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
사실 지유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추억이었지만 이현에게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사실 지유는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도대체 이현에게 기억할 가치가 있는 추억은 무엇일까?“왜 아무 말도 없어?”이현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 이현이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지유는 차가운 이현의 눈동자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이현이 지유를 힐끔 쳐다보더니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머릿속에 한 여자아이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지유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실었다.“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석이라는 사람, 그렇게 좋아?”지유가 말했다.“네, 많이 좋아해요.”이 말에 이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근데... 읍...”지유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분노에 휩싸인 이현이 그녀에게 키스했다.약간 의외였기에 지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현은 마치 화풀이하듯 미친 듯이 키스해 왔고 손도 점점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그는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지유도 점점 몸이 끓어올랐다.“이현 씨...”지유가 이현의 이름을 부르자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이라도 더한 듯 이현의 행동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아예 지유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지유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현을 보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막았다.“이현 씨...”이현은 지유를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탔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더니 하얀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했다.“음...”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지만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이현은 지유의 손을 침대 머리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가만히 있어.”이현은 몸을 지유에게 바짝 붙였다. 이현의 몸에 변화가 생긴 걸 느낀 지유는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심장도
시끄러운 벨 소리가 두 사람을 차분해지게 했다.이현이 지유의 몸에서 내려오더니 욕망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는 우석이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현은 더더욱 그녀의 제일 소중한 물건을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심호흡으로 끝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그는 이내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이현은 점점 이성을 되찾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욕실로 향했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지유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실망이 없다면 사실 거짓말이다.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중도에 멈춘다는 건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유는 미친 듯이 전화한 사람이 승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감춘다 해도 지유는 화면에 뜬 이름을 보게 되었다.약을 탄 술을 마시고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니, 도대체 승아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게 가능할까?지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모습이 조금 미웠다.이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지유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항상 사랑받는 쪽은 두려움이 없다. 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비굴해지는 걸까?기분이 잡친 지유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놓인 담배에 눈길이 갔고 잽싸게 한대를 입에 물었다.연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에 지유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우울해지는 것 같았다.잔인하게도 그녀는 또렷한 정신으로 자신이 어떻게 이현에게 빠져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치명적이진 않지만 그래도 한동안 마음이 좀 쓰라릴 것이다.욕실에서 나온 이현은 이미 이성을 완전히 되찾았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데 담배 연기를 맡았다.지유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우석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튿날.지유가 잠에서 깨보니 이현은 어느새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그는 잠에서 깬 지유를 보고 이렇게 당부했다.“바나나 바나나 우유는 침대맡에 뒀어. 일어나면 마셔.”지유가 침대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디 가요?”잠에서 깨면 바로 집에 가자던 이현의 말이 떠올랐다.“일이 좀 있어.”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기사가 집에 바래다줄 거야.”지유는 침대 가에 앉은 채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이현은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다. 지유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침대맡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따듯할 때 마셔.”지유는 이를 건네받더니 입술을 오므렸다.“전에 바나나 우유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너만 좋아하면 돼.”지유는 이런 말이 이현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몹시 의아했다.