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 나서 일에 열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도 생겼다.부모님은 지유가 귀찮아할까 봐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고 지유도 다른 일로 바쁘다 보니 부모님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집에 가니 아버지 온경준이 문을 열었다. 안경을 낀 온경준은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보자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내 딸 왔어? 들어와.”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온경준이 슬리퍼를 꺼내주었다.“네가 집에 와서 밥 먹는다니까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고 있어. 오늘 너 먹을 복 터졌어.”“정말요? 엄마가 만든 갈비찜 먹고 싶었는데.”지유가 온경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아빠가 직접 낚은 활어회도 먹고 싶어요.”온경준이 웃으며 말했다.“어이구, 먹고 싶은 건 많아서.”지유가 외투를 벗으며 소매를 걷더니 이렇게 말했다.“주방 가서 엄마 좀 도와드려야겠어요...”“됐어. 그럴 필요 없어.”온경준이 지유를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주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미리 옆에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같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비싼 슈트를 벗어둔 채 정미리 옆에 서서 싸구려 야채를 씻고 있었다.지유가 온 걸 알고 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왔어?”“딸 왔어?”소리를 들은 정미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정미리는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말했다.“아이고, 우리 딸, 엄마 좀 봐봐. 말랐나 보게.”정미리는 밖으로 걸어 나오며 지유의 손을 잡고 한 바퀴 빙 돌렸다.“마르진 않았네. 이현이가 잘 보살펴줘서 그런가?”지유는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엄마, 그이가 왜 여기 있어요?”정미리가 말했다.“딸, 네가 이현이한테 들러보라고 한 거 아니야? 이현이 효자야. 너보다 빨리 도착해서 요리도 도와주고. 사업하는 사람이 주방에 들어오는 걸 꺼려하지 않다니, 너는 복이 많은 아이야.”정미리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딸 지유만 행복하다면 정미리는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이현은 야채를 다 씻고 나서 이렇게 대꾸했다.“장모님,
정미리가 지유를 재촉하며 단둘이 있을 시간을 주려고 했다. 지유는 그렇게 주방으로 밀려들어 갔다.이현은 하던 일에 열중했고 모든 식자재를 깔끔하게 다듬었다.지유는 이현이 이런 일에 손을 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여기는 어쩐 일로 왔어요?”이현이 이렇게 말했다.“네가 내 전화를 안 받으니까, 장모님한테 어디 갔는지 물어보러 왔지.”지유는 이현과 함께 야채를 다듬었다.“전에 이런 데는 손도 안 댔잖아요.”이현이 그런 지유를 힐끔 돌아보며 장난쳤다.“장모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그만해요.”“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이현이 다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혹시 승아 씨랑 있는 거 방해할까 봐 그랬죠.”이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유가 물었다.“왜 웃어요?”“질투하는 거야?”지유가 부인했다.“아니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마다 질투하면 내가 속 터져 죽지.”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유의 얼굴에 물이 튄 걸 보고 지유가 소매로 닦으려 하자 지유의 손을 막고는 손을 말끔하게 닦고 휴지를 가져와 지유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지유는 이현이 자기를 살뜰하게 보살피자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집중해서 닦아주는 보습이 참으로 부드러워 보였다. 지유는 마치 10대로 돌아간 것 같았고 이현에게서 어렴풋이 그 소년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조심해.”이현의 목소리는 매혹적이었다.“그냥 가만히 있어. 그러다 또 뭐 묻을라.”이현은 지유가 다듬던 야채를 가져갔다.정미리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 온경준에게 말했다.“여보, 빨리 와봐요. 딸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이현이 얼마나 잘해주나 봐봐요.”온경준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보여주기 위해 쇼하는 걸 수도 있잖아. 뒤에서 우리 딸 괴롭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너무 멀리 갔어요.”정미리가 말했다.“이현이가 우리 딸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결혼했겠어요?”온경준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차갑게 말했
민우는 여기서 이현을 만난 게 퍽 의외라 이렇게 물었다.“여 대표님도 계시네요?”그러자 시선이 이현에게로 쏠렸다. 다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그대 지유가 입을 열었다.“오늘 대표님이 집에 놀러 왔어. 민우야, 너도 앉아.”정미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민우야, 지금 요리 중인데 먹고 가. 가면 안 돼.”“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민우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소파는 자리가 넉넉했다. 민우는 이현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온경준은 옛이야기를 꺼내며 민우와 담소를 나누었다.지유는 그제야 학창 시절 민우가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참 신기한 관계였다.이를 들은 이현의 표정이 점점 굳었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같이 앉아 있긴 하지만 옛날얘기를 하니 마치 아웃사이더가 된 기분이었다.