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잘 왔다. 너한테 줄 것도 있어.”여진숙이 도우미에게 말했다.“내가 지유 주려고 끓인 거 좀 올려와요.”지유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신기했다. 온 정성을 승아에게 쏟아도 모자란 여진숙이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걸까?여진숙의 눈길이 지유의 배로 향했다.“이 약, 내가 자주 다니는 한의사가 지어준 거야. 마시면 바로 애가 들어선다는데 마셔. 애가 들어설지도 모르니.”도우미가 약을 올려왔다. 냄새를 맡은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지유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도우미에게 치우라고 했다.“가져가세요. 못 마셔요.”지유가 거절하자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들게 구해온 약인데 왜 안 마셔? 능력이 없으면 약이라도 먹어야지. 얼른 마셔.”도우미가 약을 다시 지유 앞에 대령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 지유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안 되겠어요...”지유는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아니 얘가...”여진숙은 화장실로 달려가는 지유를 보며 성질을 냈다.“쓸모없긴. 뭐가 그렇게 역겹다고. 마시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지유는 위가 너무 더부룩했지만 한참을 토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여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왔다.여진숙은 더는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승아를 만나러 가기 급급했던 여진숙은 가져갈 물건이 많자 지유에게 말했다.“너 오늘 회사 나가지 마. 나 승아 보러 가는 길에 손 좀 보태. 병원에 입원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아마 이현이는 이미 보러 갔다 왔을 거야.”이 말을 들은 지유가 입을 앙다물며 말했다.“저 출근 지각할 거 같아요.”여진숙이 지유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회사로 나가는 것도 현이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병원 가면 현이 마주칠 수도 있어. 그럼 너는 땡큐 아니야?”맞는 말이긴 했다. 지유는 이현의 아내이자 이현의 수행 비서였다. 하여 여진숙과의 동행을 선택했다.여진숙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안고 집을 나섰다. 병문안을 간다기보다는 친척 방문이 더 적합해 보였다.
승아의 말에 지유가 멈칫했다.이용해? 이용할 게 뭐가 있다고? 이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이용할 사람이 없을까?승아는 지유가 멈칫하자 궁금해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며 말했다.“어떻게 이용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이용이라고 하기엔 너무 현실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승아가 온갖 방법으로 이간질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지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승아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지유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는 승아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내가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승아 씨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유가 자기 뜻대로 나와주지 않자 약이 잔뜩 오른 것 같았다.지유가 그런 승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목적이라면 내가 그이와 이혼하는 거겠죠. 그러면 여씨 집안으로 시집갈 수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불안한가 보죠?”승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래도 바락바락 악을 썼다.“언젠간 이혼할 텐데 내가 왜 불안해요? 전혀요.”짜증 섞인 승아의 말투에 지유가 웃었다.“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이혼 얘기나 꺼내고. 우리 그이보다 더 급해하는 것 같아요. 이현 씨가 나랑 이혼하기 싫어하니까 조급해졌나 보죠? 이현 씨는 설득이 안 되니까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온지유 씨, 너무 잘난 척 마요.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승아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나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지유는 세상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비아냥거렸다.“핑계를 찾을 거면 설득력 있는 걸 찾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승아 씨가 나를 위한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는데 틀렸어요. 그렇게 우리가 이혼하길 바란다면 나를 찾을 게 아니라 그이를 찾아요. 이혼하나 안 하나.”고작 몇 마디에 승아는 약이 바짝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시울을 붉혔다.눈 깜짝할 사이에 승아가 사라지자 여진숙이 그녀를 찾으러 왔다. 마침 그 뒤