그때 이현은 바나나 우유를 보기만 해도 미간을 찌푸렸다. 도우미가 말해줘서야 지유는 이현이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지유는 한 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 적이 없었다. 한 모금 쪽 빨아보니 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전에 학교를 다닐 때 시험 전에 긴장을 달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꼭 바나나 우유를 한잔씩 마셨고 그러면 기분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현이 싫어한다는 말에 바나나 우유를 끊었다.“맛있어?”이현이 물었다.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이현은 지유가 웃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좋으면 도우미 아줌마한테 집에도 좀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진짜예요?”지유는 이런 이현이 너무 의외였다. 사실 그녀는 쉽게 만족하는 여자였다. 바나나 우유 하나면 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현이 이런 변화를 불러왔다는게 신기했다.“내가 언제 약속 안 지킨 적 있어?”이현은 손을 빼더니 지유가 산 코트로 손을 뻗었다.마침 오늘 기온이 많이 떨어졌고 그가 입은 슈트와도 잘 어울렸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그러니 진호는 지유에게 전보다 더 예의를 차려야 했다.지유는 뻔히 알면서 이렇게 물었다.“이현 씨 안에 있나요?”“대표님은... 들어간 지 얼마 안 됩니다.”진호가 주춤거리며 말했다.지유는 문 앞에 선 기자들을 힐끔 쳐다봤다.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승아를 위해서라면 늘 이렇게 맹목적이었고 주변 사람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진호는 혹시나 지유가 생각이 많아질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사모님, 오해하지는 마세요. 병원에 온건 업무를 위해서예요.”지유가 웃으며 진호에게 말했다.“오해는 무슨, 설명하실 필요 없어요.”진호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다행이네요.”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생각해 지유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간 지유는 승아의 매니저 예진을 발견했고 승아가 어느 병실에 있는지 알아냈다.승아는 VIP 병실에 있었기에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병실과 가까워지자 승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왜 나를 살린 거예요?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살아서 뭐 해. 난 도대체 뭐냐고.”“승아야, 그만해.”이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유의 심장이 덜컹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왜 내가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요. 내 일이라면 일 순위로 생각하고 옆에 있어 줬잖아요. 근데 왜 변해버린 거예요? 오빠가 변한 이상 내가 살아있을 이유는 없어요!”승아는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룻밤 사이 많이 야윈 것 같았다.이를 본 이현이 얼굴을 굳히더니 승아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승아는 기회를 보고 얼른 이현의 품에 안겼다.사실 지유는 이런 광경을 정말 마주하기 싫었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이현이 침대가에 서서 휴지로 승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보였다.승아는 이현의 품에 안겨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손에는 링거 바늘도 꽂혀 있었다.겉보기에는 정말 가여워 보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유는 마음이 너무 씁쓸했다.“오빠, 나 떠나지 마요.
매니저의 말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놀랐다.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이현은 지유가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얼른 승아를 놓아주었다.훔쳐 듣다가 들킨 지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이현은 그런 지유를 보며 얼른 따라나섰다.“온지유!”지유는 이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얼른 걸음을 더 재촉했다. 하지만 이내 이현이 지유를 따라잡았다.이현을 마주한 지유의 눈시울은 이미 빨개졌고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바라봤다.이현이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지유가 고개를 돌렸다.“가서 승아 씨 챙겨줘요. 나는 상관하지 말고.”“네가 왜 병원에 있어?”이현은 지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혹시 어디 아파? 알레르기가 더 심해진 거야?”이현은 지유의 소매를 걷으며 지유의 팔을 확인하려 했지만 마음이 더 씁쓸해진 지유는 이를 거부하듯 팔을 거두며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나 괜찮아요.”지유가 병실을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어제 말했던 중요한 일이 노승아 씨죠?”이현에게 승아는 늘 일 순위였다. 승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이현은 늘 망설임 없이 바로 튀어왔다.“승아 지금 성대도 다치고 왼쪽 귀는 청력을 잃었어. 계속 나아지지 않는다면 커리어는 여기서 끝이야.”이현의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승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몰랐다. 커리어가 망가진다면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다. 극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지유는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기분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알겠어요.”승아가 이현의 뒤를 쫓아와 문 앞에 서 있었다. 매니저가 뒤에서 링거병을 들어줬다. 승아는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보며 그를 불렀다.“오빠.”이현은 그런 승아를 힐끔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지유에게 말했다.“이 일만 처리하면 바로 집에 갈게. 집에서 기다려. 알았지?”이 말을 뒤로 이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지유는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승아는 충격에 울음을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봤다. 