밥을 먹을 때도 민우는 지유를 살뜰히 챙기며 바나나 우유를 가져다주었다.“마셔.”“고마워.”지유가 대답했다.이현은 이를 지켜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나 대표님도 지유 씨가 바나나 우유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민우가 대답했다.“전에 학교 다닐 때 마시는 거 자주 봤어요. 근데 지금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네요.”지유는 민우가 이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이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지유가 바나나 우유를 좋아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또 있다는게 거슬렸다.식탁 끝에 놓인 컵을 보며 이현은 두 손으로 식탁을 살짝 두드렸고 그렇게 바나나 우유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우유도 바닥에 흩뿌려졌다.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우를 쏘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바꿔줄게요.”지유는 그런 이현을 힐끔 쳐다보며 오늘따라 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현이 우유를 하나 더 가지고 오며 이렇게 말했다.“따듯한 거야. 날이 춥잖아.”지유는 마음이 따듯해져 얼른 우유를 가져다 손에 움켜쥐었다. 그런 지유를 보며 이현의 기
딱 잘라 말하는 모습에서 이현이 지유에 대한 소유욕이 느껴졌다.이현도 민우가 지유를 좋아해서 자꾸 지유 앞에서 알짱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회는 없다고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민우는 그런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점점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가 민우가 이렇게 말했다.“여 대표님,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에요?”민우는 화내지 않고 점잖게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인연이 닿는다면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거죠.”이현은 기분이 나빴지만 지유의 손을 잡는 걸 잊지 않았다.지유는 이현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민우가 오고 나서부터 이현은 이상했고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고 있었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라 기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에게서 손을 빼며 분위기를 만회하려 했다.“다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았는데 내 얘기는 왜 해서. 엄마, 얼른 아빠 모시고 들어가요. 더 마시다간 실수하겠어요.”“그래.”정미리도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할까 봐 이렇게 말했다.“여보, 가서 눈 좀 붙이면서 술 깨요.”온경준은 꽤 협조적이었지만 그래도 흐뭇한 눈빛으로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민우야, 나는 너 좋게 보고 있어. 뒤에 한잔 거하게 하자.”“네.”민우가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온경준의 말에 대답했다.온경준은 그렇게 정미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이현은 얼굴을 굳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식탁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온경준과 정미리가 가자 갑자기 주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이에 지유가 불편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걸 느낄 수 있었다.민우는 이현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나긋한 목소리로 지유에게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던데 너무 멀어서 그런 거 아니야?”민우는 지유에게 반찬을 집어줬다. 하지만 이현이 한발 빠르게 가로챘다.“괜찮아요. 지유는 이거 안 좋아해요.”민우가 시선을 돌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당연히 알게 되었다.민우는 남자의 품위를 지키며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아니야, 밥 먹어.”지유는 약간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에게 민우는 그저 옛 동창일 뿐 친구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민우는 그녀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지유는 젓가락을 들어 접시에 담은 고기반찬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비릿한 냄새에 지유는 속이 메슥거렸고 이에 밥맛이 뚝 떨어졌다.“왜 그래? 못 먹겠어?”민우가 물었다.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 먹겠다는 말은 못 하고 이렇게 말했다.“요즘 식단 조절해서 그런지 위가 작아져서 좀만 먹어도 배부르네.”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배부르면 이제 먹지 마.”지유는 이현의 불쾌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이현을 힐끔 살폈다. 하지만 이현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정미리는 온경준을 챙기고 있었기에 지유가 민우를 배웅해 줄 수밖에 없었다.민우는 지유의 표정이 좋지 않자 이렇게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나 데려다줄 필요 없어. 돌아가서 푹 쉬어. 다음에 또 보러 올게.”지유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이 보고 있어 따로 묻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면 조심해서 가.”“응, 또 봐.”민우는 오래 머물지 않고 지유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떠났다.이현이 외투를 가지고 문 쪽으로 걸어오더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나민우가 왜 너를 그렇게 잘 알아? 전에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나도 몰라요.”이현이 캐묻기 시작했다.“보면 몰라? 나민우가 너 엄청 신경 쓰는 거?”지유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없는 얘기 지어내지 마요. 민우랑 나 그냥 친구예요. 오랫동안 연락 한번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나한테 신경 쓸 리가 있나?”만난 게 고작 몇 번이나 된다고, 이런 생각은 무리였다.“앞으로 연락하지 마.”지유는 그러기 싫었다.“왜 연락하면 안 되는데요? 친구인데.”“내가 싫어.”“이현 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좀
