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이 나가고 나서도 안에서는 처참한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지유는 길고 긴 꿈을 꿨다. 꿈에서 어떤 악마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달리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고 그로 인한 거대한 공포에 숨이 턱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지유는 울먹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를 본 이현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지유는 지금 고열을 앓고 있었다.윤정은 옆에서 계속 울기만 했다.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러 나가는데 문 앞에서 마침 이현을 만나게 되었다. 다행히 이현이 제때 도착해 지유를 구해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윤정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온 비서님 잘 못 챙겼어요. 온 비서님 지금 열나고 있으니 병원에 데려갈까요?”이현은 지금 차가운 얼음처럼 전혀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아니에요. 배 비서, 온 비서 집으로 가요.”이현은 이렇게 말하며 지유를 안고 차에 올랐다.윤정은 아직도 자책하며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그만 울어요. 어서 집에 돌아가요. 대표님이 있으니 온 비서님 괜찮을 거예요.”진호가 이렇게 타일렀다.윤정은 다리까지 부들부들 떨며 흐느꼈다.“온 비서님 이렇게 되니까 대표님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그렇게 살기등등한 모습은 처음이에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진호는 말해줄 수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호도 이를 이상하게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진호는 윤정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상황이 정리됐잖아요. 그래도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온 비서님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예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요.”윤정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두운 침실, 지유가 꿈속에서 놀라 깨어났다.“안돼!”잠에서 덜 깬 상태였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직 시야가 또렷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자기를 만지는 걸 강력하게 거부했다.“이거 놔!”“나야, 지유야.”이
욕실 문을 열자 지유가 욕조에 앉은 채 온 힘을 다해 몸을 벅벅 문질렀다. 혹시나 이현이 들을까 봐 그러는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지유야, 그만해!”이현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있는 손을 낚아챘다.지유는 눈시울이 빨개서는 이현의 손을 뿌리치며 발버둥 쳤다.“건드리지 마요. 나 더러워요…”“너 안 더러워.”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지유의 몸을 끌어안으며 더는 상처를 내지 못하게 막았다.“너 아주 향긋해.”지유의 머릿속엔 온통 이 대표의 배에 단단히 눌려있는 장면이 떠올라 속이 메슥거렸다. 이현이 살짝 건드려도 지유는 자기가 더럽다고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위로하지 마요. 나 더러워진 거 맞아요. 내가 생각해도 역겨워요.”지유는 이미 빨갛게 달아오른 몸을 마구 비벼댔다.“온지유.”이현이 어떻게 부르든 지유는 들리지 않았다. 몸 곳곳을 벅벅 문지르며 계속 중얼거렸다.“나 더럽혀졌어. 씻어야 해.”“나…”지유가 같은 말을 반복하려다 멈췄다. 떨리는 입술로 경악을 금치 못하며 촉촉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이현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키스한 것이다.“지유야, 너 안 더러워. 깨끗해. 더러운 건 다른 사람이야.”이현의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그녀를 어둠에서 끌어냈다.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행동도 바로 보였다.이현의 입술은 지유가 벅벅 긁어서 빨갛게 달아오른 자리에 놓였고 이 대표가 만졌던 곳에 놓였다. 그는 마치 보물을 대하듯 부드럽게 그녀의 몸 곳곳에 키스하며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여기도 내가 소독했어. 여기도. 그리고 앞으로 절대 너를 괴롭힐 사람은 없을 거야.”이현은 아까 있었던 일로 지유를 역겨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처에 키스하는 것으로 모든 흔적을 지워주려 했다.지유의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발버둥 치던 것도 멈추었다. 힘을 주며 버티던 손도 스르르 풀렸고 흐느끼는 말투로 이현을 불렀다.“이현 씨.”“응?”이현이 고개를 들어
지유는 이현의 목을 휘감으며 이렇게 말했다.“옆에 있어 줘요.”“여기 있을게. 아무 데도 안 가.”이현이 지유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몸이 빨갛게 달아올랐어. 잘 때 얌전하게 자야 상처가 덧나지 않는 거 알지?”지유는 그제야 승아가 왜 이현에게만 늘 그렇게 약하게 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픈 손가락에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니까.살짝만 약하게 나가도 이현은 정말 너무 부드러워졌다.“네.”지유는 아쉬움을 감추며 두 손을 풀었다.이현은 지유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침대 가에 앉았다.“추워?”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춥지는 않아요.”“너 약간 미열이 있어.”이현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젖은 수건 좀 가져올게.”“고마워요, 남편이 제일이네.”지유는 제일 진실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이현이 웃으며 지유의 코를 꼬집었다. 지유도 피하지 않고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잠깐이지만 이런 모습을 마음속에 영원히 새기고 싶었다.하지만 이현이 이렇게 말했다.“지유 님, 사람은 함부로 믿는 게 아니에요.”이현이 수건으로 얼음을 감싸더니 지유의 이마에 놓아주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없을 때 누가 잘해준다고 바로 따라가면 안 돼.”