그녀가 알던 이현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그녀를 끔찍이 아끼던 이현이었기에 절대 그녀가 서럽게 울게 놓아두지는 않았다.지금의 이현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를 아껴주기는커녕 제일 기본적인 다독임도 하기 싫어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 이현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다른 고충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승아는 이현의 손을 놓아주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정리라니, 어떻게 정리할 건데요?”이현이 대답했다.“귀 치료되면.”“싫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승아가 점점 흥분하며 옆에 놓인 과일칼로 손목을 그으려 했다.매니저가 이를 보고는 얼른 다가가 말렸다.“언니, 이러지 마요...”승아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오빠,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일은 다 오빠를 위한 것이었어요. 목숨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오빠를 사랑한다고요. 오빠가 나한테 빚진 건 영원히 계산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정리란 더더욱 있을 수 없고요!”곧이어 의사가 도착했다. 승아의 정서가 불안정해 보이자 의사가 이현에게 말했다.“대표님, 지금 환자분의 정서가 안정적이지 않으니 더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요.”이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승아를 보고 주먹을 살짝 움켜쥐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진정제 하나 놓아주세요.”의사는 이현의 말을 듣고 승아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 승아가 이를 강하게 거부했고 간호사 몇이 붙어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승아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빛에는 이현에 대한 흠모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오빠가 나한테 이렇게 독할 리 없어요!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요, 나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 지켜야죠...”그러다 승아는 조용히 침대에 누운 채 힘없이 팔을 아래로 드리우고 눈만 깜빡거렸다.“잘 챙겨요.”이현은 매니저에게 이렇게 당부하더니 밖으로 나갔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잠깐 사이에 신무열과 김혜연은 온지유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김혜연은 다시 그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때 신무열이 말했다.“이제 어른이잖아. 핸드폰에 내비게이션도 있으니까 길 잃을 일 없어. 저쪽으로 가서 구경하자.”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열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얼마 가지 않아 그들 앞에 꽃을 파는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야윈 몸에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언니!”소녀는 김혜연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꽃을 내밀며 말했다.“언니처럼 예쁜 사람은 꽃 한 다발 가져가야죠. 안 그래요?”김혜연이 대답하려는 찰나, 소녀가 말을 덧붙였다.“이 꽃들은 제가 아침에 직접 꺾은 거예요. 싸게 팔고 있어요. 하나 사시면 하나 더 드릴게요.”소녀는 정말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꽃 한 다발도 팔지 못한 데다, 집에는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김혜연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여기 있는 꽃 전부 얼마야? 내가 다 살게.”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꽃을 사는 돈이 김혜연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소녀에게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언니, 정말 다 사 주실 거예요?”소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격 계산해 줘.”소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제 돈이 생겼으니 음식을 살 수도 있고, 엄마 약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언니를 만났으니 말이다.소녀는 서둘러 계산을 시작했고, 김혜연이 많이 사는 만큼 가격도 할인해 주었다.“이 돈 받아. 잘 챙겨서 남들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두렴.”김혜연은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소녀에게 건넸다.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언니, 너무 많이 주셨어요. 제 꽃들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것도
법로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린 다 먹었어. 별아, 엄마 아빠도 밥 먹었는지 물어봐 줄래?”“네.”별이는 천천히 말했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별이는 법로가 한 말을 온지유에게 그대로 전했다.온지유는 무척 기뻤다. 최근 별이가 이렇게 완전한 문장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랑 아빠도 밥 먹었어. 그리고 여기서 네 외삼촌도 만났어. 별아, 너도 여기 와서 같이 놀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별이의 대답을 기다리며 옆에 있는 여이현을 슬쩍 당겼다. 별이가 오고 싶다고만 하면 바로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여이현도 부드럽게 웃으며 별이에게 물었다.“별아, 여기 오고 싶어?”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법로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을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별이 병 고쳐 주신대요…”“그래, 그럼 외할아버지랑 잘 지내고, 말씀도 잘 들어. 엄마랑 아빠가 돌아갈 때 선물도 사 올게. 네가 나아지면 같이 놀러 가자.”사실 여이현도 별이를 데려올까 했지만, 온지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온지유에게 미안했던 부분도 많았고, 이번에는 별이 곁에 법로가 있으니 온지유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네.”