의사와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와 승아를 들것에 들어갔다.여진숙은 아직 지유에게 따지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승아의 상처가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승아가 들것에 올려지는 순간부터 여진숙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했다.의사는 이현과 승아의 상태에 관해 토론하느라 지유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옆에 서 있는 지유는 그들이 승아를 위해 분주히 돌아치는 걸 보고 자신이 아웃사이더 같다고 생각했다.승아가 응급실에서 나오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여진숙이 그녀를 병실로 옮겨갔다.이현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지유에게 이렇게 말했다.“승아 지금 자극받으면 안 돼. 일단 단둘이 만나는 건 삼가해줘.”지유는 목구멍이 메어왔다. 지금 탓하는 건가?왜 승아를 화나게 했는지 따지면서 앞으로 승아를 괴롭히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이현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유가 오해했음을 눈치채고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왜? 기분 상했어?”“현아, 빨리 들어와!”여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병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승아가 너 찾아. 네가 없는데 승아가 어떻게 낫겠어.”지유는 급해서 눈물을 흘리는 여진숙을 보며 지유에게 말했다.“일단 밖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갔다 금방 올게.”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아와 그녀 사이에서 버려지는 걸 늘 그녀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밖에 선 지유는 마치 아무 관련 없는 방관자 같았다.그렇게 옆에서 승아가 이현의 품에 안겨 힘없이 우는 모습을 지켜봤고, 이현이 그런 승아를 밀어내지 않고 차분하게 승아의 등을 토닥이는 걸 지켜봤다.지유는 허리가 시큰거렸다. 둘이 꽁냥대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이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지유야.”여희영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지유가 멀쩡하게 벤치에 앉아 있자
여희영은 깜짝 놀랐다. 놀라움 뒤에 남은 건 분노와 실망뿐이었다.이때 이현이 병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든 이현이 지유와 함께 있는 여희영을 보며 공손하게 불렀다.“고모.”“그렇게 부르지 마.”화가 치밀어오른 여희영은 이현을 나무라기 시작했다.“내가 고모긴 하니? 지유와 이혼한다며?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할아버지 당부 잊었어? 지유 잘 보살펴주라고 했는데 이따위로 보살피는 거야? 여이현. 너 자라는 거 옆에서 쭉 지켜봤지만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이혼? 침대에 누워서 별의별 생쇼는 다하는 세컨드 년 때문에 부부간의 연을 끊겠다고?”“어머, 아가씨, 말은 가려서 해야죠. 세컨드 년이 뭐예요? 그리고 책임감 소리는 왜 하시는 거예요? 이게 책임감이랑 무슨 상관있다고?”여진숙은 거북하게 들리는 여희영의 말에 처음으로 앞에 나서서 반박했다.“현이가 이혼하든 말든 알아서 할 일이지 아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어른이랍시고 우리 아들 자꾸 혼내시는데 보기 안 좋아요.”지유는 자신이 한 말로 여희영과 여진숙이 다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여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얼른 여희영을 뜯어말렸다.이 일이 아니어도 여진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희영이 하찮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다.“내가 내 조카랑 얘기하고 있는데 왜 끼어들죠? 올케, 지금 나랑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아가씨,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여진숙이 이렇게 말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여진숙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둘은 마주칠 때마다 대화가 별로 없었고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었다.여희영은 늘 여진숙을 무시했기에 말을 가려 하는 법이 없었다. 여희영은 여진숙을 향해 다가가더니 오만하게 여진숙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할 소리예요. 엄마가 돼서 현이한테 잘해준 게 뭐에요? 내가 일일이 다 말할 필요 없죠? 여기서 제일 말할 자격 없는 사람이 올케예요. 내가 조카를 어떻게 혼내든 올케랑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지유도 자책하고 있었다. 오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충동적으로 행동한 걸까? 그러지만 않았다면 여희영이 아는 일도 없었을 텐데.“미안해요.”지유는 이현에게 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거둘 수 없었다.이현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끝내 입을 열었다.“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지유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이현과 이혼하고 싶은 걸까?사실 지유가 원하는 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게 더 컸다. 더는 막연하고 희망이 없는 것에 갇혀 있기 싫었다.지유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현이 다시 물었다.“나랑 같이 있는 게 그렇게 힘들어?”이 말에 지유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곧 흘러넘칠 것 같았다. 