이를 들은 지유는 찡해 나는 코끝에 입을 앙다물고 억지로 웃으며 강한 척했다.“그럴 리가요.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쉽게 안 속아요.”“내 생각엔 잘 넘어갈 것 같은데, 그 우석이라는 남자한테 홀라당 반한 거 아니야?”이현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유가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현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그 남자 어떤 사람인지 물어본 적도 없네. 어떤 남자길래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거야?”지유가 시선을 돌리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랑 닮았어요. 근데 더 부드럽죠.”이현은 물어본 게 살짝 후회될 정도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우석이라는 남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로 들렸다.“얼른 자.”이현은 더 물어보기 싫었다. 지유도 사실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싫었다.제
윤정이 이렇게 말했다.“아니에요. 찾을 새가 없었어요. 나가자마자 마침 식당으로 부랴부랴 건너오는 대표님을 만났어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점쟁이 아니에요? 온 비서님을 진짜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더라고요.”윤정은 아직도 그날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온 비서님은 아마 모를 거예요. 대표님이 도착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니까요. 이 대표님을 아예 아작낼 듯한 기세였어요. 그리고 몇몇 선동자까지 같이 처단했고요. 대표님은 많이 화났는지 온 비서님을 품에 안고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했어요.”윤정의 말에 지유가 멈칫하더니 옆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원래 부하를 이렇게 아끼나요?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만약 다친 사람이 나라도 그렇게 신경 쓰셨을까요?”윤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아무리 대표님 곁을 오래 지켰다 해도 이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잖아요. 온 비서님, 대표님 혹시 온 비서님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켁켁켁…”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윤정이 이렇게 말하자 바로 사레가 걸렸다.윤정이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온 비서님, 왜 물 마시는데도 사레가 걸리는 거예요?”켕기는 게 있는 지유는 얼른 부정했다.“아니에요. 대표님이 어떻게 저를!”윤정이 의아해하며 계속 토론을 이어갔다.“다른 사람들은 대표님이 노승아 씨를 좋아한다 그러던데요. 그 가수 있잖아요. 노승아 씨 웃는 거 보려고 돈을 억 단위로 쏟아붓는대요. 노승아 씨 대표님 첫사랑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제 돌아왔으니 다시 대표님과 사귀겠죠?”“온 비서님이 더 잘 알고 아니에요?”윤정은 지유가 몇 년간 이현의 곁을 지키면서 수행 비서로 있었으니 개인적인 일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지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아니다, 아니다.”윤정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이게 만약 진짜라면 증거가 안 나올 리
“에이, 다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온 비서님이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꼬신거라던데요? 대표님 비서까지는 올라갔지만 대표님 와이프 자리는 넘볼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죠. 예쁜 얼굴을 무기 삼아 이 대표님 애인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이 대표님이 성폭행했다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까지 하고. 이 대표님 지금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감옥살이 해야 된다던데?”“평소에 온 비서님 얼마나 서글서글해요. 근데 뒤에서는 이렇게 약삭빠른 줄 몰랐네요. 그러니까 대표님 옆에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거죠. 얼마나 더러운 수단을 썼을까요?”“흥, 온 비서님 대단한 거 이제 알았어요? 전 진작에 알아봤는데. 막말해서 우리 회사에 온 비서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온 비서님이 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게 다 얼굴 믿고 저러는 거 아니겠어요? 그 여우 같은 얼굴로 대표님 꼬드긴 거예요. 그러다 제대로 걸린 거죠. 똑같은 방법으로 이 대표님 꼬시려다가 성폭행이나 당하고…”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지유가 화장실 문을 걷어차고 나와 그들 뒤에 자리하고 섰다.화장을 고치던 여사원들은 지유를 보고 너무 놀라 립스틱까지 삐뚤게 그렸다.“온, 온 비서님…”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던 몇몇 여사원이 공손하게 지유를 불렀다. 하지만 유언비어를 퍼트린 그 사원은 머리를 빳빳이 든 채 지유를 힐끔 쳐다보고는 불만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진예림의 부하 고세리였다.집안 관계로 여진그룹에 들어온 고세리는 갓 사회에 나온 애송이였다.바닥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온 진예림은 당연히 뭐가 더 수지가 맞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고세리에게 꽤 잘해줬다.지유의 얼굴에는 별로 표정이 없었다. 고세리를 욕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손만 열심히 씻었다.그들은 지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했다. 하지만 유독 고세리만 지유가 겁먹었다고 생각하고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우쭐거렸다.“어떤 사람은 참 낯짝이 두껍다니까요. 그러게 소문이 나는
