원이 이렇게 큰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잖아.”김소민은 박소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은서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감이 더욱 커졌던 박소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걱정돼서 안 되겠어. 내가 가볼게.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진지한 박소연의 태도에 김소연도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같이 가보자.”두 사람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자, 비상계단 쪽에서 은서우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김소민과 박소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즉시 계단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은 선생님!”두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은 은서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저 여기 있어요!”은서우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소태훈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겨우 소태훈한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던 찰나 뜻밖의 사고가 벌어졌다.은서우의 뿌리치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은 소태훈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막 계단 입구에 도착하던 간호사들은 은서우 옆에
은서우는 이 말을 내던지고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래봤자 갈 수 있는 곳은 병원밖에 없었던 은서우는 야간 근무를 다른 사람과 교대하고 병원에 남았다.이 밤, 병원 복도에는 가끔 들려오는 기계 소리만 들려올 뿐 매우 조용했다.은서우는 평소와 같이 병동 구역을 돌아보며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바로 이때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림자의 주인은 소태훈이었는데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자 은서우는 코를 찡그렸다. 몸에서 나는 것 같은 그 냄새는 은서우의 곁으로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소태훈은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흐리멍덩하면서도 광기 어린 눈빛으로 걸어왔다.“은서우.”소태훈은 혀 꼬부리는 말투로 은서우의 이름을 부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깜짝 놀란 은서우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소태훈, 너 술 먹었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이 손 놔!”하지만 소태훈의 귀에 은서우의 말은 들릴 리가 없었고 그는 술기운을 빌어 은서우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 했다.갑작스러운 소태훈의 행동에 혐오스러우면서도 두려워진 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이 미친놈아! 이거 안 놔? 보안 요원 부르기 전에 당장 놔!”소태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보안 요원?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빠를 것 같아?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못 빠져나가. 너는 내 것이야.”끔찍한 소태훈의 말에 은서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다 무릎으로 소태훈의 배를 걷어찼다.갑작스러운 통증에 소태훈은 손에 힘이 풀렸고 은서우는 기회를 틈타 즉시 몸을 돌려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간호사들이 있었고 은서우는 보안팀에게 연락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술에 취한 채 이미 이성을 잃었던 소태훈은 아픔을 참으며 즉시 은서우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입을 꽉 틀어
하지만 소태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왜 없어? 네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는데. 그러니까 돈을 달라고 할 때 줬으면 좀 좋아? 그럼 이런 일도 안 일어났을 거잖아. 후회되지?”“너!”“지금 줘도 안 늦었어. 네 이름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리고 싶으면 일억 가져와.”터무니없는 액수에 은서우는 손도 떨리고 목소리로 떨려왔다.“일억? 사천만 원이라며?”소태훈은 휠체어에 기대앉으며 비꼬는 태도로 말했다.“그건 며칠 전 가격이지. 지금은 일억이 필요해. 백 원도 적으면 안 되는 정확한 일억.”노골적인 협박에 은서우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났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이십 년 넘게 해준 것도 없이 항상 요구하고 갈취만 하는 이런 사람들이 가족이라니, 은서우의 마음속은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차올랐다.다른 가족들은 자애로운 엄마, 다정한 아빠 그리고 효도하는 자녀로 식구들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왜 은서우의 가족은 이런 사람들인지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꿈 깨. 백 원도 못 줘. 실시간 검색 내리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방법대로 할 거야. 고소해서 법원가면 지금까지 너한테 준 돈 전부 토해내게 할 테니까 너도 각오해.”은서우도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은서우도 사람인지라 쥐꼬리만 한 은혜를 갚겠다고 이렇게까지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와장창!소상태가 들고 있던 유리컵을 은서우의 발 옆에 내 던졌다. 많은 유리 파편이 한순간 바닥에서 튕겨 오르며 사방에 뿌려졌고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은서우의 종아리를 스쳤다.은서우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고개를 숙여보니 종아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소상태는 은서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십 년을 키워줬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물건인 줄 몰랐네? 고소?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오늘 이 집 밖으로 한발도 못 나갈 테니까.”상처가 참기 힘들 정도로 너무 아팠지만