지유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창백해진 얼굴로 벽을 붙잡고 쉴 새 없이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현은 이를 보더니 얼른 걱정에 찬 눈빛으로 지유를 부축했다.“왜 그래? 많이 안 좋아?”지유는 이현의 손을 밀어내더니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아까는 이혼하자고 그러더니, 지금은 또 왜 이러는 거예요?”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상태가 진짜 안 좋다는 걸 눈치채고 부드럽게 말했다.“먼저 집에 가자.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해.”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잡더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지유는 거절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이현과 다퉜다가 부모님이 보기라도 하면 걱정할 것이다.결혼이 불행하다 해도 부모님을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차 앞으로 걸어간 이현은 지유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유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지유는 이현의 어깨에 기댔다. 코가 찡했다. 언제부턴가 지유는 건드리면 바로 깨질 만큼 나약했다.아마 이현의 조금 달라진 모습에 지유는 없었던 엄살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많아지면 전처럼 고분고분할 수가 없다.“이현 씨.”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대 말을 이어 나갔다.“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고마워요.”이현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내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거야?”지유가 말했다.“우리 집에 와줘서 고마워요. 부모님이 나 잘 지내는 거 알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전에 20억을 써서 우리 집 구해준 것도 고맙고요.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또, 나를 살려줘서 고마워요.”이현의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조금 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지만 지유가 이렇게 다독이자 이현의 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이현은 지유를 잃을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지유를 꼭 끌어안고는 이렇게 말했다.“나 네 남편이야.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야.”지유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너 잘 왔다. 너한테 줄 것도 있어.”여진숙이 도우미에게 말했다.“내가 지유 주려고 끓인 거 좀 올려와요.”지유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신기했다. 온 정성을 승아에게 쏟아도 모자란 여진숙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걸까?여진숙의 눈길이 지유의 배로 향했다.“이 약, 내가 자주 다니는 한의사가 지어준 거야. 마시면 바로 애가 들어선다는데 마셔. 애가 들어설지도 모르니.”도우미가 약을 올려왔다. 냄새를 맡은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지유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도우미에게 치우라고 했다.“가져가세요. 못 마셔요.”지유가 거절하자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왜 안 마셔? 능력이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얼른 마셔.”도우미가 약을 다시 지유 앞에 대령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안 되겠어요...”지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아니 얘가...”여진숙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유를 보며 성질을 냈다.“쓸모없긴. 뭐가 그렇게 역겹다고.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지유는 위가 너무 더부룩했지만 한참을 토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여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왔다.여진숙은 더는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승아를 만나러 가기 급급했던 여진숙은 가져갈 물건이 많자 지유에게 말했다.“너 오늘 회사 나가지 마. 나 승아 보러 가는 길에 손 좀 보태. 병원에 입원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현이는 이미 보러 갔다 왔을 거야.”이 말을 들은 지유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저 출근 지각할 거 같아요.”여진숙이 지유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회사로 나가는 것도 현이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병원 가면 현이 마주칠 수도 있어. 그럼 너는 땡큐 아니야?”맞는 말이긴 했다. 지유는 이현의 아내이자 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하여 여진숙과의 동행을 선택했다.여진숙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병문안을 간다기보다는 친척 방문이 더 적합해 보였다.