고세리는 반항할 기회가 없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종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었기에 화가나 미칠 지경이었다.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안 때리면? 앞으로 여진그룹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온 비서님. 왜 제 사람을 때리고 그러세요?”큰 소동이 일자 사람들이 달려와 구경했다.진예림은 그들이 여기 있다는 소식을 알고 달려왔다가 고세리가 맞는 장면읗 목격하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서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진예림의 사람을 때렸다는 건 진예림을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고세리는 자기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예림 언니!”고세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진예림 곁으로 달려가더니 이렇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저 때렸어요.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진예림은 고세리를 등 뒤로 빼더니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온 비서님, 미쳤어요?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정말 여진그룹이 온 비서님 거라도 되나 봐요? 모든 사람이 온 비서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모자라 제는 사람까지 때리고. 저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 이거죠?”지유는 아까 귀싸대기를 너무 심하게 갈겨 얼얼해진 손을 툭툭 털더니 이렇게 말했다.“진예림 씨 사람이라니 잘됐네요. 앞으로 부하 관리 철저히 하세요. 이런 헛소리나 퍼트리고 다니게 하지 말고. 진예림 씨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직접 했을 뿐이에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내가 때릴 이유도 없겠죠?”“헛소리는 누가 헛소리를 했다고 그래요? 다 사살이고만. 당신이 저지른 일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진예림이 거만하게 말했다.“그런 수단으로 올라간 거 아니에요?”“아, 고세리 씨가 왜 헛소리하나 했더니 다 진예림 씨가 가르친 거군요?”어떤 상사가 있으면 어떤 부하가 있기 마련이다.진예림이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지유의 명성에 금이 갔으면 해서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전에는 직접적으로 지유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에 그냥 흘러 넘겼다. 하지
구경하러 온 다른 사람들은 지유를 불쌍하게 생각했다. 일개 비서가 어떻게 전무를 이기겠는가, 결국 가차 없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 전무가 고세리를 데리고 뛰어왔다. 조카를 걱정하는 마음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누구야. 누가 우리 세리 괴롭힌 거야?”고세리가 탕비실에 있는 지유를 가리키며 말했다.“삼촌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나를 때렸어요. 삼촌, 어릴 적부터 부모님도 저를 때린 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지금 나를 때린 거예요.”진예림은 이 상황이 매우 흥미진진했다. 그녀는 얼른 불쌍한 척하면서 좋은 사람인 양 쇼를 하기 시작했다.“전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세리를 잘 챙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에서 제 입지가 작으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뜻인즉 직급은 지유와 같지만 항상 지유에게 눌린다는 뜻이었다. 진예림은 지유가 이 사무실에서 너무 우쭐댄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전무는 예전부터 지유의 안 좋은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이현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의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고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온지유 씨, 비서 주제에 감히 우리 조카에게 손을 댄 거예요? 여 대표님 옆에서 일한다고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고? 내 말 한마디면 바로 여진그룹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요.”고 전무는 여진그룹을 다닌 시간이 지유보다 훨씬 길었다. 하지만 같은 부서가 아니었기에 회사에서 활동할 때를 빼고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지유도 원칙적인 사람이라 모든 뒷담화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대부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지만 이번엔 그러기 싫었다. 지유의 한계를 건드린 것이다.고 전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유는 자기 입장을 지켰다.“고 전무님, 저도 고세리씨가 전무님 조카인 건 압니다. 아끼고 보호하는 게 마땅하지요.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해야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으면서 내 얘기를 함부로 지껄이는데
이현이 밖에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강력한 아우라와 차가운 기운에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진예림은 어떻게 지유를 혼내줄지 상상까지 끝냈는데 공교롭게도 이현이 도착한 것이다.진예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아무리 지유를 혼내주고 싶어도 이현이 나타난 순간 너무 두려워 차마 손이 내려가지 못했다.“여 대표님.”사무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길을 비켜주었다.이현은 그쪽으로 걸어가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피다 꼭꼭 묶여있는 지유를 발견하고는 미안을 찌푸린 채 차가운 얼굴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직접 마주한 게 아니라면 여진그룹이 제 회사가 아니라 고 전무님 회사인 줄 알겠어요.”고 전무는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기염이 확 줄어서는 이렇게 말했다.“아, 아닙니다. 온지유 씨가 저희 조카에게 손을 댔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이 조카를 워낙에 아껴서요. 집에서도 한번 맞은 적이 없는 애가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삼촌이 돼서 힘이 되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아니면 온지유 씨가 점점 더 무서운 게 없이 나올 것 같아서요. 