별이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한마디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별이가 법로와 함께 지내면서 많이 좋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법로가 경성에 계속 머문다면, 별이의 건강도 회복되고 온지유와의 유대도 깊어질 것이다.온경준과 정미리는 온지유를 친딸처럼 여겼고, 친구들, 오빠와 새언니까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었으니 온지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온지유는 별이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법로에게 몇 가지 당부를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여이현이 온지유를 안으며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별이 건강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그래서 지금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잖아.”온지유는 별이가 점점 나아질 모습을 그리며 미소를 지
온지유가 방을 잡을 때 신무열이 온지유한테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온지유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이인 줄로 착각했다.신무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낮게 말했다.“네가 침대 써. 난 바닥에서 잘게.”Y국 북부에서 그 험난한 환경도 다 버텼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신무열을 깊이 사랑하는 김혜연이 그를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있을까?김혜연이 조용히 말했다.“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무열 씨는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니면 저...”“지금 관광 성수기라 방 잡기도 어려워. 게다가 너 혼자 나가면 뭐가 되겠어?”김혜연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김혜연은 고개를 숙였다. 신무열 앞에서는 언제나 말 한마디 크게 못 하는 그녀였다.자신의 가장 부드럽고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신무열은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그녀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고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네.”김혜연은 신무열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그런데 민박에서 갑자기 물이 끊길 줄이야.김혜연은 거품투성이인 채로 욕실 안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무열 씨, 프런트에 전화해서 물이 왜 안 나오는지 물어봐 줄래요?”온몸에 거품이 잔뜩 묻은 채로 나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신무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프런트 직원이 계속 사과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예비 물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해결해 드릴게요.”“최대한 빨리 부탁해요.”신무열은 물이 나온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욕실 쪽으로 말한다.“곧 물 나온대. 조금만 기다려.”“네, 알겠어요.”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몇 분 후 김혜연은 머리가 흥건한 채로 나왔다.“머리 안 말려?”“이제 말릴 거예요.”김혜연은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좋았
온지유의 말을 들으니 김혜연은 더 부끄러워졌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왕 만난 김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마침 식사 시간대인데.”“저희 민박을 예약했어요. 거기로 가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길을 안내했다.빠르게 그들은 한 민박집으로 왔다.여이현은 민박집 직원을 불렀다. 그러자 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이미 이곳에 먼저 와서 지내고 있었던지라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에게 맛있었던 음식을 추천했다.두 사람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열 가지가 넘는 음식을 주문했으나 다행히 양은 많지 않았다. 김혜연이 새우를 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신무열이 매너 있게 대신 가져와 껍질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아내를 위해 새우를 까주었다.온지유는 김혜연의 잔에 음료수를 따라주었다.“여기엔 구경할 곳이 아주 많아요. 이왕 마주친 김에 같이 둘러볼래요?”“네, 좋아요!”김혜연은 바로 대답했다.그녀와 신무열의 사이는 원래부터 어색했다. 신무열이 무뚝뚝했기에 그녀가 자꾸만 말을 건다면 짜증이 솟을 게 분명했다.행여나 신무열이 언짢아하면서 이 관계를 얼른 끝내버리려고 할까 봐 걱정되었다.한 달이라는 체험 기간은 그녀가 겨우 얻은 기회였으니 말이다.“그럼 전 사장님한테 가서 두 사람 방 예약하고 올게요. 여긴 민박집이긴 하지만 엄청 커서 매일 신선한 채소도 많고 주변 환경도 아주 좋거든요.”온지유는 주동적으로 도와주었다.신무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혜연은 당연히 미소를 지었다.“정말 고마워요.”온지유는 두 사람에게 방을 잡아 주었다.방 키를 두 사람에게 건넸을 때야 온지유가 방 두 개가 아닌 하나만 잡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너비가 1.5m밖에 되지 않는 사이즈의 침대만 하나 있었다. 다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눈빛에서 계획을 눈치챘다.김혜연과 신무열이 방으로 올라가 짐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여이현은 온지유를 구석으로 끌어당겼다.“지유, 일부러 그런 거지?”그녀가