이현이 오히려 온화하게 말하자 지유는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힘들다기보다는 그가 승아와 꽁냥거리는 걸 더는 보기 싫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다.“조금?”지유는 감정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이현은 생각했다. 비록 결혼한 지 3년이 되긴 했지만 그녀가 그의 곁에 계속 남아있는 건 그 계약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우석이라는 남자다.우석이라는 남자를 위해 3년간 아무 요구도 꺼낸 적 없었고 그 남자를 위해 한결같이 몸을 지켰다.이렇게 생각한 이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이 돌에 짓눌린 듯 너무 불편했다.그녀를 놓아줘야 할까?이현이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계약 기간 3년이 차면 그때 이혼하자.”지유는 하마터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일 뻔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지유는 그렇게 서러움을 겨우 눌렀다.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체면을 잃기는 싫어 고개를 들고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그래요.”지유의 어여쁜 얼굴을 본 순간 이현은 그제야 그녀가 진심으로 웃는다고 생각했다.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이를 본 윤정이 술을 받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온 비서님은 술 안 마십니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하지만 그 대표는 별로 탐탁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이러면 재미없는데.”윤정은 난감해졌다. 사회 초년생이라 일 처리가 그렇게 매끄럽지 못했고 혹시나 실수해 일을 그르칠까 봐 무서워했다.“온 비서님, 본인이 마셔야 할 술을 부하한테 미루는 건 아니지 않나요?”지유와 윤정은 다 여자였기에 이 대표는 점점 더 눈에 보이는 게 없었고 말투도 매우 거칠었다.“여 대표님을 대신해서 왔다면서요. 여 대표님도 이 자리에 나오면 술을 마다하지 않는데 온 비서님은 더더욱 안되죠. 왔으면 하나가 돼야지. 그래야 재밌지.”“자, 내가 한 잔 쭈욱 따를 테니 마음 놓고 마셔봐요.”다른 대표들도 맞장구를 쳤다.“온 비서님, 좋은 말로 할 때 마셔요. 이 대표님이 마시라면 마셔야지, 핑계 찾지 말고.”“흐름 깨지 마요. 여 대표님이 이러는 거 알면 엄청 혼낼걸?”지유는 이런 장소가 싫었다. 이현이 술을 마신다고 해도 핍박에 의해서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리를 굽신거려도 모자랄 판에 이현이 싫어할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결국엔 지유가 여자라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것이다.지유는 업무를 하면서 불공평한 상황을 많이 참아왔지만 이런 모욕을 참기는 싫었다.이 대표는 와인잔을 지유의 입가에 갖다 대며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 마셔요.”윤정은 그들이 지유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온 비서님.”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이 대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제가 말했을 텐데요. 술 안 마신다고.”이 대표는 표정이 변하더니 와인잔을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힘을 너무 세게 줘서 그런지 와인잔이 깨졌고 빨간 와인이 테이블을 적시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윤정이 화들짝 놀랐다.“온 비서님, 왜 이렇게 주제를 모르실까? 우리 앞에서 도도한 척이라도 하는 거예요?”알코올의 작용하에 이 대표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발악했다.“여 대표님이 얼마나
그의 손놀림에 지유는 너무 역겨워 더는 견딜 수가 없어 그를 밀쳐냈다.“대표님, 예의 갖추시죠.”“예의는 무슨. 당신은 그냥 여 대표 노리개일 뿐이야. 침대에 얼마나 기어올랐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술 마실 기회를 주는 것도 당신 체면 살려준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마셔.”이 대표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유가 여러 번 거절하자 실성한 듯 다가가 지유를 끌어안았다.“여 대표가 주는 거 나도 줄 수 있어. 내가 별장 하나 줄까? 앞으로 아무 걱정 없이 내 애인 하는 거야. 여 대표를 따라다니는 것보다 더 좋은 조건 아닌가…”“이거 놔요!”인내심이 바닥난 지유는 힘껏 이 대표의 귀싸대기를 갈겼다.“내 몸에 손대지 마요.”귀뺨을 맞은 이 대표는 두 눈이 빨개서는 지유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빌어먹을 년. 감히 나를 때려? 내가 오늘 너 죽이고 만다.”윤정은 너무 무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유도 그런 윤정이 다칠까봐 걱정이었다.마침 윤정은 문과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기에 지유는 일단 윤정을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여기는 위험해요. 얼른 가요.”윤정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그럼 온 비서님은 어쩌고요?”지유도 무서워서 손이 떨렸지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나가야 했다.“나가서 누구든 불러와요. 내 말 들어요. 얼른!”무서움이 많은 윤정이었지만 지유 말은 참 잘 들었다.“가? 가긴 어디를 가? 빌어먹을 년.”이 대표가 미친 듯이 달려오더니 지유의 머리채를 잡았다. 곱게 얹은 지유의 머리가 순간 헝클어졌다. 두피가 지끈거리는데 반응할 새도 없이 싸대기가 날라왔다.싸대기를 정면으로 맞은 지유는 얼굴이 너무 화끈거렸고 방향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그렇게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이 대표가 남산만 한 배로 지유의 허리를 누르고 있었다. 초밀착 상태라 이 대표의 입에서 나는 더러운 술 냄새까지 풍겨왔다.너무 역겨워 토하고 싶었지만 이 대표가 두려웠다. 지유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는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내 털