지금도 사람을 때리고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제게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대표님을 모시겠어요.”고 전무는 지유의 트집을 잡으며 이현에게 지유의 성품이 좋지 못하니 자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지유가 아무리 날고뛰어봤자 결국 비서 나부랭이인데 이현은 결국 자기 편을 들어줄 거라 고 전무는 생각했다.이현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고 전무님이 한 말씀 인정해요?”“아니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세리 씨는 사실이 아닌 유언비어를 터트리다 제게 들키고도 뻔뻔하게 저를 도발했습니다. 고세리 씨의 행위는 제게 상처를 주었고 제가 고세리 씨를 때린 건 저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대표님이 말씀해 보세요. 제가 잘못했나요? 저는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대표님 보십시오. 아직도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거만하기 그지없습니다.”고 전무가 씩씩거리며 말했다.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 전무를 쏘아봤다.“고 전무님
권다솔은 이미 자신을 때릴 준비가 된 아버지의 손바닥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권용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김영은이 옆에서 권용민을 달래며 말했다.“혼자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죠. 이건 분명히 진호 씨 쪽 문제예요.”“당장 진호 씨를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권용민은 그 말을 듣고 딸을 곁눈질로 보며 속으로 화를 다스렸다.참고 또 참고 나서야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들었지.”“만약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면 더는 진호 씨를 감싸선 안 돼. 그는 다 큰 남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권다솔은 잠시 침묵한 후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 집으로 오라고 했다.문자를 받은 배진호는 급히 회사에서 달려왔다.거실에서 앉아 있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다가가려 했지만 권용민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어붙었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권용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권다솔을 가리키며 말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들었습니다.”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권용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제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은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도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권용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는 배진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그를 존중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자신을 구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배진호를 단순한 비서로만 보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능력을 증명했다.그의 경영 방식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용민은 배진호를 인정했다.그 기억을 떠올리며 권용민은 자신의 날카로웠던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진호 씨, 저는
김영은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너 그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또?”권다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영은은 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권용민은 달랐다.“그때는 결혼하면 잘해 주겠다느니 너희가 행복하게 살 거라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네.”권용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긴 거냐?”“이건 전적으로 진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아직도 진호 씨를 두둔하는 거야? 그럼 말해 봐. 진호 씨 잘못이 아니라면 왜 너는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냐?”권다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엉켰다.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분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진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욕을 털어놓으면 김영은은 분명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 난리를 칠 것이다.그리고 겨우 허락했던 권용민 역시 배진호와의 이혼을 요구할 게 뻔했다.부모님에게 있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결국 권다솔은 침묵을 선택했다.그녀의 태도에 권용민은 더욱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좋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호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권용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그러면서 휴대폰을 들어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권다솔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전화를 막아섰다. 그녀는 김영은과 함께 애타게 설득하며 아버지를 저지했다.휴대폰을 간신히 빼앗았지만 권용민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분명히 말한다, 다솔아. 오늘 네