승아의 말에 지유가 멈칫했다.이용해?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용할 사람이 없을까?승아는 지유가 멈칫하자 궁금해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며 말했다.“어떻게 이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승아가 온갖 방법으로 이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지유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는 승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내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승아 씨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유가 자기 뜻대로 나와주지 않자 약이 잔뜩 오른 것 같았다.지유가 그런 승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목적이라면 내가 그이와 이혼하는 거겠죠. 그러면 여씨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불안한가 보죠?”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언젠간 이혼할 텐데 내가 왜 불안해요? 전혀요.”짜증 섞인 승아의 말투에 지유가 웃었다.“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이혼 얘기나 꺼내고. 우리 그이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아요. 이현 씨가 나랑 이혼하기 싫어하니까 조급해졌나 보죠? 이현 씨는 설득이 안 되니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온지유 씨, 너무 잘난 척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승아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지유는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핑계를 찾을 거면 설득력 있는 걸 찾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승아 씨가 나를 위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데 틀렸어요. 그렇게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다면 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이를 찾아요. 이혼하나 안 하나.”고작 몇 마디에 승아는 약이 바짝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시울을 붉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승아가 사라지자 여진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마침 그 뒤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
권다솔은 컵을 받았다. 역시나 너무 뜨겁지 않고 적당한 온도였다. 아마도 배진호가 일부러 온도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녀는 배진호를 한 번 쳐다봤고 그가 자신을 위해 군밤을 까주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더위도 추위도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예민하다 했으며 가끔은 부모님조차도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는 자발적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다. 주방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팬을 뒤집는 소리와 함께 요리 냄새가 퍼져 나왔다. 거실에서는 권다솔과 배진호가 별다른 말 없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권다솔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면 사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배진호가 권다솔을 웃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본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정말 우리 아들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네.” 배진호 어머니는 권다솔을 쏘아보며 말했다. 물론 권다솔에게는 보이지 않게 했다. “진짜 진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만해. 당신이 사람을 불러온 거잖아. 근데 또 뭐가 문제야?” “내가 쟤를 불러온 이유 아직도 모르겠어? 인터넷에 떠도는 그 험한 말들 때문이지! 당신도 봤잖아! 얼마나 듣기 싫은 말들이 있었는지.”배진호의 어머니는 불만이 가득했다. 배진호 아버지는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부부 생활을 해온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여자와는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배진호 어머니는 결국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권다솔을 못마땅해했다. “안 돼. 쟤가 진호를 계속 속이게 둘 수 없어. 결혼했더라도 떼어놓아야 해.” “이런 품위 없는 여자가 어떻게 우리 아들한테 어울릴 수 있겠어?” 잠시 후 음식이 나오고 드디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진호는 권다솔의 오른쪽에
배진호는 부모님이 갑자기 권다솔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좀 이상하게 느꼈지만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며느리를 보고 싶어 하는 거겠으니 여겼다. 그는 권다솔을 위로하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아직 부모님을 뵙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처음 인사하는 걸로 생각하면 돼요.”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다솔 씨 난처하게 할 분들 아니에요.” 배진호의 반복적인 위로에 권다솔은 조금 진정되었고 결혼한 후엔 부모님을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나서 부모님을 만나는 건 사실 너무 늦은 거다. 배진호의 집안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으로 2환 구역에 오래된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그들의 회사는 시내 중심에 있었고 2환 구역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지만 중간에 차가 많이 막혀 시간이 꽤 걸렸다. 차 안에서 권다솔은 지나가며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왜 부모님께 더 좋은 집을 마련해 드리지 않았어요?” “당신 수입이면 훨씬 전에 도시 중심에 집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권다솔의 부모님은 배진호를 그저 돈이 없는 비서일 뿐이라고 얕보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는 여이현은 배진호에게 매우 후한 대우를 했으며 매달 지급하는 월급은 적어도 여덟 자릿수에 달했다. 도시 중심에 집을 사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배진호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자기 사정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우리 집 그 오래된 집은 아버지가 퇴직할 때 회사에서 준 거예요.” 배진호는 차를 운전하며 설명했다. “부모님은 옛날 걸 좋아하셔서 이사 가기 싫어하세요.” 권다솔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차는 곧 멈췄다. 드디어 배진호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권다솔은 차 트렁크로 가서 위에 놓인 선물 가방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