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경성은 아주 좋은 곳이잖아요. 게다가 아가씨도 여기에 있으니까 저도 여기 남고 싶네요. 하지만 저랑 도련님은 다시 돌아가서 나라를 살펴보아야 해서 이곳에 정착하긴 어려워요.”“그렇군요. 그럼 편히 놀다가 가요. 별이를 혜연 씨한테 맡긴다면 자유 시간이 없잖아요. 오빠한테 이곳저곳 구경하러 가자고 해요. 화국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서 구경할 곳이 많거든요.”김혜연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온지유는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이 시간은 김혜연이 힘들게 노력해 얻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깝게 낭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별이는 아버지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게다가 배 비서님도 있으니까 혜연 씨는 오빠랑 시간을 보내세요.”곧이어 온지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차에 올라탔다. 순간 여이현은 뭔가 중요한 일을 깜빡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뭘 잊고 있었는데?”여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걸 왜 깜빡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결혼 준비를 했는데 웨딩사진 찍는 걸 깜빡해버렸어.”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난 또 뭐라고. 그 중요한 일이 웨딩사진 찍는 것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우린 이미 부부가 되었잖아. 안 그래?”그녀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앞으로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 천천히 찍으면 되지.”온지유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참, 우리 신혼여행 가서 찍으면 되겠다!”“그래, 그거 좋네. 배 비서, 들었죠?”여이현은 바로 운전 중인 배진호에게 지시했다. 배진호에게 이런 일은 그저 전화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에 빠르게 촬영을 예약했다.한편 김혜연은... 온지유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에게 다가갔다.신무열은 업무를 처리하
김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저랑 보내는 시간 동안 즐겁지 않으셨어요?”그녀는 이내 신무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신무열보다 키가 크지 않았기에 신무열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다.신무열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이목구비였고 그녀가 푹 빠진 얼굴이었다.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머릿속에 김혜연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확실히 즐거웠다.김혜연은 고집을 부린 적 없었고 오히려 그를 배려해 주었다.다만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Y 국 국민을 위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Y 국에 써야 했다.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김혜연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 한 달이라고 했으니까 약속 꼭 지켜.”신무열은 느긋하게 입을 열며 김혜연에게 약속을 지키라면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다.김혜연은 순간 목구멍이 막힌 기분이었고 가슴이 미어졌다.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으나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차갑고 확고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저도 알아요. 도련님이 Y 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요. Y 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건 알겠지만 도련님도 도련님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해서 Y 국을 위한답시고 평생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맞는 말이었다.하지만 법로가 그의 어머니에게 진 빚을 전부 똑똑히 보고 자랐기에 신무열은 법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Y 국은 이미 그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희생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김혜연, 한 달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네 요구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싫어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도련님 마음을 얻을 거예요! 도련님이 하신 말씀들은 전 신경 안 써요. 전 도련님을 이해하거든요. 미
게다가 별이가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별이가 친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도 온지유는 별이를 데려다가 키우려고 했었다.심지어!인명진이 그녀의 심성이 착함에 제일 좋은 증인이었다.“이왕 경성에 온 김에 경성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가세요.”온경준은 법로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위한다는 것을 보아내고 있었다.그들은 전부 온지유가 잘 살기를 바랐으니 당연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법로는 온지유의 친부가 아니던가.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별이의 곁에 남아서, 딸의 곁에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오늘 결혼식엔 필요한 과정은 전부 순차적으로 진행했다.결혼식 피로연에서의 게임도 말이다...지석훈과 최주하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여이현은 원래 이런 이벤트를 취소하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없다면 완벽한 결혼식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들은 게임으로 여이현과 온지유에게 장난을 쳤다.하지만 대부분 여이현을 툭 밀면서 온지유와 붙어있게 해주었고 게임 벌칙도 두 사람이 이마 맞대기, 서로의 볼에 뽀뽀하기 등 시키면서 놀려대기 바빴다.피로연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술이었던지라 두 사람은 러브샷도 했다.게임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그 후엔 다들 알아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최주하는 여이현을 향해 눈썹을 튕겼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주 귀하니까 있을 때 잘해.”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도 돌아왔다. 방 안에 두 사람뿐이었던지라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온지유의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원래는...”“그래도 날 사랑하는 건 여전하잖아. 안 그래?”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강서현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잊지 못할 것이고 온지유의 얼굴과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그거랑은 달라. 나는 원래 우리가 알콩달콩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