남태건의 거듭되는 청혼은 권다솔에게 그의 절박함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그 절박함은 오히려 그녀가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다음 날, 열이 내린 권다솔은 남태건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남태건은 잠시 멈춰 서 담담하게 물었다.“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려는 거야?”“의사도 쉬라고 했잖아.”어제 공진혁이 분명히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었다.하지만 공진혁과 남태건의 친밀한 분위기를 본 권다솔은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권다솔은 단호히 떠나겠다고 했다.남태건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거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며 불안한 공기가 감돌았다.유선화와 집안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오랜 침묵 끝에 남태건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우아하게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지금은 안 돼.”“왜 안 되는 건데요?”권다솔이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들 잊었어? 여론이 정리되지 않으면 네가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차라리 배진호에게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서 빨리 그런 소문들을 잠재우라고 해.”남태건은 입가에 냉소를 띠며 말했다.권다솔은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배진호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권다솔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독였다.‘믿어야 해. 진호 씨를 믿어야만 해.’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래도 여기에 더 이상 머물 수는 없어요. 이미 오래 머물렀고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가겠어요.”“가능하다면 차를 마련해 주셨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권다솔의 단호한 태도에 남태건은 잠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를 억지로라도 붙잡아 두고 싶다는 어두운 충동이 머릿속을 스쳤다.하지만 결국 남태
권다솔의 간곡한 부탁에 유선화는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권다솔은 통화 기록을 열어보았다. 부재중 전화는 예상대로 열 통이 넘었고 가장 최근 것은 5분 전에 걸려 온 것이었다.익숙한 번호를 바라보며 그녀는 망설였다.마음 깊은 곳에서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안부를 묻는 다정한 목소리 걱정 어린 말들이 그리웠지만 전화를 걸 손가락이 화면에 닿을 때마다 정미진의 차가운 말투가 떠올랐다.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찰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놀란 권다솔은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선화 씨, 이 전화 좀 대신 받아주실 수 있나요?”권다솔은 유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겨우 모은 용기가 전화벨 소리와 함께 흔들려버렸다.“지금은 누구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유선화는 의아해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전화기를 받아 든 유선화는 뜻밖에도 상대가 남자라는 점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전화기 너머에서 배진호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듯 말했다.“다솔 씨, 드디어 전화를 받아줬네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다솔 씨를 정말 오래 찾아다녔어요. 아무리 찾아도 너를 찾을 수 없었어요. 어머니 대신 사과할게요.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저기... 죄송하지만, 저는 다솔 씨가 아닙니다.”유선화는 약간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야 배진호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당신은 누구죠?”“저는 집안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다솔 씨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도 하셨습니다. 며칠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신다고 하시네요.”권다솔은 옆에서 손짓으로 유선화에게 할 말을 알려주었고 유선화는 그녀의 말을 따라 천천히 전달했다.모든 말을 전한 뒤 전화기 너머에서는 길고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침묵은 끝날 줄 몰랐다.한참의 침묵
남태건은 굳은 얼굴로 권다솔에게 다가가 손등을 그녀의 이마에 살짝 대었다.뜨거운 열기가 손끝으로 전해지자 그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남태건이 손을 거두며 공진혁을 부르려 했지만 그 순간 손을 붙잡혔다. 멈칫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권다솔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유선화와 비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방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남태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권다솔의 입에서 그의 인내심을 시험할 이름이 흘러나왔다.“배진호 씨...”남태건은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듯 빼냈다.“대표님! 제가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비서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유선화도 눈치를 보며 방에서 나갔다.곧 가정의인 공진혁이 도착해 기본적인 검사와 약 처방을 준비했다.하지만 약을 처방하려던 순간 남태건이 중단시켰다.“임신 중이니까 약효가 순하고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는 걸로 처방해 줘.”남태건은 침대에서 잠든 권다솔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또 얼마나 나를 원망하게 될까.’공진혁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물었다.