이현은 마치 지유를 품속에 녹여버릴 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더는 상처받지 않게 말이다.그는 턱을 그녀의 머리에 올려놓고 깊이 자책했다.“괜찮아, 지유야, 이제 괜찮아. 내가 왔으니 괜찮아.”지유는 이현의 품에 기댄 채 온몸을 부르르 떨며 치를 떨었다.“왜 이제야 온 거예요? 하마터면, 정말 하마터면 당신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고요.”이현이 핏기를 잃고 창백해진 지유의 입술을 보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지만 지유를 인내심 있게 다독이며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했다.“미안해. 내가 늦었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다시는 너 혼자 두지 않을게.”지유가 걱정돼서 나와봤는데 그래도 늦은 것이다.지유는 멘탈이 완전 나가서는 흐느꼈다. 그 속에는 그녀의 불안과 두려움과 그에 대한 원망이 들어 있었다.지유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이현의 가슴을 두드렸다.“아니에요. 당신은 나 버릴 거예요. 언젠가는 나 버릴 거예요. 전에도 그랬잖아요. 지금도 그렇고.”지금까지 지유는 수도 없이 버림을 받았다. 몇 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버려질 때마다 남은 건 실망뿐이었다.이현은 지유를 품에 꼭 끌어안더니 슈트로 그녀를 꽁꽁 감쌌다.“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어. 한 번만 믿어줘. 지유야, 앞으로 너 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지유는 소리 없이 흐느꼈고 이현의 가슴을 두드리던 손도 힘없이 옆으로 축 늘어졌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지 지유는 이현의 품에 안겨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했다. 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단단한 이현의 품에 숨어있고 싶었다. 이현은 인내심 있게 그녀를 다독이며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지유의 정서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몸에서 전해지는 떨림도 살짝 약해지자 이현은 허리를 숙여 지유를 소파에 올려주고 데려온 사람에게 보살피라고 했다.이현은 느긋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바닥에 누워 비몽사몽한 이 대표를 쏘아봤다.물 한 바가지가 이 대표의 얼굴에 쏟아졌다.꿈에서 깬 이
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곧 긍정이다. 온지유는 화가 나서 바로 여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내가 직접 죽여버릴 테니까!”온지유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 5년이다. 그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아이를 생각하며 버텨왔다.여이현은 살아 있으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럼 그 뒤에는?여이현은 한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또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는 게 아닌가!신무열은 덤덤하게 여이현을 한번 흘겨보았다.“맞아도 싸죠. 저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 몇 년간 어떻게 지내왔는데 또 그 고통을 다시 겪게 하려니 말이에요. 이현 씨, 남자라면 정정당당하게 이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세요.”“잘 알고 있습니다.”여이현은 자신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온지유와 약속한 것들을 꼭 지켜야만 했다.신무열은 시선을 거뒀다.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남은 건 여이현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다.그렇게 여이현과 온지유는 함께 S국으로 떠났다.브람은 여이현이 홀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다. 온지유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온지유측에는 사람이 여럿 딸려있었고 화국의 군대도 동행했다.여러세력의 동원하에 내란은 작은 파도에 불과했고, 신속히 가라앉았다.가장 주요한 병력은 화국의 군대였다.여이현은 직접적으로 태도를 밝혔다.“다음에 또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될수록 내부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화국인이고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여이현은 브람이 자신의 친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온지유처럼 받아들이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여이현은 어릴 적부터 화국에서 자랐고 몸에 밴 습관도 모두 화국의 것이었다. S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여이현은 밖에서 온 타국인이었다.그런 신분으로 어떻게 이 나라를 통치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