“이런 일 없었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믿었을 거예요. 당신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잖아요.” “진호 씨!” 권다솔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처참하게 울었지만 마음속은 마치 꿀에 잠긴 듯 달콤했다. 그냥 배진호가 그녀를 믿어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배진호는 홍보팀에 지시해 인터넷에서 떠도는 루머를 처리하도록 했다. 최대한 확산하지 않게 막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 루머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홍보팀은 수십만 원을 쏟아부으며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했고 법적 경고장도 보냈다. 회사의 모든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며 이 일에 대처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어진 논란은 결국 권다솔의 부모님에게도 알려졌다. 권다솔은 곧바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어머니가 걸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가 대신 물어본 것이었다. “너랑 남씨 가문 그 아들 대체 뭐야? 너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김영은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난 그 사람이랑 정말 아무 관계도 없어요.” 권다솔은 손끝을 움켜쥐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저도 정말 이 일을 누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퍼뜨리고 있는지 궁금해요.” 김영은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고위층의 아내로 살아온 만큼 그녀도 결국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영은은 권다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다솔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긴장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남씨 가문하고 관련이 있다는 거네?” 권다솔은 잠시 망설였지만 두 집안의 오랜 관계를 고려해 유람선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진 않았다. 그저 일부만을 살짝 흘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부만으로도 김영은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정말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너를 불러낸 거면 그건 순전히 자기 아들하고 엮으려는 의도였을 거야.” 권다솔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아끼는 아주머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
“부사장님, 괜찮으세요?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대표님께 연락해 볼게요.”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가 꼭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맞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까지 수군대던 직원들이 갑자기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권다솔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권다솔에게 위로가 될 리 없었다. 오히려 차갑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기획팀 직원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세요?” 기획팀은 배진호의 사무실 바로 옆이라 그가 어디 있는지 알 가능성이 높았다. 직원은 배진호가 지금 자신의 사무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권다솔은 다른 건 신경 쓸 틈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비서조차 문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부사장님, 오셨어요. 그런데 지금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대표님께서 아까 핸드폰을 한 번 보시더니 우리 모두를 내보내셨어요.” “핸드폰을 봤다고요?” 권다솔은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네. 평소엔 이런 적 없으셨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비서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곧 중요한 회의가 있는데 이렇게 나오지 않으시면 회의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 건지.” 권다솔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사무실 문을 힘껏 두드렸다. “진호 씨, 나와요! 무슨 일이든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문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은 이미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비서가 옆에서 말렸다. “부사장님, 제발 그만하세요. 손 다칠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시면 걱정하세요.” 하지만 권다솔은 멈추지 않았다. 비서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을 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 안에서 나온 배진호는 권다솔의 손을 잡으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손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요? 내가 문을 열지 않는다고 이렇게 계속 두드리면 안 되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부탁인데 남태건 씨에게 전해주세요. 더는 그 사람과 어떤 얽힘도 원하지 않는다고요.” 최선정의 목소리는 아직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권다솔은 그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 있었고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통화 이후 권다솔은 며칠 동안 회사 프런트를 신경 써서 살폈다. 심지어 따로 물어보기도 했다.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은 아무 이상의 소포도 오지 않았습니다.”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신경 좀 써주세요. 이상한 소포 오면 그냥 버리세요.” 권다솔은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배달되던 소포도 멈추고 남씨 가문 쪽에서도 더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권다솔은 한동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더는 남씨 가문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며 안심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던 권다솔은 회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무리 지어져 있는 걸 보았다. “야! 그거 진짜라던데?” “우리 부사장님이 남원 그룹 남태건 사장님이랑...” “내 생각엔 진짜인 것 같아. 그런 사진까지 유출됐잖아. 인터넷 여기저기 난리더라. 우리 대표님이 정말 불쌍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권다솔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직원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권다솔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직원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사장님,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평소엔 9시쯤에 오시던데...” 권다솔은 요즘 임신 중이라 배진호는 그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아침에 조금 늦게 출근하라고 배려해 줬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는 9시가 좀 넘어서야 회사에 오곤 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일어난 거였다. 더구나 배진호도 이미 출근했고 혼자 집에서 할 것도 없어서 회사에 좀 더 일찍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오자마자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들을 줄은 몰랐다.