“아이를 임신했다고?!”남태건은 담담한 얼굴로 공진혁을 흘낏 보며 대답했다.“내 아이는 아니야. 더는 묻지 말고 진료나 계속해.”공진혁은 남태건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권다솔은 약을 먹은 뒤에도 깨어나지 않았지만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하루 종일 이어진 소동 끝에 이제야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공진혁은 남태건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 물었다.“아까 네 아이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애쓰는 걸 보면 무언가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 같은데.”“설마 남의 아이를 키울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남태건은 그 말을 듣고 싸늘한 눈빛으로 공진혁을 쳐다보았다.비록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그 질문은 그가 참아내기 어려운 선을 넘었다.남태건의 날카로운 시선에 공진혁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역시 너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문 남태건의 검은 눈동자는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그때, 발표를 하느라 진이 빠진 팀장이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좋아요.”남태건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대로 진행하세요.”그 말을 남기고 직원들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뒤로 한 채 회의실을 떠났다.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비서가 다급히 다가왔다.“대표님! 한 남성분이 회사에 무단으로 들어와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남태건은 발걸음을 멈췄다.1층 로비로 내려간 그는 예상대로 배진호와 마주쳤다.두 사람의 분위기는 지난번 유람선에서의 만남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차가운 표정을 한 두 사람은 마치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봤다.리셉션 직원은 긴장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말려들까 봐 잔뜩 몸을 움츠렸다.“남태건 씨, 다솔 씨를 어디로 데려갔죠?”배진호는 냉정하게 물었다.그는 밤새 고민했다.권다솔의 집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남태건 외에 권다솔이 찾아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권다솔은 원래 이런저런 곳을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고 가까운 사람도 몇 없었기에 남태건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과거에 이미 그녀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남태건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태연한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배진호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태건 씨!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다솔 씨에 대한 마음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인터넷 여론을 조작한 것도 모를 거라고요?”두 사람의 시선이 강렬하게 부딪혔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응시했다. 남태건은 도발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리셉션 직원은 충격을 받으며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이렇게 큰일을 듣게 되다니... 혹시 이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남태건은 끝까지 권다솔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서두르거나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집에 머물게 하며 객실을 준비해 주었다.권다솔은 지금 어디로 갈지조차 알 수 없었다.휴대폰은 꺼둔 상태였고 배진호와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으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다.밤이 지나고, 권다솔은 휴대폰을 다시 켰다. 부재중 전화가 열 통 넘게 쌓여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걸어온 것이었다.“아가씨.”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셨나요?”문을 열자 한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온화한 인상을 가진 그녀는 손에 새우 죽 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죽 위에는 은은한 기름과 짧게 썬 파가 얹혀 있었고 식욕을 자극하는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권다솔의 시선을 눈치챈 여성은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이 집의 가정부입니다. 유선화예요.”“도련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벌써 점심때가 다 됐는데 다솔 씨께서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아서 몸이 상할까 걱정돼 죽을 가져왔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죽 그릇을 옆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태건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거예요?”“그런 셈이죠. 다솔 씨를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사실 저는 가문 쪽에서 이곳으로 온 사람이에요.”유선화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친절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봤고 그 시선에 둰가솔은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누군가를 신경 쓰시는 건 정말 처음 봐요.”“그래요...”권다솔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의 마음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솔직히 말해 권다솔은 어젯밤 그 차에 탄 걸 후회하고 있었다.어젯밤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비를 맞은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태건의 집까지 따라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리저리 얽힌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권다솔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약간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거기 놔두세요. 조금 있다 제가 먹을게요.”그렇게 말한 뒤