은서우의 말을 듣고 있던 인명진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 말했다.“같이 가줄게요. 거절할 생각 하지 말고. 지난번에 거기 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도 잘 알 거 아니에요. 나 아니었으면 그 집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지난번 소태훈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못 했던 생각이 떠올라 은서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웃으며 말했다.“또 원장님한테 신세를 지게 생겼네요.”인명진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인명진은 은서우를 데리고 즉시 소씨 가문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 은서우는 문 앞에 서서 잠깐 멈추고 말했다.“여기 계세요. 조금 있다가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도와줘요.”인명진은 은서우의 휴대전화를 보며 말했다.“연락해요.”은서우는 휴대전화를 들어 인명진한테 보여줬다.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인명진을 긴급 연락처로 설정해 놓은 상태였고, 따라서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면 인명진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 수 있었다.열쇠를 가지고 있던 은서우는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집 안으로 들어오는 은서우를 보자 소상태는 즉시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무슨 낯짝으로 들어오는 거야? 밖에서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네? 태훈이가 그러는데 네가 태훈이 번호도 차단하고 돈도 안 준다고 그랬다며? 이제 큰 병원에서 일한다고 먹고살 만하니까 우리는 나 몰라라 내팽개치겠다는 거야?”“아니요. 오늘에는 이 문제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소태훈은 어디 있어요?”주방에 있던 연희진은 은서우를 보고 다정하게 맞아주며 인사를 하려다 소상태가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더니 주춤거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태훈이 방에 있어. 요즘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또 성질부리고. 어휴, 뭐 어쩌겠어.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 나이 들면 나아질 거야.”은서우는 매번 반복되는 지겨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이미 23살이에요. 몇 살을 더 먹어야 나아지는데요? ”연희진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런 상황과 태도를 먼저 예상했
은서우는 아무래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뒤에서 제 얘기를 했다고 운 게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은서우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실시간 검색어를 봤고 며칠 전 은서우한테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던 인명진은 즉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인터넷에는 은서우의 몰래카메라 사건부터 시작해 과거에 일하던 곳부터 매일 밤 아르바이트를 했던 영상과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글을 올린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고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돈이 많은 남자 덕분이라고 설명했다.돈이 많은 남자는 누가 봐도 인명진이었다.은서우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병원에 한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인명진조차도 며칠 전 은서우가 직접 말해줘서 알게 된 거라 결국 이 사실을 알고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인명진은 은서우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지난날 은서우가 밤에조차 아르바이트했던 이유는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돈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이제 와서 은서우가 더는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뒤통수를 친 거였다. 이리저리 차이는 은서우의 처지가 마치 축구공 같았다. 인명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은서우 씨는 자기 앞에 일만 잘하면 돼요. 그리고 내 생각이 궁금하다면 분명하게 말할게요.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은서우 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멍하니 인명진을 바라보던 은서우는 코끝이 찡해지며 겨우 가라앉혔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정말요?”“네.”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겨우 이런 말 한마디에도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건지, 인명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봤다.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기력한 마음을 인명진도 잘 알고 있었다.인명진도 어릴 때 법로 밑에서 크면서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그때 그는 매일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갈망했고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간호사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맥없이 툭 떨어뜨렸다.“뭐라고요?”‘어떻게 안 거지? 그 인턴이 말했나?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병원을 나갔는데?’여자 간호사는 자기 팔을 툭툭 털며 냉소를 짓고 말했다.“모르고 있었나 봐요? 인터넷 찾아봐요. 누군가가 은 선생님이 한 짓들을 전부 다 까발렸으니까.”은서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초조함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은서우는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그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일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인터넷에 들어가 보자 실시간 검색어에 ‘몰카’라는 단어가 올라가 있었다.은서우는 마치 누군가 팔다리의 힘을 쫙 뺀 것처럼 그 자리에 풀썩 물어 앉을 것 같았다.간호사는 괴상 야릇한 표정으로 은서우를 비꼬며 망했다.“우리 원장님이 누굴 제일 이뻐하죠? 바로 여기 있는 은 선생님이에요. 근데 이뻐하고 생각해 주면 뭐 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누가 감히 상상조차 했겠어요? 앞에서는 좋은척하면서 뒤에서 몰래 사진 찍어서 팔고 있을 줄?”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은서우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주위의 비웃음과 조롱이 끊임없이 은서우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양심을 후벼팠다.은서우의 머릿속에는 약을 탔던 날 인명진이 그걸 발견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얼굴이 확대되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수군거리는 주변의 소리는 마치 인명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은서우 씨,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 내가 그렇게 많은 걸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예요? 사람을 정말 잘못 봤네요.”“은서우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 애당초 좋게 보는 게 아니었는데.”“지금이라도 떠나세요.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은서우는 환청에 멍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었다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