권다솔은 배진호 덕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운 느낌이었지만 눈을 뜨자마자 걱정으로 가득한 배진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진호 씨가 여긴 어떻게... 아, 머리가 너무 아파요.”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머리가 두 개로 갈라질 것 같았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직원과 부딪치게 되었던 것만 기억났다.그 뒤의 기억은 흐릿했다. 배진호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도 몰랐다.권다솔은 배진호에게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녀를 보는 배진호의 눈빛은 심란했다.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었으나 다시 꾹 삼켜버렸다.“머리가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요. 날이 밝는 대로 항구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대충 짐 정리해서 떠나요.”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 배진호를 보며 권다솔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가 너무 아픈 탓에 이마저도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그랬기에 일단 이 일은 넘어가기로 했다.유람선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배진호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진행했다.배진호의 태도는 강압적이었던지라 권다솔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행히 검사 결과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코로 마취 성분의 액체가 흘러 들어간 겁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이 약물의 성분은 임산부에게 아주 나빠요. 남편이라는 사람이 대체 아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마취약이라고요...”권다솔은 자신이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의사에게 얼른 설명했다.“선생님,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부주의로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 거예요.”의사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는 길에서 결국 권다솔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진호 씨,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요? 어젯밤 분명 진호 씨를 놀리고 도망쳤던 것 같은데 깨어나고 보니 방에 있더라
남태건은 권다솔이 있는 방으로 왔다.문을 열려고 하자 싸늘한 얼굴로 달려온 배진호와 마주쳤다.“다솔 씨를 납치한 사람, 그쪽이죠?”배진호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남태건은 멈칫하더니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죠. 내 고양이가 그쪽이랑 함께 있지 않았나요?”“고양이요?”“네, 우린 서로 어릴 때 별명을 지어줬거든요.”남태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배진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는 남태건을 빤히 보았다. 남태건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첫 만남에서부터 배진호는 남태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하간에 이 바닥에서 일하며 그는 뒤도 깨끗한 사람을 본 적 없기도 했다.그러나 남태건은 달랐다.그의 손에 있는 더러운 것조차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그런 사람이 권다솔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배진호가 마음이 놓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계속 남태건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자선 파티에 그 틈을 보여주게 될 줄은 몰랐다.배진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정말로 다솔 씨를 좋아하는 거라면 이런 짓을 하면 안 돼요. 우리 일은 우리끼리 남자답게 해결하자고요. 무슨 일 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 말고 나한테 하라고요.” 남태건은 달려들려던 경호원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막았다.“그쪽한테 하라고요.”그는 배진호가 한 말을 반복하며 곱씹었다. 그의 주위로 위험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그쪽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그쪽한테 하죠? 난 다솔이랑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다솔이랑 먼저 알게 된 건 나라고요. 그쪽은 후에 나타난 주제에 무슨 자격이 있는 거죠? 나한테 그저 다솔이를 훔쳐 간 도둑일 뿐인데요.”남태건의 두 눈 가득한 살기는 곧 흘러넘쳐 유람선을 채울 것 같았다.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두 남자는 서로를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아주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