차는 3층짜리 고급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남태건은 권다솔에게 차에서 내려 옷을 바꿔 입을 것을 제안했다.그제야 권다솔은 그를 본 후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저는 안 들어갈게요. 그냥 길가 아무 데나 내려주시면 돼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이 상태로 길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야?”남태건이 가리킨 곳을 바라본 권다솔은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어 드러난 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했다.어디를 가려야 할지도 몰라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이 되었다.남태건은 더 이상 말로 설득하지 않고 별장의 문으로 가서 지문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권다솔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따라 들어갔다.남태건이 그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두 집안의 오랜 인연을 고려하면 그가 실제로 그녀를 해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반면 밤길에 홀로 남아 위험을 마주할 가능성은 훨씬 높았다.권다솔은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별장의 인테리어는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남태건이라는 사람처럼 차가우면서도 품위 있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공간이었다.처음엔 그런 분위기가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졌지만 권다솔은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남태건은 그녀를 위해 목욕물을 미리 준비했고 수건과 세면도구 세트는 물론, 갈아입을 옷까지도 마련해 두었다.그 세심함에 권다솔은 약간 놀라면서도 의아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남태건은 그녀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이거 마셔. 기분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야.”권다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아 들고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잔을 손에 든 채 소파에 앉자 몸속으로 퍼지는 따뜻함이 빗속에서 느꼈던 차가움을 몰아내는 듯했다.식어 있던 마음도 몸이 따뜻해짐에 따라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남태건은 소파의 다른 쪽에 자연스럽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카키색 스웨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약간 주름이 생겼다. 그는 솔직하게 물었다.“왜 혼자 비를
권다솔은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배진호는 두 주먹을 단단히 쥔 채였다.“어머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건 다솔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다솔 씨에게 사과하세요.”“사과? 그까짓 거 하면 되지.”배진호의 어머니인 정미진은 입으로는 사과한다고 말했지만 표정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다솔 씨, 이해하지? 우리 집이 큰 가문은 아니어도 나와 진호 아버지는 교직에 몸담아 왔어. 교양 있는 가문이라고. 그런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정미진은 애초에 말을 순화할 의도가 없었다.권다솔은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람들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굴욕감을 느꼈다. 참혹함에 권다솔은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그녀의 마음이 소리쳤다.'여기서 더는 못 버텨.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권다솔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오늘은 제가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권다솔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배진호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정미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지금 나가면 다시는 이 집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마! 진호야, 내 말 잘 들어.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이런 여자와 결혼 못 시켜. 결혼한 다음에도 이런저런 남자와 얽히는 여자는 절대 안 돼!”배진호가 잠깐 망설인 사이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몇 분 후, 배진호는 비를 맞으며 권다솔을 찾아봤지만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가 건 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여이현이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배진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대표님! 제발 다솔 씨를 찾아주세요. 다솔 씨를 본가로 데리고 갔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집 밖으로 뛰쳐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비가 오는 데 혼자 있어서 걱정돼요.”배진호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초조한 상태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여이현은 아무런 주저 없이 돕기로 했다.하지만 두 사